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화 (146/930)

토지에르도 안토니와 함께 들어서는 다크의 몰골을 보고 놀랐다. 그 놀라움은 곧이어 세린을 향한 분노로 드러났다.

“세린, 이년을 당장…….”

일어서서 나가려고 하는 토지에르를 향해 다크가 싸늘하게 외쳤다.

“그 아이 탓이 아니야.”

“이 정도나 되면 보고를 했어야지.”

토지에르의 반박에 다크가 비웃듯이 말했다.

“세린은 황제가 준 내 노예야. 네 것은 아닌 걸로 아는데?”

“그건, 그렇지만.”

그들이 쓸데없는 걸로 신경전을 벌이자 안토니가 그들을 떼어 놓으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참견했다.

“자자, 일단 앉아서 대화를 하시죠. 토지에르 경, 혹시 경께서 건 저주에 부작용은 없습니까? 악몽 같은…….”

“악몽? 디스라이크 걸려서 악몽을 꾼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처음에야 악몽을 꿀 수도 있지만 시간이 한참 지나서 꾸는 경우는 글쎄…….”

“매일 악몽을 꾼답니다. 그것도 거의 한 달이나 계속…….”

그 말에 토지에르는 다크에게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어떤 악몽인데? 줄거리가 똑같은 거야? 아니면 다른 거야?”

될 수 있으면 꿈의 내용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다크가 대답했다.

“똑같은 줄거리에 겁먹을 바보도 있냐? 처음 시작하면 어둠 속에서 어떤 놈이 공격을 해. 공격 방법은 아주 다양하고 매일 바뀌지. 또 그놈이 말하는 내용도 약간씩은 달라. 하지만 정말 진짜로 그놈과 싸우는 것은 꿈이야. 그 고통이나 소리……. 내가 죽기 직전쯤 되면 공격이 멈추는데, 그러고 나면 잠에서 깨지. 하지만 깨어나서도 방금 전에 직접 당한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르지.”

다크는 토지에르를 보며 씁쓸하게 미소 짓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아직까지 미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야.”

“기억은 있어? 그러니까 전에 당했던 것이라든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상의해 봤자잖아.”

“아니, 기억은 있어. 어제 당한 일이나 놈에 대한 공포 등등 자기 전에 먹었던 주스까지 기억나지. 이상하게도 내 몸이 잘 보이니까 말이야. 몸이 두 토막 나서 자기 전 마셨던 주스가 흘러나오는 걸 보는 기분은 정말, 으이그…….

하지만 이상하게도 놈에게 결국은 죽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안 그래도 당할 거면 속편하게 죽은 다음 일어나면 되는데……. 날아오는 마법에 내 목을 들이대서 순식간에 끝낼 생각은 죽어도 안 들어. 어쨌든 놈을 이기려고 아둥바둥하다가 비참하게 죽을 뿐이지.”

“하, 거참! 그래, 상대가 뭐라고 하던가?”

“맨날 하는 말이야 똑같지. ‘내 노예가 될 거냐?’ 내가 ‘싫어’하고 대답하면, 그놈이 음흉하게 웃으면서 말하지. ‘아직 맛을 덜 봤군. 죽어 봐라.’ 그러면 난 묵사발 나다가 잠에서 깨지.”

“상대의 무기는 뭔가? 검? 창? 아니면 마법?”

“마법.”

“어떤 마법인지 기억하나?”

“어두워서 뭐가 날아오는지는 몰라. 팔 다리가 아주 멋지게 피를 뿜으며 떨어지는 걸 보면 칼날 같은 것도 날아오는 모양이야. 며칠 전에는 목도 떨어져 봤는데, 기분 아주 더럽더군.”

“그렇다면 혹시 주문 같은 건 들리지 않았나?”

“주문이야 당연히 들렸지. 그러니까 그놈이 마법을 쓰는지 알지. 아쿠아 에로우, 아쿠아 소드, 아쿠아 해머, 뭐 그 정도야. 하지만 주문 한 번 외웠을 때 날아오는 숫자나 위력은 매번 바뀌더군. 아쿠아 해머는 보통 한 대 맞으면 호신강기를 찢고 내장을 묵사발 내지. 정말 뼛속까지 그 고통이 울리더군. 혹시 그런 마법 알아?”

