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화 (135/930)

세린은 요즘 들어 인간 여자의 무서움에 대해 새로이 깨닫고 있었다. 많이 자 봐야 하루 한두 시간의 수면, 뒤로는 욕을 하면서도 직접 만났을 때는 미소 띤 귀여운 얼굴로 드미트리 실바르를 대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이 궁리 저 궁리 하며 탈출 방법을 생각하는 걸 보면, 과연 인간의 여자는 묘인족과 달리 매우 무서운 존재들인 모양이었다.

한 2주일 돌아다니고 나자 요즘은 그 높은 구두를 신고도 제법 맵시 있는 걸음걸이를 유지하고 있는 주인을 보면서 세린은 존경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어머! 예뻐라……. 저거 정말 예쁘지 않니, 세린?”

그날은 다크가 외곽 정찰을 나온 날이었다. 이왕 내친김에 시내까지 들어가서 상점들을 둘러보다가 마침 여성복 가게 앞에 걸려 있는 무릎 정도 오는 짧은 치마에 예쁜 블라우스를 보고는 일부러 과장되게 예쁘다고 감탄사를 터뜨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네요, 주인님.”

“저거 정말 예쁘다. 입어 보면 좋을 텐데…….”

이런 식으로 그 앞에서 30분 정도 주절거리고 있으니, 아무리 눈치 없는 실바르라도 상대가 의도하는 걸 외면할 수 없었다. 사 달라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저, 저런 옷은 평민들이나 입지 다크 양처럼 고귀한 분이 입기에는…….”

다크는 꽉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앙증맞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호호호, 아니에요. 저는 그렇게 고귀한 사람도 아니구요. 정말 예쁘네요.”

돈은 몽땅 빼앗겼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거추장스런 옷을 입고 도망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도망치기 전에 치마 아랫부분을 잘라 낼까하는 궁리까지 하는 판에 저렇게 도망치기 좋은 간편한 복장이 있는데 그냥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저 멍청한 녀석은 이 정도까지 눈치를 주고 있는데, 아직 사 줄 생각을 안 하고 있으니 다크는 될 수 있으면 옷에 욕심이 생긴 평범한 여자 애처럼 행동하는 중이었다.

“정말 저 옷을 입고 싶으십니까?”

“예.”

그 말에 실바르는 아무 생각 없이 두 여자를 이끌고 상점 안으로 들어가 옷뿐만 아니라 뒤 굽이 낮은 구두까지 사 주고 말았다.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이 나중에 무슨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도 해 보지 않고 말이다.

어쨌든 실바르는 옷과 구두를 다크에게 선물했고, 다크는 일주일 정도 뒤에 그것을 입을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실바르는 기껏 사 줬는데도 그 옷이나 구두를 입지 않는 걸 보고 조금 섭섭했겠지만, 그걸 입고 돌아다니다가 실바르보다 좀 더 머리 회전이 빠른 놈이 본다면 뺏길 게 뻔하기에 다크는 애지중지 그 옷과 구두를 구석에 숨겨 뒀던 것이다.

“오늘은 좀 이상하네…….”

“예, 왜 그러세요, 주인님?”

“평상시보다 무사들이 별로 보이지 않아.”

“예? 저렇게 많은데요?”

세린의 말은 사실이었다. 평상시보다 더 많은 수비병들이 쫙 깔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크의 말은 그게 아니었다. 수비병들의 숫자는 늘어났지만 뛰어난 실력의 기사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평상시보다 수비병들의 질은 떨어지고 양은 늘어났다고 봐야 할까?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궁금하시면 제가 알아보고 올게요.”

“그래라.”

세린은 밖으로 뛰어나가더니 한 시간쯤 후에 돌아왔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구요. 콜렌 기사단하고 근위 기사단 건물이 텅 비었다고 하던데요? 여기저기 하녀들하고 하인들한테 물어봤으니까 아마 정확할 거예요. 어디 훈련 나갔는지도 모르죠.”

“그래?”

별 표정 없이 대답했지만 다크는 이제 기회가 왔다고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날 저녁에도 세린은 야행성 동물 특유의 몸짓으로 조용히 주인의 방문을 살짝 열고 들어갔다. 자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침대 위에 이상한 자세로 앉아 있을 테지만……. 만약 자고 있다면 이불을 정돈해 줘야 하고, 또 토지에르에게 지시받은 대로 주인에 대한 감시도 해야 했다. 자질구레한 걸 보고할 필요는 없었지만, 만약 도망친다면 그걸 막든지 아니면 그 사실을 빨리 보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 그러면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을 테니까…….

