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2화 (152/930)

어느덧 바쁜 가운데 3주일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아르티어스는 그날도 일찍 일어나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귀여운 소녀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뭔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침마다 소녀가 해 주던 모닝 키스가 빠졌던 것이다. 아르티어스의 딸은 그와 생활한 지 일주일 만에 붙은 버릇대로 상냥하고 귀여운 얼굴로 다가와 자신의 뺨에 가벼운 키스를 해 주며 잘 잤느냐고 인사를 했어야 정상인데, 그냥 말로만 인사를 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도 처음에는 그걸 그냥 무심결에 넘겼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뭔가 빠진 것 같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드래곤의 그 뛰어난 기억력으로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과 어제 아침에 있었던 일을 비교해 봤다. 아르티어스의 머릿속에는 두 대의 영사기가 돌아가듯 화면들이 겹쳐졌고, 곧이어 무엇이 빠졌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또 오늘이 그가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던 그날이라는 것도…….

아르티어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녀에게 물었다.

“기억은 돌아왔나요?”

소녀는 잠시 멈칫했지만 정직하게 말했다.

“예.”

“난 다크가 전에 뭘 했었고, 또 어떤 사람인지는 신경 쓰지 않아요. 또 다크를 잡고 싶은 생각 또한 없습니다. 드래곤이란 원래 강한 만큼 고독해야 하는 존재니까요.”

“꼭 강하다와 고독하다가 연관성이 높아야만 하나요?”

“내가 4천 년 정도 살아오면서 느끼기로는 그랬습니다. 강자는 약자를 친구로 받아들일 아량이 있을지 모르지만, 약자가 강자를 열등감 없이 순수하게 친구로 받아들일 배짱을 가지기는 힘들지요. 그 정도 배짱이 있다면 그는 이미 약자가 아니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당신이 꼭 딸처럼 생각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나를 부모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그 말에 소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르티어스는 절망했다.

“역시…….”

“딸은 어렵지만 아들은 안 될까요?”

소녀의 의외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매우 감동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여태껏 단조로웠던 그의 생애에서 4천 년을 살아오면서 느낀 감동보다 짧았던 이 한 달간의 감동이 더 진했던 게 사실이었다. 아르티어스는 가냘픈,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그 소녀를 살며시 껴안으며 중얼거렸다.

“내 아들아…….”

다크는 아르티어스에게 배우기 시작한 마법이란 것에 꽤나 흥미가 있었고, 또 자신만큼이나 강한 자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매우 만족했기에 기억을 되찾았다고 밖으로 떠돌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의부와 차원 이동에 대해 폭넓은 의논을 했다. 하지만 드래곤인 아르티어스에게도 그에 대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아르티어스가 기억을 되찾은 다크에게 별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씀씀이가 꽤나 마음에 들었기에 다크는 그를 매우 좋아했다. 그 넓은 중원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의지할 만한 존재’를 여기서 찾은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그날 저녁, 늦게까지 잠들지 않고 있는 다크에게 잠의 요정 시시를 보내어 잠들게 만들었다. 그런 후 또 한 번 나이아드를 불러냈다.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아드는 이번에는 우람한 근육질의 2.3미터나 되는 거구의 남자가 되어 나타났다. 나이아드는 그 큰 덩치를 일부러 자랑하듯 근육을 과시하며 거만하게 아르티어스를 내려다 봤다.

“무슨 일이냐?”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불렀다.”

“무슨 부탁?”

“일 년만 우리에게 시간을 다오. 그다음은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상관하지 않겠다.”

아르티어스의 조심스런 말에 나이아드는 비웃음을 터뜨렸다.

“훗! 아쿠아 룰러에게 들으니 용언 마법과 아쿠아 룰러의 사용법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더군. 겨우 그따위 얄팍한 재주로 나를 거역할 수 있다면 큰 오산일 텐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내 아들에게 다만 일 년만이라도 평화로웠던 기억을 간직하게 해 주고 싶다.”

“훗! 평화로운 기억이라고? 좋아, 일 년 정도야……. 내 계획이 일 년 미뤄지는 거지만 마지막 부탁인데 뭐, 그 정도는 들어줘야겠지.”

“왜 너는 저 아이에게 그렇게 집착하는 거지? 또 계획이란 것은 뭐냐?”

