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136/930)

“소녀가 도망쳤습니다.”

“뭣이? 그럼 네 녀석은 뭐 하고 있었나?”

토지에르의 질책에 실바르는 얼굴색이 벌게지며 황망히 답했다.

“그것이 밤에 살짝 도망쳤기 때문에…….”

“그렇다면 세린은?”

“방 안에 기절한 채 쓰러져 있는데, 이상하게 아무리 해도 깨어나지 않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공작이 말했다.

“데리고 와라.”

“예, 전하!”

조금 지나자 묘인족 소녀가 들려왔다. 그녀는 완전히 인사불성이었다. 정신을 잃고 있는 세린의 몸을 이리저리 눌러 보던 공작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흐음, 대단하군.”

“무슨 일이옵니까? 마법으로 잠을 재운 것도 아니고…….”

공작이 살펴보는 사이 마법을 써 봤던 토지에르가 궁금한 듯이 묻자 공작이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대단한 기술이야. 몸속에 마나가 흐르는 통로를 막았어. 그러니 이상이 생길 수밖에…….”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기사들 중 한 명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몸속에 자연스레 흘러야 하는 마나의 통로를 막는 기술도 있사옵니까?”

“글쎄, 타인의 몸속에 자신의 마나를 끼워 넣어 마나 흐름을 방해하는 기법도 있을 수 있겠지. 어쨌든 대단한 기술이야. 이걸 그 소녀가 했다는 말인가?”

“예.”

“정말 자네가 말한 대로 마스터였던 모양이군. 그것도 매우 독특한 기술을 많이 알고 있는……. 추격대는?”

“예, 군견(軍犬)들을 이끌고 수색 중이옵니다. 전하.”

이때 세린이 깨어났고, 토지에르는 재빨리 그녀를 추궁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사방에 서 있는 높은 양반들 때문에 주눅이 든 표정이었지만 세린은 솔직히 말했다.

“주인님 방에 들어가자마자 등 뒤가 따끔하면서 정신을 잃었습니다, 토지에르 나으리.”

그 말에 토지에르는 약간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군. 하녀를 제압했다 하더라도 옷이나 신발이 도망치기에 적당하지 않았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도망쳤지?”

그 말에 공작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긴 치마야 자르면 그만이고, 신발이야 벗고 담요로 돌돌 말면 그만인데, 그런 게 뭐가 중요한가? 추격대에 그래듀에이트 네 명을 추가로 파견해라.”

“예.”

이때 세린이 끼어들었다.

“저, 주인님께는 행동하기 좋은 옷하고 구두가 있습니다. 그렇게 안 해도…….”

“뭐? 네년은 그걸 감시하지 않고 도대체 뭐 한 거냐?”

“저, 그게 실바르 나으리께서 선물하신 거였기 때문에…….”

그 말에 토지에르는 괜히 돈쓰고 궁지에 몰린 실바르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네 녀석은 그녀를 감시하고, 보호하라고 붙여 놨더니, 편한 옷까지 사 주면서 도망치는 걸 도와줘?”

“예? 죄송합니다, 토지에르 경. 굉장히 예쁜 옷이었고, 그걸 사 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아무 생각 없이……. 죄송합니다.”

“네 녀석도 빨리 달려 나가 그 소녀를 잡아왓! 못 잡으면 아예 돌아올 생각을 말아라.”

“옛!”

이때 당황한 표정의 인물이 들어섰다. 재빨리 밖으로 달려 나가는 실바르와 충돌할 뻔했지만 용케 실바르가 옆으로 피해 나갔고,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그 인물이 다급하게 외쳤다.

“토지에르 경,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청기사가 한 대 없어졌습니다. 그게 어제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그게…….”

토지에르는 단정적으로 공작에게 말했다.

“그녑니다.”

“뭐?”

“그녀가 훔쳐간 게 틀림없사옵니다.”

“설마……. 그래도 방금 전 하녀의 몸속에 들어간 마나의 성질이나 분량으로 봤을 때 그렇게 대단한 실력은……?”

“그야 그렇지요. 실력은 별 볼일 없지만 타이탄과 계약을 맺는 데 마나의 분량은 상관없사옵니다. 마나를 제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사실 마나를 제어할 수 있는 자라면 대단한 실력의 인물, 몸속에 방대한 마나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가정 하에서 생겨난 조건이기에…….”

“그렇다면 더 큰일이군. 유령 기사단의 그래듀에이트 열 명을 투입해라. 제길! 이제 막 전쟁이 시작되려는 판에 이게 무슨 꼴이얏!”

“헉, 헉, 헉…….”

