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오네 평원 전투
나리오네시가 위치한 나리오네 평야에 양국의 주력 부대들이 속속 모여 들었다. 양쪽 다 이번 전쟁에 국가의 사활을 걸고 있기는 마찬가지였기에 양군은 모두 필사적이었다.
스바시에의 보병 4만과 기병 1만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정면에, 크라레스의 3만 보병과 기병 5천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물론 양국의 군대들은 2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서로 간의 거리를 충분히 두는 이유는 조만간에 시작될 타이탄들끼리의 전투를 위해서였다.
아침이 되자 양군의 군세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스바시에의 중갑 보병(重鉀步兵 : Havy Footman)이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중갑 보병은 두터운 갑주(甲胄)와 묵직한 방패, 그리고 비교적 짧은 미들 소드(Middle Sword)를 허리에 차고, 3미터 길이의 창으로 무장했다. 이들은 묵직한 무게 덕분에 기동력은 뛰어나지 못하지만 그 파괴력이나 방어력이 뛰어나기에 정면 접근전에 투입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들의 뒤편에서는 중갑 기병(重鉀騎兵 : Havy Trooper)이 천천히 따라왔고, 양쪽에는 경갑 보병(輕鉀步兵 : Light Footman)과 용병대가 전진했다.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도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중갑 보병은 막강한 힘은 있지만 기동력이 뛰어나지 못하기에 가장 앞 중심 공격선에 두고, 그 뒤에는 역시 파괴력은 뛰어나지만 통상의 기병보다는 기동력이 떨어지는 중갑 기병을 배치했다. 중갑 보병이 적의 보병과 충돌한 후에 중갑 기병을 투입하는 전술은 매우 교과서적인 것이었다.
기병은 속도는 뛰어나지만 잘 준비된 보병을 공격하기 위해 돌격했다가는 창이나 활에 절단나기 쉽다. 그렇기에 먼저 보병을 밀어 넣어 상대의 진형을 흩트린 후 기병을 투입했다.
하지만 상대의 기동력이 뛰어나다면 오히려 포위당할 위험성도 있으므로, 기동력이 뛰어나 상황 대처 능력이 좋은 경갑 보병이나 기병은 좌우 측면에 두어 적의 움직임에 효과적으로 대비하게 만든다.
이 같은 방식은 가장 교과서적인 전투 방법이어서 구태의연한 면도 있었지만, 정통적인 방법이니만큼 그 위력 또한 대단하다. 교과서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효율이나 위력이 강하며 성공할 확률도 높다는 것을 뜻한다. 또 이런 넓은 평야 지대의 전투에서는 이 진형이 가지는 강점은 극대화되고 약점은 최소화된다.
상대방의 군대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걸 보면서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상하군……. 타이탄 수는 저쪽이 월등한데 왜 타이탄을 꺼내지 않는 거지?”
그러자 공작의 뒤쪽에 서 있던 노장군 한 명이 즉각 답했다.
“예, 전하. 통상 타이탄들이 나서는 것이 정석인데, 저들이 뭔가 또 다른 계책이라도 꾸미는 게 아닐까요?”
“그래듀에이트들은 모두 어디 있나?”
“예, 명령대로 모두 이동 마법진 주위에서 대기 중이옵니다. 하지만 아직도 황궁에 적이 침투했다는 보고는 없사옵니다.”
“젠장, 토지에르.”
“예, 전하.”
“저 녀석들이 이동 마법진으로 한 번에 이동시킬 수 있는 건 몇 명 정도일까?”
“예, 마법사들이 좀 있으니까 아마도 1백 명까지는 가능할 것이옵니다. 대신 그들을 전부 투입한다면 그쪽으로 한 번에 보내는 건 가능하겠지만, 마법사들이 그곳으로 함께 이동해 갔다 하더라도, 새로이 마법진을 만들어야 하니까 돌아오려면 최소한 30분 이상의 시간이 걸리옵니다. 1백 명 정도를 이동시킨다면 그 정도는 쉬어야 다시 한 번 마법을 쓸 수 있을 테니까요.”
