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930)

“만약에…, 이렇게 생긴 여러 도형이 겹치는 중간쯤에 서 있다가 번쩍 한 다음 어딘가에 떨어져 내렸는데, 말도 안 통하고…, 모든 것이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와 완전히 다르다면 그건 어떻게 된 일인가요?”

“흐음, 아마도 차원(Dimension) 이동의 마법일 걸세.”

“차원이라구요?”

“그렇네, 차원이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지. 각 차원은 아무리 무한대의 거리와 시간을 투자해도 만날 수 없는 별개의 공간이지. 바로 코앞에 있다 하더라도 그건 완전히 별개의 세계야. 이건 아직까지 마법사들 간에도 이론으로만 알려져 있지. 하긴 실제로 성공한 사례가 있다고도 전해지는데…….”

“그러니까 요점은 그 차원을 달리해서 이동하는 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자네가 대강 그려 준 걸 보니, 마법진(魔法陣)이군. 이걸 통한다면 대단히 강력한 마법이라도 실행이 가능하지. 마법사는 그 진세를 발동만 하면 될 뿐, 나머지는 마법진이 주위의 마나를 흡수하여 자동적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니까 말일세.”

“그러면 A라고 하는 차원에서 B라는 차원으로 이동을 했다고 가정한다면, 역으로 B에서 A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건 어려울 거야. 왜냐하면 수많은 차원이 존재하는데, 그중에 자신이 원하는 차원이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지. 그걸 모르고서 차원 이동을 한다면 A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C라는 다른 차원으로 갈 수도 있지. 오히려 그 가능성이 더욱 크고…….”

“그렇다면 다른 차원으로 가기는 쉽지만 어떤 특정 차원으로 돌아가기는 힘들다는 겁니까?”

“그렇지.”

“어쨌든 차원 이동의 마법은 존재하기는 하는 거군요.”

“그렇겠지. 하지만 옛날 마법이 극도로 발전했던 마도 시대 말기에 차원 이동의 마법이 만들어졌다고 들었고, 또 그때 실험이 행해졌었네. 하지만 아무도 돌아온 사람이 없으니 명확한 결론이 나지는 않은 거야.”

“그렇다면 지금 그 마법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없네. 마도 시대는 1천 년도 전에 마법이 가장 흥성했던 시대야.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하지만 어딘가에 기록으로라도 남아 있을 수 있잖아요.”

“흠, 과거 많은 마법사들이 건설했던 던전이 조금씩이나마 발굴되고 있지만 글쎄…, 아직까지 그런 마법이 발견되었다는 학술 보고는 없었다네. 지금 자네 얘기하고 있는 건가?”

“그건 왜 묻는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아주 중요한 자료지. 다른 차원에서 이리로 생명체가, 그것도 사람이 날아왔으니 획기적인 발견이 아니겠나?”

“예, 그렇죠. 실은 저하고 아주 친한 친구가 그런 식으로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는 걸 제가 봤거든요. 어떤 마법사하고 싸울 때였는데…, 그 마법사가 그 도형이 있는 쪽으로 친구를 유인한 다음에 그런 짓을 했다구요.”

그러자 여태껏 다크를 상대했던 늙은 마법사는 김빠진 표정으로 바뀌더니 말투가 퉁명스러워졌다.

“난 또 자네가 차원 이동 쪽으로 말을 돌리기에 혹시나 했지. 그건 아마 그 마법사가 자네 친구를 당해 낼 수 없으니 공간 이동시켜 버린 걸 거야. 짧은 거리라면 며칠, 먼 거리라면 몇 달 기다리면 그 친구 멀쩡한 모습으로 자네 앞에 나타날 걸세. 이만 가 보게나. 괜히 시간만 낭비했군. 쯧쯧.”

다크가 투덜거리는 노마법사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 가스톤, 팔시온, 라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라는 더 이상 멍청한 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마도 마법이 풀린 모양이었다.

“마법이 풀린 모양이군요.”

다크의 퉁명스런 물음에 라라가 고운 목소리로 답해 왔다.

