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아와 함께 걷고 있는 다크를 모든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엄청나게 큰 헐렁한 옷에 허리에는 검까지 차고 있는 걸 보고, 얼굴은 예쁘지만 아무래도 반쯤 미친 여자 앤 줄 알았던 것이다.
“뭘 찾으십니까?”
상인 특유의 느물거리는 미소를 피워 올리며 옷 가게 주인이 말했다.
“저 아이한테 맞는 옷.”
그러자 다크가 예쁜 눈동자를 날카롭게 빛내며 덧붙였다.
“남자 옷!”
미디아는 다크를 잠시 바라봤다. 아무리 알맹이는 그래도 껍데기는 귀여운 여자 아이인데 남자 옷을 입혀도 될까? 하는 걱정과 또 다크에게 여자 옷을 입히는 게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어서 미디아는 막무가내로 말했다.
“어떤 게 저 애한테 맞는 ‘여·자·옷’이죠?”
그러자 주인은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소녀를 애써 외면하며 손짓했다.
“저기 있는 옷들이에요.”
미디아는 그중에서 예쁜 옷 한 벌을 들고는 반항하는 다크를 끌고 옷 갈아입는 곳으로 갔다. 계속 다크가 옷을 벗지 않으려고 반항하자 미디아가 다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계속 반항하면 기절시키고 벗긴다.”
그러자 다크의 저항이 멈췄다. 사실 지금 자신의 힘으로는 반항이나 조금 할 수 있을까 용병으로서 다져진 미디아와 격투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분노를 머금은 눈으로 쏘아보는 다크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미디아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크의 옷을 모두 벗겨 버렸고, 속옷부터 착실하게 입히기 시작했다. 이래서 힘이 없는 자는 서럽다니까…….
예쁜 치마와 블라우스를 걸친 다크를 데리고 나오는 미디아의 손에는 여섯 벌의 옷과 여자용 속옷들이 들려 있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세탁을 하기도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에 속옷은 여러 벌이 있어야 했다. 미디아는 옷 가게에서 나오면서 이전에 다크가 입었던 옷들은 모두 쓰레기통에 집어넣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제길, 두고 보자.”
분한 듯이 다크가 그 커다란 눈으로 쏘아보며 말하자 미디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두고 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은 하나도 없더라. 거기 여자용 여행복도 두 벌 넣었으니까 돌아가서 그걸로 갈아입고 비무라도 한번 해 볼래? 자신의 실력을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니까 말이야.”
“좋아.”
두 사람은 서둘러서 여관으로 돌아간 다음 준비를 갖췄다. 미디아는 먼저 뒤뜰로 나갔고, 곧이어 간편한 여행복으로 갈아입은 다크가 나왔다.
무릎 위까지 오는 가죽 반바지를 입고 그 위에 무릎 약간 아래까지 오는 스커트를 입어 가죽 반바지를 가리는 것이 보통 여자용 여행복이다. 스커트 안에 반바지를 입는 이유는 맨살로 말을 탔다가 잘못하면 가죽(?)이 벗겨지는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으로 나타난 다크는 샤벨을 쭉 뽑았다. 그걸 보고 미디아도 내로우 소드를 뽑아 들었다. 둘은 즉시 공격을 시작했다. 처음에 미디아는 ‘겨우 저 체구로…’하는 마음에 큰 공격을 했지만 다크가 살짝 피하면서 반격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큰 상처를 입을 뻔했다. 몸이야 엉망이라도 예전의 그 엄청났던 기술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걸 느낌과 동시에 미디아는 예전에 처음 검을 배울 때 사용했던 무식한 검법, 즉 ‘마구 휘두르기’ 검법을 사용했다. 저런 한 수 하는 자들은 보통 카운터를 노리기 마련……. 힘은 형편없지만 기술이 엄청난 자를 상대하는 최고의 방법은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마구잡이로 사방에서 쉴 새 없이 들어오는 공격에 다크는 계속 뒤로 밀렸다. 반격을 하려고 해도 재빨리 상대의 빈틈으로 찔러 넣을 근력이 부족했다. 상대가 큰 기술을 써서 빈틈이 크다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라도 있는데, 얄팍한 기술로 연속 공격을 퍼부어 대니 그걸 막는 것만 해도 벅찼고,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비무는 5분 정도 더 지속되다가 다크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검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끝났고, 다크는 신경질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자신의 몸이 겨우 그것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절망감만 남았으니……. 이 상태라면 복수는커녕 지금의 라나처럼 짐밖에 안 되는 처지였다.
다크는 미디아에게 박살 난 후 가스톤과 마법에 대해 토론하면서 본격적으로 고대에 개발된 마법을 위한 언어인 룬어 학습에 들어갔다. 어쩌면 이놈의 저주란 걸 자신이 마법을 익혀 부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였다.