“1백 명이라. 만약 40명 내외로 잡는다면?”
“20분 정도 될 것이옵니다.”
“예상되는 적의 타이탄은 36대 정도. 최대로 잡아도 한 40대? 우리들이 가진 타이탄은 아홉 대는 황궁에, 19대는 여기 있다. 모든 걸 무시하고 공격했을 때 놈들이 20대의 타이탄을 황궁으로 보낸다면? 최악의 경우 너 죽고 나 죽자고 40대 모두 다 보낼 수도 있고……. 지금 이대로 총력전으로 끌고 들어간다면 본국의 타격이 너무 커. 타이탄은 수리가 가능하지만 죽은 병사는 살릴 수 없지. 언데드라도 만들면 모르겠지만, 그러면 곧장 악마의 집단으로 찍혀서 멸망당할 뿐이야.”
“전하, 우선 카프록시아 몇 대를 투입해 보고 상대의 반응을 살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흐음, 그 방법 외에는 없겠군. 크로마스!”
그러자 뒤쪽에 서 있던 기사 중의 한 명이 재빨리 다가왔다. 그는 다크 사냥에 참가했다가 된통 혼이 났던 미온지에 폰 크로마스였다.
“옛, 전하.”
“근위 기사단의 타이탄을 출동시켜라. 만약 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적의 중갑 보병을 먼저 괴멸시켜라.”
“옛!”
곧 크로마스가 인솔하는 아홉 대의 근위 타이탄들이 왼손에는 거대한 방패를, 오른손에는 7미터 정도 되는 거대한 창을 들고는 적진을 향해 달려 나갔다. 카프록시아들이 적진으로 달려감과 동시에 적진 저편에서 공간을 열고 20여 대의 타이탄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즉각 카프록시아를 향해 저마다의 무기를 휘두르며 뛰어왔다.
상대의 타이탄 20여 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공작은 재빨리 외쳤다.
“콜렌 기사단을 출동시켜라.”
마법진 주위에 모여 웅성거리던 기사들이 즉시 자신의 타이탄을 불러내어 적진을 향해 뛰어갔다. 이미 전장은 적 타이탄과 이쪽 타이탄이 얽혀 접전 중이었기에, 그들은 창을 포기하고 근접전용 무기인 도끼나 철퇴를 들고 뛰어갔다.
처음 돌격을 시작한 카프록시아들은 상대 타이탄들이 달려 나오자 먼저 거대한 창을 맹렬한 기세로 상대방에게 던진 후 곧장 허리에 꽂혀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카르록시아가 가진 그 강대한 힘으로 던진 창의 위력은 엄청났고, 제대로 막지 못한 상대 타이탄 네 대의 방패를 꿰뚫으면서 본체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그들이 2차 장갑에 꽂힌 창을 뽑아내고 상처 수복을 하는 사이 이미 선두에 나선 타이탄들끼리 격전을 시작했다.
공작이 푸치니 아홉 대를 투입한 후 곧 저쪽에서도 20대 정도의 새로운 타이탄들이 공간을 열고 나왔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공작의 뒤에서는 카프록시아 한 대가 모습을 나타냈고, 공작은 자신의 타이탄에 뛰어오르며 외쳤다.
“놈들의 타이탄은 모두 이곳에 있다. 황궁의 타이탄들도 모두 불러들여라.”
“옛!”
토지에르는 공작의 명령에 답하고, 공작의 카프록시아가 전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지도 않고, 곧장 뒤쪽 마법진 앞에 서 있는 마법사를 향해 외쳤다.
“황궁에 대기 중인 타이탄들을 불러들여랏!”
