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140/930)

순조로운 전쟁

예로부터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남자고, 그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어울릴 만한 여자를 두들겨 팬 원죄 때문에 실바르가 전전긍긍하는 동안 스바시에 왕국과 크라레스 왕국과의 첫 번째 격전은 크라레스의 압승으로 끝이 나 버렸다.

파괴된 상대 타이탄의 머리를 열고는 탈진해서 기절해 버린 기사들을 체포하고, 파괴된 타이탄들을 본국으로 옮기는 동안 크라레스에서 투입한 4만 5천 명의 보병과 1만의 기병들은 콜렌 기사단의 도움을 받으며, 기사단의 전멸로 후퇴 중인 스바시에의 보병 4만 명을 포위하여 괴멸시켜 버렸다.

사실 말이 괴멸이지 30분도 싸우지 않고 모두들 항복해 버렸으니 싱거운 싸움이었지만, 이로써 스바시에 왕국의 최전선을 지키던 병력은 깨끗하게 청소된 셈이었다.

“이번 전투는 본국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적은 대단히 강력한 힘을 가진 기사단들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방심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노획한 물자의 일부를 코린트에 보내면서 코린트를 좀 더 다독거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최전방에 배치했던 미가엘 네 대를 왕궁에 배치하는 게 좋겠습니다.”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공작의 회의적인 물음에 한 장교가 자신에 찬 어조로 설명했다.

“예, 이번 1차전에서 아홉 대의 타이탄을 코린트 국경에 배치함으로써, 우리는 코린트를 못 믿어 수도까지 비워 두면서도 국경을 경비하는 듯한 인상을 심어 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전력(全力)을 동원하고 있다는 걸 그들이 믿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번 기습전이 끝난 후에도 지금과 같은 병력 배치를 한다면 코린트가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배치로는 왕궁이 텅텅 빈 상태가 되니까 말이지요. 스바시에가 몇 대의 타이탄을 이용해 왕궁을 기습한다면 손도 못 쓰고 당해야 하는 배치입니다. 그러니 코린트에게 뇌물을 주면서 전방의 병력을 왕궁으로 뺀다면, 그들은 우리가 왕궁 방어를 위해 타이탄을 빼야 하기에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추가로 더욱 많은 뇌물을 제공하는 거라고 착각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스바시에가 진짜 기습을 가해 온다면 우리는 유령 기사단을 투입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끝장입니다. 코린트의 첩자가 쫙 깔려 있을 테니까요.”

“좋아, 그 계획을 곧장 시작하라.”

“예, 전하.”

“그건 그렇고, 포로들은 어떻게 처리했나?”

“임시 수용소를 건설하고 모두 가뒀습니다. 그래듀에이트와 마법사들은 따로 수감 중입니다. 곧 있을 2차전에서 승리하고 국왕을 잡은 후 설득하면, 그들은 우리의 동지로 써먹을 수 있을 겁니다. 정 안 된다면 정신계 마법을 써서 세뇌 작업을 하면 되겠지요.”

지휘관들이 그날의 전쟁을 끝내고 밤늦게까지 작전 회의를 하는 동안 장병들은 적국에서의 기념할 만한 하룻밤을 조용히 보내고 있었다.

“이제 일이 끝나셨습니까?”

피곤한 안색으로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 로니에 사제를 보면서 팔시온이 물었다.

“간단하게 전투가 끝나는 것 같았지만 예상외로 부상자들이 많더군요. 사실 거의가 적국 병사들이었지만…….”

“그럼, 적국 병사들도 치료하셨단 말입니까?”

“당연히 해야지요. 일부 신들을 모시는 신관들은 적군의 병사들을 치료하지 않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만약 상대가 치료를 받을 가치가 없다면 샤이하드께서 저에게 치료의 권능을 나눠 주지 않으시겠지요. 제가 치료의 주문을 외웠을 때 상대가 치료된다면 저는 치료를 해야만 한답니다. 거대한 신의 뜻을 한낱 인간이 결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전에 만났던 신관과는 완전히 다른 말씀을 하시는군요. 대지의 여신을 섬기는 사제들의 경우 누구나 치료를 하지만, 전쟁의 신전에서 일하는 사제들은 절대로 적들을 치료를 하지 않거든요. 그들의 말로는 적들을 치료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지요.”

