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이 되자 미카엘과 그 추종자들, 안토니, 라나, 다크는 토리아의 수도인 크로멜로 향했다. 크로멜은 그들 일행이 묵고 있는 ‘지레온’이란 작은 마을에서 멀지 않았기에 그날 저녁때면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들이 수도로 떠나기 전, 시골에서는 구하기 힘든 잡다한 것들을 빽빽하게 적은 종이쪽지하고 돈까지 일행들로부터 건네받았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크로멜로.”
“그런데 쟤는 왜 데리고 가는 거죠?”
다크가 저쪽에서 안토니와 떠들고 있는 라나를 가리켰다.
“그야 아데나 신전으로 가는 길이니까 인사도 시킬 겸해서 데리고 가는 거지.”
그들은 점심때가 가까워졌을 무렵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약간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시드미안이 국경을 벗어나면서 다크에게 만들어 준 트루비아의 신분증명서를 이곳 적국에서는 쓸 수 없었기에 다크는 마법사 길드에 갈 때는 성벽을 넘어 다녔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 힘을 쓸 재주도 없었고, 또 신분증명서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여자가 되었기에 그 신분증명서와 최소한의 유사점도 찾아볼 수 없는 몰골이 되어 있었다.
어쨌든 트루비아 태생이 아닌 미카엘이나 지미, 라빈은 그대로 신분증명서를 제시했고, 안토니 크로와는 팔시온의 신분증명서를 써 먹었다. 모험가로서 일자리를 찾으러 왔다는……. 그리고 귀여운 두 여자 애들은 쌍둥이 자매로 숲 속에서 만난 하프 엘프 고아들이며, 그냥 여행에 데리고 다닌다고 소개했다.
아름다운 금발과 미모, 그리고 작은 체구를 살펴본 병사들은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그들을 통과시켰다. 반쪽짜리 엘프니까 꼭 귀의 모양이 엘프를 닮으란 법도 없지 않은가? 거기다 예쁘고 가냘프게 생겼으니 그 말이 사실이겠지 하고 그냥 넘어간 것이다.
“아데나 신전에 가는데 내가 왜 따라가야 하는 거예요?”
“그야 거기도 신전이니까 혹시 저주를 풀 수 있을까 해서지.”
“그러자고 가는 인원치고는 너무 많은데요?”
“물건도 살 게 많고, 또 안토니도 여기 볼일이 있어. 라나는 신전을 방문할 거고. 모두 이유가 있다구. 그러니 따지지 마.”
그들이 아데나의 신전에 도착해서 신탁받기를 원한다는 전갈을 넣고 한참을 기다리자 아름다운 여자 신관이 나오더니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신탁을 받고 싶으시다구요?”
“예.”
“어떤 신탁을?”
“신탁을 받고 싶은 것은 세 가집니다. 첫째는 사라진 드래곤 하트가 어디로 갔는지, 둘째는 저 아이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물론 시술자를 족치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저 아이에게 저주를 건 녀석의 행방이죠.”
저주라는 말이 나오자 그 신관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미카엘이 가리킨 방향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엄청난 덩치의 사내들 틈에 쌍둥이처럼 닮은 여자 아이 둘이 서 있었다. 그 둘을 찬찬히 살펴본 신관은 곧이어 둘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 명은 쉴 새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색다른 것들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한 명은 그냥 무표정하게 가만히 서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미카엘에게 불쌍하다는 듯 말했다.
“가엾게도 예쁜 아인데, 눈이 보이지 않는 저주를 받았나요?”
미카엘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럼 벙어리가 되었나요?”
또다시 고개를 가로젓는 걸 본 여신관은 매우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어떤 저주를 받았나요?”
“원래 남자였는데 여자 애가 됐어요.”
“예?”
그 신관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모습을 보니 저주라고 할 수도 없겠군요. 어쨌든 60골드.”
“예? 60골드라니 무슨?”
“신탁을 의뢰하셨으니 돈을 주셔야죠. 한 건당 20골드예요.”
“저, 그럼 한 가지만 좀 묻겠는데요. 아데나를 모시는 신전은 외국의 다른 신전들과 연결되어 있나요?”
“그건 당연하죠. 외국의 모든 신전들과 연결되어 있죠. 같은 아데나 여신님을 모시고 있으니까요.”
“그럼 코린트의 드로아 대 신전과도 연결되어 있습니까?”
“예, 코린트에 있는 드로아 대 신전은 아데나 신전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엄청난 규모의 대 신전이지요. 그러니 당연히 그쪽과 연락을 안 할 수는 없지요.”
