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화로운 장식으로 꾸며진 널찍한 저택……. 이 집은 꽤나 높은 마법사 나으리의 여름 별장이었지만 지금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주인이 아닌 객(客)이 쓰고 있었다.
“뭐야? 놓쳤다고?”
“죄송합니다, 백작 각하! 코앞까지 추격해 들어갔을 때 공간 이동해 버렸기에…….”
“그놈들의 본거지에는 사람을 보냈나?”
“예, 매키니 경이 갔지만 그곳도 역시 빈집이었다고 합니다. 놈들은 모두 공간 이동용 마법 반지를 휴대하고 있기 때문에 잡는 게 매우 힘듭니다.”
“바보 같은 놈들! 미네온 마법사 길드에 압력을 넣어 통신 마법의 발신처를 겨우 알아냈는데……. 쓰레기 같은 녀석들! 물러가라.”
“예, 백작 각하.”
백작이라 불린, 당당한 체구에 멋진 콧수염을 달고 있는 40대 초반의 무사는 꽤나 호화로운 복장을 걸치고 있었고, 허리에 찬 호화로운 롱 소드가 아주 잘 어울렸다. 그는 보고를 올린 부하 녀석을 물리치고는 창가에 서서 아름다운 꽃들이 핀 정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지오네에게서 온 연락은?”
그러자 심기가 불편한 상관을 조심스런 눈길로 살피고 있던 인물들 중에서 아마도 마법사인 듯싶은 날씬한 여자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백작 각하.”
“이놈이나 저놈이나 도움이 되는 놈은 하나도 없군. 머저리 같은 것들! 본국에서 타이탄을 스물한 대나 끌고 오면 뭐 하냔 말이다. 상대가 없는데…….”
“백작 각하.”
“뭐냐?”
“키메라를 조사하러 갔던 미테오로부터 연락이 있었습니다. 그런 특이한 형상의 키메라를 제작한 사람은 없다는 보고입니다. 키메라 자체가 각 생물을 조합해서 만드는 마법 생물인 만큼 서로 간의 짜깁기는 가능해도 완전히 새로운 어떤 생명체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좋아. 키메라 쪽은 기대도 안 했다. 미테오를 불러 들여라.”
“예.”
“그리고 마법사 길드에 압력을 가해 공간 이동이나 특히 통신 마법의 발신처를 알아내 두더지들을 사냥해 보기로 하지.”
“알겠습니다, 백작 각하.”
“어서 오게나, 시드미안.”
“네 녀석은?”
시드미안이 도미니크와 함께 여관방으로 들어섰을 때, 방 안에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세 명 더 있었다. 그들은 시드미안이 드래곤을 만나러 가는데 아무런 보탬이 안 되기에 고헨에 남겨 놓고 간 안토니와 스미온을 결박한 채 목에 칼까지 들이대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방 안에다가 널찍한 마법진까지 그려 놓은 걸 보면 꽤나 오래전에 도착해서 준비하며 기다린 모양이었다.
“서툰 짓은 하지 말게. 설마 고헨시 안에서 타이탄 전쟁을 벌일 생각은 아니겠지? 그러면 죄 없는 사람들이 많이 죽게 된다구. 또 동료들의 목숨이 아깝다면 그런 행동은 자제해야 할 거야……. 그리고 팔시온인가 하는 녀석의 패거리들도 우리가 가둬 뒀지. 꽤나 애를 먹이더니 막상 손을 쓰니까 아주 쉽게 잡히더군.”
시드미안은 이미 방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꽤나 대단한 인물들이 몇 명 더 있는 것을 알았지만, 지오네처럼 코린트에서 파견 나온 기사라 생각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 실책이었다. 시드미안은 분노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네놈은 어떤 나라의 기사단에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고작 하는 짓이…….”
그러자 상대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지. 시작햇!”
뒤에 서 있던 마법사가 곧장 시동어를 외쳤다.
“슬립(Sleep)!”
탈출을 위한 첫걸음
“주인님, 과자 드실래요?”
“뭐?”
소녀는 한소리하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가 순수한 표정의 상대를 보고는 과자를 받아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 다음 창문 밖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데, 다시 뒤에서 조심스런 말이 들려왔다.
“날씨가 좋은데 밖에 안 나가세요?”
“그 구두를 신고 말이냐?”
“예, 얼마나 예쁜데요. 요즘 유행하는 최신 모델이라니까요. 저거 한 켤레에 13골드나 하는데도 물건이 없어서 못 판대요.”
“뒤 굽이 그렇게 뾰족한 거는 너나 신어라. 빌어먹을 녀석들……. 신고 달리기 힘들게 생긴 것으로 준 걸 보면 속셈이 빤히 보인다. 그건 그렇고, 내가 부탁한 신발은 구했냐?”