토지에르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신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정령 마법이야. 그것도 물의 정령을 이용한.”

다크가 씁쓸한 표정으로 아쿠아 룰러를 가리켰다.

“그러면 범인은 이 녀석이야?”

“그런지도……. 아니, 그럴 거야.”

“하지만 이걸 사용한 후 한동안은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그리고 이놈은 나를 주인으로 택했다고 했잖아.”

토지에르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아쿠아 룰러가 너를 주인으로 택했다는 거지. 정령왕 나이아드가 너를 아쿠아 룰러의 주인으로 인정했다는 말은 아니야. 지금 너는 나이아드의 시험을 거치는 중이야. 그 시험에 통과한다면 주인으로 인정해 주겠지만… 글쎄, 실패한다면 죽음이나 아니면 나이아드의 노예가 되겠지.”

“제길, 이따위 반지 필요 없어.”

다크는 반지를 뽑으려고 했지만 반지는 뽑히지 않았다. 아예 살하고 완전히 붙어 버렸는지 떨어질 생각조차 안 했다.

“잘라야겠군.”

“자른다고?”

“응, 손가락을 잘라 보고 잘리면 다행이고, 만약 안 잘린다면 손목이나 팔목을 잘라야지.”

다크는 잠시 손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좋아. 아직은 견딜 만하니까 좀 더 버텨 보고 나중에 도저히 안 되면 자르기로 하지.”

칠흑의 공간. 쓰러져 있던 그녀가 서서히 눈을 뜨자 또다시 앵앵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도망쳐. 너를 죽일 거야.”

“너는 누구냐?”

“나? 난 아쿠아 룰러, 약속의 증거야.”

“약속의 증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럼 그놈은 누구야?”

“약속을 지키는 자, 나이아드지. 그가 오기 전에 빨리 도망쳐.”

“제기랄, 도망칠 곳도 없다니까 계속 도망치라고 해. 뭐 무기가 될 만한 거 없어? 저 자식은 너무 강해.”

“그런 거 없어. 하지만 있어. 있으면서도 없는 거야.”

“무슨 대답이 그따위야. 네 녀석은 지금 어디서 떠드는 거야?”

“네 왼손에…….”

다크가 왼손을 잡아 보니 거기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반지가 너냐?”

“응, 빨리 도망쳐.”

이때 그 음산한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크흐흐흐, 어때? 생각은 해 봤나? 버틸수록 너만 손해야. 매일같이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서 여태껏 버틴 놈은 네가 처음이다. 그 끈기는 인정해 주지. 하지만 네년의 실력으로 나를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해. 너도 나의 노예가 되어라.”

“헛소리하고 앉아 있네.”

“그러면 죽어 봐라, 크하하하. 아쿠아 소드!”

그와 동시에 다크는 최대한 빨리 앞으로 튀어 나갔다. 퍽 하면서 호신강기를 강타하는 뭔가가 있었지만 이놈을 만난 지도 한 달.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하는 수련은 많은 효과가 있어서 그의 내력은 엄청나게 증가해 있었다. 문제는 이쪽이 강해질수록 저쪽의 공격도 더 강해진다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처음에는 아쿠아 소드도 한 개 정도가 날아왔지만, 요즘 들어서는 대여섯 개가 한꺼번에 날아왔다. 그 파괴력과 날카로움은 거의 검기에 맞먹었다.

일정 시간은 호신강기로 버틸 수 있었기에 막는 즉시 놈에게 뛰어들면서 주먹을 선사할 생각이었다. 요즘 들어 놈의 모습이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또 감각도 그만큼 좋아졌기에 놈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있어 실패란 있을 수 없었다.

놈은 다크가 뛰어 들어오자 곧 그 의도를 파악하고 외쳤다.

“아쿠아 실드(Aqua Shield : 물의 방패)!”

상대의 목을 향해 주먹을 내뻗는 순간 다크의 손은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는 물줄기에 막히면서 산산이 찢겨져 나갔다. 다크는 자신의 손이 가루가 되면서 피가 뿜어져 나가는 모습을 맨정신으로 보기 정말 어려웠다.