“전에도 말했잖아. 여러모로 실험해 봤지만 꽤 쓸 만하다고. 나는 저 아이를 조종해서 인간의 수를 좀 줄일 생각이야. 지금 인간의 숫자는 너무 많거든. 지금 수의 백분의 일 정도가 딱 좋겠지.”

“미쳤군.”

“나는 절대 미치지 않았어. 이건 벌써 대지의 정령왕 다오와도 얘기를 끝낸 거야. 그 녀석도 인간들이 돌아다니면서 그와 내가 이룩해 놓은 것들을 파괴하고 있는 게 별로 마음에 안 들던 참이었거든. 물론 나머지 세 녀석들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으니 이번 계획에 찬성하지 않겠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내가 저 아이를 지배하고, 또 힘을 준다면 그 누구도 우리를 막을 수 없지.”

“다, 닥쳐랏! 그렇게 방대한 살육을 다른 드래곤이나 엘프들이 놔둘 성싶나?”

“드래곤? 흥! 저 아이의 마스터에 이르는 능력과 두 정령왕의 힘, 그리고 멍청한 네놈은 몰랐겠지만 저 아이가 거느리고 있는 타이탄까지 합쳐진다면 드래곤 따위는 상대가 안 돼.”

의외의 반격에 아르티어스는 멈칫했다.

“그, 그렇다면 카렐은?”

“카렐은 대단하지. 그랜드 마스터급인 그 녀석의 힘에다가 엘프들이 만든 최고의 걸작 골든 나이트와 이프리드의 힘이 보태진다면……. 하지만 이건 몰랐을걸? 저 아이가 가진 타이탄은 골든 나이트와 쌍벽을 이루지. 또 저 아이의 모자란 능력은 정령왕 둘이 보태 줄 거고. 그렇다면 아무리 카렐이라도 힘든 건 마찬가지야.”

아르티어스는 나이아드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카렐이 가진 타이탄의 위력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카렐이 자신의 타이탄에 탄 상태라면 거의 에인션트 드래곤을 제외하고는 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랑스러운 저 아이가 그와 대등한 타이탄을 가지고 있다니……. 저 아이의 신분이 뭐기에? 하지만 지금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이아드는 이번에야 말로 꼭두각시 하나를 만들어 인간들을 멸종시키려고 드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살인이 반복된다면 저 가냘픈 아이의 섬세한 영혼은 반복되는 살인에 짓눌려 황폐해질 것이고 결국은…….

일단 아르티어스는 후퇴해서 시간을 벌기로 했다. 일 년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좋아. 네 녀석이 무슨 계획을 세우든 간에 그건 내가 상관할 수 없지. 다만 일 년의 시간은?”

“잘 생각했어. 원래가 드래곤은 다른 하등 생물의 일에 관여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 흐흐흐, 자네도 우리들 정령과 같이 조화와 균형을 소중히 여기게나. 단순히 인간 편만 든다고 될게 아니야. 자연을 생각한다면 인간의 수는 좀 줄어들어야 해. 그게 균형도 맞고, 조화로운 거야. 물론 일 년은 주지. 겨우 일 년으로 뭐가 되겠느냐마는……. 흐흐흐흐흐.”

나이아드는 얄미운 웃음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환골탈태

“수련은 오후에 하면 안 될까요? 실은 어제저녁에 하려고 했는데, 잠들어 버리는 바람에 못한 게 있거든요.”

소녀는 약간 쑥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다크는 처음부터 이런 표정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한 달 동안 아르티어스 옹에 의해 실시된 감정 표현 교육은 매우 훌륭한 성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귀여운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르티어스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다크가 의자(義子)가 된 이후 아르티어스는 그녀에 대한 말투를 하대로 바꿨다.

“그럼, 그럼. 마음대로 하거라. 일 년이란 시간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냐?”

“일 년이요?”

“흠흠,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혼잣말이야.”

다크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방문을 잠갔다. 그리고 차곡차곡 옷을 벗어 버린 후 알몸으로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제 마지막 관문에 도전해야 하는 것이다. 운기조식이 진행됨에 따라 점차 다크의 몸은 떠오르기 시작했고, 온몸에서 엄청난 열과 광채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엄청난 기(氣)의 회오리가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와 주위를 맴돌았다. 이제 바야흐로 현경으로 들어가는 두 번째의 환골탈태가 시작된 것이다.

