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유, 오늘도 이렇게 끝나는군.”
투덜거리면서 다가오는 팔시온을 보고는 미카엘이 씩 웃으며 술병을 들어 보였다.
“술 마실래?”
“응.”
팔시온은 미카엘이 건네주는 술병을 통째로 들고 벌컥벌컥 들이켠 후 다시 그 병을 미카엘에게 내밀었다.
“전쟁보다 이게 더 어렵군.”
그 말에 앞쪽에 앉아 있던 미디아가 참견했다.
“투덜거리지 마. 원래 용병들이 싸우는 전쟁이란 게 이런 거야.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적들, 사방에서 기습을 당해 죽어 넘어지는 전우들. 처음부터 말도 안 될 정도로 편한 전쟁을 해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거지.”
“그래! 너 잘났다.”
투덜거리는 팔시온을 향해 미디아가 정색을 했다.
“잘난 게 아냐. 그래도 콜렌 기사단에서 그래듀에이트 두 명이 지원 왔잖아. 뭐 타이탄은 없지만 그 사람들 정말 잘 싸우더라. 딴 데 가 봐. 그래듀에이트 구경이나 할 수 있을 줄 알아? 그 사람들이야 이런 싸움이 장난이겠지만 우리들로서는 목숨 걸어야 하는 거라구.”
그녀의 말에 미카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건 맞는 것 같아. 토지에르란 마법사, 제법 사람 쓸 줄 안다니까.”
“참, 너 소문 들었냐?”
미카엘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무슨 소문?”
“이번 토벌전 끝나고 난 다음 치레아 국경으로 배치된다고 하던데……. 진짜인지 모르겠어.”
“국경에? 국경선에 용병대가 배치될 리 없잖아. 정규 사단들이 있는데…….”
“아니, 그럴지도 몰라. 만약에 치레아와 전쟁을 한다면 말이야.”
하지만 팔시온은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치레아는 약한 나라지만, 그 뒤에는 아르곤 제국이 있는데 침공할 수 있을까?”
“그건 모르지. 그런데 지미하고 라빈 이 녀석들은 어디 갔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미디아가 묻자 팔시온이 대답했다. 지미나 라빈은 소대장으로서 팔시온의 밑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 낮의 싸움에서 라빈이 부상당했거든. 그래서 지미는 거기 가 있을 거야.”
“자식! 좀 조심하지.”
투덜거리는 미카엘을 향해 팔시온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도 요즘 그 녀석들 실력이 많이 나아졌던데 뭐.”
미카엘도 마주 웃었다. 처음 봤을 때는 어리숙한 멍충이들이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제법 전사(戰士) 티가 났기 때문이다.
“그건 사실이야.”
미디아도 빙긋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쨌건 여기처럼 용병을 쉴 틈 없이 써먹는 곳은 처음이야. 여기 일 끝나면 저리 가라. 저기 일 끝나면 그리 가라. 대신 한 곳에 용병대들을 대량으로 투입하고, 정규 기사단에서 지원까지 해 주고, 만약 안 되면 타이탄까지 지원해서 목표한 곳은 완전히 뿌리를 뽑아 버리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해.”
“여기도 차츰 정이 들어가잖아? 꽤 살기 좋은 고장이야. 대 전쟁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인심도 나쁘지 않고…, 또 용병대에 대해 사람들이 삐딱한 시선을 보내지도 않고 말이야.”
그러자 미카엘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팔시온을 바라보았다.
“용병대에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 게 아니라 이걸 보고 사람들이 안심하는 거야.”
미카엘이 자신의 갑옷에 새겨진 머리가 셋 달린 붉은 드래곤을 가리켰다. 머리 셋 달린 붉은 드래곤은 크라레스 제국을 나타내는 문장이었다. 드래곤을 문장으로 쓰는 나라는 많았다. 금색 드래곤, 은색 드래곤, 녹색 드래곤 등등. 하지만 대가리를 셋이나 붙이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그게 메두사나 뭐 그런 전설에 나오는 악룡들의 생김새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말되네.”
“용병대치고 이렇게 군기가 센 곳은 처음 봤어. 거의 정규군 취급하잖아. 한 번씩 함께 작전하는 정규군 경장 보병대들하고 무슨 차이가 있어?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렇게 군기를 강하게 하는 게 아무래도 용병대를 정규군에 통합할 생각인지도 모른다는 거야.”
미카엘의 말에 팔시온은 약간 놀랍다는 듯 말했다.
“용병대를 정규군에? 그러면 너는 좋겠군.”
미카엘이 인상을 찌그리며 팔시온을 바라봤다.
“왜?”
“너는 그래도 용병대보다는 정규군에 어울리잖아. 단번에 기사가 될지도 모르는데…….”
“야야, 기사가 될 생각이었으면 벌써 되었을 거야. 아무나 한 명 받들기만 하면 되는 게 기사인데 뭐. 나는 한 곳에만 얽매이는 건 싫어.”
