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폼을 잡으면서 그림을 감상하던―자신이 순수 무골이 아니라 예술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걸 부하들에게 자랑하기 위해―백작을 부르는 외침이 있었다.
“백작 각하!”
마법사 한 명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백작은 별로 곱지 못한 눈으로 그를 째려보며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그는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이런 식으로 허둥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바, 발렌시아드 공작 전하로부터의 통신입니다. 각하를 찾으십니다.”
“공작 전하께서?”
그 말을 내뱉으며 백작은 통신 마법진을 그려 놓은 방을 향해 재빨리 뛰어갔다. 키에리 발렌시아드 공작은 그가 단 1초라도 기다리게 만들 수 없는 지고(至高)한 위치의 인물이었다.
방금 전까지 허둥대던 부하를 험한 눈초리로 쳐다봤던 그도 역시 허겁지겁 달려가 수정 구슬 앞에 서자, 수정 구슬에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이가 느긋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 비춰졌다. 그 화면을 향해 백작은 최대한 당황한 표정을 숨기며 정중히 절을 했다.
“안녕하셨사옵니까? 공작 전하.”
“그래, 일은 어찌 되어 가나?”
냉랭한 공작의 말에 백작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어쩌면 자신의 무능을 책(責)하기 위해 통신을 했는지도……?
“예, 단서가 너무 적어서 추적 작업에 어려움이 많사옵니다. 또 블루 드래곤에게 몇 가지를 알아보겠다고 간 지오네로부터도 연락이 없사옵니다. 하지만 사실상 드래곤이 드래곤 하트를 훔쳐갔을 리는 없으니…….”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백작의 변명을 도중에 끊으며 수정 구슬 속의 인물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좋아, 힘들다 이거군. 이번 작전은 당분간 중지한다.”
“예? 그럼 그 도둑들은…….”
“사실 나도 그 보고서들을 읽어 봤지만 그 정도 증거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 시드미안의 보고로는 놈들이 로메로급 타이탄을 사용했다고 한다. 로메로를 가지고 있는 나라만 거의 50개국이다. 그런데 그 나라들을 모두 다 철저히 뒤지지 않고 어떻게 찾을 수 있겠나? 기다려 보면 놈들의 마각이 드러나겠지. 그냥 창고에 넣어 두려고 훔쳐간 것은 아닐 테니까, 그때를 기다리자는 거야. 그리고 로메로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들에 첩자들을 파견해서 감시하고 말이야. 하지만 이 상태로 계속 시간만 끈다면 황제 폐하의 권위가 실추된다. 그러니 자네는 트루비아를 멸망시키도록 하게.”
공작의 냉랭한 말에 백작은 조금은 정신이 없는 듯 반문했다.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
“대 코린트 제국의 드래곤 하트를 훔쳐갔는데도 아직까지 범인을 잡지 못했다면, 본국의 명성이 실추되고, 또 황제 폐하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것이지. 우선은 트루비아를 그 범인으로 만들어 죄를 묻는다. 그런 후 차근차근 놈들을 추적해 나가 멸망시킨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예, 하지만 트루비아도 피해 당사국인데, 그들을 공격할 만한 명분이…….”
수정 구슬 안의 젊은이는 싸늘한 눈초리로 백작을 노려봤다.
“멍청한 녀석! 왜 명분이 없어? 이번에 드래곤 하트를 훔친 것은 트루비아의 국왕이 사악한 마왕의 꼬임에 넘어가 마신을 부활시키려고 한 짓이다. 어쨌든 본국에서는 그렇게 발표할 것이다.
본국의 발표가 있은 후 자네는 자네가 가진 전력과 동맹국에서 차출한 약 50대의 타이탄, 그리고 코린트 남부에 주둔 중인 제12, 13보병 사단을 거느리고 본보기로 트루비아를 철저히 파괴해라. 코린트의 뜻을 거스르면 어떻게 되는지 그놈들에게 보여 주란 말이다. 알겠나?”
“명심하겠사옵니다, 공작 전하.”
“동맹국의 타이탄들은 앞으로 한 달 후에 소환될 것이다. 그때까지 자네는 지렌시에서 그들과 합류, 트루비아를 정복하라. 그대에게 전권을 위임하겠다.”
“감사하옵니다, 공작 전하.”