그 여사제가 말하자 미카엘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 드래곤 하트를 찾는 일은 트루비아 왕실에서 부탁한 겁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드래곤 하트는 코린트의 드로아 대 신전에 있던 것을 트루비아 왕실에서 잠시 빌렸던 것이구요. 어쨌든 드래곤 하트가 트루비아 국내에서 없어졌으니, 트루비아 왕실이 발 벗고 나서서 그걸 찾고 있는 겁니다. 저희들이 그 일을 위탁받았는데, 그걸 훔쳐간 놈들을 추격하는 중에 일행이 저주를 받는 불상사가 벌어진 거구요. 저기 두리번거리는 저 애가 드로아 대 신전에 있었던 견습 사제지요. 그러니 공짜로 안 될까요?”
“저, 그건 제 마음대로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대사제님과 의논을 해 봐야겠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한참이 지나자 그 사제는 기품 있게 보이는 중년 여인과 함께 돌아왔다. 나이가 꽤 들어 보였지만 정말이지 대단한 미녀였다. 미카엘은 그녀가 대사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무예 수련자 미카엘이라고 합니다.”
“오, 당신들이 드로아 대 신전에서 일을 의뢰받은 사람들인가요?”
“예.”
“드로아 대 신전에서 들은 말로는 시드미안 경이 그 책임자라고 하던데…….”
“그는 얼굴이 너무 알려져서, 적국의 수도로 들어올 수가 없어 제가 부하들과 함께 왔습니다. 그리고 동료의 저주도 풀 수 있다면 더 좋겠구요.”
“저주에 걸린 사람을 볼 수 있을까요?”
“다크! 이리 와 봐.”
맵시 있는 여성용 여행복 차림을 한 아름다운 소녀가 그들에게 걸어오는 걸 보고 그녀는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라나…군요.”
미카엘이 히죽 웃었다.
“예, 아시는 모양이죠?”
“물론 잘 알고 있어요. 1년 전에 드로아 대 신전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봤죠. 그런데 어쩌다가?”
“모르겠습니다. 저주를 받았는데, 어떤 저주를 받았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흐음…….”
그 대사제는 잠시 생각을 해 보더니 다크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는 축복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저주의 극성은 축복이었기에 웬만한 싸구려 저주의 경우 축복 한 방으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축복이 끝난 후에도 다크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꽤 고위급 저주에 걸리신 것 같군요. 이런 때는 그 시전자가 아니면 풀 수 없을 겁니다. 안 되면 그 시전자를 죽이든지, 또는 그 매개물을 찾아야겠죠. 어쨌든 다크 씨의 모습을 보니 드로아 대 신전에서 부탁받은 일이란 걸 바로 알겠어요.”
“저기 라나도 데려왔는데 만나 보시겠습니까?”
“예.”
“라나! 두리번거리지 말고 이리 와라.”
라나는 재빨리 달려오더니 오랜만에 만난 그 여인에게 처음에는 공손히 인사를 했다. 하지만 몇 분 지나지도 않아 그 여인에게 수다를 떠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한 시간 정도 여정을 떠들어 대는 걸 참으며 듣고 있던 안토니가 더 이상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는지 조용히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라나는 자신의 수다에 도취되어 외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이윽고 주문을 다 외운 안토니가 미카엘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미카엘이 라나가 도망치지 못하게 꽉 잡았고, 안토니는 재빨리 라나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는 시동어를 외쳤다.
“리멤버런스 실(Remembrance Seal : 기억 봉인)!”
안토니의 손이 약한 빛을 뿜자 또릿하던 라나의 눈동자가 멍청하게 풀려 버렸다. 이걸 보고 있던 대사제가 놀라서 외쳤다.
“당신들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안토니는 죄송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사제님도 이 아이가 얼마나 말썽꾸러기인지 아실 겁니다. 처음 떠날 때 이 아이를 돌려보내고 떠났는데도 무턱대고 따라오다가 나쁜 놈들에게 사로잡혀 있는 걸 구출하기도 했죠.
그냥 돌려보낸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기에 기억 봉인을 한 겁니다. 저 애가 얼마나 말썽을 피웠으면 동료 하나가 저주를 받아 저 모양이 되었겠습니까? 일단 이 아이를 이 상태로 1년만 좀 데리고 계셔 주실 수는 없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제한적으로 기억을 봉인할 수 있는 사람에게 데리고 가서 드래곤 하트와 우리 파티에 관련된 기억들만 없애시든지요.
적들은 타이탄까지 동원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 파티에서 한 명도 안 죽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라구요. 이제 더 이상 아무런 능력도 없는 라나를 보호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대사제께서 우리들의 조치를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대사제는 그제야 얼굴 표정을 풀었다.
“알겠습니다. 저 아이를 떼 놓는 데 기억 봉인이라는 방법 외에는 길이 없다면……. 대신 나중에 저 아이를 드로아 대 신전으로 보내서 좀 더 제한적인 기억 봉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안 그러면 라나가 너무 불쌍하니까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어쨌든 신탁을 받으려면 시간이 좀 많이 걸리는데……. 볼일 보시고 나중에 오세요.”