“그래도 모르지. 그건 그렇고, 이거 끝나면 치레아 국경선으로 진짜 갈까?”
“그건 아무도 몰라.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아닌 것 같아. 이번에 점령한 점령지도 엄청나게 넓은데, 여기도 제대로 안정시키지 않고 또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없잖아. 안 그래?”
“그것도 말 되네.”
그들의 말을 한참 듣고 있던 미디아가 중얼거렸다.
“다크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참 특이한 애였는데.”
“애는? 70살 먹은 애도 있냐? 큭큭……. 처음에 다크가 여자가 됐을 때 생각이 한 번씩 떠오르면 돌아 버리겠다니까…….”
“하하하, 나도 엄청 놀랐으니까 말이야. 이번 작전 끝나면 모두 휴가 내서 다크나 보러 갈까?”
“그러지.”
“찬성!”
다크는 천천히 일어서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데 오늘은 평상시와 약간 달랐다. 완전히 어두운 것이 아니라 어슴푸레하지만 사방이 보였다.
“그가 오기 전에 도망쳐!”
“닥쳐! 흐흐흐, 오늘은 나도 준비가 좀 되어 있단 말이야. 이 개자식 폼 잡지 말고 빨리 나와.”
그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희미한 음영이 나타나면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크크크, 오늘은 힘이 넘치는군. 그래, 내 노예가 되겠느냐?”
“놀고 있네. 이거나 먹어랏, 아쿠아 소드!”
“아쿠아 바리어(Aqua Barrier)!”
그러자 희미한 음영 주위로 둥근 벽 같은 게 생겨났고, 날아갔던 아쿠아 소드는 거기에 부딪치면서 소멸해 버렸다.
“크흐흐흐, 겨우 얄팍한 거 몇 가지 배워 가지고 감히 이 위대하신 나에게 반항하려 들다니……. 아쿠아 해머!”
그 말과 함께 앞쪽으로 수십 개의 거대한 물줄기가 튀어 나왔다.
“아쿠아 실드!”
퍽!
거대한 물줄기 중 하나가 맹렬히 회전하는 물의 방패에 박히면서 산산이 분해되어 버렸다. 아쿠아 실드가 그 무작스럽던 아쿠아 해머를 간단하게 막아 내자 다크는 자신감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할 수 있어. 개자식! 아쿠아 해머!”
세 개의 거대한 물줄기가 날아갔지만 상대의 방어벽을 뚫지는 못했다.
“크크크, 겨우 그따위 것도 공격이라고 하다니. 이게 진짜 아쿠아 해머다. 받아랏!”
상대의 물줄기는 점점 더 빨라졌고, 그에 따라 그 파괴력도 점점 더 강해졌다. 그렇기에 아쿠아 실드에 더욱 많은 내공을 넣어야만 그놈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내공의 양에 따라 그 회전 속도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크는 내력이 고갈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모든 것이 내공을 넣어야만 발휘되기에 방대한 내공이 소모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좋아, 좋아……. 이제 슬슬 기운이 딸리기 시작하는 모양이군. 그 정도면 많이 버틴 거야. 아쿠아 실드!”
그러자 그 희미한 놈의 주위에 다섯 개의 물 방패가 형성되었다.
“크크크, 아쿠아 실드는 상대의 공격을 막기만 할 수 있는 게 아냐. 어디 한번 막아 보시지. 죽어랏!”
그의 주위에 떠 있던 다섯 개의 물의 방패가 맹렬히 회전하면서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문제는 그 다섯 중 세 개는 일직선으로 날아왔지만, 두 개는 거의 타원을 이루면서 다크의 양쪽 옆구리로 날아왔다는 것이다.
“제기랄!”
그것들이 최대한 가까워졌을 때 다크는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공중에 뜬 상태에서 회전하는 속도가 비교적 느린 원반의 정중앙을 때렸고, 곧 구멍이 뚫렸지만 파괴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뒤에서 다가오는 속도가 빠른 물줄기에 부딪치면서 간단하게 손목이 잘려 나갔다.
“크윽!”
“그 아쿠아 실드는 방어 무기가 아닌 공격 무기야. 그 무엇이라도 잘라 내지. 강철도 잘라 내는 물의 위력을 맛 보거라. 크흐흐흐……. 아쿠아 에로우!”
수십 개의 물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보며 다크는 절망감을 느꼈다. 내공도 거의 고갈되어 방어하기도 벅찼다. 그녀는 간신히 아쿠아 실드를 불러내 물 화살을 막으면서, 그걸 곧장 그놈에게 날렸다. 그러나 아쿠아 실드마저 놈의 방어벽에 부딪치면서 소멸되어 버렸다.
“하루 사이에 제법 쓸 만해졌다고 나를 깔보면 곤란하지……. 크흐흐흐, 네년은 죽었다 깨도 나만큼의 힘을 가질 수 없어. 자, 이제 나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거야. 으하하하하! 아쿠아 해머!”