그 마법사는 수정 구슬을 향해 열심히 뭐라고 떠들었고, 잠시 후 황궁에서 출격 준비 중이었던 아홉 명의 기사들이 희미한 빛을 내며 이동용 마법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워프에 성공하자 즉시 자신들의 타이탄들을 불러낸 다음 저마다 철퇴나 도끼를 하나씩 잡고 전장으로 달려갔다. 바야흐로 40대에 가까운 타이탄과 28대의 타이탄이 얽히고설키는 대접전이 벌어졌다.
바로 이때 세 대의 타이탄이 갑자기 크라레스군의 뒤쪽에서 나타났다. 그들의 방패에 그려져 있는 거대한 뱀의 문장이 그들이 소속된 국가를 나타내 주었다.
“크악!”
“아악!”
갑자기 나타난 치레아 왕국 크라얀 기사단의 크메룬급 타이탄 세 대는 곧장 그들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창을 이용하여 개미처럼 모여 있는 상대방의 군대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머리에 붙어 있는 작은 창문을 노리고 화살을 날리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타이탄의 그 작은 허점을 노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공작이 거느리는 28대의 타이탄들은 수적으로 우세한 상대 타이탄들과의 싸움에서 몸을 뺄 수가 없었고, 그 덕분에 놈들은 더욱 신이 나서 설쳐 댔다. 거대한 창을 휘저으며 중갑 보병들을 짓뭉개는 타이탄을 바라보던 토지에르는 마법을 외우기 시작했고, 옆에 있던 마법사 다섯 명도 거기에 가세했다. 타이탄을 파괴하려면 7사이클급의 마법이 필요하지만 옆에 있는 마법사들이 외운 5사이클급 마법 다섯 방에 자신의 6사이클 마법 한 방을 합치면 약간의 가능성도 있었다.
중얼중얼 마법을 외우는 마법사들을 처음에는 적 타이탄들도 무시했다. 타이탄이 마법 따위로 타격을 입을 수 없다는 걸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여섯 명의 마법사들을 중심으로 넘치고 있는 마나의 기운은 이들이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해 줬고, 곧장 세 대의 타이탄들 중 한 대가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이때 가까스로 마법을 완성한 마법사 한 명이 익스플로우전을 날렸다. 익스플로우전이라면 5사이클에서는 최강의 파괴력을 자랑하는 주문. 하지만 대 폭발의 화염을 뚫고, 타이탄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상당한 충격에 약간 주춤하긴 했지만 타이탄은 그 정도는 어린애 장난이라는 듯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불길 때문에 외부의 페인트는 완전히 타서 없어졌지만 미스릴을 입히지 않은 크메룬의 몸체에 새겨진 대마법 주문(對魔法呪文)이 드러나서 특이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자신의 마법에도 끄떡없이 달려오는 타이탄을 보고 그 마법사의 눈이 공포에 물들었다. 그때 주문을 완성한 남은 네 명 모두 거의 근사(近似)한 시간 차이로 타이탄에 익스플로우전을 퍼부었다. 연속되는 강력한 마법 공격의 충격으로 타이탄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을 때, 토지에르의 입에서 강렬한 마나의 울림을 담고 있는 시동어가 터져 나왔다.
“딥 스웜프(Deep Swamp : 깊은 늪)”
그와 동시에 타이탄이 서 있던 굳건한 대지가 물렁물렁해졌고, 타이탄은 그 엄청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밑으로 빠져 들었다.
대지를 물컹하게 만드는 스웜프 주문은 보통 2, 30센티미터 정도의 지표면을 질척하게 만들어 상대의 기동력을 떨어뜨리는 데 사용한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타이탄의 경우 밑에 뭔가 밟히는 부분이 있기만 해도 뛰어오를 수 있기에, 최소한 5, 6미터의 깊이로 스웜프 주문을 사용해야 했다.