“예, 저는 라라가 아니고 ‘라나 슈바이텐베르크’예요. 그리고 드로아 대 신전에서 지혜의 여신 아데나를 모시는 수련생이구요. 잡혔을 때 도와주셔서 감사드려요.”

“슈바이…, 뭐라고?”

다크의 말에 그녀는 약간 비웃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슈바이텐베르크요. 저 아저씨는 머리가 별로 안 좋은 모양이야.”

다크가 울컥해서는 한소리하려는데, 팔시온이 끼어들었다.

“역시 그놈들의 목표는 라나가 아니었어. 라나가 가지고 가던 작은 상자였지. 트루비아 왕실 마법사 다리아 경으로부터 부탁을 받고 드로아 대 신전에 보관하던 그 상자를 샤헨의 왕궁으로 가져오다가 기습을 받고 물건을 뺏긴 거지.”

“그 속에 들어 있는 게 뭡니까?”

“놀라지 말게. ‘드래곤 하트’야.”

하지만 다크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뭔 헛소리하냐는 듯한 얼굴로 팔시온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팔시온은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다크는 검술 실력은 엄청나지만 마법 쪽으로는 아예 무지하다는 것을 잠시 잊었던 것이다.

“아, 그러니까 드래곤 하트라는 건 드래곤의 목뼈와 척추가 만나는 지점에 불룩 튀어나온 부분인데, 그곳에 드래곤의 마나가 집중적으로 모이지. 사실 드래곤이 죽어 버리면 그 안에 남는 것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사람이 평생 가도 모을 수 없는 엄청난 마나가 들어 있다구. 그 부분의 색깔이 붉기 때문에 드래곤의 심장이라고 부르는데, 아마 그 부분의 뼛조각을 어떤 모양으로 가공한 덩어리가 그 작은 상자 안에 들어 있었던 모양이야.”

‘아하, 내단 같은 거군.’

다크는 감을 잡았다. 드래곤이 어떻게 생긴 영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말이었고, 그런 영험한 놈의 내단이라면 대단한 내공 증진의 효력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크는 자신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중원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그따위 내단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자신과 같은 경지까지 무공을 닦았다면 쓸데없는 영약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 더욱 중요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처음에는 놀랍다는…, 그다음은 탐욕(貪慾)의…,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무욕(無慾)으로…, 마지막에는 무관심으로 변해 가는 다크의 얼굴 표정을 재미있다는 듯 보고 있던 라나가 말했다. 그녀는 지혜의 여신을 섬기는 만큼 눈치가 빨랐고, 잔머리 굴리는 게 보통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말 얼굴 표정이 다채롭게 변하네요. 한 사람의 얼굴 표정이 그렇게 순식간에 마구 변하는 건 처음 봤어요.”

다크는 지나치게 쾌활한 라나의 얼굴을 힐끗 본 다음 냉랭하게 물었다.

“팔시온, 저 쓸모없는 계집애는 언제까지 데리고 있을 거죠?”

‘쓸모없는 계집애’란 말에 발끈하는 라나를 바라보며 팔시온이 대답했다.

“흠, 이제 기억도 돌아왔으니 드로아 대 신전으로 돌려보내야지.”

“아뇨. 저도 같이 갈래요. 드래곤의 심장을 찾으러 갈 거 아니에요?”

그러자 다크가 냉랭하게 받아쳤다.

“드래곤의 심장 따위는 찾아서 뭐에 쓰려구. 팔시온, 전에 그 와이번 갑옷을 어디서 만든다고 했지요?”

“알카사스.”

“예, 거기. 알카사스로 가 보지 않을래요?”

“알카사스는 왜?”

“당연히 제가 필요로 하는 게 마법이니까 그렇죠. 마법이 가장 발달한 나라가 거기라면서요. 가스톤도 마법사니까 거기 같이 가면 뭔가 배울 것도 있을 거 아니에요?”

팔시온은 시큰둥한 얼굴이었지만 마법사인 가스톤은 다크의 유혹에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 그 모양을 본 라나가 다시 팔시온을 꼬시기 시작했다.

“빨리 쫓아가지 않으면 그 마법사를 완전히 놓칠 거예요. 생각해 보라구요. 드래곤의 심장을 찾아다 주면 엄청난 상금을 지급해 줄 거예요.”