하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전에 썼던 마법은 다크가 천재라서 가능했었던 게 아니라 북명신공의 도움으로 만든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룬어 단어나 몇 개 외울 수 있었을까 하나도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두세 시간 만에 때려치우고 말았다.
점심때가 되자 그들은 식당으로 갔고, 급사 여자 아이가 주문받은 음식을 가져와서 각자에게 나눠 주었다. 반주로 시킨 술을 가져와서 차례로 나눠 주다가 급사가 물었다.
“갈렛슈는 누가 시킨 거예요?”
“내가…….”
급사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대답한 사람을 바라봤다. 아직 솜털도 못 벗은 게 확실한 예쁜 계집아이가 그 독한 술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갈렛슈는 토리아에서 생산되는 과실주를 증류한 술로 알코올 순도가 50퍼센트에 달하는 지독하게 강한 술이다. 어른도 그걸 한 병을 못 마시는데, 새파란 계집아이가…….
“너 몇 살이니?”
“충분히 나이 먹었으니까 줘.”
그러면서 다크는 주위를 둘러보며 원군을 청했다. 그러자 지금 현재 다크의 정신 상태를 충분히 감안하고 있는 미디아가 다크 편을 들어 줬다.
“그거 이리 줘.”
급사는 미디아에게 술과 잔 한 개를 건네준 다음 물러섰다. 그러나 일을 하면서도 과연 그 꼬마 애가 술을 마실 것인지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아마도 두 잔도 못 마시고 인사불성이 될 게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귀찮은 여자가 물러나자 다크는 미디아에게서 술과 잔을 건네받은 후 한 잔 가득 따랐다. 보통 갈렛슈는 큰 잔의 아래쪽에 얄팍하게 따른 후 조금씩 마시는 게 정석인데, 그걸 잔 가득히 채우는 걸 보고 미디아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거 억수로 독한 술이야. 그렇게 잔뜩 따르면 안 돼!”
다크는 예쁜 얼굴에 단호한 표정을 띠며 말했다.
“상관없어.”
다크는 그대로 한 모금 꿀꺽 마신 후 잔을 내려놓으며 심하게 기침을 했다. 정말 엄청 독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마침내는 그걸 다 뱃속에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어차피 그래 봐야 한 잔이었지만…….
귀여운 여자 애가 백주 대낮에 그 독한 술을 들이켜는 걸 보고 식당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이 그쪽 테이블로 집중되었다. ‘과연 저 한 병을 다 마실까?’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한 잔을 깨끗이 비운 다크의 얼굴은 빨갛게 변했다. 일부러 취하자고 마시는 술이니 점잔 빼면서 마신 것도 아니었고, 또 원체 독한 술이라서 그런지 그 술기운에 몸이 견뎌 내지를 못했다. 정신은 모르겠지만……. 두 번째 잔을 마시기 위해 헛손질을 해 대던 다크는 그대로 오믈렛이 담겨 있는 접시에 얼굴을 박으며 곯아떨어졌다. 미디아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급히 다크의 얼굴을 오믈렛 접시에서 들어 손수건으로 깨끗이 닦은 후에 방으로 안고 올라갔다.
혹시나 저 술을 몽땅 다 마시는 괴력을 발휘하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 꼬마 애를 비웃는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방에서 내려온 미디아는 의자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
시드미안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다크는?”
“괜찮아요. 그냥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것뿐이에요. 침대에 눕혀 놓고 내려왔어요. 아무래도 그 일이 엄청난 충격이었던 모양이에요.”
그러자 지미가 미디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만약 제가 그런 일을 당한다면 아마 미쳐 버릴 거예요. 내가, 저런 덩치 작은 꼬마 애로…….”
그러자 모두들 지미와 라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확실히 기사가 되기 위해 수련의 길을 걷고 있는 지미의 거대한 근육질 체구와 근육이라고는 거의 붙어 있지 않은 날씬한 라나의 체구는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가스톤이 미소를 지으면서 대꾸했다.
“설마, 그렇다고 미치기까지 하겠어?”
“아니에요, 가스톤은 이해를 못 하시겠죠. 마법사니까……. 마법이란 것은 정신력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지 체력이나 근력과는 상관없죠. 하지만 저희 같은 무사는 다르다구요. 제 체격이 라나처럼 된다면 저는 제가 가진 갑옷부터 검까지 모두 새로 바꿔야 해요. 그걸 휘두를 힘이 없기 때문이죠. 믿어지지 않는다면, 라나, 이거 한번 들어 볼래?”
그러면서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던 롱 소드를 뽑아서 라나에게 건네줬다.
롱 소드는 원래가 한 팔로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검이다. 그렇지만 그 길이는 1미터, 폭 4센티미터, 무게가 자그마치 3킬로그램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롱 소드보다 더한 검도 있는데……. 무사들이 한 팔로 버틸 수 있는 최대 무게를 가정해서 만들어진 배틀 소드(Battle Sword)가 그것이다. 이건 무게가 5킬로그램이나 나간다.
