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화 (143/930)

승전 무도회

“흑흑흑, 주인님. 저 좀 살려 주세요. 제발∼.”

세린은 다크를 잡고 사정하고 있었고, 다크는 침대에 걸터앉아서는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퉁명스레 대꾸했다.

“닥쳐! 누가 너보고 죽으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금 죽으라고 하시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군소리하지 마. 나는 안 간다고 했으면 안 가.”

“주인님이 무도회에 안 가시면 토지에르 나리가 이번에는 진짜 제 가죽을 벗기실 거라니까요.”

“너는 내 거니까 그 영감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으니 안심해.”

“하지만 토지에르 나리는 주인님의 상관이시잖아요. 주인님이야 괜찮다고 해도 저는……. 엉엉, 내일 죽을 게 분명해.”

“이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수련 좀 하자. 수련! 빨리 밖으로 안 나갈래? 정말 팔려 봐야 정신을 차릴래? 토지에르만 무섭고 나는 안 무섭냐? 이게 정말 가죽이 벗겨지도록 두들겨 맞고 싶어서…….”

다크가 말을 멈춘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앙탈할 힘도 없는지 울면서 옆방으로 건너가는 세린의 뒷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사실 무도회 참석권은 귀족급에게는 다 주어지는 것이고, 거기 참석하든 말든 그건 자기 마음이었다. 문제는 이게 황제가 연 대규모 승전 축하 무도회였고, 또 그런 비중 있는 무도회에 꼭 가야 되는지, 가지 않아도 되는지를 세린이 명확히 알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꼭 가야만 하는 거라면 거기 불참한 다크야 잘 몰라서 안 갔다고 치더라도, 그녀를 보내지 않은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쏟아질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엉엉,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그래도 죽기는 싫다구요, 엉엉…….”

훌쩍거리는 세린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리는 가운데, 다크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길, 그래! 가 주지! 가 주고 말 테닷!”

이런 우여곡절 끝에 다크가 무도회장으로 떠난 건 무도회가 시작되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다크는 건성으로 세린에게 설명을 좀 듣기는 했지만 춤(dance)이라고는 전혀 몰랐기에, 방명록에 자신의 이름만 기록해 두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들어가는 거야 체크를 하겠지만 설마 나가는 시간까지 체크할까? 또 나가는 시간까지 체크한다고 해도 도중에 누구하고 뭐 했는지까지 기록하는 놈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한두 명 초대하는 것도 아니고…….

다크는 무도회장으로 가면서 중원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매우 특이한 음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무림에 있을 때도 금(琴 : 거문고)이나 적(笛 : 피리) 같은 걸 꽤 다뤄 봤기에, 이 특이한 악기에 흥미가 동하는 것은 당연했다. 소리만 들어서는 악기의 종류가 다양한 것도 같았고, 듣기에도 좋았기에 어떤 악기인지 또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천히 정원을 가로질러 정문 가까이 다가가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얼굴색이 약간 붉어졌다.

“으아흥, 으으으으흥, 으으응… 아아앙…….”

아주 낮으면서도 간드러지는 듯한 신음 소리. 이 소리가 뭔 소린지는 뻔한 노릇이었다. 그 소리들은 다크가 걸어가는 길의 좌우에 펼쳐진 정원의 여기저기에서 아주 낮게 들려왔는데, 아무래도 나무들을 2미터 정도 높이의 미로처럼 만들어 놓은 이 괴상하게 생긴 정원의 용도를 십분 활용하는 인물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무도회장으로 들어가는 통로에는 높은 가로수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그 가로수에서 2미터 정도 떨어져서 양쪽에 이 미로 같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 정원의 바닥에는 폭신한 잔디까지 심어져 있으니 일 벌이기에는 매우 적합한 장소였으리라. 세린도 다크의 뒤를 따르면서 귀를 쫑긋거리는 걸 봐서는 그녀의 귀에도 이 자극적인 소리가 들리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고양이는 후각보다는 청각과 시각이 뛰어난 동물이니까 그게 당연한지도 몰랐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은 다크는 어쩔 수 없이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데, 길옆의 가로수 위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리더니 뒤따라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휘유우우∼ 어디를 가시나요? 아가씨?”

다크는 약간 당황해서 나무 위를 쳐다봤다. 그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그녀는 나무 위에 사람이 있다는 걸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로 기척을 숨길 수 있다면?

“에잉? 어린 애잖아. 어? 낯이 좀 익은 것 같은데, 구면이었나?”

남자는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 다크 앞에 섰다. 공식적인 무도회라도 여기서는 검을 휴대할 수 있는지, 허리에는 낮에 봤던 그 근사해 보이는 롱 소드가 매달려 있었다.

“글쎄요?”

“아, 참! 낮에 거리에서 봤었는데, 깜빡했군. 보통 부모들은 15세 정도는 되어야 무도회에 보내 줄 텐데, 너희 부모는 아주 개방적인 성격을 지니신 분들인 모양이군. 어라? 그런데 어떻게 보호자도 없이 혼자 왔냐?”

“여기 있잖아요.”