“크아악!”

비명을 지르면서도 뒤로 재빨리 물러서는 다크를 보면서 나이아드는 킬킬거리며 비웃었다.

“도망치는 재주는 비상하군. 하지만 그것 가지고는 안 돼! 아쿠아 해머!”

다크는 재빨리 옆으로 피했다. 하지만 옆구리에 엄청난 충격이 그대로 쏟아져 들어왔다. 호신강기가 박살 나고, 갈비뼈 몇 대가 부러져 나가고, 내장이 박살 났는지 입속에서 피 냄새가 올라왔다.

“크왁!”

이제 거의 전투력을 상실한 다크를 나이아드는 아쿠아 룰러가 앵앵거리는 소리를 반주 삼아 차근차근 뭉개 나갔다. 다리가 잘려 나가고 팔이 뭉개졌다. 그녀의 봉긋하던 가슴도 아쿠아 해머 한 방에 잘 다져진 고깃덩이가 되어 버렸다. 그놈은 비명을 질러 대는 그녀를 학대하는 것이 즐거운지 천천히 자근자근 박살 냈고, 제일 마지막으로 목을 잘라서 그 목을 들고 비웃듯이 말했다.

“다음에는 좀 더 그럴듯한 대답을 해 봐. 크흐흐흐.”

반격

다크는 천천히 눈을 떴다. 세린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정도로 다크가 처한 상황이 좋은 게 아니었다.

“주스.”

세린이 재빨리 과일 주스를 가져다주자 그걸 천천히 다 마신 후 컵을 세린에게 넘겨줬다.

또 작살나기는 했지만 최초로 공격을 해 봤다는 게 별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다크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자세히 살펴봤다. 악몽을 꾸기 시작한 후부터는 완전히 틀어박혀 수련만 했기에, 그녀의 피부는 햇볕을 받지 못해 완벽할 정도로 하얀색이었다. 이 하얀 손이 찢겨지며 가루가 되어 흩날리던 영상이 잠시 떠올랐지만 이런 일을 한두 번 당해 보는 게 아니니 요즘 들어서는 별 감흥도 안 났다.

하지만 남의 손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는 기분과 자신의 손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는 기분은 완전히 달랐다. 정말 그 고통에 미치고만 싶었지만 그녀의 굵은 신경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딴 계집애들 같았으면 바로 기절해서 고통받지 않았을 텐데……. 신경이 굵다는 게 좋은 것만도 아니군. 어쨌든 무기도 없이 그런 괴물과 싸운다는 것은 자살 행위야. 놈은 너무나 강해. 하지만 나도 강해. 놈이 무기만 안 쓴다면 이길 수 있어. 그런데 그놈이 무기를 안 쓸 리 없지. 비겁한 자식! 그러면 내가 무기를 쓰는 수밖에 없는데, 뭐로 싸우지? 자기 전에 검을 안고 자 봤지만 효과가 없고……. 아쿠아 룰러는 있지만 아쿠아 룰러의 힘은 나이아드의 힘. 과연 나이아드와 싸울 때 아쿠아 룰러를 쓸 수 있을까?’

“제길! 알 게 뭐야. 아니지, 한번 실험을!”

다크는 아쿠아 룰러가 끼워진 왼손을 앞으로 쭉 뻗으며 막대한 기를 집어넣었다. 그러면서 외쳤다.

“아쿠아 에로우!”

뭔가가 곧장 앞으로 뻗어 나가며 벽에 구멍을 하나 뚫어 버렸다. 다크는 잠시 놀랐지만 놀라고 있을 수 없었다. 그대로 쫓아가서는 구멍을 확인했다. 역시 예상대로 구멍은 물에 젖어 축축했다. 엄청난 속도의 물이 지닌 파괴력. 벽을 뚫을 정도라면 사람의 육신에 구멍 내는 거야 별로 어렵지 않으리라.

“그래, 오늘 저녁에 보자. 개자식! 한번 써 보고 안 되면 더 내공을 쌓아 검기나 강기로 상대해 주겠다.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거야. 크하하하!”