그녀가 살짝 들어갔을 때 주인은 침대 위에 없었다. 순간 세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순간적으로 내일 당해야 할 몽둥이찜질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주인님!”

그녀는 주인이 혹시나 화장실에라도 갔나 싶어 그쪽으로 발길을 옮기려고 했을 때, 몸이 뜨끔 하더니 곧장 정신을 잃어버렸다.

세린의 혈도를 찍어서 잠들게 만든 후 다크는 곧장 옷을 갈아입었다. 세린은 인간이 아니었기에 혈도가 인간과는 약간 달랐지만, 그 차이를 파악할 만한 시간은 충분했다. 그사이에 다크는 일부러 세린을 안기도 하고 손을 잡기도 하면서, 그녀의 몸속으로 내공을 흘려 넣어 이미 혈도를 파악해 놓은 상태였기에 일은 손쉽게 진행된 것이다.

“여기 온 지도 거의 한 달이 되어 가는데, 아직도 나에게 힘이 없는 줄 착각하다니, 호호호.”

자신의 방은 4층이었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곧장 경신술을 사용하여 왼쪽 아래층에 있는 발코니로, 그다음은 오른쪽 2층에 있는 발코니로, 그다음은 잔디 위로 매끄럽게 떨어져 내렸다. 그다음부터는 될 수 있으면 보초들의 눈을 피해서 이동해야 했기에 다크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워지고 또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으음, 저쪽이군.”

다크는 여태껏 꼼꼼히 그려 놨던 지도를 펼쳐서 별들을 보고 방향을 잡아 도망쳤다. 우선은 시내로 들어가기보다 산속으로 도망치는 게 최고. 하지만 시내 쪽으로 도망친 것 같은 흔적을 만들어 둬야 했기에 그쪽으로 가는 중이었다.

샥!

앞으로 나가려다가 저쪽에서 보초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다크는 재빨리 건물 뒤로 몸을 숨겼다. 보초를 해치울 수는 없었다. 보초는 거의 두 시간 단위로 교대를 했고, 이 보초를 해치우면 두 시간 이내에 자신의 탈출 사실이 발각되기 때문이었다. 뒤쪽에서도 보초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다크는 재빨리 옆에 있는 나무로 몸을 날렸고, 그 나뭇가지를 밟고 위로 올라가 옆 건물의 발코니 같은 곳으로 몸을 날렸다.

밑에서 네 명의 보초들이 만나 잠시 쑤군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마침 창문이 조금 열려 있는 게 보였다. 다크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은 지독하게 어두웠다. 바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 다시 뒤로 돌아서 나가려고 할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누구인가?>

“응? 들켰나?”

어둠 속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크는 바짝 긴장했다. 이왕 이렇게 되었다면 상대를 해치우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쪽에서 희미한 마나의 기척이 느껴지는데…….>

‘느낌상 거리는 3미터 저쪽……. 제길, 어두워서 하나도 안 보이네. 달려 들어가면서 그대로 목뼈를 부숴 버려야 해.’

<그대는 누구인가?>

깡!

“아얏!”

재빨리 도약해서 상대를 가격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손은 강철을 때린 것처럼 얼얼했고 발밑은 허전했다.

“끼약!”

퍽!

그래도 비명 소리를 크게 안 질러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밑바닥으로 떨어진 충격에 한동안 정신이 없던 다크는 자신이 지금 어떤 처지라는 걸 다시금 상기했다. 얼떨결에 떨어져서 발목을 삐었는지 욱신욱신 전해져 오는 통증에 비명이 터져 나올 뻔한 걸 참으며 다크가 살며시 물었다.

“네 녀석은 누구냐?”

<나? 나는 쿠마다. 그러고 보니 그대는 나의 옛 주인과 함께 있던 자로군.>

“쿠마라고? 그 타이탄?”

<그렇다.>

“시드미안은 어디 있지?”

<나와 계약을 해제하고 떠났다. 아무래도 그는 정신이 제압당한 것 같았지만 나는 그를 도와줄 수 없었다.>

“그럼 시드미안도 여기 있다는 말이군.”