로니에 사제의 피곤한 얼굴에 씁쓰레한 미소가 떠올랐다.

“샤이하드께서는 다른 어떤 신들보다도 배타적인 신이시죠. 다른 신을 받드는 자들이라든지, 또는 악한 자들에게는 치료의 권능을 베풀지 않으십니다. 제가 아무리 상대를 살리려고 해도 치료의 주문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지요. 그렇기에 우리들 샤이하드를 받드는 신도들은 상대가 아무리 악한 자라고 해도 먼저 치료의 주문을 외웁니다. 그다음은 샤이하드께서 결정하실 일이지요. 그를 낫게 하시든지 아니면 상태를 더욱 중하게 하시든 그건 샤이하드의 뜻입니다. 우리는 샤이하드께서 내리신 재능을 그저 베풀 뿐, 그 이상의 선택은 모두 샤이하드께 맡겨야 하지요.”

“매우 실리적인 말씀이군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자신의 책임은 아니라는……. 하지만 살릴 수 있는데도 손을 쓰지 않는 자들보다는 사제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렇게 행할 뿐,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로니에 사제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로니에 사제는 매일 두 시간씩 기도를 했고, 일주일에 한 번은 네 시간씩 기도를 했다. 팔시온 일행은 그가 아무리 바빠도 그걸 빼먹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루는 그게 궁금해서 팔시온이 로니에 사제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사제님께서는 꽤나 능력이 있으신데, 바쁜 와중에도 꼭 그렇게 기도를 해서 시간을 까먹어야만 하냐”고……. 그러자 로니에 사제는 “인간의 일로 신과 약속된 시간을 뺄 수는 없지요. 그것은 샤이하드보다 인간의 일을 더 사랑한다는 말. 그런 자에게 샤이하드께서는 은총을 베푸시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샤이하드께 약속드린 일은 해야만 하고, 또 그걸 지켜 나가야만 한답니다”하고 답했다.

팔시온이 밖으로 나오자 미디아가 물었다.

“로니에 사제님은?”

“기도 중이셔.”

“아, 오늘도 이렇게 끝나는구나. 우리들 중에 아무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사실 다칠 건덕지도 없었지. 여기 기사단이 엄청 세더군. 이쪽은 고작 19대밖에 안 되고, 저쪽에서 30대 정도가 달려오는 거 보고 끝장이구나 생각했었는데, 아주 간단하게 상대방을 박살 내 버렸으니까 말이야. 다른 건 모르겠지만 붉은색과 푸른색을 함께 칠해 놓은 그 덩치 큰 타이탄에 타고 있는 기사들은 정말 일류였어.”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 근위 기사단 전용 타이탄의 이름이 카프록시아라던가? 크라레스의 수호신이라고 하더군.”

“카프록시아……. 정말 근사한 놈이었어. 나는 언제 그런 거 한번 타 보지? 어쨌든 일 다 끝났는데 패거리를 불러들여서 한잔해야지. 내일부터는 적의 수도로 진격해 들어가니까 며칠 동안은 전쟁이 없을 거라고 뱁새 눈 영감이 그러더군.”

“오늘 전쟁은 여태껏 해 본 어떤 전쟁보다도 산뜻하게 끝난 것 같아. 사실 내가 겪어 본 전쟁들은 변방에서 산적 토벌이나 몬스터 토벌이 다였는데 말이야. 정말 오늘 싸우는 거 보면서 정규전이 얼마나 다른지 알겠더라. 4만의 적군이면 그거 다 물리치는 데 몇 날 며칠을 피터지게 싸워야 할 텐데, 순식간에 끝나 버리잖아. 타이탄이 들어가서 휘젓는 가운데 마법사들이 마법 몇 방 날리니까 깨끗이 손들더라 이거지.”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애들 모으러 가자. 술은 이미 내가 구해 놨어.”

