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
미카엘 일행이 낑낑거리며 짐을 지고 와서는 아데나 신전에 맡겨 뒀던 말들에 실었다. 그리고 신탁 내용을 듣기 위해 신전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 물음이 사라진 드래곤 하트의 행방이라고 하셨죠?”
“예.”
“신탁에 따르면 푸른색 괴물이라고 하더군요. 두 번째 물음에 대해서는 답이 없었어요. 어쩌면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세 번째 물음이 저 아이에게 저주를 건 마법사의 행방이죠?”
“예.”
“거대한 건물에 있다는군요. 그 건물이 뭔지는 모르겠어요. 큰 기둥들이 세워진 걸 보면 신전인지도……. 어쨌든 사제의 말을 토대로 그림을 그렸어요. 그걸 보시면 참고가 될 겁니다.”
미카엘은 달랑 두 장의 그림만을 받아 들고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두 그림 다 그냥 대강 그려진 것이었기에 뭐가 뭔지 알아보기가 매우 어려웠다. 특히 한 장의 그림은 정말 괴물이었다. 거대한 머리통만 봐 가지고는 뭔지 알 수가 있나?
“떠그랄! 이게 뭐야?”
같이 그림을 들여다보던 지미도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요.”
“색깔이 푸르죽죽한 걸 보니 트롤인가?”
옆에서 함께 보던 라빈이 참견했다.
“하지만 트롤은 뿔이 없잖아요.”
그러자 지미가 대꾸했다.
“뭐 모르지. 트롤의 변종인지……. 아니면 뿔이 세 개일 수 있어?”
둘의 말을 듣고 있던 미카엘이 투덜거렸다.
“이게 네 발로 걷는지 두 발로 걷는지, 몸통도 그려야 할 거 아냐? 제길 머리통만 대강 그려 놓고는 이게 뭔 줄 알고 찾으라는 거야?”
그러자 지미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다른 그림도 그래요?”
“이게 그 그림이다.”
널찍한 홀 중간에 마법진 같이 보이는 것 몇 개와 크고 높은 기둥들이 그려져 있는 이상한 그림이었다. 이게 그냥 넓은 건물인지, 아니면 신전의 일부인지 알기 힘들었다.
“이거만 봐서는 알 수가 없겠는데요.”
“제길! 이래서 처음부터 저 신탁이란 걸 믿지 않았어.”
“원래 신탁이란 게 이래요?”
“신탁 자체가 이상한 약 먹고 오랜 시간 아데나 여신에게 바치는 춤이랍시고 광란의 춤을 추면서 본 어떤 환각을 말(言)이나 그림으로 표시한 거니, 환각제 먹고 지랄하는 미친년들하고 뭐가 달라.”
“얘기가 그렇게 되나요?”
“어쨌든 필요한 건 다 구입했으니 돌아가자.”
“휴우, 또 한 대 만들었군.”
한 마법사가 토지에르 경의 푸념에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는 널찍한 건물의 한 귀퉁이에 쌓여 있는 엑스시온들을 가리켰다.
“엑스시온 한 대 만드는 데 이렇게 힘이 들어서야……. 과연 저 많은 것들을 다 만들 수나 있을지 걱정입니다.”
“그래도 어쩔 수 있나? 폐하의 칙명(勅命)이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완성해야 하는 거야. 그건 그렇고, 자네들은 수고했으니 이만 들어가서 쉬게나. 일주일 후에 또다시 중노동을 해야 하니.”
마법사들은 감히 궁정 제1마법사 토지에르의 앞에서 투덜거리지는 못하고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토지에르 경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마법진의 중심으로 걸어가서 이번에 생명을 불어넣은 엑스시온을 쓰다듬으며 뿌듯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왕국 내의 전 마법사를 동원해야만 하나의 엑스시온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 타이탄을 못 만드는 것은 돈이 없어서, 또는 타이탄을 만들 재료가 부족해서……. 그러고 보니 그 말이 그 말이군. 뭐 어쨌든 이런 이유들이었다. 확실히 자금의 문제는 타이탄의 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 몸통이야 쇠니까 별 문제가 없지만 크로네나 미스릴 같은 경우 엄청난 액수의 돈을 들여야 구입할 수 있었다.