“주인님, 그런 거 구해다 드리면 저는, 저는……. 제발 저를 살려 주세요, 흑흑…….”
가련한 모습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사정하는 세린을 차마 보지 못하고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면서 소녀가 중얼거렸다.
“제기랄, 오냐. 그래 나는 놔두고 하녀만 족치면 된다 그거지? 두고 보자. 신발 없다고 도망 못 칠 나도 아니고…….”
“그런데 피곤하지 않으세요? 어제도 밤새도록 안 주무시고 앉아 계셨잖아요. 그렇게 안 주무시면 몸에 해로워요, 주인님.”
그 말을 듣고 소녀는 세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따스한 눈길을 보냈다.
“걱정하지 마라. 내 몸은 내가 더 잘 아니까. 운공조식 때 아쿠아 룰러가 나에게 대자연의 기를 나눠 주고 있어. 많지는 않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감히 끌어 모을 엄두도 나지 않는 양을……. 나는 그걸로 천천히 내공을 쌓고 있어. 그 덕분에 시간은 더욱 단축될 거야. 어쩌면 1년, 운이 좋다면 6개월 이내에 가능할지도 몰라. 그때가 되면, 그때가 되면…….”
일부러 다크는 뒤의 말을 중국어로 떠들었다. 상대가 알아서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다가 마지막 말을 하면서 방그레 미소 짓는, 언제나 무표정했던 주인을 바라보면서 세린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꼭 말이 통해야만 한다는 법도 없었으니까…….
“그러지 마시고 밖에 나가서 산책이나 좀 하세요. 제가 준비해 드릴게요. 안에만 계시면 몸에 해로워요, 주인님.”
“좋아, 밖에 나가자. 알아볼 것도 있고…….”
“예, 주인님.”
세린은 뛰어나가 몇 가지 준비를 해 가지고 다시 돌아와서 소녀가 신발 신는 것을 도왔다.
세린에게 이 소녀가 다섯 번째의 주인이었지만, 그 성격이 들쑥날쑥해서 어떤 때는 여태껏 모셨던 주인들 중에서 최고로 힘든 대상인 것도 같았고, 어떤 때는 최고로 다루기 쉬운 주인이 될 때도 있었다. 이제 이 새로운 주인과 지낸 지 일주일이 넘어가면서 이 까다로운 주인을 다루는 법을 조금씩 터득해 가고 있었다. 원래 묘인족은 눈치 하나는 대단히 빠른 종족이었으니까.
‘어쨌든 가련한 표정과 눈물에 이상하게 약하단 말씀이야. 딴 주인들은 안 그랬는데…….’
소녀가 뒤 굽이 5센티미터는 족히 되는 예쁜 구두를 신고 약간은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세린과 함께 방을 나서자 언제나 방 앞에 지키고 있던 무사가 20미터 정도 뒤에서 천천히 따라왔다.
“저쪽으로 올라가자.”
“예? 그쪽은 경사가 심해서 힘드실 텐데요, 주인님.”
“상관없어.”
둘은 약간 높은 언덕 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곧 언덕 위에 만들어진 큰 인공 구조물을 볼 수 있었다. 탑 같기도 했지만, 탑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단조로운 모양이었다. 그냥 밑에 넓은 발판을 만들고, 그 위에 8미터 정도 되는 바위를 사각지게 잘라 만든 비석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쪽에 글자들이 쓰여 있는 걸 보면…….
“이건 뭐지?”
“예, 현충탑(顯忠塔)이에요. 30년쯤 전에 일어났던 대 전쟁에서 패한 후, 그때 희생되었던 사람들을 기리는 탑이지요.”
“웃기는군. 이따위 것을 만든다고 그 사람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또 전쟁에서 패한 후라면 먹고 살기도 힘들었을 텐데……. 이런 걸 만들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한 바퀴 빙 돌면서 탑을 보니 탑 아래쪽에는 돌로 만든 무사와 백성들의 형상이 있었고, 그 중앙에는 커다란 타이탄의 형상도 있었다. 빙 돌아가며 구경을 하고 나서 위로 더 올라가려는데, 더 이상 길이 없었다. 풀밭 위로 걸어가자니 부드러운 흙 때문에 구두 뒤 굽이 푹푹 빠져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제기랄…….”
투덜거리며 아예 구두를 벗어 들고 언덕 위로 올라가는 소녀에게 한마디 하려던 세린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따라 올라갔다.
“그렇게 높지는 않군.”
그래도 언덕 위에서 바라보니 다크의 의도대로 주변의 경치를 명확히 볼 수 있었다. 군데군데 솟아 있는 아름다운 건물들, 여기저기 모여 있는 군사들도 보였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주인님.”
세린은 준비해 온 널찍한 천을 나무 그늘이 드리워지는 바닥에 깔았다.
“여기 앉으세요, 주인님.”