타국의 정복대 사령관이 되는 것. 그것도 승리가 확실한 싸움이라면 그건 대단한 특혜였다. 정복한 국가로부터는 엄청난 노획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물론 그것의 상당량을 황제 폐하께 바쳐야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에게 떨어지는 게 전혀 없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막대한 수의 노예도 잡아들일 수 있었다. 또 이번 정복을 잘 마무리 지으면 자신의 위치는 더욱 올라가게 될 것이다. 그런 기회를 자신에게 베풀어 준 것을 생각하며, 백작은 수정 구슬에 비춰지고 있는 젊은이를 향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충성을 다하겠다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 빛이라고는 천장에 있는 작은 환기창을 통해 조금밖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기에 실내는 몹시 어두웠다. 꾀죄죄한 몰골의 시드미안이 역시 그와 다를 바 없는 도미니크를 향해 물었다. 도미니크는 수갑을 이용해서 벽에 표시를 하던 중이었다.
“오늘로서 며칠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여기 들어온 지는 7일째입니다.”
“7일이라……. 벌써 그렇게 되었나?”
“예, 그놈들은 왜 우리를 그냥 가둬만 둘까요?”
“그냥 가둬 둔 건 아니겠지. 아마도 정신계 마법을 써서 알아낼 건 다 알아냈을 거야.”
“예?”
“쿠마가 사라졌다. 아마 자네의 티론도 마찬가지겠지. 내가 그 녀석과 계약을 해약한 기억은 없으니, 아마도 뭔가에 홀렸을 때 상대의 지시에 따라 쿠마를 놔 줬으리라는 건 뻔한 사실이지. 제길, 국왕 전하께서 하사해 주신 타이탄을 이렇게 무력하게 뺏기다니……. 나는 기사로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야.”
“그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놈들은 인질로 협박했고, 상대는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 만만한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또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 중일 때 그놈들은 비겁하게 마법으로…….”
“도미니크.”
“예?”
“변명을 하자면 한이 없는 거라네. 결과만이 중요한 거야. 나는 전하께서 나에게 주신 타이탄을 보호하지 못했고, 또 내가 맡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그 중간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내가 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게 중요할 뿐이지.”
“그런데 왜 녀석들은 우리를 여기다가 가뒀을까요? 더 이상 우리에게서 알아낼 것도, 빼앗을 것도 없을 텐데…….”
“모르지, 아마 회유하려는 생각인지도……. 자네나 나는 그래듀에이트고, 또 안토니는 마법사니까 말이야.”
시드미안 일행이 감옥에 처박혀 있을 때, 다크는 또다시 세린과 함께 현충탑이 있던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한 번만 간다면 뭔가 수상하게 여길 수도 있었기에 날씨 좋은 날에는 세린과 함께 놀러가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몇 번 올라간 후에 세린은 아예 음식까지 싸들고 따라와서 점심까지 언덕 위에서 먹는 일이 잦아졌다.
거기에다가 다크는 일부러 매일 따라 다니는 호위 무사에게 함께 식사를 하자고 권하면서 조금씩 친분을 쌓아 가는 중이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서서히 지나면 이자의 조심성도 천천히 풀려 갈 거라는 걸 노린 작전이었다.
“사과 드실래요, 주인님?”
“응, 그리고 포도주도 줘. 실바르 경도 포도주 한잔하실래요?”
그 말에 앞에 앉아서 함께 샌드위치를 먹고 있던 기사가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살포시 미소를 지으면서 공손한 어조로 실바르를 대하는 주인을 보면서, 세린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이제 이 주인과 함께 산 지도 2주일……. 성질이 뭐 같은 데다가 입은 거의 시궁창 수준을 방불케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기사를 향해 생글거리며 공손히 말하다니……. 으욱, 저런 내숭.
“실바르 경은 참 건장하시군요.”
부럽다는 듯한 예쁜 소녀의 눈길을 받자 실바르의 안색이 약간 붉어졌다. ‘육체가 바뀔 바에야 저런 몸매가 좋았을 텐데……’라는 뜻이었지만 정작 여자에게 그런 눈길을 받는 남자의 입장에서는 생각이 다르다. ‘혹시 이 아가씨가 나한테 마음이 있나? 저런 뜨거운 눈길로 보게, 흐흐흐’하는 게 정상이 아닐까?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하하하.”
궁정 제1마법사인 토지에르로부터 철저히 신변 보호와 탈출 방지를 명령받은 실바르로서는 ‘겨우 저따위 소녀쯤이야…’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상관의 명령이 있었기에 철저한 감시와 보호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는 소녀의 행동을 보고 ‘겨우 저 따위 소녀쯤이야…’하던 생각을 재확인할 수밖에 없었고, 점차 감시의 눈길까지 무뎌지고 있었다.