“어? 주인님, 안색이 왜 그러세요? 몸이 안 좋으세요?”

세린의 걱정스런 물음에도 주인은 창백한 안색으로 묵묵부답이니 속이 더 터질 수밖에…….

“왜 그러세요? 몸이 편찮으시면 의사를 불러올까요? 어디가 아프세요?”

하지만 악착스럽게 입을 꽉 다물고 있는 주인을 바라보다 못한 세린은 의사를 불러왔고, 다크는 의사의 진찰을 받았다.

진찰을 받는 동안 다크의 지시로 문밖에서 기다리게 된 세린은 초조한 마음으로 주인의 안위를 걱정했다. 자신이 돌보고 있는데도 큰 병에 걸렸다면, 토지에르라는 짐승의 지시에 따라 또다시 몽둥이찜질을…….

의사가 허탈한 표정으로 나오자 세린은 더욱 궁금증이 치밀어 재빨리 결과를 물어봤다. 그 옆에서 실바르도 자신의 목이 걸려 있기에 무심할 수 없었다.

“주인님은 어떠세요? 큰 병이 걸리신 거는 아니에요?”

“에잉, 별거 아니다. 겨우 초경(初經)이 시작된 거 가지고 그 난리를 떨다니……. 도대체 저 아이의 어머니는 누구길래 그런 간단한 것도 교육을 안 시켰단 말이야? 그리고 약간의 생리통이 있는 모양인데 약은 나중에 와서 받아다가 먹여라.”

띵한 표정으로 바뀐 세린의 물음.

“예? 생리…통이라구요?”

“생긴 걸 보니 영양 상태가 부실해서 초경이 약간 늦게 온 모양인데. 쯧쯧, 좀 더 잘 먹여야 살이 찌지, 그렇게 비쩍 말라서야. 나는 가 볼 테니 알아서 해.”

“예.”

세린이 방으로 들어왔을 때 주인은 시뻘게진 안색으로 화장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주인님, 겨우 생리통 가지고…….”

“겨우 생리통? 제길, 내가 왜 이런 한심한 꼴을 당해야 해. 거기다가 생리라는 것은 또 뭐고? 왜 내가 한 달 주기로 이따위 치욕스런 꼴을 당해야만 하지? 제기랄…….”

다크는 침대 옆에 놓여 있던 꽃병을 화장대에 던져 버렸고, 꽃병은 화장대의 거울과 함께 박살이 나 버렸다.

“네년도 나갓! 꼴도 보기 싫어. 으드드득!”

무슨 이유 때문인지 머리끝까지 신경질이 난 주인을 피해 세린은 밖으로 튀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때가 되면 생리하는 거야 당연한 건데…….

“용기사들의 보고로는 적들의 병력이 나리오네시를 중심으로 집결 중이라고 합니다. 그들도 수도에서 전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리오네시는 수도에서 15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으로, 크라레스의 주력 부대가 적의 수도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꼭 통과해야 할 교통의 요지였다.

“집결 중인 적군 병력의 규모는?”

크로이델 장군의 질문에 그 장교는 재빨리 답했다.

“예, 치레아 국경선에 주둔 중이었던 1개 보병 사단, 또 2개 기병 여단, 1개 용병 여단, 2개 수도 경비 사단, 근위 기사단, 네시 기사단입니다. 각지에서 용병들을 계속 모집 중이며, 그들은 지속적으로 나리오네시로 보내지고 있습니다.”

“끝내 한판의 도박을 할 생각인 모양이군.”

공작의 빈정거림에 장교는 황급히 답했다.

“예, 전하. 그런데 이상한 것이 나리오네시에 치레아 왕국의 크라얀 기사단의 깃발이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에 크로이델 장군 옆에 앉아 있던 인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노장군은 쥬리앙 아그리오스 장군으로 현재 콜렌 기사단장이었다.

