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5화 (145/930)

정령왕 나이아드

끼기기기기긱!

오랫동안 열리지 않던 철문이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며 열리자 그 틈을 타고 안으로 빛이 들어왔다. 사실 그리 강한 빛도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 어두운 공간에서 생활한 그들에게 그 빛은 너무나 강렬했다.

“모두 나왓!”

오랜 시간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시드미안 일행은 갑작스런 상대의 행동에 어리둥절해졌다. 장시간 감옥 안에 가둬 두고 모른 척할 때는 언제고, 모두 밖으로 끄집어내기에 혹시 고문이라도 하려나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끌려간 곳은 놀랍게도 목욕탕이었다. 목욕탕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발사는 그들의 길게 자란 머리카락과 수염을 깨끗하게 다듬어 주었고, 그다음은 따뜻한 목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깨끗하게 씻어. 옷은 여기 있으니까, 다 씻은 후 이 옷으로 갈아입도록!”

정말 오랜만에 뜨뜻한 물에 몸을 담그면서 그들은 저마다 머리를 굴리느라고 바빴다. 왜 갑자기 감옥에서 꺼내 목욕에, 깨끗한 옷을 입힐까?

“혹시 처형하려는 게 아닐까요? 죽이기 전에는 웬만한 소원은 들어준다던데…….”

“기분 나쁜 소리 하지 마!”

시드미안은 스미온의 말을 묵살했지만 아무래도 속이 찜찜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빼앗길 만한 것은 다 빼앗겼으니, 이제 놈들이 자신들을 죽인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시드미안은 죽기 전에 가족들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부인과 겨우 다섯 살밖에 안 된 예쁜 딸을 말이다.

어쨌거나 그들이 몸을 다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곧장 식당으로 안내되었고, 제법 먹을 만한 음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고기라고는 먹은 기억도 없었기에 그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마지막 만찬을 즐길 수밖에 없었다. 감시병은 몇 명 되지도 않았지만 마나의 응집을 방해하는 팔찌가 채워진 지금 도망치려고 해도 무장한 감시병들을 해치울 자신은 없었다. 그리고 여기가 어딘지도 알 수 없는 판에 어떻게 도망친다는 말인가?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서 안내된 곳은 제법 널찍한 회의실이었다. 왜 상대가 이런 곳으로 자신들을 끌고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 의아하게 생각하기에는 충분했다.

“놈들이 왜 여기로 데려 왔을까요?”

“안토니, 혹시 짚히는 게 없나?”

“글쎄요, 시드미안 경. 어쩌면 여기서 최후 심문을 한 후 처형하려는 건지도…….”

이때 문이 열리면서 마법사 한 명과 기사 한 명이 들어왔다. 그 기사는 그들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바로 자신들을 잡아온 프로이엔이었기 때문이다. 마법사는 미소 띤 얼굴로 그들을 쭉 훑어본 후 자리에 앉았다.

“반갑군요, 모두들……. 여러분은 여기가 어딘지 매우 궁금할 것입니다. 여기는 크라레스 제국이지요. 본국은 가증스러운 코린트 제국을 무찌르기 위해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여러분들이 잡혀 온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원래는 여러분들을 처형해 버릴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사건이 하나 터지면서 여러분이 우리에게 협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회유해 볼까 해서 이렇게 부른 것이죠.”

“놀고 있군.”

“닥쳐라, 우리가 어떻게 네놈에게 협조한다는 거냐?”

“왜 협조를 못합니까? 당신들이 살 수 있는 길은 협조하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협조하신다면 압수했던 안토로스들도 돌려드리겠습니다. 돌아갈 곳도 없는 지금, 저희들과 함께 반 코린트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국왕과 국민들의 뜻에 따르는 길이 아닐까요?”

“헛소리하지 마라. 그게 어떻게 국왕 전하와 국민들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는 말이냐? 트루비아 왕국은 코린트의 속국이자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다. 어찌 코린트를 배신하는 것이 전하와 국민들의 뜻에 부합하는 게 되겠는가?”

그 말에 마법사는 피식 웃었다.