다크는 죽자고 달리다가 이제 더 이상 달릴 기운도 없어서 나무 아래에 퍼질러 앉았다. 그놈의 타이탄을 때린 오른손은 뼈까지 몇 개 부러졌는지 손등 위로 뼛조각이 불룩 솟아올라 있었고, 통증도 엄청났다. 그리고 자신이 2층에 있다는 것도 모르고 뛰어든 결과, 타이탄을 가격한 후 아래쪽으로 떨어지면서 삐어 버린 오른쪽 발목은 너무 혹사를 시켜서 그런지 퉁퉁 부어올라 욱신거리다 못해 이제 무감각해진 것 같았다. 몇 군데 혈도를 제압해 통증만을 억제해 놓은 상태로 밤새껏 달렸으니, 몸에 이상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밤새 달려오면서 옷은 나뭇가지에 걸려 군데군데 찢어져 걸레가 된 상태였고, 또 몇 번이나 넘어져서는 흙투성이가 된 데다 피부도 여기저기 찢겨서 아직도 피가 흘러내리는 곳이 있었다. 밤에 산길을 달렸으니 이 정도 대가야 별로 큰 것도 아니었지만……. 문제는 지금쯤 그놈들도 자신의 탈출 사실을 알아내고 추격을 시작했을 테니 그것이 문제였다.

이때 저쪽에서 와이번이 한 마리 날아가는 게 보였다. 와이번이라면 기사단에서 정찰, 이동용으로 쓰는 괴물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다크는 좀 더 으슥한 곳으로 몸을 숨겼다. 그런 다음 오른손의 부러진 뼛조각들을 대강 맞추기 시작했다.

지독한 통증을 참으며 손가락을 앞으로 당겼다가 어느 정도 제 위치를 확인해 가며 다시 밀어 넣는 동작을 반복했다. 부러진 뼛조각 두 개를 맞췄을 때쯤 지독한 통증으로 인해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대강 몸을 정리한 후, 다크는 이제 서서히 밝아 오는 하늘 위를 떠도는 와이번을 잠시 바라보다가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30분쯤 후, 운기조식에서 깨어난 다크는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기조식을 해서 그런지 다리나 손에서 통증은 그렇게 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 운기조식을 하면 치유력이 대단히 높아지기에, 고수라면 30분 정도 운기조식으로 다리 삔 거 정도는 치유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사실 고수가 다리를 삘 리도 없었고, 또 다크의 내공으로는 고수 축에도 못 들어가는 게 현실이었다.

다시 네 시간 정도 죽어라 달려가자 작은 오솔길이 나왔다. 이 길을 따라서 갈 것인가, 아니면 산길로 들어갈 것인가 잠시 생각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사람들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도합 다섯 명. 그들의 모양새를 잠시 바라보던 다크는 그들이 아무래도 여행객 내지는 모험가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도망쳐 온 곳은 왕궁이었으니까 추격자들은 군인들일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이보세요, 헉, 헉…….”

군데군데 찢어진 옷을 입은 소녀를 보고 그들은 잠시 놀란 것 같았지만, 곧 그녀가 뛰어온 방향을 향해 세 명이 검을 뽑아 들고 경계 태세를 갖췄다. 이런 곳에 소녀가 이 꼴로 뛰어왔다면 아마도 저쪽에서 몬스터라도 따라오는 줄 알았던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그중에서 제법 인자하게 생긴 30대 중반의 남자가 물어왔다.

“혹시 물이나 먹을 거라도 가지고 계시면 조금 주실래요? 헉, 헉…….”

“여기 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요?”

소녀는 기갈이라도 들린 것처럼 작은 휴대용 물통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어느 정도 숨을 돌리고 소녀가 말했다.

“토지에르라고 들어 보셨어요? 마법사인데…….”

소녀의 말에 그중 좀 가냘파 보이는 인물이 말했다.

“토지에르라면 여기 크라레스 왕국의 궁정 마법사님을 말하는 건가요?”

“예, 그 토지에르…, 그 인면수심의 나쁜 놈이 우리 엄마를 겁탈하고 아빠를 죽이고, 거기다가 나까지, 흑흑…….”

소녀의 말에 그들은 모두들 아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설마가 아니에요. 저쪽에서 토지에르의 부하들이 쫓아오고 있다구요. 아마 날 잡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흐느끼는 척하면서 다크는 자신의 거짓말 솜씨에 도취되어 가는 중이었다. 여행객 일행은 설마 하는 마음이 앞섰지만, 그래도 저 꼴이 된 채 도망치는 소녀를 보고 마음에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이때 그중 한 명이 말했다.

“토지에르 경일 리는 없겠지요. 아마도 토지에르 경을 사칭하고 못된 짓을 하는 놈일지도…….”

“저를 도와주실 필요는 없어요. 상대는 군사를 거느리고 있다구요. 괜히 도와주시려다가는 큰 봉변을 당하실 수도……. 어쨌든 물하고 식량이라도 좀 주실래요? 친척집까지 도망치려면…….”

“친척집은 더 위험할 겁니다. 다른 곳으로 도망치세요. 여기 물하고 식량은 좀 나눠 드리죠. 도와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 정도만 해도 저에게 큰 도움을 주신 겁니다. 그럼 안녕히…….”

소녀는 물과 식량을 등에 지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달려가 버렸다. 잠시 바라보던 검객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정말 빠르군. 그런데 저 말이 진짜일까요?”

“글쎄, 그건 모르지.”