일행은 돌아다니며 부탁받은 물건들을 사들였다. 또 안토니는 상처를 치료하는 약물인 포션이라든지, 여러 가지 약초, 각종 광석(鑛石) 가루 등을 사러 다녔고, 나머지 일행들은 옷, 양말, 식량, 양념류 등 살 게 정말 많았다. 하기야 지금까지는 될 수 있으면 현지 조달을 하면서 그런대로 견뎌 왔지만 대부분이 물가가 비싼 시골 지방으로 다녔기에 여행에 꼭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이런 대도시에는 각종 물품이 대량으로 공급되었으므로 아주 저렴한 가격에 많은 양을 살 수 있었다. 특히나 세련된 디자인의 옷이나 양말, 여행용 말린 고기포 따위는 시골에서 구하기 힘들었다. 마법에 관계된 물품이라면 더욱 구할 수 없었다.
덩치 큰 장정들이 떼거리로 돌아다니며 눈에 힘을 주고 거의 협박하다시피 흥정을 하니 물건도 꽤나 싸게 구입할 수 있었지만, 다만 그들도 한 가지 부탁을 수행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 미디아가 자신은 여기까지 오기 귀찮다고 속옷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들은 여자 옷 가게 앞에서 30분 정도를 서성거리다가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다크에게 통사정을 했다. 하지만 다크도 껍데기는 어떤지 모르지만 남자였기에 옷 가게로 들어가기를 완강히 거절했다.
“제발 좀 사다 주라, 응?”
“내가 왜 여자 옷을 사러 들어가야 하죠?”
“제길! 너도 지금은 여자잖아. 너는 속옷 필요 없냐? 네 것 사는 김에 같이 사면 되잖아.”
“내 건 미디아가 그때 다섯 벌이나 구입해 줬어요. 더 이상 필요 없다구요.”
“그럼 그때 왜 자기 것은 안 사고 네 것만 사 준 거냐?”
“모르지요. 자기 말로는 그쪽은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든다고 그러던데……. 너무 촌스럽다나 어쨌다나.”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사기는 해야 할 거 아냐?”
“그거야 미카엘 사정이죠. 내가 부탁받은 건 아니니까…….”
“제길, 이럴 줄 알았다면 물건을 먼저 사고, 라나의 기억을 봉인하는 건데……. 좋아, 여기 써 놓은 거 사 오면…….”
“사 오면?”
“앞으로 설거지하지 않아도 된다. 어때?”
미카엘의 웃는 얼굴을 다크가 예쁜 눈으로 쏘아보았다.
“말도 안 돼! 그냥 설거지하고 말래.”
다크가 끝까지 저항하자 미카엘은 전술을 바꿔 다크의 약점을 찌르기 시작했다.
“좋아. 정 그렇게 나오면 나는 너와 완전히 개별적으로 행동하는 수밖에 없어. 그리고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팔시온과 가스톤을 설득해 이번 모험에서 손 떼게 만들 거야. 그럼 너는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할걸? 어여쁜 여자 애로. 자, 어떻게 할 거야?”
“제길! 좋아. 대신 설거지하고, 식사 당번까지 빼 줘. 좋아요?”
“그래 좋다.”
“쪽지하고 돈 내놔요.”
그렇게 해서 다크는 아름다운 여자 옷들을 전시해 놓은 옷 가게에 혼자 들어가게 되었다.
“어서 오세요. 어머! 정말 예쁜 아가씨네……. 뭘 찾아요?”
상점 안에는 여자들만 열세 명 정도가 우글거리며 여러 가지 물건들을 둘러보고 점원들과 흥정을 하고 있었다. 다크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인사를 건네 오는 여자에게 쪽지를 건넸다.
“이거 주세요.”
“으응? 이거 꽤 고급 속옷인데……. 조금만 기다려요.”
잠시 후 여자는 속옷들을 가져왔다.
“거기 쓰인 것들이에요. 그런데 그 치수대로라면 아가씨한테는 너무 클 텐데?”
“심부름이에요.”
“아, 예. 12골드 34실버예요.”
다크는 재빨리 계산을 마치고는 가게에서 나왔다. 들어가기 전에 놔뒀던 짐들이 몽땅 없어진 걸 보고 두리번거리던 다크는 그것들이 지미와 라빈의 짐 더미 속에 함께 들어 있는 걸 알았다.
“내 짐 내놔.”
사실 다크는 짐을 잘 지고 다니는 편은 아니었지만, 여자로 변한 후에는 남자들이 일부러 자신에게 짐을 안 주는 것을 느끼고 오기로 자청해서 지고 다녔던 것이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무거웠지만 이를 악물고 참고 있었다.
“너는 속옷만 들어. 괜히 힘없는 여자 애 부려먹는다고 사람들이 욕할 거 아냐?”
“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