토지에르는 6사이클급에 해당하는 그 한 방을 날리고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한 것에 흡족해했다. 하지만 그가 미소를 짓는 그 찰나 옆에 있던 마법사가 그를 재빨리 붙잡아 뒤로 당기면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이 제각기 주문을 외우고 있었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남은 두 대의 타이탄들이 무시하지 못할 위력을 낸 마법사들을 없애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이라면 간단한 이동 마법도 못 외우고 몸이 두 토막 날 것은 당연한 이치. 하지만 그들은 달려서는 도저히 저 괴물을 따돌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필사적으로 공간 이동 주문을 외웠다.
이때 엄청난 소리를 내며 대기를 가르고 날아온 거대한 검이 토지에르 일행 쪽으로 달려오던 타이탄의 목 아랫부분과 엑스시온이 위치한 부분을 꿰뚫어 버렸다. 물론 그 타이탄은 뭔가가 날아오는 걸 느끼고 대비하려 했지만, 미처 적절한 대비를 하기도 전에 검에 꿰인 것이었다.
그 타이탄이 서서히 쓰러지는 찰나 붉은색과 푸른색의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거대한 카프록시아가 나타났다. 카프록시아는 이미 검을 던져 버렸기에 방패만 들고 있었고, 상대는 무장을 갖추고 있으니 누가 위험한지는 뻔했다.
상대 타이탄인 크메룬은 덩치도 3.7미터로 카프록시아보다 훨씬 작았고, 출력도 0.7밖에 안 되지만, 그래도 무장을 갖추고 있다는 이점을 이용해 재빨리 쓰러진 동료의 옆으로 이동하면서 카프록시아가 자신의 칼을 회수하지 못하게 막았다.
크메룬이 창으로 찌르는 것을 두 번 다 카프록시아가 방패로 가볍게 막아 내자, 크메룬에 탄 기사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상대 타이탄은 카프록시아. 크라레스의 근위 타이탄이며 높이 5.2미터, 출력 1.3이나 되는 강자다. 지금 검이 없을 때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정상적인 방법으로 일대일에서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크메룬은 강력한 힘으로 창을 한 번 더 찔렀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카프록시아가 방패로 창을 튕겨 냈다. 여기까지는 크메룬이 예상한 대로였다. 크메룬은 재빨리 파고들면서 왼손에 든 방패로 옆으로 비껴 있는 카프록시아의 방패 왼쪽 부분을 강하게 때렸고, 상대의 방패는 몸 쪽에서 벗어나 밖으로 튕겨 나갔다. 그때 크메룬은 이미 방패를 버리고 검을 뽑아 카프록시아를 베려 하고 있었다.
이때 카프록시아의 오른손이 크메룬의 왼손을 꽉 잡았고, 그와 동시에 크메룬은 카프록시아에 밀려 거의 5미터쯤 떨어진 곳에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크메룬에 탑승한 기사는 정신이 없는 상태였고, 카프록시아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가 무릎 관절에 붙어 있는 거대한 강철 뿔로 크메룬의 복부 장갑을 찢어 버렸다. 그런 다음 양 팔꿈치에 붙어 있는 강철 뿔로 크메룬의 양쪽 어깨를 찍었다. 철판이 우그러져서 팔을 잘 움직이지 못하는 상대의 허리에 달려 있는 검을 슬며시 뽑아 곧장 가슴 부분에 박아 넣었고, 그와 동시에 크메룬의 움직임이 정지되어 버렸다.
타이탄 두 대를 간단히 처치한 카프록시아가 첫 번째 재물로 다가가 자신의 검을 회수하고 있는데, 땅이 불룩하게 솟아오르면서 땅 속에 묻혔던 크메룬이 튀어 나왔다.
크메룬은 저급 타이탄이었기에 연이은 익스플로우전의 공격에 대마법 방어진이 파괴되기 직전까지 갔다. 만약 토지에르가 6사이클급의 파괴 주문을 썼다면 아마도 고철이 되었겠지만, 당황한 김에 정규급 타이탄의 방어력을 상상해 버린 토지에르는 그걸 파묻어 버렸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땅이 다시 굳어지자 튀어 나온 것이었다.