“현재 트루비아 왕국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깨끗하게 멸망했죠. 코린트는 트루비아를 마신의 꾐에 속아서 사악한 짓을 저지르는 부도덕한 국가로 선포했죠. 코린트의 타이탄 20여 대와 2개 보병 사단, 그리고 코린트를 지지하는 동맹국들이 보낸 타이탄 50여 대가 트루비아를 완전히 폐허로 만든 것이 일주일 전입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은 후 시드미안이 반박했다.

“거, 거짓말하지 마라.”

“이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트루비아의 국왕과 귀족 30여 명은 코린트로 끌려가 황제가 보는 앞에서 ‘피의 광장’에서 참수(斬首)되었지요. 또 왕족들이나 귀족들 중에서 남자들은 모두 처형되었고, 여자들은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참, 그러고 보니 경들의 가족들은…….”

마법사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그들을 훑어봤고, 순간 모두 긴장했다. 만약 저 빌어먹을 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들의 가족 또한 노예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상대는 긴장한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빙긋 웃더니 말을 이었다.

“모두 노예… 신세는 면했죠. 여기 론가르트 단장이 직접 가서 모두 납치해 왔으니까요. 그 가족들이 트루비아가 멸망하는 순간을 봤으니, 나중에 만나 보고 확인해 보세요. 트루비아의 국왕은 다행히 왕자를 대피시키는 데 성공했더군요. 트루비아가 가진 여섯 대의 타이탄과 열두 명의 기사, 세 명의 마법사에게 왕자의 도피를 부탁했습니다. 덕분에 트루비아는 반항 한 번 제대로 못 해 보고 박살 났지만 말이에요.

지금 광분한 코린트는 그들을 죽이기 위해 추격하고 있지만 아직 잡지 못했죠. 사실 잡기가 좀 어려운 것은 코린트 국내도 아니고 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에 마음대로 군대를 투입할 수는 없다는 문제점 때문이죠.”

“우선 가족들을 만나 보고 싶소.”

“좋습니다. 먼저 가족들과 상의를 해 보세요. 그런 후에 다시 의논을 하기로 하죠. 참, 가족을 만나신 후 론가르트 단장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해 주시는 게 좋겠군요. 저 친구, 흔적이 남지 않도록 데려오느라고 꽤나 고생했으니까…….”

다크가 정신을 차렸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방이 캄캄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어두움. 하지만 이 정도에 공포를 느낄 다크는 아니었다. 이때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소녀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아직 변성기에 들어가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잘 분간이 안 가는 목소리였다.

“도망가……. 그가 오기 전에 도망가.”

‘그? 그가 누구야? 왜 도망쳐야 하지?’

도망치기는 싫었지만 이런 어두운 공간에서 싸움을 한다는 건 무리였다. 뭐가 보여야 싸우지. 또 자신의 감각은 아직 완벽한 수준까지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어디로 도망친단 말인가? 사방에 빛이라고는 들어오지 않기에 도망치거나 숨을 장소도 찾을 수 없었다. 또 ‘이런 어두운 공간에서 나를 찾아낼 수 있는 놈이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어둠 저편에서 굵직한 저음이면서도 쉰 듯한, 너무나 음침하고 사악해서 듣기에 거북한 소리가 들려왔다.

“네 발전 속도는 정말이지 놀랍군. 크흐흐…….”

어두운 공간 때문에 놈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엄청난 힘과 위압감, 존재감으로 누군가 어둠 저편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크는 사실 상대의 엄청난 위압감 때문에 공개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는 게 망설여졌지만, 일단 검을 뽑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왼쪽 허리로 손을 가져갔지만 잡히는 게 없었다. 그녀는 당황해서 무의식중에 허리를 힐끗 봤다. 여태껏 못 느낀 거였는데 사방은 어둠에 싸여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의 몸은 선명하게 보였다. 자신이 입은 옷도, 허리띠만이 있을 뿐 검은 채워져 있지 않았다. 자신의 비무장을 눈으로까지 확인한 그녀는 투덜거리면서 맨손으로라도 상대해 주겠다는 듯이 자세를 갖추며 외쳤다.

“네놈은 누구냐?”

“나? 크흐흐흐흐, 네년은 지금 알 자격이 없어.”