세린은 핏발이 선 눈으로 미친 듯이 웃고 있는 주인을 걱정스런 안색으로 바라보았다.

“누굴 찢어 죽이실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목욕이나 하시죠. 땀에 흠뻑 젖은 옷을 입고 계시면 건강에 안 좋습니다, 주인님.”

다크가 목욕을 끝내고 나왔을 때 방에는 토지에르와 실바르가 와 있었다. 토지에르는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보고 살짝 시선을 돌렸고, 실바르는 얼굴색이 급속도로 뻘게지면서 뒤로 돌아서 버렸다.

“웬일이야? 새벽같이 찾아오고…….”

“이봐, 옷이나 입고 얘기하자구.”

“으응? 그렇군. 세린!”

“예.”

다크는 세린이 건네준 옷을 입고는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무슨 일이야?”

토지에르는 옷을 다 입은 다크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정상인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세린이 아무래도 주인님이 이상하다고 해서 왔지. 아무래도 미친 것 같다고 말이야. 누군가를 찢어 죽이겠다고 외치더니 갑자기 미친 듯이 웃더라나?”

“푸훗! 그래서? 내가 미쳤다면 고쳐 주겠다는 말이야?”

“아니, 최소한 토굴에 가둬 둘 수는 있겠지.”

“눈물나게 고맙군. 별일 없으니까 그만 돌아가.”

“이거 섭섭하군. 그래도 모처럼 찾아온 손님인데 차 대접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돌아가. 나는 한시가 급하니까.”

“평상시와 하는 꼴이 마찬가지인 걸 보면 확실히 미치지는 않은 모양이군.”

토지에르가 이죽거리자 갑자기 신경질 난 다크가 외쳤다.

“뭐얏! 내가 매일 당하는 걸 너도 한번 당해 봐라. 이 빌어먹을 영감탱아. 아쿠아 에로우!”

그와 동시에 다크의 왼손에서 엄청난 속도로 뭔가가 튀어나왔고, 실바르는 황급히 토지에르의 앞을 막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그 검은 채 다 뽑히기도 전에 날아오던 것과 부딪쳤고 “챙!”하는 큰 소리를 내며 부러져 버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충격으로 비틀비틀 뒤로 밀린 실바르는 뒤에 앉아 있던 토지에르와 함께 나자빠지고 말았다.

두 남자가 뻗는 걸 보면서 다크는 잔인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흥! 그 정도는 별것도 아냐. 이제 진짜를 먹여 주지. 아쿠아 해머!”

“쿠엑!”

거대한 물줄기는 비실비실 일어서던 실바르의 복부에 정통으로 명중했고, 실바르는 자빠지면서 그 뒤에 뻗어 있던 토지에르를 뭉개고 지나갔다. 실바르는 이제 문 가까운 곳까지 밀려나가 뻗어 있었고, 이제 엄폐물이 사라져 버린 토지에르는 바닥에 쭉 뻗은 채 자신의 몸 위로 지나간 실바르의 몸무게를 떠올리고 있었다.

“너도 맞아 봐랏! 아쿠아 해머!”

“우왁!”

몸에 정통으로 맞고 쭉 뻗어 있는 토지에르를 보면서 다크는 비웃음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

“단 세 방에 뻗어 버리다니……. 멍청한 자식들. 이봐, 실바르!”

“콜록콜록! 예.”

“저 녀석 데리고 나가서 치료해 줘. 갈비뼈 두세 대는 확실히 부러졌을 테니까…….”

“그러죠.”

두 남자가 물에 흠뻑 젖어서 비실거리며 나가자, 세린은 황급히 빈 물통과 걸레를 가져다가 갑자기 홍수가 나 버린 바닥을 열심히 닦기 시작했다.

