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3화 (153/930)

다크에게서 이상한 자신감이 보이기 시작한 그때부터 아르티어스 옹의 사랑스럽던 아들은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머리 속에 뭐가 들어갔는지 가사 일에는 도무지 발전을 보이지 않았고, 또 마법 수련도 지지부진했다. 뭐 실수를 많이 했다든가 그런 건 아니었지만 도무지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없었다.

거기에 마법은 과거 2주일 동안 1사이클 마법의 절반 이상을 마스터하고 2사이클급 마법까지 몇 개 배워 낸 그 엄청난 학습력이 어디 갔는지, 일주일을 꼬박 핏대를 세워 가며 가르쳤는데도 1사이클을 마스터하기는커녕 겨우 1사이클급 마법 네 개도 못 가르쳤다.

아무리 아르티어스 옹의 머리가 노화 때문에 돌이 되었다 해도, 그의 머리는 돌하고 거리가 멀지 않은가? 뭔가 이상함을 당연히 재빨리 눈치 챘고, 그 원인을 유추하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는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다크가 자신의 말을 잘 안 듣기 시작한 시발점은 기억이 회복된 때부터였다. 기억이 돌아왔던 그날, 아르티어스는 나이아드와 흥정을 할 생각에 정신이 없었기에 다크의 마법 공부를 대강 하고 치웠다. 또 아들을 얻은 기쁨에 다크의 실수는 ‘뭐, 새로이 기억을 되찾아서 좀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하고 그냥 너그러이 참고 넘겼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사람이 한순간에 어떻게 이렇게나 바뀔 수가 있을까? 그토록 자신의 말을 잘 듣고 사랑스럽던 소녀는 사라지고 고집 세고, 지독하게 주관이 강하고, 흥미 있는 것 외에는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는 고집불통의 검객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태껏 배운 것이야 잊지 않고 잘했지만, 새로운 것을 가르치는 게 문제였다. 가르치다가 실수해서 잘 못 한다고 꾸짖으면 무사는 그따위 것 안 배워도 상관없다고 반박하는 데야 아르티어스 옹으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마법도 꼭 마나의 응용이나 뭐 그런 부분은 자신이 알고 있는 무술과 관련지어 파악해 가려고 머리를 굴려 대니 수업 진도는 지지부진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아르티어스 옹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참아야만 했다. 생각 같아서는 엎어 놓고 말 안 듣는 그녀의 엉덩짝이라도 기분이 풀릴 때까지 패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왜냐고? 사랑스런 소녀를 패는 게 너무 가슴 아파서 못한 게 아니라 힘에 밀려서 못했다.

한 번은 그걸 시도했다가 자신이 트랜스포메이션한 육체를 가지고는 망나니 같은 아들 녀석의 한주먹 거리밖에 안 된다는 것을 눈탱이가 퍼렇게 된 다음에야 깨달았던 것이다. 정말이지 인간이면서, 그것도 계집애인 주제에 아들 녀석은 무지막지하게 강했다.

“아구구구……. 내 팔자야. 내 사랑스럽던 아들은 어디로 갔지? 에휴.”

저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한숨을 뿜어낸 아르티어스는 지금의 사태에 대해 궁리해야만 했다. 다크의 엉덩짝을 패기 위해 틀어쥐려다가 도리어 다크에게 한 대 맞고 나자빠질 때부터 아버지로서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권위를 보여야 해. 그 녀석과 나와의 힘의 차이를 보여 주고 존경심을 얻어 내야만 해. 저 빌어먹을 년을 통제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 하지만, 그래도 안 되면?”

아르티어스는 조금 더 궁리한 다음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뱃속에 꿀꺽해 버리고, 모든 걸 없었던 일로 하면 되지.”

아르티어스가 작심을 하고 그녀의 방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아르티어스가 만들어 놓으라던 조각보는 손도 대지 않고 뭔가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아버지, 혹시 검 있어요?”

“아빠라고 부르라니까, 아니면 엄마라고 부르든지. 아버지는 너무 거리감이 느껴져서 싫어. 알겠냐?”