또 엑스시온을 만들려면 상당량의 금과 은, 백금, 크로네가 필요했고, 또 엑스시온 힘의 핵을 만드는 데는 루비(홍옥)가 필요했다. 루비가 완벽한 덩어리일 필요는 없다는 점 때문에―가루가 된 상태라도 상관없고 많기만 하면 된다―어느 정도 돈이 적게 들지만……. 청기사의 엑스시온은 달랐다.
엑스시온의 크기가 더욱 커짐으로 인해 더 많은 귀금속들이 들어간 데다가 루비와 함께 다른 엑스시온에는 들어가지 않는 드래곤 하트까지 집어넣었던 것이다.
안피로스가 최후에 개발해 낸 엑스시온 제조법에 따르면, 엑스시온 내에 루비와 함께 드래곤 하트를 일정량 넣으면 더욱 막강한 증폭력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안피로스의 마지막 작품은 헬 프로네의 엑스시온을 더욱 발전시킨 형태의 것이었다.
아쉽게도 그의 던전에는 그가 마지막에 연구하던 여러 가지 물건들과 자료만 발견되었을 뿐 과거 크루마 제국 궁정 제1마법사로 활동하던 시절에 만들었던 타이탄들에 대한 자료는 없었다. 만약 그게 있었다면 아마도 청기사가 아닌 위험도가 훨씬 떨어지는 헬 프로네에 미스릴을 입힌 타이탄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지금 만들고 있는 이 청기사는 안피로스조차 드래곤 하트를 구하지 못해 이론상으로 설계만 해 둔 작품일 뿐 실질적인 테스트를 거친 작품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프로토타입 엑스시온을 만들기 위한 연구가 거의 10년에 걸쳐 진행되었고, 시험용 소형 엑스시온에 마력을 불어넣다가 폭발 사고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토지에르 경은 그때마다 그의 뛰어난 실력으로 대형 사고로 이어지지 않게 막아 냈고, 드디어 안피로스의 이론을 실제로 만들어 내는 데도 성공했던 것이다.
그 첫 번째 수확물이 한쪽 구석에 서서 얕은 잠을 자고 있었다. 아직 완성품이 나오지 않아 알 수는 없지만 그 출력은 통상 출력의 2.5배 내지 3.5배 사이일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었다. 헬 프로네급이 2.2배였으니까 그보다 더 발전된 엑스시온이라면 그보다 더 뛰어나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서 보통보다 좀 더 큰 엑스시온을 위해 청기사 설계진들은 6.1미터의 거대한 타이탄을 만들어 냈다.
과연 프로토타입의 엑스시온이 어느 정도 출력을 내 줄지는 신만이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튼 저 프로토타입 청기사가 깨어난 후에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 시간은 60일도 남지 않았다.
토지에르가 여태까지의 고생을 회상하며 감회 어린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제자 녀석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저, 놈들의 동태를 감시하라고 보낸 첩자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오오, 그래? 어떻게 되었느냐?”
“여관을 착실하게 감시했지만 더 이상 그런 검은색 옷을 입은 검객의 모습은 확인할 수 없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자살하거나 파티를 떠난 모양입니다.”
토지에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피어 올렸다.
“호오, 너도 오늘 일한다고 피곤했을 텐데, 이렇게 달려와 알려 줘서 고맙구나. 이제 들어가서 푹 쉬거라.”
“예, 스승님. 스승님께서도 쉬십시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탁은 도저히 도움이 되지 않는데…….”
미카엘은 파티를 이끌어 가고 있는 리더격 존재들인 시드미안 경, 팔시온, 안토니와 맥주를 마시며 앞으로의 향방에 대해 의논을 시작했다. 얄궂은 그림 한 장으로는 도저히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아니, 도움이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네. 이 그림을 보면 확실히 괴물이야. 하지만 이 세상에 뿔 달린 짐승만 생각해 보면 뭔가 답이 나올 수도 있지.”
시드미안 경의 말에 안토니가 덧붙였다.