“네년이라고? 이 빌어먹을 자식! 찢어 죽여 주겠다.”

“크하하하, 자아는 남자이되, 여자의 육체에 동화되어 점점 자아를 상실하고 있는 바보 같은 년이 감히 고귀하신 나에게 저항할 힘이 있을까?”

그 말에 다크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닥쳐랏!”

“좋아, 말로는 안 통할 것 같으니 우선 네년의 기를 좀 죽여 놓고 대화를 시작하는 게 좋겠군. 크흐흐, 너의 그 보잘것없는 힘을 느끼고 나에게 굴복하라. 아쿠아 소드(Aqua Sword)!”

다크는 엄청난 무언가가 날아오는 것을 느끼고 최대한 빨리 몸을 숙였지만, 그것이 위로 지나가면서 자신의 머리카락 일부를 쑹덩 잘라 놓았다.

‘검인가? 아니면 마법인가?’

하지만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상대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다크는 자신이 여태껏 쌓아 올린 모든 기를 끌어올리며 저항했다.

“안 돼! 그녀를 제발 놔둬요. 그녀는 아직 힘도 없단 말이에요.”

어디선가 둘의 싸움을 말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기분 나쁜 목소리의 주인공은 전혀 멈추고 싶은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또다시 주문을 외웠다.

“아쿠아 애로우(Aqua Arrow)!”

뭔가 위험을 감지한 다크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면서 보호했지만 곧이어 들이닥친 엄청난 충격에 나뒹굴고 말았다. 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그녀의 얄팍한 호신강기를 돌파하고 대여섯 군데의 깊은 상처를 남겼다.

“크흐흐흐, 좋아. 그 정도는 견뎌 줘야 말이 되지.”

그렇게 광기를 부리면서 그놈은 다크를 무자비하게 공격해 댔다. 어둠 속에서 날아오는 그 무언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놈의 무기는 다양했다. 다크가 가진 모든 진기를 끌어올려 형성한 호신강기를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내상을 입힐 정도로 둔중한 파괴력을 가진 것부터 시작해서, 그녀의 옷과 함께 왼쪽 팔을 통째로 숭덩 잘라 버릴 정도로 날카로운 것까지 매우 다양했다. 피를 토하면서 뒹굴고 있는 다크를 공격하면서도 그놈은 광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크하하하! 나에게 복종하라. 네 몸과 마음은 내 것! 나의 종이 되어라. 크하하하.”

팔과 다리가 잘려 나가고 내장이 으깨지고 몸이 찢어지는 가운데서도 다크는 정신을 잃지 않고 놈을 공격할 방법을 궁리했다. 자신의 몸은 잘 보였기에 손발이 잘려나가며 피가 튀는 걸 보는 것은 썩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거기에다가 잘려 나간 후 쏟아지는 지독한 고통……. 그녀는 놈을 정말 갈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 어떤 방법도 없었다. 순간 절망감이, 이제 끝장이라는 절망감이 그녀를 엄습해 왔지만 그녀는 그런 생각을 간신히 떨쳐 버리고 그 절망감을 상대에 대한 증오로 바꿨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진다 해도, 단 한 번이라도 기회가 온다면…, 그 기회를 이용해서 적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육체가 박살 나면서 지독한 통증이 그녀를 덮쳤지만 그녀는 강인한 인내력으로 그걸 참고 견뎌 냈다. 예의 이상한 목소리는 그들 간의 일방적인 싸움을 말리려고 앵앵거렸지만 그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광기에 찬 공격을 받아 냈을까……. 지독한 고통으로 정신마저 희미해져 갈 때쯤 공격이 멈추더니 예의 그 목소리가 비웃는 듯 지껄여 댔다.

“지독한 년, 우선 오늘은 인사차 왔으니까 이쯤 해 두지. 다음에는 널 꼭 취할 것이다. 크하하하…….”

“헉!”

다크가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머리맡에는 세린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비 오듯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아 주고 있었다. 다크는 몽롱한 시선으로 헐떡거리다가 약간 제정신이 돌아오자 힘 빠진 음성으로 물었다.

“여기는……?”