“그게 그래도…….”

다크는 난처했다. 눈 딱 감고 아빠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70여 년을 살아온 그의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좋아, 어떤 검을 원하는데? 우리 아들이 원하는데 하나 장만해 줘야지.”

“그러니까 길이는 70센티미터 정도, 손잡이는 20센티미터 정도, 양날검이어야 하고, 검신은 완만하게 휘어지게 만들면 돼요.”

“흠, 별로 어려운 부탁은 아니군. 하지만 새로 만들기는 귀찮으니 내가 가지고 있는 검들 중에서 아무거나 골라 가지면 안 될까?”

“검이 있어요?”

“그럼, 한 열 자루 정도 있지. 내가 과거 인간 세상을 떠돌 때 수집해 놓은 건데 나쁜 건 아냐. 그중 한 자루는 내 친구 녀석이 선물한 것인데, 아주 괜찮은 마법검이지.”

“드래곤이…, 친구도 있어요?”

“드래곤은 친구가 없는 줄 아냐? 그 녀석은 여행 도중에 만난 레드 드래곤 ‘브로마네스’라는 녀석인데 콧대 높기로 이름 높은 레드치고는 쓸 만한 놈이었지. 그 녀석과 헤어지면서 기념으로 서로가 직접 검을 한 자루씩 만들어 교환했는데, 제법 쓸 만하더라 이거지.”

“한번 봐요.”

‘짜식! 검하니까 눈빛이 달라지는군.’

아르티어스는 그녀를 자신의 보물 창고로 인도했다. 문을 열자 한쪽 벽에는 검이나 활, 창 등 무기류와 방패, 갑옷 등이 걸려 있었고, 그 반대쪽에는 금은보화가 쌓여서 거대한 방의 거의 절반을 메우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이 수집품들을 자랑스레 바라봤다. 이 금들의 3분의 1은 드워프들을 협박해서 뺏은 것이고, 3분의 1은 인간 세상을 떠돌며 갖가지 일을 해서 벌어들인 것이었고, 또 3분의 1은 장난 삼아 몇몇 나라의 국왕들을 드래곤인 상태로 찾아가서 자신의 거대하면서도 위압적인 자랑스런 몸매를 구경시켜 주고 얻은(?) 것들이었다.

사실 드래곤인 자신에게 보석이나 금은 따위는 별로 필요한 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드래곤들이 그러하듯 그 반짝거리는 영롱한 광채가 보기 좋아서 끌어 모은 것이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이 보물의 산을 쳐다보기만 해도 다리의 힘이 빠져 주저앉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아들 녀석은 그렇지 않았다. 엄청나게 쌓여서 영롱한 광채를 뿜어내는 보석 따위는 본체만체하고 곧장 검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들 녀석이 검을 고르는 데 들어간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냥 쭉 훑어보더니 곧장 한 개를 선택했다. 과거 아르티어스가 여자 마법사로 활동하던 시절 멋으로 차고 다녔던 여성용 격투검 샤벨이었다.

“이게 좋겠어요.”

그 샤벨은 보통의 샤벨들이 그러하듯 검신의 길이 60센티미터, 폭 3센티미터 정도의 매우 짧지만 예리하고 날카로운 여성용 검이다. 하지만 그건 단지 멋으로 차고 다녔던 거라 마법검도 아니었고, 그냥 금은 따위로 모양을 내고 손잡이에 붉은 보석까지 붙어 있는 정말 겉멋뿐인 검이었기에 아르티어스는 그녀의 선택에 반대했다.

“그건 아무런 위력도 없는 검이야. 내가 왕년에 멋으로 좀 차고 다녔던 건데, 그런 걸 차고 다닐 수야 없지. 방금 내가 말했던 브로마네스가 선물했던 검은 이거야. 얼마나 근사하냐?”

그러면서 아르티어스 옹은 요즘 들어 회의가 좀 일긴 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소녀를 향해 벽에 높직하게 걸려 있던 1.5미터가 넘는 호화롭게 장식된 바스터 소드를 손수 꺼내 들고는 그녀에게 권했다. 확실히 드래곤이 마법으로 검신을 직접 만들었고, 거기에 아르티어스 옹의 협박에 굴복한 드워프들이 손잡이와 검집을 만들어 붙였기에 너무나 화려하면서도 완벽한 검이었다.