“푸른색에 뿔 달린 짐승이라……. 거기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면 가장 유력한 녀석이 있기는 있죠.”
“누군데요?”
“블루 드래곤. 나도 본 적이 없어서 뿔이 몇 개나 달렸는지, 안 달렸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드래곤의 색상 중에는 블루도 있어요.”
“드, 드, 드래곤이라구요? 저는 이렇게 빨리 죽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안토니도 좀 더 오래 살고 싶으면 딴 걸 생각해 보라구요. 우리가 가기만 하면 불문곡직 아작아작 씹어서 디저트로 먹어 버릴 텐데…….”
미카엘의 엄살에 시드미안 경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꼭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지. 드래곤을 방문하려면 좀 더 강력한 동료가 있는 게 좋겠지.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알카사스로 가세. 거기서 할 일이 있으니까.”
“마도 왕국 알카사스에는 왜요?”
“그야 다크의 저주를 그쪽에서 혹시 풀 수 있을까 알아보려고……. 만약 안 된다고 해도 어떤 저주에 걸렸는지는 알 수 있을 거 아니겠나? 혹시 알아? 그 저주가 아주 독특한 거라면 범인을 잡아낼 수 있을지…….”
“그럼 제가 일행들에게 연락하죠.”
팔시온이 위로 올라가려는데 위에서 미디아가 약간은 창백한 얼굴로 급히 뛰어 내려왔다.
“혹시 다크 못 봤어?”
“어? 미디아하고 같이 안 있었어? 아까 저녁 식사 때 술 실컷 마시고 뻗어서 네가 데리고 올라갔잖아.”
“그런데 샤워하고 나와 보니까 없잖아.”
“이런 제기랄, 콩알만 한 게 되게 말썽을 부리는군.”
다크의 위기
“아저씨, 포도주 한 병 주세요.”
예쁜 여자 애가 약간은 술에 취한 것 같은 어조로 말하자 상점 주인이 물었다.
“설마 네가 마시려고?”
그러자 그 여자 애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듯 순진하게 미소 지으며 완강하게 부인했다.
“설마요. 아빠 심부름이에요.”
“그래, 착한 아이구나. 여기 있다. 5실버 22타라다.”
여자 애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지불했다. 그리고 상점에서 나오자마자 병뚜껑을 따고 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꿀꺽꿀꺽, 크아, 달콤하고 쌉싸름한 게 죽여주는데…….”
그녀는 비틀거리며 사람이 별로 안 다니는 골목길로 들어가, 작은 상자에 걸터앉아 계속 술을 마셔 댔고, 반 병쯤 마신 후에는 거의 맛이 간 상태가 되었다.
이때 길 앞을 지나가던 패거리들 중 하나가 혹시 골목길 안에서 키스하는 장면이라도 훔쳐볼 수 있을까 살짝 들여다보다가 술 취한 예쁜 여자 애를 발견하고는 일행에게 손짓을 했다.
“저것 봐!”
“이야… 꽤 예쁜데……?”
“관둬라. 어린 애잖아.”
“어린 애는? 저 정도면 다 큰 거라구.”
그중 한 녀석이 소녀에게 다가가서는 슬쩍 말을 걸었다.
“이봐, 맛있니?”
“그러어엄, 아아주 아아주 조오오아.”
완전히 혀 꼬부라진 소리가 들려오자 그 녀석의 눈에 음침한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봉 잡았다’하면서…….
“더 좋은 거 있는데, 같이 가자.”
“더 조오은 거어? 가레이슈?”
“그래, 갈렛슈도 있지. 응? 같이 안 갈래? 흐흐흐…….”
그러자 옆에 있던 놈이 끼어들었다.
“이봐, 여기서 해치우지 어디로 가자는 거야?”
“이런 예쁜 애를 이런 곳에서 먹는다는 건……. 거기다 완전히 맛이 갔는데, 좀 더 분위기 좋은 데서 즐긴 후 노예상한테 팔아 버리자구. 아마 못 받아도 2백 골드는 받을 수 있을 거야. 거기다 칼까지 차고 있는데? 여행객인 모양이야. 뒤탈도 없을 거고…….”