라나의 유혹에 팔시온과 가스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진짜 그걸 되찾을 수 있다면 엄청난 포상금을 받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회색 갑옷들과 검을 섞어 본 팔시온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다크가 아니었다면 자신들도 백색 갑옷을 입은 자들과 마찬가지로 지금쯤 짐승들 밥이 되어 있을 테니까…….

팔시온은 다크를 쳐다봤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품고…, 다크 같은 든든한 실력자가 있다면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크는 이번 일에 끼어들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게 확실했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 팔시온은 약간 풀이 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 안 되겠어. 그놈들 엄청나게 강해. 그들 중에 그래듀에이트도 한 명 있었어. 그때 죽을 뻔했다구. 역시 그래듀에이트급에는 그래듀에이트급이 상대해야 장단이 맞지. 트루비아의 정예 라칸 기사단원 50여 명을 겨우 30명 정도로 기습한 놈들이야. 우리들이 겨우 그따위 포상금 타겠다고 설쳤다가는 목숨이나 잃기 딱 좋지.”

“그래듀에이트급이 있었다구요? 맞아. 그때 라칸 기사단을 인솔하신 분은 알렉스 시드미안 경이셨지요. 그분은 그래듀에이트셨는데……. 그렇다면 그분을 죽인 그래듀에이트가 있었을 텐데, 당신들은 어떻게 저를 구하셨죠?”

“운이 좋았을 뿐이야. 꼬맹이도 이제 돌아가거라. 우리 중에서 목숨 걸고 싸울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가스톤, 팔시온, 이제 여관으로 돌아가죠.”

모험의 시작

다크는 침대 위에 앉아 명상을 하고 있었고, 팔시온은 다크에게 검술 좀 가르쳐 달라고 조르다가 통하지 않자 밖에서 혼자 간단한 수련을 했다. 그리고 가스톤은 다크가 앉은 맞은편 침대에 드러누워 옆에 놔둔 땅콩을 집어 먹으며 뭔지는 모르겠지만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아직 다른 일행들은 오지 않았기에 방 안은 조용했다. 여관의 방은 큰 편이었고, 세 명이 묵을 수 있는 방에 무예 수행자 패거리가 투숙하고, 여자들을 위해서도 3인실을, 그리고 나머지 3인실을 빌려 가스톤과 팔시온, 다크가 함께 묵었다.

계단이 쿵쾅거리며 엄청난 덩치를 가진 사람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책을 읽고 있던 가스톤이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댔다. 미카엘이 돌아온 줄 알았던 것이다.

“하여튼 무예 수행한다는 녀석들은 예의도 모르는지 일부러 사나운 척 쿵쾅거리며 남의 이목을 끈다니까.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이때 문이 덜컥 열리며 웬 낯선 인물이 들어왔다. 흔히 볼 수 있는 플레이트 아머(Plate Armour : 철판을 두들겨 만든 갑옷)를 입은 엄청난 덩치를 가진 인물이었는데, 갈색의 눈매가 싸늘해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그를 보고 가스톤이 의문을 표시했다.

“무슨 일이시오?”

그때 그 의문의 방문객은 뒤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이 사람들이 맞냐?”

그러자 그 남자의 뒤쪽에서 작은 여자 애의 머리가 튀어나오며 말했다.

“예, 맞아요.”

라나였다. 라나의 확인을 받은 그 남자는 가스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며 정중히 말했다. 그 남자가 가스톤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을 때 가스톤은 상대의 덩치와 은근히 흘러나오는 마나에 질려 버렸다. 그리고 그 남자의 뒤에는 그에 못지않은 덩치를 가진 젊은 기사가 한 명 더 있었다.

아무리 팔시온이나 미카엘 같은 덩치 큰 놈들과 어울려 다닌다고는 하지만, 이런 덩치가 낯선 인물이라면……. 그것도 정신적으로 의존할 만한 팔시온 같은 우군도 없을 때 나타났다는 것은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조금은 소심한 가스톤의 유일한 위안이었다면 파티에서 가장 검술 실력이 뛰어난 인물이 저쪽 침대에 앉아 있다는 것뿐…….