다크가 뒤에 서 있는 묘인족을 가리키자 사내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묘인족이 보호자가 될 수는 없지.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동행이 없으면 함께 들어가자. 나도 일이 있어서 늦게 왔더니 괜찮은 여자는 딴 놈들이 다 꼬셔 버려서 말이야. 그냥 돌아갈까 말까 궁리 중이었다구.”

사내는 손을 내밀었다.

“자, 가실까요? 아가씨?”

‘놀고 있네! 뭐 딱히 저런 데 가서 할 짓도 없으니 같이 가 볼까?’

사내와 함께 두 개의 문 중에서 처음 들어가는 손님들을 위한 문으로 들어가자 세린은 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에게 초대장을 줬고, 그 사내 또한 초대장을 건넸다. 정원으로 바람을 쐬기(?) 위해 나가는 남녀들을 위한 문은 따로 마련되어 있었지만 그쪽에는 급사가 없었다. 이 문으로 들어가며 급사에게 초대장을 줘야만 방명록에 이름이 기입되고, 누가 출석했는지 체크가 되는 것이다. 다크와 그 사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초대장을 보면서 소리쳤다.

“다크 크라이드 남작님과 코린트 제국의 까미유 드 크로데인 백작님이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그 두 남녀에게, 특히 그 남자에게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약간의 증오와 두려움이 얽힌 시선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애써 그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서로 떠들어 대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했다.

“별로 시선이 곱지 않지?”

“좀 그러네요.”

“이래서 크라레스에는 별로 오고 싶지 않았는데……. 참, 그런데 너 고아냐?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그건 왜 묻죠?”

“남작 영애(令愛 : 딸)라고 부르지 않고 남작이라고 불렀잖아. 그렇다면 결론은 무남독녀에 고아뿐이지.”

그 말에 다크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런 질문은 좀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미소를 지으며 말했기에 사내는 처음에는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사내는 한참 생각해 보더니 갑자기 얼굴이 벌게졌다. 이제야 그의 궁금증을 채우기 위한 질문이 뜻하는 바를 깨달았던 것이다.

“아……. 미안, 미안. 의문점이 생기면 앞뒤 생각을 못 한다니까. 미안하다. 안 좋은 일을 물어서……. 어린 나이에 충격이 컸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소녀의 안색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가지고서야 매우 둔감하다는 말을 듣지 않아요?”

그 말에 사내는 피식 웃었다.

“사실 한 가지에 미치다 보면 딴 데는 둔감해질 수밖에 없지.”

“뭐에 미쳐요?”

“검(劍)……. 한쪽으로 천재 소리를 듣다보면 다른 쪽으로는 완전 멍충이 소리를 듣는 게 정상이니까. 이러지 말고 저기 앉자.”

세린은 이런 곳에 들어올 자격이 못 되기에 하인들이 대기하는 장소로 갔고, 그들은 한쪽에 놓인 테이블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그 남자는 재빨리 음료수와 과자 몇 개를 접시에 담아서 가져왔다.

그들이 잠시 얘기를 나누는데,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단발머리 여자가 다가와서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앉았다.

“역시 까미유는 재주도 좋군요. 어디서 이런 예쁜 아가씨를 만났죠?”

“이쪽은 지레느, 지레느 드 카브리에 양이야. 이쪽은 다크 크라이드.”

“반가워요.”

“예, 저도…….”

잠시 얘기를 해 보니 이 두 남녀는 이번에 코린트 제국에서 크라레스 제국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보낸 사절단의 일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코린트는 크라레스가 전후에 어떤 식으로 행동할 것인지, 또 크라레스 궁정의 분위기는 어떤지, 이번 전쟁을 눈감아 준 대가로 어느 정도의 진상품을 바칠 것인지 등등 궁금한 점도 많았고, 또 압력을 가할 것도 많았기에 사절단을 파견한 것이었다. 만약 크라레스에서 겨우 작은 땅덩이 하나 집어 먹었다고 반 코린트 기운이라도 팽배해진다면 어떤 이유를 붙여서라도 박살 내 버릴 계획이었다.

30여 분 정도 대화를 나누다가 이만 돌아가겠다고 다크가 일어섰다. 다크가 문을 나서자 지레느는 재빨리 까미유에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저 꼬맹이는 누구야? 도대체 정체가 뭐야?”

“글쎄, 나도 오늘 낮에 거리에서 만났을 뿐이니까 잘 몰라.”

“그런데 네 취향은 저런 어린 애가 아니잖아. 이상하게 풍기는 분위기가 어린 애 같지 않았지만……. 엘프처럼 말이야. 그렇지만 저 애는 엘프도 아닌 것 같던데, 시간을 꽤나 할애하면서 정성을 쏟는 거 보면 뭐 켕기는 게 있지?”

그 말에 까미유는 살며시 목소리를 더 낮췄다.

“이상한 점이 있기는 해. 묘한 분위기를 풍긴단 말이야. 상당히 성숙한 분위기 같기도 하고, 또 겉모양과 달리 연약함은 보이지 않아. 슬며시 여자답지 않은 강인함이 풍긴단 말이야. 어쩌면 상당한 수준의 검객인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말이야. 내 눈이 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에 지레느는 역시나 하는 미소를 띠었다.