흙투성이가 되어 엉망진창인 상대를 바라보며, 카프록시아는 이제 검이 있기에 저따위 타이탄쯤 겁날 것도 없다는 듯 여유 있게 다가갔다. 밖으로 튀어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눈앞에 엄청난 강적을 맞이한 크메룬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상대 타이탄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강대한 마나의 기운을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이다.
순간, 카프록시아가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자 먼지가 피어올랐고, 순식간에 크메룬의 코앞으로 접근한 카프록시아는 그 거대한 방패로 상대를 두들겼다. 막강한 힘에 타격을 입은 상대의 방패가 위로 튕겨 오르는 순간, 카프록시아의 검은 크메룬의 가슴을 꿰뚫었다. 곧이어 크메룬의 거대한 덩치가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뒤에서 튀어 나왔던 타이탄들을 몽땅 처치한 카프록시아는 급히 이탈했던 전장으로 돌아갔다. 아직도 평원에서는 수많은 타이탄들이 얽혀서 각종 무기로 상대를 두들겨 대고 있었던 것이다.
개선 행렬
“왜 이렇게 밖이 소란스러운 거지?”
소녀의 말에 세린이 방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예, 언제 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스바시에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대요. 오늘 원정군 사령관이신 크로아 공작 전하께서 돌아오시기에 개선 축제(凱旋祝祭)가 열린답니다, 주인님.”
“그럼 토지에르도 돌아오겠군.”
“예? 토지에르 나리는 벌써 돌아오셨는데요? 일주일 전에 뵈었어요. 굉장히 바쁘신 것 같기도 하고……. 피곤한 표정으로 걸어가시는 걸 봤는데요.”
사실상 일주일 전의 대회전에서 스바시에 왕국은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공작이 지금에야 돌아온 이유는 잔당들의 처리 등 점령지에서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지에르는 스바시에에서 노획한 고철 타이탄들을 수거해다가 새로운 타이탄들을 제작해야 했기에 급히 돌아와 있었다.
“흐음…….”
“축제 구경 안 하실래요? 오늘 있을 개선 축제는 정말 화려할 거라고 하더라구요. 준비한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는데요? 빨리 가요.”
“나는 시끌벅적한 건 별로 안 좋아하니까 너 혼자 가거라.”
“에이, 주인니임. 그러지 마시고 구경 가요. 예?”
“싫다니까 그러네. 그건 그렇고 목욕물이나 받아 놓고 가.”
단호한 주인의 태도에 풀이 죽은 세린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예.”
다크가 목욕을 끝내고 나왔을 때 세린은 아직 방에 있었다.
“아직 안 갔냐?”
“할 건 하고 가야죠. 엎드리세요.”
세린은 올리브유를 손에 바르고 다크의 근육을 부드럽고도 세심하게 마사지해 주었다. 그런 후 주인에게 새로운 옷가지를 가져다주고는 옆방으로 갔다.
다크는 세린이 나갔으니 수련이나 좀 더 해야겠다는 생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지만, 옆방에서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아주 들으라는 듯 세린이 크게 떠들어 댔기 때문이다.
“아, 축제 구경하면 좋을 텐데, 왜 구경을 안 하시겠다고 그러셔? 뼈 빠지게 일해 주는 노예를 위해서 구경 좀 시켜 주면 어때서? 아무리 싫다고 해도 그건 너무하잖아. 주인을 놔두고 노예가 밖으로 돌아다닐 수 없다는 걸 잘 알 텐데……. 혼자서 구경하라고 하는 건 나보고 구경하지 말라는 거나 똑같잖아. 만약 내가 자리를 뜬 게 발각되면 토지에르 나리에게 죽도록 맞을게 뻔한데…….”