“라나를 구해 주셨다구요.”

“예, 하지만 뭐 근처를 우연히 지나가다가…….”

가스톤은 ‘우연히’라는 단어에 힘을 줘서 말했다. 혹시 귀찮은 일에 얽히는 것은 절대로 사양이었으니까.

“라나에게 도난당한 물건이 뭔지는 들으셨겠지요?”

“예.”

“그렇다면 그게 사악한 마법사의 손에 들어가면 얼마나 위험한지도 잘 아시겠군요.”

“어느 정도는…….”

“그렇다면 우리를 좀 도와주십시오.”

그 말에 가스톤은 난감하다는 듯 대답했다.

“예? 저희들은 그냥 여행자들입니다.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할 수는 없어요. 목숨이 몇 개나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팔시온의 말로는 상대방에 그래듀에이트급의 인물도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이건 그들의 뒤에는 어떤 국가가 후원한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의 실력으로 끼어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계속 말을 건네 오자 난감해진 가스톤은 실례인 줄 알지만 잠시 상대의 말을 중단시켰다.

“잠깐만요, 저는 파티의 리더가 아닙니다. 리더를 불러다 줄 테니까 그와 의논하시죠.”

그런 다음 창가로 가서는 뒤뜰에서 혼자서 용을 쓰고 있는 팔시온을 향해 외쳤다.

“야, 팔시온. 빨리 올라와 봐. 급한 일이야.”

조금 지나자 쿵쾅거리며 땀에 젖은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는 팔시온이 올라왔다. 역시 근육질은 근육질들끼리 있어야 균형이 잡혀 보인다.

팔시온은 슬쩍 눈길로 낯선 사람들을 가리키며 가스톤에게 물었다.

“이 사람들은 누구야?”

가스톤도 상대의 정체는 알지 못했기에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네가 리더니까 알아서 해.”

그러자 그 덩치 큰 사내가 팔시온에게 인사를 건넸다.

“당신이 리던가요? 드래곤 하트를 찾으려고 하는데, 좀 도와줄 수 없겠소? 사례는 충분히 하겠소.”

“아마도 가스톤이 말했을 텐데요. 상대편에는 그래듀에이트가 몇 명인가 있습니다. 사실 뒷구멍으로 하는 일이니 그 정도 실력자가 많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한 명 이상은 된다고 봐야겠죠. 저희 파티가 어떤 구성원으로 이루어졌는지 라나에게 못 들으셨나요? 무예 수행자 세 명, 수련 마법사 한 명, 신관 한 명, 용병 한 명, 모험가 두 명―팔시온은 다크를 모험가에 넣었다―이오. 더군다나 지금 목적지인 샤헨에 도착한 상태니 다음 여행에는 몇 명이나 따라나설지 아무도 모르죠. 이 전력으로 아직 정체도 모르는 그 강한 놈들과 싸우란 말입니까?”

“왜 내가 이런 부탁을 여행자인 여러분께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가겠지만, 나는 여러분의 실력을 믿기 때문에 이런 부탁을 드리는 거요. 도대체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당신네 파티는 그래듀에이트가 끼어 있을 게 확실한 적들로부터 라나를 구해 냈소. 왜 그래듀에이트가 끼어 있을 거라고 확신하느냐 하면, 그 마차의 호위대를 지휘한 인물이 알렉스 시드미안, 내 동생이었기 때문이오. 그 녀석은 2년 전에 그래듀에이트의 자격을 얻은 뛰어난 기사였소. 어찌 됐건, 호위 대원들 시체 주위에는 32명의 회색 갑옷을 입은 자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소. 그중에 마법 때문에 죽은 자도 있더군. 그리고 어떤 자는 머리가 터져서 죽은 자도 있었고, 어떤 자는 갑옷과 함께 몸통이 두 토막이 난 사람도 있었소. 정말 대단한 실력의 검사가 당신들 중에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요.”

여기까지 말한 상대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다시 정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 소개를 하지요. 나는 트란 근위 기사단의 그라드 시드미안이라고 하오. 사실상 놈들이 어느 정도 정보망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르기에, 비밀 유지를 위해 나만 올 수밖에 없었지만…, 내가 당신들과 함께 간다고 해도 안 되겠소? 그리고 저기 있는 스미온 엘시란도 젊긴 하지만 뛰어난 기사요.”