아무튼 10킬로그램 정도 나가는 바스타드 소드를 한 팔로 휘두르는 괴물도 있으니, 그에 비하면 배틀 소드는 꽤나 무사들 팔의 근력을 생각해서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걸 여자가 휘두를 수 있느냐 하면 그게 아니다. 당당한 덩치의 여자 용병인 미디아의 경우에도 검은 2킬로그램짜리 내로우 소드, 방패는 엄청난 돈을 주고 구한 와이번 비늘로 만든 걸 착용하지 않는가? 거기에다 한술 더 떠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다크네라는 마법 장갑까지 끼고 있을 정도니…….
그 검을 받아든 라나의 팔이 아래로 축 늘어졌고 무게를 어떻게든 버티려고 용을 쓰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다크의 충격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다 바뀌어 버린 것에 대한 충격……. 생리적인 변화는 둘째 치고 오래도록 단련된 자신의 육체가 일순간에 쓸모없는 육체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모두 동료의 불행에 침울해 있자 팔시온이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하실 겁니까? 꽤 찾아봤는데도 답이 없는데요. 아무래도 놈들은 의도적으로 여기서 흔적을 지운 것 같은데…….”
팔시온의 말에 안토니가 의견 한 가지를 내놓았다.
“신전에 알아보면 어떨까요? 지혜의 여신 아데나를 모시는 신전에서 신탁을 들어 보면 어느 정도 참고가 되지 않을까요?”
“글쎄, 어쨌든 그 방법밖에는 없군. 여기 아데나를 모시는 신전이 어디에 있나?”
“잠깐 기다려 보세요. 이봐요!”
팔시온이 부르자 멧돼지처럼 생긴 우람한 덩치의 주인이 다가오며 그 생김새에 어울리지 않게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더 필요하신 게 있습니까?”
“맥주 두 잔 더 주시구, 여기 근처에 아데나를 모시는 신전이 있습니까?”
“아, 별로 멀지 않습니다. 그 신전은 수도 내에 있죠.”
주인은 맥주를 가지러 가 버렸고, 일행들에게는 또 하나의 문제가 생겼다. 그들이 아직도 이 근처를 배회하는 이유는 이곳이 트루비아와 사이가 좋지 않은 토리아이기 때문이다. 또 작은 도시에 들어갈 때는 문제가 될 게 없지만 수도로 들어가려면 아무래도 성문에서 신원 조사를 좀 더 철저히 할 게 뻔했다.
“그냥 돌아가면 어떨까요? 샤헨에 가도 아데나 신전은 있잖아요.”
“안 돼. 그럼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어떻게 해서든 수도에 들어가서 신탁을 받아야 해. 어쩔 수 없이 많이 알려진 우리 일행은 안 될 테니, 팔시온, 자네가 좀 해 주겠나?”
“저도 국적이 트루비아라 좀……. 참, 미카엘 자네가 가지.”
“좋아, 자네가 가기 싫다면 뭐…….”
“참, 그리고 다크하고 라나도 데려가. 라나! 너도 여기 아데나 신전을 한번 구경하고 싶지 않냐?”
“예, 좋아요.”
“그럼, 미디아. 아까는 다크 때문에 외출했지만 지금 보니까 라나도 옷이 별로 좋지 않은 거 같은데, 라나 옷도 한 벌 좀 사 주겠나? 그냥 여행하는 데는 상관없지만, 아무래도 신전에 갈 건데 신경을 좀 써야지.”
“그러죠. 가자! 라나.”
라나는 좋다고 미디아를 따라나섰고, 그들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시드미안이 말했다.
“신탁을 받은 후에는 어디로 여행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니, 라나를 여기 떼 놓고 가자구.”
시드미안의 제안에 팔시온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또 따라오다가 그놈들에게 잡히면 누가 책임을 질 겁니까?”
“아예 따라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그러자 안토니가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방법이 좀 과격해도 상관없을까요?”
“상관없어!”
“그럼 기억을 봉인시켜 버리죠. 저는 아직 실력이 모자라서 일부 기억만 봉인시킬 수는 없습니다. 전체 기억을 봉인해야만 하는데…, 그러면 그 아이가 기억이 봉인된 동안 누가 돌봐 줄 건가요?”
“그래! 그 방법이 있었군. 기억을 봉인해 버린 다음에 아데나 신전에 맡기면 되겠지. 그럼 그들이 알아서 해 줄 거야. 물론 한 1년 동안은 기억을 되찾아 주지 말라고 부탁도 하면서 말이지.”
“그게 좋겠군요. 그런데 다크는?”
“다크는 당연히 저주 건 놈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봐야 하니까 데리고 가야지. 그리고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도 물어봐야 할 거고……. 어쩌면 거기 있는 고위 사제들은 그걸 풀 수 있을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