이들이 한참 식사를 즐기고 있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와이번이 아래로 급강하(急降下)하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실바르는 재빨리 일어서서 검을 뽑아 들며 대비했다. 하지만 그 와이번은 야생이 아니었고, 위에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무사가 타고 있었다. 정찰대 소속이거나 콜렌 기사단 소속인지도……. 하지만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기에 실바르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상대의 행동을 주시했다.
와이번은 그들의 머리 위 10미터 정도 높이를 통과하며 밑으로 내려갔고, 실바르는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그 뒤를 따라 쫓아갔다. 순간적으로 몸을 날리자 거의 한순간에 그의 몸이 사라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실바르가 밑으로 쫓아 내려갔을 때 와이번은 현충탑 부근에 내려서 있었고, 그 위에 타고 있던 기사는 우울한 표정으로 현충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누구냐?”
실바르가 경계하며 묻자, 기사는 천천히 뒤로 몸을 돌렸다.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용모에 다부진 체구, 허리에 늘어뜨린 바스타드 소드. 실바르는 상대의 날카로운 눈매를 쏘아보며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러는 자네는 누군가?”
“나는 콜렌 기사단 소속, 드미트리 실바르다. 그대는?”
그 말에 상대는 역시 우울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스바스의 루빈스키 폰 크로아라고 한다네, 젊은이.”
그 말에 실바르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그의 머릿속은 지금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루빈스키 공작은 지금 60세가 넘은 인물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63세. 그런데 이렇게 젊은 인물이 그를 자처하고 있다면 미친놈이든지, 하지만 진짜일지도…….
“신분을 증명하실 물건을 가지고 계신지요.”
그러자 상대는 자신의 호화로운 검을 쑥 뽑아 들었다.
“이 녀석의 이름은 크로마타. 황제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검이다. 더 이상의 증거가 필요할까?”
그것을 보고 실바르는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몰라 뵈어 송구스럽사옵니다, 전하.”
“자네가 몰라보는 것도 당연하지. 28년 만에 돌아왔으니……. 응? 저기 있는 인물들은 자네의 동행인가?”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싸늘한 눈빛을 던지며 서 있는 소녀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묘인족 한 명이 있었다.
“예, 전하.”
“나는 폐하를 만나 뵈러 갈 테니 자네는 자네 볼일을 보게나. 재미난 시간을 방해했다고 그렇게 눈을 부라릴 필요 없다고 여자 친구에게 전해 주게. 자네 여자 친구는 대단한 미인이기는 하지만 꽤나 성깔이 있어 보이는군. 그럼, 다음에 보세.”
그 말과 함께 그는 와이번의 등에 올라탔고, 와이번은 급속히 날아오르더니 황궁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탈출
제국 최고의 기사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이 돌아오면서 크라레스 제국의 지도부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제 모든 준비가 완료된 상태니 서서히 정복 사업을 벌여야 할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크라레스 제국의 최고 지도부는 크로아 공작의 도착과 더불어 작전 회의를 열었다.
정장을 입은 장교 한 명이 찰흙으로 정교하게 만든 지형들 위에 꽂힌 깃발들을 지휘봉으로 가리키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에는 지금 황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크로아 공작을 비롯하여 크라레스 제국 최고위급 장성들은 모두 모여 있었기에 장교는 꽤나 긴장하고 있었다.
“본국의 영토는 지금 말토리오 산맥 깊숙이까지 파고 들어가 있는 상태입니다. 사실상 풍요로운 크로나사 평야를 상실한 후 본국의 대부분의 영토가 말토리오 산맥 속에 있다고 봐야겠지요. 그렇기에 과거에는 말토리오 산맥에 가로막혀 있던 스바시에 왕국이 지금에는 바로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형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먼저 풍요로운 상업 국가 스바시에 왕국을 병합하고, 그다음 옆에 있는 치레아 왕국을 병합하여 국력을 키우는 게 최선의 과제라고 생각됩니다.”
“흐음, 스바시에 왕국의 군사력은?”
“예, 총 57대의 타이탄과 127명의 그래듀에이트가 주축인 3개 기사단, 그리고 7개 보병 사단, 2개 기병 여단이 있습니다. 그들은 거의 병력의 50퍼센트를 국경선에 투입 중이며, 그로발 근위 기사단과 네시 기사단은 수도 근처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4개 보병 사단과 티노 기사단을 최전선에 배치하여 국경선을 지키고 있습니다. 거리상으로 봤을 때 전방에서 전쟁이 벌어진 후 3일 내로 1개 기병 여단이, 나머지 1개 기병 여단도 6일 내로는 가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나머지 보병 사단들 중 1개는 치레아 왕국과의 국경선에, 2개는 수도 부근에 포진 중입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제2차전은 2개 보병 사단과 근위 기사단, 네시 기사단과의 전투가 될 것입니다.”
