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930)

만남

다음 날 아침, 그들은 본격적으로 키아드리아스의 영토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한 번씩 몬스터들이 나타나긴 했지만 그 정도 몬스터에게 당할 정도의 약한 파티는 아니었다. 험한 산길이라 꾀를 부려 대는 말을 억지로 끌면서 팔시온이 앞서갔고, 그 뒤에서 스미온이 다크의 말까지 두 필을 끌고 따라왔다. 자기 말의 안장에 다크 말의 고삐를 매서 끌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 뒤로 줄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참 전진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드미안이 팔시온에게 외쳤다.

“이봐, 잠시 쉬어 가세.”

“예? 좀 더 가는 게…….”

“저기 좀 보게. 더 가서 될 일인지.”

시드미안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얼굴이 창백해진 다크가 땀을 있는 대로 흘리며 주저앉아 있었다. 팔시온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확실히 같은 육체라도 그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이렇게 바뀌는군요. 라나라면 죽는 소리를 하면서 더 이상은 못 간다고 떼를 써 댔을 텐데, 저 지경이 되도록 아무 소리 안 하고 따라오고 있었다니…….”

“인내심이 대단한 녀석이야. 지금의 육체로는 조금만 험한 곳을 걸어도 죽을 지경일 텐데……. 아마 저 상태로 조금만 더 가면 곧바로 인사불성이 될걸?”

“으휴, 그래도 계집애라면 칭얼대는 맛이 있어야지, 저렇게 다부져서야 누가 데리고 살겠어요?”

“하하하, 자네가 걱정 안 해 줘도 나중에는 데려갈 사람이 줄을 설 거야.”

이때 미카엘이 시드미안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도대체 키아드리아스는 어디 있는 거죠?”

“모르지, 뭐…….”

“계속 안 나타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어떻게 하기는?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어까지 찾아가야지.”

“돌았군요.”

“돌지 않았어. 그 방법뿐이잖아. 안 그럼 어쩔 거야?”

모두 투덜거리며 또다시 길을 떠났다. 키아드리아스는 그레이시온 산맥의 동쪽에 위치한 카마가스 지역에 산다고 하니까 그 일대를 배회하다 보면 뭔가 수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될 수 있으면 좋은 길을 택해 말을 끌고 갔다.

그런 식으로 며칠 걸어가다 보니 그들의 발아래에는 넓고 평평한 구릉 지대가 나타났다. 곳곳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돌무더기들이 있다는 걸 제외하고는 별로 의심스러운 곳도 아니었다.

“어째 기분이 좀 으스스한데요?”

“그러게 말이야. 돌무더기들이 꽤 많군. 적게 잡아도 1천 개는 되겠어.”

“저 구릉 지대 중간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요?”

“으응? 그렇네. 건물 같기도 하고 안토니 저게 뭐지?”

안토니는 중얼중얼 주문을 외워 대더니 시동어를 외쳤다.

“클레어보이언스(Clairvoyance : 천리안)!”

안토니는 구릉 지대의 구석구석을 훑어보았다.

“돌무더기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작은 집이 한 채 있어요. 사람이 사는 듯 작은 밭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가 보자.”

일행은 산에서 내려와 구릉 지대 안으로 들어섰다. 사방에 쌓여 있는 돌무더기가 별로 기분 좋지는 않았지만 뭐 그게 걸어 다니면서 공격해 올 가능성은 없으니까. 그들은 차분하게 중간에 위치한 집으로 걸어갔다.

똑똑!

꽤 낡은 집이긴 했지만 그래도 본바탕이 튼튼한 돌로 만들어져서인지 아직도 버티고 있는 모양이었다.

똑똑!

“뭐야? 사람이 안 사는 거 아니에요?”

“설마, 저기 작은 밭이 있는데 사람이 살지 않을 리가 있나?”

똑똑, 똑똑.

20분 정도 문을 두들겨도 반응이 없자 미카엘이 투덜거렸다.

“사람이 안 사는 거라니까요. 그냥 들어갑시다.”

“글쎄, 밭이 있는 걸 보면 외출한 모양인데 들어갈 수야 있나. 그냥 이 근처에서 기다리기로 하지.”

“으휴, 속 터져. 여기까지 와서 기사 흉내를 내야만 하겠어요?”

“나는 트루비아의 자랑스런 기사라네. 그것도 근위 기사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받은 사람이지. 아무리 어려운 곳이라도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지. 자, 야영할 준비나 하게.”

시드미안의 말에 모두들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카엘, 지미, 라빈, 팔시온이 숲 쪽으로 나무를 주우러 갔고, 미디아가 음식 만들 준비를 했다. 그리고 시드미안과 스미온은 주위를 둘러보러 갔고, 마법사들은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대지의 기억에 물어보기 시작했다. 일단 주인이 누군지는 알아야 실례가 없을 테니까.

지미와 라빈이 먼저 돌아와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미디아는 여자였지만 영 음식 솜씨가 형편없는 관계로 지미와 라빈이 음식 준비를 도맡고 있었다. 돌덩이 몇 개를 놓고는 그 위에 솥을 올려놓고, 그 밑에다 모닥불을 지폈다. 미디아가 이미 길어 놓은 우물물을 펄펄 끓여서 대강 가지고 있는 재료 다 집어넣고 밀가루를 풀었다. 걸쭉하게 만든다고 지미가 휘휘 젓고 있는 동안 라빈은 또 다른 모닥불에 프라이팬을 올려놓고 밀가루를 반죽해 적당히 간을 맞추고 팬케이크를 부치기 시작했다.