“왕궁 안입니다, 주인님. 몸이 편찮으십니까? 의사를 불러 올까요?”

“아니! 됐어. 악몽을 꾼 모양이군.”

“열은 없으신 것 같은데……. 땀을 너무 흘리셨으니 간단하게 목욕이라도 하고 주무세요. 땀에 옷이 완전히 젖었으니 옷도 새로 갈아 입으시구요.”

“정말, 꿈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사실적인 꿈이군. 흐유…….”

다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악몽

사람은 잠을 자지 않을 수 없다. 다크같이 내공을 수련한 고수의 경우 수면 시간을 보통 사람보다 월등하게 줄일 수 있다는 것뿐이지, 완전히 자지 않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과거 남자의 육체를 가지고 현경의 경지를 쌓았을 때도 잠은 잘 수밖에 없었다. 대신 수면 시간이 매우 짧았기에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한 것일 뿐……. 4, 5일에 한 번씩 2각(30분) 정도만 자면 버틸 수 있는 사람을 누가 자는지 안 자는지 확인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 다크의 몸은 여기서 말하는 마스터, 즉 화경(化境)의 경지에도 올라서지 못한 상태가 아닌가? 그렇기에 매일 몇 시간이라도 수면은 필요했고, 악몽을 꿨던 다음 날도 수련을 하다가 새벽이 되었을 때쯤 아무 생각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다크는 또다시 자신이 어두운 공간 속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몸서리 쳐지는 두려움을 느꼈다.

“이건 꿈이야! 꿈이라고…….”

정말 울부짖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자신의 연륜과 체면 때문에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게 꿈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누가 그랬더라? 꿈일 때는 뺨을 꼬집어 보면 알 수 있다고. 꿈이라면 아프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다크는 자신의 뺨을 힘껏 비틀었다.

“윽!”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이건 꿈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 또 그녀에게 예의 그 앵앵거리는, 아무 도움도 안 되는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망가. 너는 아직 상대가 안 돼. 그와 싸우면 안 돼.”

오히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다크는 버럭 화를 냈다.

“닥쳐! 어디로 도망친단 말이야? 도망칠 곳이나 알려 주고 그딴 소리를 해야지.”

하지만 어쨌거나 다크는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잠시 후면 또다시 만나기 싫은 주인공이 등장할 것이다. 그 전에 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역시 다크의 예상대로 기분 나쁜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크흐흐흐, 어때? 나의 종복이 되기로 결심했나? 하루나 시간을 줬잖아.”

“빌어먹을! 네놈은 누구냐?”

“노예가 주인을 알 필요는 없지. 네년은 나에게 충성하기만 하면 돼. 더 이상 알 필요는 없는 거야.”

“거절한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제발 그녀를 놔둬요. 부탁드려요.”

소녀의 앵앵거리는 목소리는 양쪽 모두에게 묵살되었다. 누구도 그녀의 목소리에 신경 쓰는 사람이 없는데도, 그녀는 계속 싸우지 말 것을 부탁하고 떠들어 댔지만 양쪽 다 그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아직 맛을 덜 본 모양이군. 크하하하, 주인에게 반항하는 노예가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 주마. 죽어라, 으하하하…….”

또다시 어둠 속에서 날아오는 무자비한 공격.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예상하고 있었기에 처음의 몇 번은 피할 수 있었고, 그다음 이어진 두 번의 공격은 호신강기로 튕겨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다음부터는 전날과 마찬가지였다. 살이 찢어지고 다리가 잘려 나갔다. 참을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 증오를 느끼면서 다크는 자신의 몸이 박살 나는 것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상대가 너무나 강했기 때문이다.

똑똑.

곧 예쁘장한 묘인족이 문을 살짝 열고는 귀여운 귀를 쫑긋거리며 나타났다.

“주인은 계시냐?”

그녀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예, 지금 수련 중이십니다. 누구라고 전해 드릴까요?”