‘트란 근위 기사단’이란 말이 나오자 가스톤과 팔시온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각 국가마다 유명한 기사단 외에 근위 기사단을 가지고 있다. 근위 기사단이라면 그 국가 최고의 엘리트들만을 엄선해서 만들어 놓은 최강의 기사 집단이다. 그렇기에 그 구성원은 모두 다 그래듀에이트급.

여기 조그마한 왕국인 트루비아의 경우 총 2천여 명의 기사들 중 34명만이 그래듀에이트 자격시험에 통과했다. 또 그 귀한 그레듀에이트들 중에서 ‘트란 근위 기사단’의 멤버로 뽑히는 영예를 받은 기사는 단 네 명.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지금 그들의 눈앞에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에? 그렇다면… 가능성이 있죠. 하지만 국가에서 개입하실 생각이라면 기사단에서 사람을 뽑아다가 직접 하셔도 될 텐데 왜……?”

그 말에 시드미안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드래곤 하트를 도난당한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있기에, 정규 기사단을 동원하여 난리를 칠 수는 없지 않겠소. 놈들이 눈치를 채는 것은 둘째 치고, 사실은 더 중요한 것이 따로 있소. 코린트 제국에서 드래곤 하트의 도난 사실을 안다면 본국이 얼마나 심한 대가를 치러야 할지……. 또 도둑놈들도 머리가 있다면 트루비아의 기사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최대한 신경 쓸 거요. 나는 근위 기사인 만큼 각종 행사에 많이 참가해서 얼굴이 너무 알려져 있소. 그래서 직접 돌아다니기는 힘드니, 당신들이 앞장서서 수소문을 하고 내가 그 뒤를 받치겠다는 것이오. 또 당신들 쪽에 모험가가 두 명이나 있으니 추격에는 훨씬 유리할 것이 아니겠소?”

“흐음…….”

팔시온은 오랜 시간 궁리를 해야만 했다. 뒤에서 이들이 받쳐 준다면 위험도는 많이 줄어든다. 거기에 성공한다면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을 것이다. 아주 그럴듯한 제안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저 혼자서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일행이 다 모였을 때 같이 의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흐음, 좋아. 그럼 내일 다시 오겠소.”

“아닙니다. 내일은 너무 늦어요. 결론이 나면 오늘 저녁에라도 떠나야 하거든요.”

“알겠소. 그럼 해질녘에 다시 오겠소.”

이때 가스톤이 문을 나서려는 그라드 시드미안 경에게 조심스레 제안했다.

“그러지 말고 여기서 잠시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괜히 그런 차림으로 다녀 봐야 눈에만 띌 뿐이죠.”

“딴은 그렇군.”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술하고 안주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가스톤은 곧 음식을 장만해 왔고, 모두들 예전에 있었던 추억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시드미안 경은 남은 두 명의 ‘모험가’를 찬찬히 훑어봤다.

팔시온은 모험가답게 장대한 체구와 우람한 근육질이었고, 거기에다 40킬로그램은 족히 되어 보이는 호화로운 바스터 소드(Burster Sword)를 지니고 있었다. 바스터 소드는 파괴검이란 말에 어울리는 마상용(馬上用) 장검으로 보통 말안장에 매어 두었다가 기마전에서 사용하는 게 정석이었다. 그런데 이자는 그 외의 다른 검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팔시온이란 이름의 모험가는 바스터 소드만을 전적으로 사용하는 대단한 힘과 기술의 소유자임이 확실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저쪽 구석에 앉아 있는 다크라 불리는 자. 팔시온과는 달리 근육질의 몸매가 아니었으며 허리에는 얄팍한 여성용 검 샤벨을 차고 있었다. 검의 모양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로 봤을 때는 마법사처럼 보이지만, 방금 전 이 파티에는 마법사가 한 명뿐이라고 했다. 눈앞에 있는 가스톤이라는 사람이 마법사임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힘보다는 속도 위주의 검법을 구사하는 인물인가? 하지만 트롤이나 오우거 같은 거대한 몬스터와도 상대해야 하는 모험가 생활에서 저런 파괴력이 형편없는 검을 사용하는 걸 보면 저 검의 파괴력이 아마 상상 이상인지도…….