“좋아, 상대방이 어느 정도 시간 안에 후방의 타이탄들을 투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나?”
“예, 스바시에 왕국은 전통적으로 마법보다는 기사가 더 강한 나라이기에 마법사의 수는 많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정보로는 일곱 명을 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입니다. 그렇기에 전쟁이 터짐과 동시에 이쪽으로 워프한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전체 전력을 보내기는 힘들 겁니다. 초반에 이쪽에서 기선을 제압해 버린다면 가망 없는 전투에 타이탄을 소모하기보다는 두 번째 전투를 위해 타이탄을 아낄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장교의 설명을 쭉 듣고 있던 크로아 공작은 시선을 옆에 있던 노장군에게로 돌렸다. 바로 이 노장군이 바로 작전 담당관, 줄여서 작전관이었다. 이 시대의 모든 전투는 타이탄으로 결말을 짓게 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렇기에 총사령관인 기사는 대부분의 경우 오너(the OWNER of the Titan : 타이탄의 주인)였기에, 자신의 타이탄을 타고 전장에 나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령관이 없는 상황에서 남은 부대들을 지휘할 인물이 따로 한 명 더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사령관을 대신하여 모든 휘하 부대들을 이끌 권한이 주어지기에, 가장 노련한 지휘관이 작전관으로 임명된다.
“작전관, 이번 작전에 본국에서 투입할 수 있는 최대 전력은 얼마나 되나?”
크로아 공작의 질문에 작전관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현재 타국에 알려지기로는 본국의 보유 타이탄은 28대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될 수만 있다면 그 정도 병력만을 사용해야 합니다. 또 유령 기사단과 청기사들은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코린트의 침공에 대비해 남겨 둬야만 합니다.”
“음, 타이탄의 성능으로만 생각하면 이쪽이 위야. 10대의 카프록시아를 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아무리 질이 좀 떨어지는 타이탄이라도 57대나 가지고 있다는 게 좀 마음에 걸리는군. 또 그들과의 전쟁에 최고 실력의 기사들을 투입할 수도 없을 테고…….”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번 정복에서 우리의 전력이 노출되어서는 안 되지요. 그러면서 코린트가 보기에 이번 정복이 꽤나 타당성 있게 보여야만 하옵니다. 그렇지 않다면 코린트는 우리를 의심할 테고, 최악의 경우…….”
“좋아. 그렇다면 마법사들 외에는 답이 안 나오는데, 몇 명이나 동원 가능한가?”
“예, 마법사 클래스만 스물다섯 명이옵니다.”
“스물다섯 명이라……. 빠듯한 숫자로군.”
공작의 푸념에 토지에르가 참견을 했다.
“전하, 남은 스물일곱 명의 기사들을 이용해서 다른 작전을 쓸 수도 있사옵니다.”
“어떻게?”
“청기사에 탑승시킬 기사들을 모두 카프록시아로 돌리는 것이옵니다. 사실 청기사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어서 론가르트 단장 이외의 인물에게는 지급하지 않았사옵니다. 그러니…….”
믿고 있는 비밀 무기에 문제가 있다고 하자 크로아 공작은 긴장 어린 표정으로 곧장 질문했다.
“무슨 문제인가?”
“예, 주인을 인정하지 않는 못된 버릇이 있사옵니다. 웬만한 실력자가 아닌 한은 비교 평가되어 또다시 그 주인으로 인정받기 힘들지요. 그러니까 론가르트 단장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근위 기사들을 모두 이번 전쟁에 투입할 수 있사옵니다. 또 론가르트 단장이 타던 카프록시아는 전하께서 사용하셔도 되구요. 혹시나 코린트가 이번 전쟁에 개입한다면 모두들 계약을 해제하여 타이탄을 다른 기사에게 넘기고 본국으로 돌아와 청기사와 계약을 맺으면 되옵니다. 하지만 코린트가 우리를 얕보고 보낼 1차 원정대는 막을 수 있겠지만 아무리 청기사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더 이상은 막기 힘들 것이옵니다. 그러니 이번 작전에서 우리의 힘을 최대한 숨겨야만 하옵니다. 코린트는 우리가 약간이라도 위험해 보인다면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국가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개입해 올 것이옵니다.”
“좋아, 근위 기사들을 이번 전쟁에 투입할 수 있다면 28대가 아니라 20대 정도만 투입해도 충분해. 안티노스, 자네는 우선 코린트의 고관들에게 뇌물을 전달하고 이번 전쟁을 묵인해 줄 것을 요청하게. 또 코린트 황제에게도 적절한 뇌물이 필요하겠지.”