두터운 마법책을 펴 놓고는 다크가 익힐 만한 마법이 없을까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던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느껴진 광폭할 만큼 거대한 마나의 존재에 경악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히 그 기운은 아들의 방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에 그는 서둘러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방문을 열 수는 없었다. 안에서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잠시 이놈의 문을 박살 내고 안으로 들어갈까 말까 갈등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다크가 수련을 한다고 들어갔고, 또 안에서 잠겨 있다면 자신이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뭐, 다 큰 자식이니 사생활의 자유를 보장해 줘야겠지.”

그는 애써 스스로 뱉은 말에 위안을 느끼며 다시금 마법책을 읽기 위해 돌아갔다.

다크의 피부는 점점 열기가 높아짐에 따라 쭉쭉 금이 가고 찢어지기 시작했고, 바깥쪽에서 분리된 껍질은 곧 시커멓게 타 들어가 버렸다. 시커멓게 타 들어간 피부의 갈라진 틈 사이로는 기괴할 정도로 밝은 빛과 열이 계속 뿜어져 나오며, 아직 이 작업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자 갈라진 금의 폭이 더 넓어지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는 시커멓게 타 버린 껍질이 오그라들며 넓어지는 듯 보이겠지만, 사실 그 시커먼 부분은 더 이상 오그라들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을 정도로 재가 되어 있었다. 이 현상은 진짜로 육체가 외부로 약간씩 팽창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현상이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더 이상 진전되지 않고 멈췄다.

화경이나, 현경, 생사경으로 들어갈 때마다 한 번씩의 환골탈태를 거치며 기를 저장하는 단전을 키우게 된다. 물론 이때 육체도 재구성되며, 싱싱한 젊은 육체로 돌아가지만 가장 확실하게 바뀌는 부분이 단전이다. 각 환골탈태 때마다 단전의 용량은 1.5배씩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크의 경우 일반적으로 무공을 익힌 사람들과 확연히 다른 점이 있는데, 그건 다크가 육체적으로 매우 어린 상태에서 환골탈태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전번의 환골탈태에서도 급격히 키가 조금 자랐었고, 또 이번에도 커지게 된 것이다.

어쨌든 파란만장한 환골탈태는 거의 세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고, 매번 환골탈태 시에 느끼는 거지만 그 시간 동안 다크는 지독한 열기를 견디느라 진이 빠져 버렸다. 하지만 환골탈태가 끝났다고 ‘이제 해방이다’하고 모두 끝나는 건 아니었다. 이제부터는 그놈의 환골탈태를 한다고 소모한 기를 보충해야 하고, 또 더욱 많은 기를 쌓을 수 있도록 확장된 그녀의 단전에 기를 모아야만 했다.

그녀는 북명신공을 응용하여 사방에서 방대한 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자신의 마나가 갑자기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에 놀란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레어 밖으로 급히 피신한 것을 깊은 무아의 세계에 들어간 그녀는 알 수 없었고, 또 알았다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아는 한 아르티어스는 매우 강한 생명체였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레어 밖에서 죽치고 있다가 안에서 걸어 나오는 아들을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그녀는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다. 우선 한눈에 보기에도 잘 맞던 옷이 조금 작아진 게 그새 키가 좀 자란 것 같았다. 또 키만 좀 커진 게 아니라 좀 더 성숙해진 뭔가가 느껴졌다. 그리고 좀 더 예뻐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도 외형의 변화는 아르티어스에게 별 감흥을 주지 못했고, 가장 큰 변화는 다른 데 있었다. 자신이 드래곤이었기에 맞받아 줄 정도로 강렬한 마나를 지니고 있음을 대변해 주던 그 맑은 눈에서 더 이상 아무런 느낌도 받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그 엄청난 마나의 흔적을 깨끗이 숨겨 버린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가급적 놀라움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 때문에 약간 굳어 버린 얼굴로 물었다.

“이제 끝났냐?”

“예.”

“새 옷을 사 와야겠구나. 시장할 테니 먼저 밥부터 지어라. 나는 그동안에 옷을 사 올 테니까.”

“그럴게요.”

다크가 아름답게 살포시 미소 지었는데, 아르티어스는 그녀의 얼굴에서 여태껏 보지 못했던 강한 자신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야 성(性)을 제외하고 자신이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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