“시드미안 일행이라고 하면 알 거야.”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묘인족 소녀는 곧 다시 나와서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시드미안 일행은 자신의 눈을 믿기 어렵다는 듯 놀라운 표정으로 다크를 바라봤다. 그녀는 상당히 많이 변해 있었다. 그 모습은 과거 한 달 동안 술에 절어 있을 때보다 더 비참해 보였다. 홀쭉하게 야위고, 너무나 창백해진 얼굴, 앙상한 손을 보고 그들은 너무나 가엾어서 하마터면 다크를 껴안을 뻔했지만, 상대가 누군지 떠올리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여기 생활이 별로 좋지 못한 거야?”

다크는 피로한 듯한 퀭한 눈에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생활은 괜찮아. 악몽 때문에 잠을 못자서 그래.”

“악몽? 아무리 악몽을 꾼다고 이렇게까지…….”

“나도 놀라는 중이다. 내가 이렇게 나약했었나 하면서 말이야. 그건 그렇고 어쩐 일이야? 너희들도 잡혀 온 거야?”

시드미안은 씁쓰레한 표정을 지었다.

“휴……. 처음에는 잡혀 왔지. 그런데 조금 있다가 사정이 바뀌었어. 내 조국 트루비아가 코린트에게 멸망했기 때문이야. 그 얄미운 토지에르 개자식이 우리들을 불러 말하더군. 자네들의 조국은 멸망했으니 우리와 손잡고 코린트를 무찌르자고. 제길! 그 자식 때문에 트루비아가 멸망한 거나 마찬가지야. 그놈들이 드래곤 하트만 훔쳐 가지 않았다면 트루비아는 멸망할 이유가 없었다구. 그 원인을 제공한 놈이 뻔뻔스레 그런 말을 하다니. 제기랄!

하지만 나는 그 제의를 거절할 수가 없었어. 안 그러면 트루비아의 재건은 꿈도 꿀 수 없으니까 말이야. 그들과 손잡고 우리는 곧장 국외로 탈출한 왕자님 일행을 안전하게 이리로 모셔와야만 했다구. 그 때문에 너한테 바로 연락하지 못하고 떠나서 미안해. 4일 전에야 겨우 도착했어.”

“그래도 일이 잘되었다니 다행이군.”

다크가 모두를 둘러보며 힘없이 웃자 그들도 그녀에게 미소로 답해 왔다. 하지만 그녀를 쭉 날카로운 시선으로 보고 있던 안토니가 궁금한 듯 물었다.

“아까 악몽 때문이라고 했나?”

“응.”

“도대체 어느 정도나 악몽을 꾸면 사람이 이렇게 마를 수 있는 거야? 좀 자세히 설명을 해 봐. 악몽 한두 번 꾼다고 해서 사람이 이렇게 마를 수는 없어.”

“한두 번? 한 달 정도 악몽만 꿔 봐. 매일 몸이 잘리고 피가 터지면서 지독한 고통과 두려움에 떨어 보라구.”

“한 달이나?”

“그래도 놈에게 버티는 시간이 약간씩 늘어나고 있으니까 아직까지 버티고 있지 안 그랬으면 벌써 자살했을 거야. 처음에는 완전히 껌껌한 곳에서 일방적으로 터졌는데, 지금은 조금씩 밝아지고 있어. 어제 꿈에는 놈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았으니까 말이야.”

“아무래도 이상하네. 매일 같은 꿈이라 이거지. 토지에르에게 얘기해 봤어?”

“아니. 그놈도 바쁜 것 같고, 또 그렇게 악몽이 계속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사실 그리 대단한 악몽도 아니었고…….”

그 말에 옆에 있던 세린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노예가 주인과 주인의 친구들이 대화하는 데 끼어들 수는 없었지만, 그녀 또한 자신의 주인이 말라 죽는 건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예의에 어긋나는 걸 알면서도 참견한 것이다.

“대단한 악몽이 아니라니요, 주인님. 매일 시트가 흠뻑 젖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시면서 그게 대단한 게 아니면 도대체 어떤 게 대단한 건가요?”

“조용히 해.”

“어쩌면 토지에르가 건 저주의 부작용인지도 모르니까 토지에르에게 가 보자.”

안토니는 다크를 재촉하더니 시드미안에게 말했다.

“저는 다크하고 토지에르한테 가겠습니다. 경께선 일행들과 먼저 돌아가십시오.”

“알겠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