보통 때는 빵을 데워서 스프하고 함께 먹었지만, 며칠 동안 산속을 헤매다 보니 빵은 다 먹어 버렸고, 이제부터 건조식품을 대강 끓여서 먹는 단계에 온 것이다.

이들이 한참 음식을 만든다고 부산을 떨고 있을 때 팔시온과 미카엘이 나무를 잔뜩 가져왔다. 다른 방향으로 정찰 나갔던 시드미안과 스미온 역시 땔감들을 한 아름 가지고 왔다. 시드미안은 땔감들을 한쪽에 내려놓으며 안토니에게 물었다.

“수상한 점은 없는 거 같던데,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저 역시 수상한 건 못 느꼈습니다. 이 집 주인은 엘프더군요.”

안토니가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고 나자 잘생긴 남자 엘프의 영상이 만들어졌다. 약간 낡은 듯한 망토와 고풍스러운 검이 아주 잘 어울리는 엘프였다.

“바로 이 사람이 집주인인 모양입니다. 대지의 기억에 따르면 오늘 아침까지는 여기 있었던 것 같은데요.”

“좀 지나면 날도 저물 테니 돌아오겠군. 지미, 식사는 멀었냐?”

“이제 다 됐어요. 자, 둘러들 앉으세요.”

그러자 시드미안이 저쪽 구석에서 심법을 펼치고 있던 다크에게 외쳤다.

“다크! 밥 먹어라! 밥!”

요즘 들어서 다크는 시간만 나면 태허무령심법을 통해 내공을 쌓고 있었다. 하지만 원체 단련이란 단어라고는 모르던 육체가 되어 놔서 그런지 거의 일주일 이상 내공을 운용해 봤지만 거의 기가 모이지 않았다. 일단 기가 모이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는 쉬운데, 처음에 기가 지나다닐 통로를 개척하고 정말 실낱같은 기를 끌어 모아 하나의 자그마한 덩어리로 형성해 나가는 것은 엄청나게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심법을 마치고 일행들 사이에 끼어 앉아 지미가 내미는 스프와 팬케이크 덩어리를 받는 다크를 보며 시드미안이 조심스레 물었다.

“진전은 보이냐?”

그 말에 다크는 씁쓰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젠가는 되겠지요.”

식사를 마친 후 설거지는 음식 준비에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한 미디아와 다크가 해치웠다. 그들이 쉬려고 할 때쯤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시드미안은 미카엘에게 외쳤다.

“텐트를 쳐!”

“뭐라구요? 집이 옆에 있는데 텐트를 왜 쳐요. 집으로 들어가자구요. 나중에 집주인에게 사정을 설명하면 되겠죠.”

가만히 생각하던 시드미안이 말했다.

“그도 그렇군. 혹시 잠기지는 않았나?”

문을 슬쩍 밀자 문은 끼긱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쉽게 열렸다.

“자, 안으로 들어가자. 팔시온, 미카엘, 가스톤, 지미, 라빈은 말에서 짐을 꺼내서 집 안에 넣고, 나머지는 집 안에 들어가서 불 좀 피워. 스미온, 안토니 자네들은 나 좀 따라오게.”

기사들의 신조가 ‘숙녀를 위하여’다 보니 여자들은 일단 비를 피할 수 있는 집 안으로 집어넣고, 남자들은 비를 맞으며 각자에게 할당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일을 끝낸 후 집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집의 외부는 낡고 허름한 데 반해 내부는 아주 고풍스럽고도 멋있게 잘 꾸며 놓은 데 놀랐다. 거기에 갖가지 아름다운 금, 은 세공품들이 장식되어 있었고, 매우 아름다운 여자의 그림도 몇 점 걸려 있었다.

“우와, 정말 대단하네. 도대체 그 엘프는 이런 멋진 장식을 시골집에다 해서 뭐 하려는 거지?”

“뭐, 각자 취향이 있는 거니까. 꽤 고급스런 취향을 지닌 엘프인 모양이군.”

“이야, 저 활 좀 봐요. 정말 멋있는데…….”

그러면서 한번 만져 보려고 하자 가스톤이 제지했다.

“될 수 있으면 만지지 말고 감상만 해. 엘프는 대단히 뛰어난 마법사들이야. 누가 알아? 딴사람이 못 만지게 저주라도 걸어 놨는지.”

“저주쯤이야 걸려 봐야…….”

그러다가 지미는 저쪽 구석에서 또다시 수련을 시작한 다크를 보며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저 꼬라지가 되면 절단이지.’

한참 지난 후 비에 흠뻑 젖은 시드미안이 돌아왔다. 뭐 하러 갔었는지 모르지만 장작을 한 아름씩 안고 있었다.

“적당히 말려가며 태우면 되겠지. 그건 그렇고…, 아직도 주인은 안 돌아왔나?”

“예.”

“어디서 비라도 피하는 모양이군, 어쨌든 오늘은 이대로 쉬고…….”

시드미안은 집 안을 두리번거리면서 다음 말을 이었다.

“따뜻한 보금자리를 빌리는 것만 해도 고마운 거니까, 집 안 물건에는 손대지 않도록 주의하게. 화낼지도 모르니까.”

“아무것도 안 만졌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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