“하긴…….”
그들은 슬쩍 소녀의 허리에서 검집을 벗겨 무장 해제를 시키고 나서, 인사불성인 그녀를 부축하듯 끌어안고는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저기 맞아?”
“예, 금방 술 취한 금발머리 여자 애를 부축해서 데리고 갔다고 하던데요?”
미카엘의 물음에 기가 찬다는 듯 지미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자 미카엘이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지 그쪽으로 뛰어갔다.
“이런 나쁜 새끼들……. 모두 죽여 버리겠어.”
안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반쯤 부서진 폐가의 문짝을 단숨에 박살 내고 미카엘이 뛰어들었을 때, 이미 세 놈은 제정신이 아닌 여자 애의 옷을 다 벗겨 놓고 누가 먼저 할 것인지 한참 제비를 뽑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못된 놈들! 죽엇!”
퍽, 퍽, 퍽!
우람한 근육질을 자랑하는 미카엘은 많이 봐 줘야 이제 갓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하는 젊은 남자 셋을 그야말로 개 패듯 패기 시작했고, 뒤따라 들어온 지미도 그놈들을 지근지근 밟았다. 하지만 그 젊은이들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화풀이를 다 끝낸 지미와 미카엘이 씨근덕거리면서 인사불성인 다크의 나신(裸身) 위에 옷을 덮어 주고 있을 때 들이닥친 라빈의 분풀이 상대도 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다크가 갑자기 없어져 버린 덕분에 시드미안 경 일행은 모두들 밖으로 뛰어나가 “금발머리의 예쁜 여자 애 못 봤어요? 키는 이만한데”하면서 여태껏 밤거리를 뛰어다녔던 것이다. 지금껏 마음 졸였던 것까지 합쳐서 라빈이 이미 기절해 버린 세 녀석들에게 한참 스트레스를 풀고 있을 때, 헐레벌떡 뛰어온 미디아도 실내의 정경을 보고는 어떻게 된 일인지 금방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야, 모두 밖으로 나가. 그리고 지미, 너!”
“예?”
“내가 나갈 때까지 저 녀석들 정신 차리게 만들어 놔. 다크에게 옷 입히고 나가서 아예 죽여 버릴 테니까.”
여태껏 보지 못했던 분노에 찬 미디아의 표정에 질린 지미가 얼른 대답했다.
“알았어요.”
“아, 앙……. 벌써 아침이야?”
비실비실 기지개를 켜며 잠자리에서 일어나 목욕탕으로 걸어 들어가는 소녀를 보고 지미와 라빈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제의 그 사건…, 그걸 통해서 지미와 라빈은 미디아를 다시 보게 되었다. 도대체 그렇게 무자비하게 사람을 팰 수 있다니……. 여자가 그렇게 잔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던 것이다.
미디아는 정말 죽기 일보 직전까지 그 녀석들을 두들겨 팬 다음 다크를 안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정작 정조를 상실할 위험에 처했던 당사자는 그 사건의 전모를 전혀 알지 못하는 얼굴이니 웃길 수밖에 없었다.
그날 아침은 마도 왕국 알카사스로 떠날 준비에 바빠 모두 이리저리 짐을 챙기고 물건을 구입하느라고 바빴다. 그들이 떠나려고 할 때쯤 다크는 또다시 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지미가 완전히 인사불성이 되어 버린 여자 애를 안고 나오자 팔시온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시큰둥하게 물었다.
“어디서 찾았냐?”
“뒤뜰에서요. 포도주 한 병을 다 마신 모양이던데요? 빈 병이 굴러다니는 걸 보니…….”
“제기랄, 이 녀석은 라나보다 더 하군.”
“그래도 라나보다는 나아요. 최소한 시끄럽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어쩌죠? 완전히 뻗어 버렸는데…….”
잠시 궁리하던 팔시온이 단호하게 외쳤다.
“말 등에 묶어 버려. 어차피 점심때쯤 되면 깨겠지. 으휴, 술 취한 계집애는 정말 대책이 없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