스바시에 왕국은 요즘 들어 새로운 형국을 맞이하고 있었다. 왕국이 멸망하면서 거의 대부분의 귀족들이 처형되었고, 그들의 재산은 몰수당했다. 또 어제까지 귀족의 부인으로서 또는 딸로서 떵떵거리면서 살던 여자들은 하루아침에 경매장에 끌려와 팔리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물론 자살한 여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운명을 체념하고 받아들였다. 초기에 기회가 있을 때 자살하지 못하고 사로잡힌 경우, 그녀들이 자살할 수 없도록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막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매우 예쁜 데다가 교양과 예절이 몸에 배어 있어 매우 고가에 판매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울컥하는 기분에 자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람이란 적응력이 매우 뛰어난 동물이다. 그렇기에 한두 달 지나고 나면, 모든 걸 체념하고 자신에게 새로이 다가온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성인 남자는 거의 모두 처형, 어린 남자 애들과 여자들은 모두 다 노예로 팔린다. 돈 안 되는 할멈들은 처형해 버리지만 말이다. 그렇게 스바시에의 귀족들이 사라지고 난 자리를 크라레스의 귀족들이 차지하고 들어왔다. 크라레스는 이번 전쟁이 끝나자 곧 왕국에서 제국으로 칭호를 변경하고, 황제 즉위식을 가졌다. 그러면서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인물들에게 포상하는 형식으로 영지가 하사되었다.

국유지는 황실의 재산이고, 황제가 직접 그걸 관리하지는 못하니 그 대리인으로 파견하는 게 지방 영주들이다. 그렇기에 영주들이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영지는 소유가 아닌 땅을 관리할 권한만을 부여받은 것이기에, 자의로 매매나 증여를 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작위와 함께 관리권이 장자(長子)에게 상속될 뿐이다.

보통 지방 영주들은 황제로부터 받은 영지를 관리하면서 그 땅에서 생산되는 산물의 30퍼센트를 황제에게 바쳤다. 관리권을 위임받았으니 그 결과를 황제께 올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지방 영주들은 따로 수입이 없으니, 황제에게 올리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세금을 농노들에게서 거둬들이는 것 또한 당연했다. 그래야 성도 수리하고, 사병(私兵)들도 거느리고, 딸 시집보낼 지참금도 마련해야 하고……. 뭐 그런 돈이 장만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주, 매우, 진짜로 양심적인 지방 영주들이 사유지(私有地)와 마찬가지로 산물의 50퍼센트 정도를 세금으로 거두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60퍼센트 정도를 거둬들이며, 일부는 농노들이 죽지 않을 정도만 남겨 두고 싹쓸이를 해 가는 빌어먹을 놈들도 있는 게 현실이었다.

그렇기에 국유지에 배속된 농노들은 영주가 바뀌고 안 바뀌고에 신경을 쓰는 게 아니라, 새로 바뀐 영주가 얼마나 세금을 거둬들일 것이냐에 더욱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영주들은 황제로부터 최고 50퍼센트를 초과하는 세금을 거둬들인다면 영지를 몰수하겠다는 통고를 받고 왔기에, 농노들의 환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황제는 지방 영주들에게 25퍼센트의 소득만 바치도록 했기에 영주들도 그 제안을 수용했던 것이다.

또 사유지의 세금은 45퍼센트로 5퍼센트 인하한다고 발표했고, 자유 무역 지대는 세금을 40퍼센트에서 30퍼센트로 인하하여 무역을 더욱 장려했다. 거기에다가 부자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임으로써 그 부족분을 메웠기에 크라레스 황제로서는 손해 본 것도 없었다.

또 전쟁이 끝난 후 들끓게 마련인 산적들과 반 크라레스 잔당들, 몬스터들을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병력을 동원했기에, 민심이 크라레스 쪽으로 급속도로 기울었다. 일단 잘살게 해 준다는 데야 군말이 있을 수 없었다. 또 추가로 세 개의 항구를 자유 무역항으로 지정했고, 이번 전쟁에서 새로이 얻은 해군력을 동원하여 해적을 대대적으로 소탕하면서 무역로를 개척해 나갔다.

점령지에 대한 정책들은 거의 20년에 걸쳐 계획해 온 것이었기에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소모되는 대량의 자금은 귀족들로부터 몰수한 재산과 거상(巨商)이나 대규모 지주들, 또 정부와 결탁하고 매점매석(買占賣惜)을 행한 악질 상인들을 숙청하면서 간단히 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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