<그대는 과거 만났을 때보다 엄청난 진보를 했군. 하기야 내가 그대를 처음 봤을 때는 그대가 드래곤인 줄 착각했을 정도였으니까……. 현재 그대의 마나는 아직 보잘것없다. 하지만 그대의 발전 속도로 미루어 봤을 때, 조만간에 그대는 엄청난 힘을 다시 얻게 되겠지. 골렘의 맹약을 맺기 위한 첫째 조건은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자. 그대의 마나는 얼마 되지 않지만 그대는 그걸 효율적으로 다룰 줄 알기에 첫째 조건은 충족된다. 그대는 나와 계약을 원하는가?>

“타이탄이 한 대 있다면 좋긴 하겠지만, 넌 시드미안의 것이잖아. 사양하겠어.”

<나는 시드미안의 것이 아니다. 시드미안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계약을 해제했으니까……. 현재 나의 주인은 없다. 그러니 그대는 나의 주인이 되고 싶지 않은가?>

“내 대답은 똑같아. 그런데 여기를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지?”

<그건 나도 모른다. 나는 주인을 통해 모든 걸 보고 느낀다. 주인이 없는 지금 나는 5미터 정도의 앞을 겨우 볼 수 있을 뿐이다.>

“보탬이 안 되는 놈이군. 좋아, 다음에 보자구.”

<나중에 그대의 종으로 선택될 타이탄에게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제기랄, 이 건물에는 창문도 없나? 아예 눈앞이 하나도 안 보이네…….”

더듬거리면서 한참을 걸어가자 또다시 다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누구인가? 희미한 마나의 기척이 느껴지는데…….>

이번에도 굵직한 저음의 무게 있는 목소리……. 보나마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타이탄일 것이다.

“제길, 여기는 타이탄을 쌓아 둔 창고인 모양이군.”

<그대는 누구인가?>

“시끄러우니까 좀 조용히 해. 그런데 여기 출구가 어디야? 너무 컴컴해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있어야지.”

<지금 나의 능력으로 그 정도까지는 알 수 없다. 그대와 같은 마나를 부릴 능력을 갖춘 자를 만나기는 이번이 처음이니까……. 사실 그대의 능력은 매우 실망스럽지만 어쩔 수 없군. 하지만 그대는 마나를 부릴 수 있기에 계약의 최소 조건은 갖춰져 있다. 그대는 나와 계약을 맺고 싶은가?>

“그러는 네놈은 누구냐?”

<내 이름은 안드로메다.>

“안드로메다? 아무도 주인이 없었다고?”

<그렇다.>

“호오……. 그럼 그 녀석들의 타이탄인 모양이군. 좋아, 계약을 맺자구. 어떻게 하면 되지?”

<그대가 수락을 했으니 이제부터 그대와 나는 태곳적부터 내려오는 골렘의 맹약에 따라 주종이 되었다. 내 이름은 안드로메다. 그대의 이름은?>

“나는 다크. 그런데 그다음부터는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내 몸에 탑승하면 된다. 그러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해 주지.>

“좋아, 그런데 어두워서 보이지가 않아.”

<그건 걱정하지 마라.>

곧 거대한 손이 다크의 몸을 잡고 위로 살며시 들어 올렸다가 내려놨다.

<거기 있는 의자에 앉으면 된다.>

다크가 더듬더듬 찾아서 의자에 앉자 곧이어 기긱거리는 금속음이 들려왔고, 앞으로 밀려가 있던 금속 조각이 튀어나와 그녀의 몸을 완전히 감쌌다. 그다음 거대한 안드로메다의 몸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쾅거리는 걸음에 다크는 재빨리 소리쳤다.

“이 멍청아, 너무 시끄럽잖아. 내려 줘, 걸어서 도망치는 게 잡힐 확률이 적겠다.”

안드로메다가 곧 멈췄고, 조금 지나자 손으로 다크를 잡아서는 아래쪽에 내려놨다. 땅에 내려서자 또다시 더듬거리면서 걸어가는 다크를 향해 안드로메다가 말했다.

<나는 여기서 기다려야 하나?>

“참, 그러고 보니 쿠마는 공간의 저편에서 기다리다가 부르면 나타나던데……. 너도 공간의 저편에 갈 수 있냐?”

<좋아, 공간의 저편에서 기다리지.>

그다음은 더 이상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또 다른 청기사들도 서 있었지만, 이미 주인이 있는 상대를 부를 필요가 없었기에 잠자코 있는 것이었다.

다크가 가까스로 출구를 찾아 밖으로 나왔을 때는 시간이 꽤 흐른 후였다.

‘제길, 이런 식이면 시가지 쪽으로 도망친 흔적을 만들 수도 없잖아. 할 수 없다. 빨리 도망치자.’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크는 최대한 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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