무리한 승부수
“크허억!”
무심결에 다크는 땀에 흠뻑 젖어 있는 자신의 목을 만졌다. 멋지게 목이 잘리며 튕겨 나간 머리가 땅바닥에 데구르르 구르는 그 느낌은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도 수없이 많은 사람의 목을 잘라 죽였지만 잘린 머리통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특별했다. 붕 날면서 천천히 쓰러지는 자신의 육체가 보이고, 뒹굴뒹굴 구르면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땅바닥을 보는 것도, 또 딱딱한 땅바닥이 자신의 얼굴 여기저기에 닿는 느낌도……. 두 번 다시 당하기 싫은 기분이었다.
“주스나 좀 다오.”
“예, 주인님.”
세린이 가져오는 주스를 바라보며 다크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 상태로는 승부는 뻔했다. 매일 몇 컵은 될 것 같은 땀을 흘려 대니 체력이 온전할 리 없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승리는 불가능했다. 잠을 안 자는 한이 있더라도 며칠 수련을 해서 그놈을 죽이든지, 아니면 포기하고 놈의 노예가 되든지.
“아예 포기해 버릴까……. 너무 힘들군.”
힘없이 말하는 주인을 세린은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름답지만 생긴 것에 안 어울리게 매우 사납고 자신감 넘치는 주인이었는데,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까지 변하게 하는지 너무 궁금했던 것이다.
“세린.”
“예?”
“일주일 정도 수련할 만한 장소를 토지에르에게 물어봐라. 위가 뚫려 있어 햇빛과 달빛이 그대로 들어오는 곳이어야 해. 그리고 사방이 뻥 뚫려 있지만 위험은 없어야 하고. 일주일간 나는 완전히 잠을 자게 될 거야. 그동안 내가 충분히 안전할 수 있을 만한 장소가 있는지 물어봐라. 지금 가 보거라.”
“예, 주인님.”
세린이 달려가고 난 후 그녀는 작고 예쁜 반지를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공짜는 받는 게 아니었는데…….”
“여긴가?”
다크는 토지에르가 안내해 준 왕궁의 꼭대기에 있는 방어탑 위에 서 있었다. 이곳은 적의 동정을 살피고 또 공격하도록 되어 있기에 전망은 그만이었다.
“그래, 여기 말고는 네가 말한 모든 조건에 충족되는 곳은 없어. 여기는 성에서 제일 높은 곳이야. 좀 좁아서 그렇지 남들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또 사방에 병사들이 있으니 안전하고, 원한다면 바로 밑에 그래듀에이트 열 명을 배치해 두지.”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실바르만 밑에 배치해 둬. 사람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이상하니까 말이야. 일주일이야. 일주일 동안만 보호를 부탁해.”
“그 정도야 어려운 게 아니지.”
“몸은 괜찮아? 갈비뼈가 두어 대 부러졌을 텐데…….”
편의를 잘 봐주자 어제의 행동에 약간 미안해진 다크가 쑥스러운 듯 물었지만 토지에르는 그녀의 사과를 간단히 받아넘겼다.
“흐흐…, 그 정도도 치료 못 한다면 궁정 마도사는 때려 치워야지. 수련 잘하게나.”
토지에르가 내려가고 난 다음 다크는 하늘을 바라봤다. 이제 태양이 조금 떠올라 제법 더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곧 가을이지만 아직도 한낮에는 매우 더웠다.
“내 선택이 옳았기를…….”
다크는 중얼거리면서 탑의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녀가 시도하려는 것은 마교의 정통 심법. 그것도 최고 속성으로 내공을 쌓을 수 있다는, 마교에 몸담은 초심자들에게 가르치는 천마구령심법(穿魔究逞心法)이었다. 속성이지만 주화입마의 위험성이 최고로 높았고, 잘못하면 마성이 머리 속에 침투해 마인이 될 가능성 또한 지극히 높았다. 하지만 항복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다크에게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개자식, 두고 보자.”
서서히 내공을 역으로 돌리자 온몸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심법을 계속하면 통증은 곧 사라진다. 통증이 매우 강하다면 누가 이 심법을 쓰면서 주화입마에 걸릴 것인가? 통증은 오히려 잡념을 없애 주는 하나의 도구일 뿐인데……. 문제는 조금 더 있다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심신이 노곤해지면서 잡념이 계속 떠오르는 것이다. 거기서 아차 실수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다크는 여기에다가 북명신공까지 함께 혼합할 생각이었다. 태양의 막강한 양기(陽氣)와 달의 강력한 음기(陰氣), 또 저녁 무렵에 태양은 지고 달이 떠오르기 전 가장 강한 대우주의 기운, 그리고 사방에 퍼져 있는 대자연의 기운까지 몽땅 흡수해서 몸이 박살 나는 한이 있더라도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맹렬한 속도로 내공이 역전하기 시작하면서 온몸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듯한 지독한 고통이 몰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