소녀가 그 위에 앉자 세린이 밝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참 경치가 좋죠? 날씨도 좋고…….”
“저기 보이는 건 뭐지?”
“예, 저건 경계 초소예요, 주인님.”
“이 성에는 수비하는 병사들이 많냐?”
“예, 아무래도 왕궁이니까 수비병들이 많죠. 주인님, 저쪽에 보이는 아름다운 건물이 콜렌 기사단 본부에요. 또 저기 보이는 푸른색의 자그마한 건물이 스바스 근위 기사단 건물이구요. 저기 보이는 건 경비병들 막사지요. 건물은 좀 아름답지 못하지만, 여기는 과거 황제 폐하의 여름 별장이었는데, 왕궁으로 바뀐 탓에 건물을 갑자기 만들려니 어쩔 수 없잖아요?”
소녀는 흥미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세린의 설명을 듣고 있었지만, 그건 저쪽에서 감시하고 있는 기사 녀석을 속이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 머릿속은 엄청난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4, 5개월 정도 죽자고 공력을 쌓으면, 이 녀석들이 말하는 그래듀에이트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탈출해야 하나? 아니면 좀 더 기다렸다가 힘의 10퍼센트라도 되찾은 후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크는 자신의 손발을 내려다 봤다. 도대체 라나라는 년이 어떻게 자라 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지독하게, 정말이지 이럴 수도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단련이라고는 안 된 육체……. 여기서 환골탈태를 한다 해도 예전의 힘을 그대로 되찾는 건 불가능했다.
내공이란 것도 중요하지만 내공은 어디까지나 뒤에서 받쳐 주는 힘! 진짜 힘은 근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환골탈태한다고 이렇게 가는 팔다리에 근육이 덕지덕지 붙는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다크는 아마 잘되어야 과거 힘의 30퍼센트 정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래 까짓거 3성이면 어때? 그 정도라도 장인걸 정도는 반쯤 죽여 놓을 수 있어. 천천히 하자. 조급하게 굴지 말고…….’
토지에르는 제자가 환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
“어떻게 되었느냐?”
“예, 방금 크로마스 경이 시드미안과 또 한 명의 기사를 포획하고 돌아오셨습니다.”
“흐흐흐, 하늘이 우리를 돕는구나. 고헨에 한 번 갔었다고 해서 혹시나 하고 고헨으로 파견해 봤더니 대어를 낚았어.”
토지에르는 팔시온 일행과 상담한 후 그들이 고헨 근방에 산다는 블루 드래곤을 만났다는 걸 알았다. 이들이 키아드리아스를 엘프 카렐로 착각했으니만큼, 그들의 말을 건방진 코린트 놈들이 믿지 않고 또다시 그리로 간 게 아닐까 추측했던 것이다. 사실 나타나자마자 공간 이동 마법으로 사라졌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래, 코린트 녀석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예, 크로마스 경의 말로는 코린트 놈들이 오기 전에 그들을 재빨리 포획한 후 고헨을 탈출하셨다고 합니다. 지금쯤 시드미안을 찾는다고 고헨을 뒤지고 있겠지요.”
“그래? 시드미안을 잡아 온 경로는 철저히 은폐했느냐?”
“예, 거기 거주하던 모든 첩자들은 그 즉시 거점을 옮겼습니다. 또 알카사스에서 활동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기에 알카사스 내에 투입했던 첩자 20명도 모두 본국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대신 한 명은 코린트 녀석들을 감시하기 위해 놔뒀습니다. 연락은 전서구로 코발트에 잠입한 첩자에게 보내고, 또 거기서 마법으로 이쪽에 연락하라고 지시해 뒀습니다.”
“잘했다. 딴 건 다 좋은데, 알카사스는 마법사들이 활동하기에 너무 위험하단 말이야……. 3사이클급 이상의 마법만 되어도 위치를 정확히 잡아내니……. 도대체 무슨 짓을 해놨기에 그렇게 잘 알아내는지 이해를 할 수 없어. 그건 그렇고, 시드미안에 대한 심문은?”
“프로이엔 경께서 직접 하시기로 했습니다. 정신계 계통의 마법을 쓴다면 곧 실토하겠지요.”
토지에르는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좋아, 좋아…….”
“그런데, 스승님.”
“왜 그러느냐?”
“알카사스에서 첩자들을 모두 후퇴시키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만약 그놈들이 단서를 찾아낸다면…….”
“그럴 가능성은 없다. 팔시온 녀석들에게 물어본 결과 그들이 알아낸 사실은 거의 전무(全無)해. 겨우 그 정도 단서를 가지고 이쪽을 찾아낼 수는 없다는 말이지. 괜히 얼쩡거리다가는 오히려 꼬리를 밟힐 수 있으니까 고헨에 남은 녀석도 탈출시켜라. 대신, 공간 이동이 아닌 정식 통로로.”
“예, 스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