소설리스트

99화 (99/930)

묵향이 이렇듯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곳에서 3천여 리 떨어진 어두운 밀실 안에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적에서 동지로 변화를 도모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호오, 이번에 큰 고생을 치르셨다구요.”

“허허헛! 뭐 그까짓 것이 고생이겠소? 본좌에게는 아직 몇 곳의 비밀 분타가 남아 있고, 또 천마혈검대가 있는 이상 재기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외다.”

그는 상대가 호탕한 말로 얼버무리고 있지만 재기라는 것이 너무나도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 자신이 저 ‘웬수’ 같은 마교라는 단체 덕분에 너무나 오랫동안 음지에서 생활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만큼 쉽지는 않을 거요. 적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지요. 안 그렇소이까?”

“하지만 희망은 있소.”

“어떤 희망 말이오?”

“흐흐흐, 그것은 본좌가 마인이라는 것이지요. 묵향만 없어진다면 또다시 교주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본좌에게 굴러 들어오게 되어 있소.”

“그렇다면 그대의 생각은?”

“바로 그것이오. 그 녀석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없애 버린다면 만사는 본좌의 뜻대로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세상에는 죽일 수 있는 상대가 있고, 그렇지 못한 상대가 있소. 또 죽일 수 없는 상대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배경이 너무 튼튼한 인물이라든지, 아니면 그를 죽인 것이 들통 났을 때 너무나도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든지, 또는 너무 강해서 죽인다는 것이 불가능한 자도 있소. 본좌도 여러 가지로 그를 없애려고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봤지만, 본좌가 내린 결론은 그는 죽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아수혈교(阿修血敎)는 오래전 묵향이란 인물과 단 한 번 충돌한 후, 그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데 오랜 시간을 투자했다. 그 결과 그 정체불명의 인물이 마교의 부교주 묵향으로 밝혀졌고, 또 그의 무공 수위까지 파악하고는 아예 응징을 포기해야만 했다.

마교라는 벽은 혈교가 힘을 떨치는 데 막대한 지장을 주는 걸림돌이 되려고 작정을 한 듯 보였고, 또 그것을 하늘이 도와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상대도, 또 상대의 배경도 혈교로서는 간단히 무너뜨릴 수 없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혈교 교주가 자신 없는 듯 말했는데, 장인걸은 상대의 말을 가볍게 가로막았다.

“아아, 이론과 실제는 다르지요. 물론 물리적인 힘만으로 그를 상대한다면 그대의 말이 맞소. 하지만 계책을 쓴다면 다르지요. 그대도 강자고 본좌도 마찬가지요. 본좌가 가만히 궁리를 해 보니 강자에게는 독특한 성질이 하나 있더라 이거지요. 뭔지 아시겠소?”

“글쎄요.”

“바로 자부심이란 것이외다. 자신의 적이 중원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에게는 커다란 허점이 생기는 것이지요. 만약 자신이 그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모른다면, 그는 자신의 호위에 만전을 기할 것이고 또 행동에 조심에 조심을 하겠지만, 그는 그렇지 않소. 그건 본좌가 그 방법을 이용해서 한중길을 해치웠기 때문에 자신할 수 있소이다.”

“어떤 계책이라도?”

“오래전부터 본좌가 그놈을 해치우기 위해 준비해 둔 것이 있소. 물론 계획을 세우고 준비 작업을 시작한 것은 한중길 교주였지만, 본좌가 그를 없애 버린 후에 보강 작업을 해 놨지요.

그 작업에는 본좌의 가장 신임하는 수하들만을 투입했고, 2개월 전에 모든 것이 완성되었소. 그 함정을 만드는 데 동원되었던 장인(匠人)들은 모두 다 무덤 속에서 잠들어 있으니 비밀이 샜을 가능성은 아예 없소. 이제 그 함정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만 남았을 뿐이오.”

“흐흐흐, 그대가 이렇듯 본좌를 믿고 비밀을 털어놓으니, 본좌도 한 가지 알려 드리리다. 그를 죽일 수는 없겠지만 없애 버릴 수는 있소.”

“없애다니요. 그게 죽인다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니오? 서로 간에 말장난은 하지 맙시다.”