세린이 이렇듯 당차게 나갈 수 있는 건 노예의 혼잣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숙녀로서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약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대놓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혼잣말인 경우에는 어떤 소리를 떠들어도, 실례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걸 참고 들어야만 했다. 그래야 ‘귀부인’이나 ‘숙녀’라는 호칭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다크도 세린이 한 번씩 그러는 걸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리저리 알아본 결과 그것이 이곳 귀족층에서 지켜야 할 덕목에 들어간다는 걸 알았다. 얄미운 노릇이었지만 그녀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얌전한 숙녀가 되려면 그 잔소리를 참아 줘야만 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치명적인 논리상의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는데 다크가 숙녀였던가?
“으으윽! 도저히 못 참겠다! 세린!”
그러자 옆방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
“너 계속 떠들면 가죽을 벗겨 버린다. 알겠어?”
그러자 경악한 세린이 뛰어 들어왔다.
“어머, 어머, 세상에……. 그런 말은 숙녀로서 도저히 입에 담지 못할 천박한 말투라구요. 제발 그 상스러운 말투 좀 고치세요. 그리고 숙녀는 절대로 노예의 혼잣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죠.”
세린은 당연하다는 듯 반박했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미소뿐이었다.
“나는 여자가 아니야. 그렇기에 숙녀도 아니야. 또 숙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어. 정말 너, 죽고 싶냐? 응?”
다크가 도저히 어린 소녀라고는 볼 수 없는 매서운 살기를 뿜어내며, 살며시 한 손으로 세린의 목 윗부분을 잡고는 슬슬 쓰다듬자 세린은 공포에 질리기 시작했다. 그 기세로 봤을 때 목이 비틀리든지 아니면 졸릴 가능성이…….
“…….”
“이게 귀엽다고 봐줬더니 정말 죽고 싶어? 다시는 내 앞에서 숙녀니 여자니 하는 말 하지 마. 나는 그 말을 제일 싫어하니까, 알겠지?”
세린이 겁에 질려 떠듬떠듬 대답했다.
“예, 예.”
“이만 가 봐.”
세린이 부리나케 옆방으로 도망치자, 다크는 이제야말로 수련을 하려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자신으로서는 가장 열 받는 게 여자가 된 것인데, 그걸 들고 떠들어 대다니……. 내 수련이 조금만 얕았어도 진짜 가죽을 벗겨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가 다크의 생각은 조금 더 발전했다.
‘전에 팔려고 내놓은 묘인족 소녀는 분명히 꼬리가 있었다. 하지만 세린은 꼬리가 보이지 않아. 꼬리는 어디 갔을까? 허리에 돌돌 말고 있나? 아니면 저 긴 치마 안에서 축 늘어져 있나? 그때 묘인족 소녀의 꼬리와 귀에 돋아난 털이 꽤 뽀송뽀송하니 부드러워 보이던데 몸에도 그런 털이 있을까? 털이 있다면 가죽을 벗겨 놓으면 따뜻할지도…,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수련, 수련…….’
태허무령심법의 구결에 따라 천천히 기를 돌리자 몸의 감각은 더욱 예민해졌다. 더욱 깊이 수련에 들어가면 정신이 집중되면서 외부의 자극이 차단되겠지만, 그 직전의 상황에서는 매우 예민해지게 된다. 이때 그녀의 예민해진 귀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길, 또 짜고 있군. 무시하고 수련을……. 으윽! 제기랄 못 참겠다. 공력이 얕으니 귀를 틀어막을 수도 없고, 저년을 죽여 버리든지 팔아 버리든지 해야지 원…….’
씨근거리며 다크는 옆방으로 쫓아갔지만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처량하게 훌쩍거리고 있는 세린에게 튀어 나간 말은 의외로 부드러웠다.
“또 울고 있구나. 너 계속 울어 대면 팔아 버린다.”
세린의 물기 어린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이 주인은 맨날 할말이 궁색해지면 팔아 버린다고 위협하는데, 그게 말뿐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엉? 웃어? 주인의 말이 같잖게 들리냐? 이게 아직도 맛을 다 못 본 모양이군……. 에휴, 그래, 네 마음 내가 알지. 너도 참 성질 더러운 주인 만나서 고생이 많지?”