‘그렇다면 저 검은 마법검 같은 건가?’

마법검이라면 일단 설명이 된다. 마법을 쓸 수 있고 또 대단히 강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쨌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떠벌리는 가운데 가스톤이 술과 안주를 더 가지고 왔고, 방 안은 좀 더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보통 이야기를 전개하는 사람은 많은 모험을 한 팔시온과 시드미안 경이었고 나머지는 듣는 입장이었다.

웃고 떠드는 가운데 시간은 점차 흘러갔고, 이윽고 창밖에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계단이 소란스럽게 쿵쾅거리며 사람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지나자 문이 벌컥 열리더니 엄청난 덩치를 자랑하는 미카엘이 그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어럽쇼? 우리가 나간 새 비겁하게 술 파티를 벌이다니…….”

미카엘은 가스톤이 들고 있던 잔을 빼앗아 한 잔 가득 담긴 술을 입속에 털어 넣었다. 그런 다음 알맞게 구워 놓은 고기포를 질겅거리며 화통하게 말했다.

“이봐, 좋은 기회를 잡았어. 역시 여기는 수도라서 그런지 매주 일요일마다 경기장에서 대회가 열린다고 하더군. 트롤이나 뭐 그런 걸 혼자서 때려잡으면 아주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더라구. 돈도 다 떨어져 가는데 아주 좋은 기회잖아.

그리고 한 달 후에는 샤헨 아카데미에서 무투회(武鬪會)가 벌어진대. 우승자는 상금이 자그마치 1천 골드라구. 그리고 매 경기당 승리 수당이 10골드야. 본선 경기는 50골드고. 물론 상처 입으면 치료는 신전에서 공짜로 해 주고……. 어때? 팔시온, 한몫 잡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잖아?”

“괜찮군. 하지만 만만찮은 실력자들이 다 모일 텐데?”

“우승이야 못 해도 상관없지. 아무리 못 벌어도 2백 골드는 벌 수 있을 거야. 물론 재수 없어서 1회전에 그래듀에이트하고 붙으면 가능성이 없어지지만……. 그래도 여기는 양심적으로 그레듀에이트는 무조건 본선에 올려 준다고 되어 있더라구. 그때 그 망할 놈의 기다스 아카데미 무투회 때는 예선 1회전에 그래듀에이트하고 붙어서 떡이 난 걸 생각하면……. 으, 이 갈린다!”

생각만 해도 열이 뻗친다는 듯 또다시 한 잔을 목구멍에 꿀꺽꿀꺽 쏟아 부은 미카엘이 말을 이었다.

“세상에 그래듀에이트 자격을 가진 기사를 예선전부터 싸우게 만드는 속셈은 뭐야? 그놈이 이길 게 당연한데! 그리고 그 알프레드 미트리에란 녀석도 그래! 아무리 돈이 궁해도 그렇지, 그 정도 실력의 기사가 할 짓이 없어 겨우 무투회 따위에 나오다니. 못된 녀석!”

미카엘이 한참 과거를 회상하다가 열이 뻗쳐 성질을 부리고 있을 때 미디아가 들어왔다. 그녀는 난데없이 웬 술 파티냐는 듯 휙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모두 웬일이야? 방 안에서 술 파티를 하다니. 참, 아무래도 헤어져야 할 것 같아. 용병 길드에 가 봤더니 안테로스 공국(公國)에서 용병을 모집한다던데……. 혹시 같이 갈 사람 없어? 보수는 아주 후하다구. 월급은 한 달에 10골드, 실력만 좋다면 한 달에 30골드. 물론 숙식은 그쪽에서 해결해 주고 말이야. 같이 갈래?”

미디아까지 도착하자 팔시온이 입을 열었다.

“이제 대충 다 모였으니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어. 미디아는 자리가 없으니 저쪽 침대 위에 앉아.”

그제야 낯선 사람들을 알아본 미디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봤다.

“뭐야? 누구지?”