“크라얀 기사단의? 흐음, 치레아가 스바시에를 돕기 위해 기사단을 파견했을 수도 있겠지요. 스바시에가 먹힌 다음에는 자기들 차례라는 걸 알 테니까 말입니다. 또 스바시에는 꽤 오랫동안 치레아와 잘 지내 왔으니 원군을 보냈을 가능성은 매우 큽니다. 만약 원군을 보냈다면 어느 정도 규모일 것 같은가?”

“옛, 아마도 크메룬급으로 다섯 대에서 열 대 정도일 것입니다. 본국이 현재 투입 중인 타이탄 수가 고작 19대인 점을 생각한다면 그것도 꽤 많은 숫자지요. 또 치레아의 총 타이탄 수가 23대인 점을 감안한다면, 그들이 반 수 이상의 타이탄을 지원해 줄 리는 없을 거란 추측입니다.”

“크라얀 기사단이 가진 타이탄 총수는?”

“예, 크메룬 15대입니다. 크메룬은 본국의 푸치니급과 거의 같지만 높이가 조금 낮은 만큼 기동력은 조금 더 좋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모두 합치면 꽤 되겠군. 근위 기사단이 일곱 대, 네시 기사단이 22대, 거기에 열 대라면……. 호오, 39대나 되는군.”

“하지만 그중 반 이상이 정규 타이탄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죠.”

“이봐, 장군들!”

공작의 말에 장군들은 일제히 답했다.

“옛.”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에 본국에 남은 타이탄 아홉 대를 이쪽으로 워프해 오면 위험할까? 놈들이 그 많은 숫자만 믿고 본국의 왕궁을 기습하는 짓을 할까? 어떨까? 만약 그들이 기습을 가해 온다면 왕궁은 적 공격대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겠나?”

그 말에 즉각 크로이델 장군이 대답했다.

“본국의 남은 병력까지 다 쓰실 생각이시라면, 오히려 그런 식으로 곡예를 부리는 편이 코린트의 의심을 덜 받을 테니, 그 방법을 쓰는 게 좋겠사옵니다. 전하, 먼저 마법진을 이용해서 전쟁 직전에 이쪽으로 워프해 타이탄을 불러들여 싸우다가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근위 기사단을 수도로 돌려보내면 되겠지요. 39대 28의 싸움이면 전쟁이 훨씬 빨리 끝날 것이옵니다. 타이탄끼리의 전투가 끝나면, 불러들였던 아홉 대의 타이탄은 코린트와의 국경선으로, 카프록시아 다섯 대는 왕궁으로 워프시키면, 코린트는 우리의 작전에 꽤나 감명을 받겠지요. 전 국력을 한곳에 모아 일전을 벌이고 다시 제자리로 돌리는 전술에 말이옵니다. 사실 그 전술은 30년 전에 코린트가 본국을 상대로 써먹었던 거니까, 그들로서도 느낌이 새로울 것이옵니다.”

“그리고 적의 보병은 남은 타이탄들로 박살을 내고?”

“예, 전하.”

“좋아, 대신 놈들이 왕궁을 기습할 때를 대비해서, 근위 기사들은 토지에르의 신호가 올 때 만사를 제쳐 놓고 전장에서 이탈하여 이동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직행, 워프해야 한다. 폐하께도 연락을 드려서 왕궁이 텅 빌 때를 대비해 어딘가 피신해 계시라고 하면 되겠군. 적의 기습이 포착된 후 10분 내로 워프가 가능할 테니 10분만 버티시면 돼. 폐하께서도 그래듀에이트시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야. 어쨌든 간에 코린트 놈들이 개입하지만 않는다면 걱정거리는 없지.”

한가한 한때

어제는 다크가 원체 히스테리를 부리는 바람에 전달해 주지 못했던 실바르는, 세린에게서 다크의 심리가 꽤 안정되어 있다는 보고를 들은 후에야 행동을 개시했다. 탈출 사건 때문에 피차간에 별로 좋은 인상은 아니었으니, 그때 나타났다면 아마도 그 이후에 일어날 일은 그도 예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의 판단은 어느 정도 정확한 것이었다.

똑똑.