“예, 전하.”
“우리는 이번 전쟁에 국력을 완전히 다 쥐어짜서 전쟁을 벌이는 것처럼 보여야만 한다. 이번 전쟁만 승리하면 우리에게 50여 대의 타이탄이 새로 생긴다 하더라도 코린트에는 거의 영향이 없지. 코린트가 우리를 얕보게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고 작전을 진행시켜라. 코린트와의 국경 수비대를 제외하고 전 병력을 동원한다. 그 병력 배치는 그대들에게 맡긴다. 대신 이번 전쟁을 최대한 타이탄끼리의 전쟁으로 끌고 가야 해. 25명의 마법사와 콜렌 기사단을 적절히 배치해 최대한 보병들을 보호하라.”
“예, 전하!”
그들은 한동안 작전 회의를 한답시고 떠들어 대다가 자신이 맡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돌아갔고, 회의실에는 공작과 토지에르만이 남았다.
“그 말이 정말이었군요, 전하.”
“뭐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면 몸이 재구성되며, 젊어진다고 그러던데…….”
그 말에 공작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디서 들었나? 나도 경험해 보기 전에는 몰랐던 사실인데…….”
그 말에 토지에르는 약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 좀 특이한 인물이 하나 있는데, 그에게서 들었사옵니다.”
“그래? 어쨌든 별로 좋은 건 아니야. 내가 이렇게 젊어졌다는 말은 곧 키에리 발렌시아드란 그 악마도 젊어졌다는 말이 되니까.”
말을 하면서 공작은 천천히 창문 쪽으로 걸어가 왕궁의 정원을 바라봤다. 이때 공작의 시야에 낯익은 인물들이 들어왔다. 귀여운 소녀 두 명과 기사 한 명. 그중 한 명이 묘인족인 걸로 봤을 때 또 다른 소녀는 노예까지 거느릴 정도로 지체 높은 인물의 딸일 것이다.
“우리나라도 아직 절망적인 상황은 아닌 모양이군. 그렇게 공녀들을 많이 헌납했는데도 아직도 저렇게 예쁜 애가 남아 있는 걸 보면 말이야. 그런데 저 아이는 누구의 딸인가?”
“예?”
토지에르는 공작이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기 위해서 창문으로 다가갔고 곧이어 진상을 파악하게 됐다.
“저 아이는 포로이옵니다, 전하.”
“포로라고? 그런데 무슨 포로가 노예에다가 호위병까지……. 전에 만나 보니까 호위 기사가 그래듀에이트로 보이던데, 본국에 그래듀에이트가 그렇게 남아돌았나?”
“아니옵니다. 매우 중요한 포로이옵니다, 공작 전하. 그녀는 아쿠아 룰러의 주인이옵니다.”
그 말에 공작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쿠아 룰러? 그 나이아드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예.”
“믿을 수 없군. 겨우 저런 힘없는 소녀가 지닐 물건이 아닌데. 또 아쿠아 룰러가 겨우 저런 소녀를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할 리도 없고 말이야.”
토지에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아이도 마스터였사옵니다.”
공작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스터가 그렇게 흔한 게 아닌데, 어찌 저런 소녀가 마스터가 될 수가 있었다는 말인가?
“정말인가?”
“예, 공작 전하.”
그러면서 토지에르는 공작에게 다크와 있었던 그전의 일들을 설명했다. 만약 이런 말을 토지에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했다면, 공작은 거짓말하지 말라고 화를 냈을 것이다. 그만큼 토지에르가 한 말은 믿기 힘들었다.
“아쿠아 룰러의 주인에게 저주를 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 텐데…….”
“예, 아쿠아 룰러를 가지기 전의 일이었지요. 아쿠아 룰러는 저 그레이시온 산맥의 주인 키아드리아스에게 선물 받은 것이옵니다.”
공작은 새삼 다시 한 번 그 소녀를 유심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놀라운 인물이군.”
“예, 시간을 두고 설득해서 우리 편으로 만들려고 하옵니다. 그때까지는 호위를 붙여 놔야 하지요. 현재의 육체가 어떻든 과거에 엄청난 경지까지 올라갔던 인물이옵니다. 그래서 감시자로 그래듀에이트를 붙일 수밖에 없었사옵니다.”
“좀 더 열심히 회유해 보게나. 아쿠아 룰러의 주인이 우리 편이 된다면 매우 든든할 테니까.”
“예,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