“저 아이를 도와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저 아이의 말이 진짜인지 그것도 확실하지 않잖아. 설혹 진짜라고 하더라도 우리들의 힘으로 저 아이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아? 상대는 궁정 마법사야. 그냥 혼자서 도망치게 내버려 두는 게 낫지.”

일행 중 젊은 쪽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뭔가 한마디 더 하려다가 포기했다. 사실 그들의 힘으로 궁정 마법사를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시간도 못 되어 반대편에서 엄청난 속도로 달려온 험악한 인상의 세 남자에게 제지당했다. 그들은 제법 호화로운 복장을 하고 있었고, 허리에는 모두들 롱 소드나 바스타드 소드를 차고 있었다. 그중 앞에 서 있는 덩치 좋은 인물이 그들에게 물었다.

“이보시오. 혹시 금발머리 소녀 한 명을 못 봤소? 키는 이만하고 아주 예쁘고, 삐쩍 말랐는데…….”

“그런 아이를 보기는 했소. 그런데 무슨 일이시오?”

그중 인상이 좀 더 험악하고 얼굴에 흉터까지 가진 사내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무슨 일인지는 알 것 없고 어디로 갔소?”

그들의 하는 짓거리에 모두들 ‘이놈들이 토지에르 경의 이름을 사칭하고 못된 짓을 하는 놈들이군’하고 단정을 지었다. 그들이 가리킨 방향은 소녀가 도망친 방향과는 상당히 다른 곳이었다.

“저쪽 길로 달려갔소.”

“만난 지는 얼마나 되었소?”

“세 시간 정도 되었소. 그 아이를 본 게 드미트리안 고개에서였으니까 말이오.”

“고맙소. 가자!”

그들은 큰 덩치에도 놀라운 속도로 달려가 버렸다.

“젠장! 더럽게 빠르군.”

동료의 말에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아마 리더인 듯 보이는 인물이 말했다.

“진짜 그래듀에이트다. 그런데 왜 저들이 소녀를? 소녀가 한 말이 진짜라는 건가?”

“그렇다면 진짜로 그 토지에르 경이?”

“아마 그럴지도…….”

“원래 마법사란 것들이 다 그렇고 그런 놈들이잖아. 아, 미안하군. 자네는 빼고…….”

이들은 다시 크라레스 왕국의 수도 크로돈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토지에르라는 악당을 씹기 시작했다. “나쁜 놈, 못된 놈, 그 엄마도 모자라서 딸까지?”하면서 말이다.

이때 하늘 위에 떠 있던 와이번 한 마리가 그들을 보고는 아래로 쏜살같이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약간 긴장했지만, 그 와이번 위에 사람이 타고 있는 걸 보고는 경계를 풀고 상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곧 와이번은 길 위에 착륙했고, 그 위에 타고 있던 인물이 재빨리 그들에게 뛰어왔다.

“자네들은 어디에서 오는 길인가?”

정식 갑주를 걸친 것으로 보아 기사단 소속의 기사인 모양이었다.

“코린트 제국에서 오는 길입니다.”

“혹시 오는 길에 금발머리의 예쁘장한 소녀 한 명 못 봤나?”

“그런데 왜 찾으십니까? 방금 전에도 그걸 묻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던데…….”

“지금 크라레스 전역에는 그 아이를 잡으려고 야단이지. 현상금 100골드까지 걸려 있단 말일세. 그 못된 년은 얼마 전까지 토지에르 경의 하녀로 일하고 있었는데, 국왕 전하께서 토지에르 경에게 하사하신 물건을 들고 도망쳤다 이거야. 사실 그렇게 비싼 거는 아니지만, 전하께 하사받은 물건을 도난당했으니 일이 크게 벌어진 거지.”

크라레스는 과거 제국으로 불렸지만 30년 전 코린트와의 전쟁 이후로 왕국으로 전락했다. 타국에서는 크라레스를 왕국으로 불렀고, 또 사신들도 국왕으로 불렀다. 하지만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있던 크라레스의 신하들은 그들끼리는 제국, 황제 폐하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용기사는 친절하게도 제법 자세하게 그들에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해 줬다.

여행객 일행은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진짜 토지에르 경이 사고(?)를 쳤다면 자신의 잘못을 수습하기 위해 그래듀에이트까지 동원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래듀에이트면 기사단의 최고 엘리트들……. 그들에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 바보가 있을까? 하지만 뭔가 들고 도망쳤기에 추격하는 데 그래듀에이트가 동원되었다면 말이 되지.

“지금부터 한 시간쯤 전에 만났습니다. 알기에는 고개를 넘은 후에요. 우리들에게 토지에르 경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인간인지 한참 떠들어 대면서 자신의 엄마를 강간하고……. 흠흠, 그러더니 우리에게 물과 식량을 조금 얻어서는 오른편 산속으로 도망쳤죠.”

그 기사가 와이번을 타고 날아오르는 걸 보면서 그들은 또다시 쑤군거렸다.

“그 아이가 못된 년이었군.”

“역시 도와주지 않기를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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