그러자 재빨리 세린이 문을 열고 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으리?”

“네 주인에게 전할 게 있다.”

“예, 나으리.”

세린은 쪼르르 주인에게 달려가서 말했다.

“주인님, 실바르 경이 뵙자고 하십니다. 전해 드릴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들어오라고 해.”

“예, 주인님.”

세린의 안내로 실바르가 들어왔고, 그는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 방 주인을 보면서, 뭐라고 대화를 시작할까 한참 망설였다.

“폐하께서 그대에게 전해 주라고 한 물품들을 가지고 왔소. 가지고 와라.”

밖에서 노예들이 차곡차곡 정돈해 놓은 물품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각종 옷가지나 여행 물품들 그리고 작은 검이었다. 그것들 중에는 황제가 다크에게 주는 선물도 있었고, 다크가 압수당한 것들도 있었다.

“그리고 세린도 그대의 것이오. 폐하의 하사품이니까 그대가 알아서…….”

실바르가 말을 끊은 것은 상대가 자신의 말은 듣지도 않고, 그 물품들 중에서 검과 장갑 한 벌을 꺼내서는 검을 허리에 차고 나서 천천히 장갑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상대가 장갑을 끼고 “파워 업”이라고 중얼거리는 걸 들었을 때, 실바르의 손도 무의식중에 슬며시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검 손잡이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웬만한 여자라면 이따위 짓을 해도 신경을 쓰지 않았겠지만, 이상하게 그의 몸은 자신의 의지와 달리 소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에, 그러니까 세린은 폐하께서…….”

슉!

갑자기 상대의 검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끄러운 동작으로 검집을 빠져나와 허공을 날았다. 자기 쪽으로는 날아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잔뜩 긴장하고 있던 실바르의 손이 순간적으로 검을 반쯤 뽑았다가 황급히 다시 집어넣었다.

만약 실바르가 검을 완전히 뽑았다면, 완전히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실바르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때, 뭔가가 바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그것은 세린의 목걸이였다. 자신의 목으로 거의 스치듯이 지나간 칼 때문에 세린의 표정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실바르는 상대의 날카로운 일검을 보고 폐하가 이 소녀를 아끼는 이유가 단순히 뜨거운 잠자리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걸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또 자신의 몸이 소녀의 행동에 왜 그렇게 뜨겁게 반응했는지도……. 그녀는 겉보기와는 달리 엄청난 숙련도를 지닌 검객이었던 것이다.

“나쁘지 않군.”

다크는 과거와 달리 자신의 몸속에서 들끓고 있는 힘을 느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자신의 내공이 상승한 만큼 마법 장갑은 현재 풀 파워를 내면서도 그녀에게 무리를 주지 않았다. 이 상태라면 충분히 내 몸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다크는 천천히 샤벨을 검집에 넣으면서 “파워 다운”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런 후 실바르를 쳐다봤다.

“뭐 할 말이 더 있어요, 실바르 경?”

여러 가지 생각이 뒤얽혀서 멍한 표정으로 있던 실바르는 그제야 깜짝 놀라서는 황급히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실바르가 밖으로 나갈 때 뒤에서 나지막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이제 자유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일을 못한다고 두들겨 맞을 이유도 없고, 또 두려움에 떨 필요도 없다. 야성이란 것은 야성으로서 존재할 때 아름다운 것. 길들여진 야성은 보는 이에게 슬픔을 자아낼 뿐이지.”

그녀의 말이 끝났을 때 딸깍 하고 실바르가 문 닫는 소리가 들렸고, 또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세린이 주인 앞에 꿇어앉아서는 울먹였다.

“주인님, 저 버리지 말아 주세요. 더 열심히 일할게요. 예? 주인님……. 엉엉, 다시는 게으름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할 테니 제발 버리지 마세요.”

자신의 다리를 끌어안고 울고 있는 세린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주인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너는 너무 길들여져 버렸구나. 나는 너에게 자유를 선물하려 했는데……. 그게 너에게는 너무 부담스러웠느냐? 너를 버리지 않을 테니 그만 울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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