다크는 세린을 토닥여 주었다.
“그만 울고 같이 구경이나 가자. 아이고, 내 팔자야.”
다크가 세린과 함께 밖으로 나오자 언제나와 같이 실바르도 멀찌감치 따라왔다. 왕궁의 모양이 약간 달라져 있었다. 궁이야 변한 게 없었지만 궁으로 들어오는 정문 주위의 좌우에 다섯 대씩 열 대의 거대한 덩치의 타이탄들이 서 있었다. 붉은색과 푸른색을 화려하게 칠했으며, 방패와 그 두터워 보이는 갑옷 여기저기에는 여러 가지 문장들이 그려져 있었다.
“와! 주인님, 정말 멋지죠? 저게 타이탄이에요.”
언제 울었느냐는 듯 한껏 들떠 있는 세린을 씁쓰레하게 바라보며 다크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나도 알아.”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넘쳐났고, 여자들은 저마다 작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그 바구니 안에는 꽃잎이 들어 있었는데, 아마도 저거 딴다고 산골짜기를 꽤나 돌아다녔을 것이 분명했다.
세린에게 이끌려 한참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이윽고 개선군(凱旋軍)들이 당당하게 도로를 가로질러 행진해 들어왔고, 사방에서 여자들이 바구니의 꽃잎을 그들에게 뿌렸다. 주민들이 환호하자 갑주를 걸친 군인들은 더욱 자신들의 전공을 자랑하듯 굳건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행진했다. 이번 전쟁에 자신들이 없었다면 승리할 수 없었다는 듯…….
전쟁에 투입되었던 군대의 대부분은 점령지나 국경으로 보내졌고, 개선 행진에 동원된 병사는 5천도 되지 않았다. 특히나 점령지의 불순분자들, 즉 게릴라들과 험한 지형에서 싸울 때는 중장갑을 지닌 군대는 필요가 없었기에 개선 행진에 동원된 병사들은 대부분 중갑주를 착용한 병사들이었다. 중갑 기병, 중갑 보병이 지나가고 나자 마지막으로 제각각의 무장을 갖춘 용병대가 지나갔다. 다크는 혹시나 하고 용병대를 쭉 훑어봤지만 아는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팔시온 일행은 어디로 간 걸까? 토지에르의 말로는 용병대에 있다고 했는데, 아직 점령지에 남아 있나? 나중에 토지에르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이봐요, 아가씨.”
“예?”
다크가 상대를 바라보자 상대는 김샜다는 표정이었다.
“이런, 어린 애잖아. 눈이 삐었나? 아무리 뒷모습이지만 내가 착각을 하다니…….”
다크는 투덜거리고 있는 상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상대는 여행자들이 흔히 입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망토 안에는 잘 손질된 반들반들한 가죽 갑옷이 보였고, 허리에는 제법 근사한 롱 소드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다크의 시선을 잡고 있는 것은 상대의 제법 잘생긴 외모와 황금색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호색한을 가장하고 있는 저 눈동자 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느낌. 고수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그 힘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봐,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는 어린 애는 안 건드린다구. 너 혹시 언니 없냐? 너 얼굴만 봐도 네 언니는 보증 수표일 텐데…….”
“없어요.”
“쳇! 좋다 말았군. 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오! 저쪽에 괜찮은 아가씨가 있군. 꼬마야, 만나서 반가웠다. 안녕!”
다크는 사람들을 헤치면서 멀어지고 있는 상대의 등을 멍하니 바라봤다. 저렇듯 상당한 실력을 갖췄을 것으로 짐작되는 인물들이 한 번씩 보이는 걸 보면, 이 나라가 꽤나 대단한 나라인지도…….
“주인님, 왜 그러세요?”
세린이 옆에서 말을 걸었기에 다크의 상념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구경 다 했으면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