“검객이 아니라 정령술사야.”

“정령술사?”

“응, 네가 그 애하고 들어올 때부터 저 애한테서 정령의 냄새가 나서 주의를 기울였지. 정령술사만이 정령술사를 알아볼 수 있잖아. 어쨌든 꽤나 강한 정령술사인 것 같았어. 정령의 냄새가 상당히 강렬했거든.”

“어느 정도인데?”

“글쎄, 그게 알기 어렵다니까. 뭔가 강력한 정령의 냄새가 희미하게 풍기기는 하는데, 그게 어떤 정령인지는 확실하게 모르겠어.”

“불과 바람의 정령은 아니라는 말인가? 네가 부릴 수 있는 건 불과 바람의 정령이잖아. 흠, 이럴 줄 알았으면 지레인도 데려오는 건데 잘못했군.”

지레느 자매는 타고난 정령술사들이었다. 언니인 지레인은 대지와 물의 정령을, 동생인 지레느는 불과 바람의 정령을 부릴 수 있었다. 지레느의 경우 불의 하급 정령 살로스(Salos), 중급 정령 살라만더(Salamander) 그리고 바람의 하급 정령 실피드(Sylphid)를 부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둘이 모인다면 뇌전을 빼고 모든 종류의 정령을 부릴 수 있었다.

“언니를? 언니는 대지와 물의 정령을 부릴 수 있으니까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언니가 부리던 정령의 냄새는 내가 다 안다구. 그 아이에게서 나던 정령의 냄새는 대지의 하급 정령 노움(Gnome)이나 물의 하급 정령 운디네(Undine), 중급 정령 닉스(Nix)도 아니었어. 정령술사는 한 번 맡은 정령의 냄새는 절대 잊지 않으니까 이건 신뢰성 있는 말이라구.”

“그럼 뭐야? 뇌전의 정령을 부린다는 말인가?”

“그 외에는 답이 없지. 설마 하급 정령은 부리지 않고 중급 정령, 또는 정령왕만 부린다면 몰라도…….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돼. 중급을 부른다면 하급은 언제든 부를 수 있다는 뜻이니까 말이야.”

“그래서 저런 당당한 분위기가 나오는 건가? 불의 정령과 마찬가지로 뇌전은 완전히 파괴적인 정령이니까 말이야.”

“뇌전의 정령을 다룰 줄 아는 정령술사는 많지 않아. 뇌전의 정령은 꽤나 친해지기 어려운 존재들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일단 친해지면 상당한 득이 있어. 상대하기 매우 까다롭거든. 불의 정령을 검에 씌워 봐야 파이어 블레이드(Fire Blade : 화염 칼날) 정도의 효과밖에 얻을 수 없지만 뇌전은 다르지. 검이나 강철 방패로 막으면 전기가 타고 들어오니까 말이야. 드래곤 본이나 목검(木劍), 또는 나무 방패를 쓰지 않는 한은 충격을 막기 힘들어. 아니면 처음부터 매직 실드로 감싸고 싸우든지.”

“그래서 고아인데도 대접이 좋은 모양이군. 납치할까? 쓸 데도 많을 텐데…….”

그 말에 당황한 지레느가 숨을 죽이며 반박했다.

“미쳤어? 그러다가 발각되면 아주 곤란해.”

“큭큭, 농담이야.”

“그런데 저 아이 좀 이상한 점은 있어.”

“어떤?”

“보통 정령술사가 단 한 종류의 정령만 다루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 대부분이 두 가지 이상의 정령을 다루지. 상극(相剋)의 정령만 피한다면 가능하거든. 불과 물, 불과 대지의 정령은 완전히 상극이야. 이렇게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정령들이니까 이것만 피한다면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지. 그러니까 저 아이가 최소한 한 종류 이상의 다른 정령도 부릴 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거야.”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그 말은 한 종류 정령과의 친화력이 매우 크다는 말과 같지.”

“…….”

“멍청한 표정 짓지 마. 그토록 하나에 대한 친화력이 크다는 건, 오랜 시간 수련한다면 정령왕의 힘까지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말이야.”

“정, 정령왕의 힘이라고?”

“응, 뇌전의 정령왕 카르스타(Karstar)의 힘. 사실 정령왕을 마음대로 소환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 힘의 일부를 빌려 쓸 수 있다는 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나지. 거의 7사이클급 전격의 힘을 낼 수 있으니까 말이야.”

“…….”

7사이클이란 말에 상대의 안색이 굳어지는 걸 보며 지레느가 미소 지었다.

“잘 키우면 대단한 재목(材木)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 안 될 가능성도 많지만…….”

“…….”

한동안 말이 없던 까미유가 살며시 입을 열었다.

“납치하자.”

“미쳤어?”

“쉿! 7사이클급이라면 엄청난 거라구. 거기다 고아라니까 잘만 달래면 코린트를 위해 충성을 다 바칠걸? 밑져 봐야 본전인데…….”

그 말에 지레느도 약간은 솔깃한 듯 중얼거렸다.

“글쎄…….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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