아르티어스가 내부를 보여 주기 위해 검신을 밖으로 조금 꺼내자 검신에 새겨진 수없이 많은 기하학적인 주문과 레드 드래곤의 뼈다귀―뼈와 드래곤의 외피는 같은 성분이다―만이 가지는 찬란한 붉은색이 검을 더욱 멋있게 해 주었다.

“어때? 이 정도면 최고의 예술품이지? 그런 쓸모없는 검보다야 이게 낫지. 이건 마나만 주입해 주면 5사이클급까지 화염 마법을 사용할 수 있거든. 내가 과거 이 검을 들고 대륙을 돌아다닐 때 정말 끝내 줬었단다. 어때? 구미가 당기지 않냐?”

“전혀. 그렇게 큰 걸 귀찮게 어떻게 들고 다녀요? 이 정도 크기가 딱 맞아요.”

양보할 줄 모르는 소녀의 말에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벌컥 화를 냈다.

“이런 제기랄! 그런 쇠붙이로 만든 건 약해 빠져서 못 쓴다니까. 좋다, 그럼 조금만 시간을 다오. 내가 하나 만들어 줄 테니.”

“검 한 자루를 어느 세월에 만들겠어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다크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에잉, 그게 아니라니까. 마법으로 검을 만드는 건 금세 끝나지. 지금 여기서 검을 만들 건데 너도 한번 볼 테냐?”

“그러죠.”

이 음흉하신 아르티어스 나으리는 이제 바야흐로 본체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당연히 드래곤 본을 이용해 검을 만들기 위해 그 뼈의 성분을 몸에서 뽑아내려면 드래곤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이 작업을 망나니 아들 녀석 앞에서 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아들 녀석과 위대하신 아버님 사이의 힘의 차이를 확실하게 느끼게 해 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드넓은 공동에서 아르티어스가 주문을 외치자마자 그의 몸은 빛나기 시작했고, 그 빛의 덩어리는 폭발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약 5분 정도 지나 그 빛이 사라질 때쯤, 드넓은 지하 공동 안은 거대한 황금빛 드래곤 한 마리에 의해 꽉 차 버렸다.

“정말 더럽게 크네.”

<진짜 크지? 어때? 이 엄청난 ‘아빠’의 힘을 이제는 느끼겠냐?>

일단 드래곤으로 돌아가면 말을 할 수 없다. 당연히 구강 구조가 다르니 말이 되나? 대신 텔레파시를 이용해 의사소통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아르티어스는 일부러 아빠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계속 아빠라고 주입 교육을 시키면 ‘아버지’가 ‘아빠’로 바뀔지도 모르고, 저런 귀여운 녀석의 입에서는 ‘아빠’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는 것이 훨씬 어울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자부심과는 달리 다크는 그리 크게 위압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실 엄청난 기가 느껴지기는 했다. 하지만 상대의 덩치 또한 매우 컸기에 그 덩치로 재빠른 몸놀림은 힘들 것이고, 맞붙는다 해도 자신이 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특히 이런 좁은 곳에서 저런 덩치로 변신한다는 것 자체가 자살 행위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검은 안 만들어요?”

<으응? 네 녀석은 아빠의 이 위용에 대해 뭔가 감탄사조차 터뜨릴 줄 모르냐?>

그 말에 소녀는 호들갑스럽게 과장된 그러나 전혀 감흥을 받지 못한 표정으로 감탄사를 터뜨려 줬다.

“우와! 대단해요. 정말이지 엄청나요. 최고예요. 이 정도면 됐어요?”