“본좌의 말은 그야말로 없애 버린다는 말이요. 본교에는 대단히 강한 술법들이 많이 전해 내려온다는 사실을 알 것이오. 그중에서 특히 강한 술법이 있소. 그걸 사용하면 죽일 수는 없지만 없앨 수는 있소.”

“호오, 없앤다구요?”

“그렇소. 말 그대로 없애는 거요. 진세를 발동시키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진세만 발동되면 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오. 본교에서는 그걸 묵령시분술(墨靈屍分術)이라고 부르죠. 그야말로 시체조차 분해되어 찾을 수가 없는 최고의 술법이오.”

혈교 교주의 말에 장인걸은 구미가 당긴다는 듯 반겨 말했다.

“호오, 그런 게 있단 말이오?”

“하지만 그걸 사용하는 데는 까다로운 조건이 있소. 진법을 가동시키는 데 약 반 각 정도 시간이 걸린다는 거지요. 그 시간을 벌어 줄 자신이 있소?”

“반 각 정도라면 충분하오.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겨우 반 각쯤이야, 하하하하”

“정말 아름답군요. 멀리서는 몇 번 봤지만 이렇듯 자세히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에요.”

옥화무제는 어린애가 새로운 장난감을 보듯 두 눈을 반짝이며, 맑고 투명한 검신에 새겨진 수룡을 바라보았다.

“문주님, 그따위 검 한 자루에 감탄하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호호홋! 그따위 검 한 자루가 아니에요. 이건 무림맹주의 신물인 빙백수룡검(氷白水龍劍). 이게 본녀의 손에 들어온 이상, 무림맹주를 향해 남들보다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고 보는 게 옳겠죠. 총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물론 문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낱 껍질뿐인 무림맹의 맹주 자리를 노릴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2황야가 있고, 또 그는 우리의 도움을 절실히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 본문의 총력을 기울여 그를 도와준다면 나중에 크나큰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진길영 원수가 정벌군을 이끌고 돌아온 후에는 너무 늦다 이 말씀입니다.”

“진길영 원수는 대요전쟁에서 손쉽게 발을 뺄 수 없어요. 요가 거의 멸망한 지금 그 엄청난 땅덩어리가 전리품으로 남았어요. 그걸 탐욕스런 여진족과 미련한 정안국 국왕, 그리고 고려국 왕에게 적당히 배분을 해 줘야 할 것이 아닌가요? 여기서 배분이 잘못되면 곧장 아귀다툼이 벌어질 것이 확실한데.”

“그래도…….”

“그래도가 아니에요. 진길영 원수는 아무리 짧게 잡아도 2개월 이내로는 돌아오지 못해요. 즉, 두 달 동안 2황야를 주무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동안 2황야를 주무르면서, 그를 우리 쪽의 입맛에 맞도록 길들이는 것이 중요하겠죠.”

“참, 문주님, 중요한 보고가 있습니다.”

“뭔가요?”

“장인걸이 문주님과 제휴를 원하고 있습니다.”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들어 보겠군요. 그와 제휴를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어디에 있다고.”

“있습니다. 여기 이것을 읽어 보십시오.”

총관이 품속에서 꺼내어 두 손으로 바친 종이는 천천히 날아 발 안쪽으로 사라졌다. 잠시 종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발속에서 의문이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원하는 것이 뭐죠? 묵향의 신상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알려 준다고 해도, 묵향을 죽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요?”

“하지만 조건이 근사하지 않습니까? 죽이는 방법이야 장인걸이 생각해 낼 문제고, 그 대신 본문에서 얻게 되는 것은 1천 냥의 금화와 실종되었던 진영 공주의 행방입니다.”

“흠, 역시 진영 공주는 장인걸의 손아귀에 있었던 모양이군요. 좋아요. 묵향의 세력이 더욱 커지는 것은 본녀가 원하는 게 아니죠. 장인걸과 묵향이 피 터지게 싸울수록 본녀에게는 유리하니까 말이에요. 그러다가 혹 장인걸이 그를 암살하는 데 성공이라도 한다면, 막대한 희생을 치른 후의 장인걸을 없애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예요. 즉시 시행하세요.”

“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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