팔시온이 팔을 내저으며 미디아를 제지했다.

“우선 내 말부터 들어 봐. 뭔가 하면 우리들에게 한 가지 일거리가 떨어졌다. 며칠 전에 만났던 그 패거리들을 추격하여 어떤 물건을 회수해 오는 일이지.”

팔시온은 아직 참가할 일행이 정해진 상태가 아니기에 일부러 ‘어떤 물건’이라는 표현을 썼다. 혹시 빠진 사람이 소문을 퍼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만났던 그 패거리라면, 그 그래듀에이트와 마법사가 끼여 있던 놈들 말이야? 팔시온, 제정신이야? 그때는 다만 운이 좋았던 거라구.”

“맞아. 그 녀석들이 우리를 얕보지 않았다면 몇 명 죽거나 부상당했을 게 뻔해. 특히 그 마법사의 실력은 대단한 것 같던데…….”

“아, 그건 염려할 필요가 없어. 그래듀에이트급의 뛰어난 기사 한 분이 우리를 도와주기로 했어. 여기 온 분이 우리들과 계약을 청하기 위해 온 분이시지. 보수는 상당히 괜찮아. 경비는 저쪽에서 부담할 것이고, 또 그 물건을 안전하게 회수해 오면 그에 따른 충분한 보수도 준다고 했어.

자, 각자 생각해 보고 빠질 사람 있으면 지금 빠지라구. 갈 사람이 정해지면 출발에 대해 의논을 해야 하니까…….”

그러자 미디아가 이의를 제기했다. 한 사람 안 왔기 때문이다.

“아직 미네리아 사제님이 안 왔잖아? 어쨌든 뛰어난 사제가 한 명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상대가 만만하지 않으니까 부상자도 많이 생길 텐데…….”

“미네리아 사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 사실 사제야 어디서든지 구할 수 있고, 또 안 되면 신전에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도 있지. 그리고 미네리아 사제 같은 경우 치료 마법밖에 못 하잖아. 자, 각자 참가할 건지 빨리 말해 줘.”

“나는 참가하겠어. 얼마나 괜찮은 동료가 있을지 알지도 못하는 전쟁터에 가는 것보다는 이미 실력을 확인한 동료가 좋겠지. 그리고 보수도 괜찮은 것 같고. 안 그러면 팔시온이 권하지 않을 테니까.”

“나도 하겠어.”

“나도.”

“우리들도 하겠어요.”

“자네는?”

지미와 라빈이 답하자 마지막으로 팔시온은 다크에게 질문을 던졌다. 다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저 여자 애만 빠진다면 이의 없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쪼그만 게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으니까…….”

그러자 팔시온이 시드미안 경을 바라봤다. 시드미안 경은 라나를 쳐다보더니 싱긋 미소 지었다.

“저 아이는 처음부터 돌려보낼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됐습니까?”

“지금 돌려보내시죠.”

“이봐, 스미온, 데려가게.”

“예.”

그러자 라나는 끌려 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안 돼요. 나 같이 갈래요. 가게 해 줘요. 엉엉, 놔요. 데려가 줘요. 나 없이 잘되나 두고 보자.”

시드미안 경의 뒤쪽에 앉아 있던 덩치 큰 사내가 라나를 끌고 나갔다. 라나는 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소한 네 배 이상의 무게를 지닌 인물이 잡아끄는데 끌려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발버둥을 치고, 떼를 쓰면서 라나가 끌려 나가자 모두들 한숨을 쉬었다. 이런 모험 여행, 특히나 기사급 인물들이 지원해 주는 만큼 꽤나 안전하면서도, 또 역으로 그런 인물들이 참가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이라면 누구나가 꿈꾸는 멋진 모험이 될 것이다. 그런 여행에 꿈 많은 소녀가 참가하려고 발버둥을 치는 거야 당연했다. 하지만 인정에 이끌리면 안 되지. 짐이 될 게 뻔한데.

모두는 그들과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오늘 저녁에 바로 출발하기로 합의했다. 시드미안 경은 팔시온 일행에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성문 밖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후 나가다가 뒤돌아섰다.

“치료를 위한 신관은 내가 해결해 드리겠소. 이따 봅시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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