아르티어스는 속으로 매우 못마땅했지만 더 이상 시간을 끌기도 그랬다. 사실 이놈의 레어는 드워프들을 협박해서 만든 것까지는 좋았는데, 자신이 아주 젊을 때 제작한 것이었기에 이제 노룡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봤을 때는 좀 비좁았다. 사실 이런 대 공동은 할 짓 없는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을 보낼 때 드래곤인 상태에서 잠자기에나 알맞지 활동 자체는 불가능했다. 한 두어 달 정도 잠으로 때워 버리면 계절이 바뀐다. 대 공동은 그렇게 시간 때우는 데는 최고였던 것이다. 좀 비좁더라도 이 대 공동은 아르티어스 자신의 남은 생이 끝날 때까지 그 목적을 다할 수 있으리라.

아르티어스 옹께서 정신을 집중하여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그의 몸속에서 뼈다귀 성분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드래곤의 그 거대한 몸집을 생각해 본다면 겨우 검 하나 만들 정도의 드래곤 본을 뽑아내는 것은 표시도 나지 않는 작업이었다.

아르티어스의 몸 여기저기에서 미세한 증기와 같은 형태로 뿜어져 나온 드래곤 본은 하나로 뭉쳐 밝은 금광(金光)을 내며 점차 검의 형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물론 검집이나 손잡이 따위는 생략한 완전한 검신(檢身)뿐이었지만 말이다.

한 30분 정도 시간이 흐르자 검신이 완성되었다. 그것은 골드 드래곤 특유의 뼈 색깔인 밝은 황금색을 띠었다. 그리고 그 검신의 위에는 아르티어스가 아들을 위한 서비스로 새겨놓은 수많은 마법 주문들이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검날을 완성한 후 아르티어스의 몸은 전같이 빛을 뿜으며 작아지기 시작했고, 곧이어 다크가 잘 알고 있는 인간 형태로 돌아왔다. 아르티어스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신을 주워 들고는 찬찬히 살펴보더니 만족스레 미소를 지었다. 꽤 오랜만에 써 보는 마법이었지만 매우 훌륭하게 아들 녀석이 주문한 대로의 검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좋아, 좋아. 이 정도면 아주 괜찮군. 이제 아무 드워프 마을에나 가서 검집하고 손잡이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면 되겠지.”

“그거 다 만드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데요?”

“그 녀석들 손재주가 좋으니까 내일이면 완성될 거다.”

“검집하고 손잡이는 그냥 수수하게 해 줘요. 괜히 보석 따위 덕지덕지 붙이지 말고…….”

“왜? 사랑하는 아들에게 선물하는 검인데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다구. 저 방에 쌓여 있던 금은보화를 못 봤냐? 검집하고 손잡이쯤 만들어 준다고 해도 별로 문제 될 게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거라.”

아르티어스는 처음에는 땡전 한 푼 안 든다고 설명을 하려다가, 그래도 명색이 드래곤인데 체면이 있지. 드래곤의 거대하고 위압적인 몸매와 힘을 이용해 드워프들에게 무료 봉사를 시키는 것도 모자라, 그 재료까지 드워프들에게 부담시킬 예정이라는 건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완성품만 넘겨주면 되는데, 골치 아프게 중간 과정까지 상세하게 설명을 해 줄 필요는 없었다.

“좋아요. 하지만 될 수 있으면 수수하게 해 줘야 해요. 그리고 칼막이는 필요 없구요. 알았죠?”

“흐흐흐, 아빠라고 불러 준다면 원하는 그대로 해 주마.”

다크는 할 수 없이 자존심을 꾹꾹 눌러 죽이고 대답해야 했다. 그녀는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드래곤이 아니었기에 눈에 확 띄는 검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비싼 검을 차고 있어 봤자 그것에 눈독 들이는 놈들 때문에 쓸데없는 사건도 많이 일어날 것이고, 무엇보다 남의 이목이 집중되니까 말이다.

“…아빠.”

“우헤헤헤…, 좋아, 좋아. 이 아빠는 드워프들에게 부탁하고 오마.”

‘그래! 하나씩 하나씩 고쳐 나가는 거야. 흐헤헤헤…….’

매우 기분이 좋아진 아르티어스 옹께서는 황금빛 나는 검신을 가지고 비행 마법을 써서 부탁할 상대를 찾아 화살보다 빠르게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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