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4화 (154/930)

드워프는 키도 작고 못생긴 볼품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신께서는 그들에게 겉모습이 모자라는 만큼 금속이나 보석 세공에 대한 위대한 재능을 선물하셨다. 그렇기에 세상에 이름난 검이나 갑옷, 보석 세공품들은 거의 대부분이 드워프들의 작품이었다. 특히나 그들은 찬란한 빛깔이 영원히 간직되는, 신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영원불멸의 금속인 황금을 매우 좋아했고, 철을 가장 혐오했다. 그렇기에 그들의 작품들 중에는 철로 만든 건 거의 없었다.

드워프는 좀 더 좋은 재료를 얻기 위해서 고달픈 광석 채굴 작업도 마다하지 않는 타고난 장인(匠人)들이었기에, 드워프의 마을들은 대부분 외딴 산간벽지에 위치하고 있다. 일부 개방적인 드워프의 경우 인간들의 마을까지 들어가 금은방을 경영하거나, 희귀한 귀금속이나 보석류를 찾기 위해 떠돌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외진 곳에 정착해서 살았다.

외진 곳일수록 포악한 몬스터들이 많이 돌아다니지만 생긴 것과 달리 호전적(好戰的)인 드워프들에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고된 광산 노동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체력과 덩치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강인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십 명의 드워프들이 자기 키만 한 도끼를 휘두르며 용맹하게 달려들면, 웬만한 몬스터들은 꼬리를 감추고 달아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드워프에게도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증오하는 몬스터가 있었으니…….

<흐헤헤헤, 작은 일 한 가지를 해 줘야겠다. 너희들에게는 매우 쉬운 일이야. 설마 거절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한적하기만 하던 작은 드워프 마을의 촌장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앞에 황금빛 찬란한 거대한 드래곤이 먹음직한 먹이를 눈앞에 두고 어떻게 먹을까 감상하는 듯한 눈빛으로 보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예, 예! 당연히 해 드려야 합지요. 어떤 일이신지?”

촌장의 앞으로 드래곤의 거대한 손이 다가오더니 뭔가를 뚝 떨어뜨렸다. 얼핏 보기에 황금 막대기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땅바닥에 툭 떨어지는 게 아니라 떨어지던 여력을 이용하여 거의 절반쯤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 버렸다. 촌장은 땅에 반쯤 박혀 있는 그걸 뽑아 본 다음에야 그것이 절대로 황금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건 귀하디귀한 골드 드래곤의 뼈로 만든 검신이었던 것이다.

드래곤은 사멸하기 직전에 주문을 외워 자신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모든 것을 대지의 여신 케레스(Ceres)에게 되돌려 버린다. 그렇기에 여태껏 수많은 드래곤이 노화(老化)에 의해 자연사(自然死) 했음에도 그 껍질은커녕 뼈다귀도 구하기 힘든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드래곤의 뼈와 가죽을 손에 얻기 위해서는 드래곤이 주문을 외울 시간을 주지 않고, 직접 사냥해서 죽이는 방법밖에 없었지만, 사냥에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쨌든 황금빛 드래곤이 떨어뜨린 그 검신은, 저 먼 서방 땅에서 사용한다고 들었던, 약간 휘어진 매우 특이한 형태의 검이었다. 역시나 황금빛 드래곤이 직접 제작한 것인 만큼, 그 황금빛 나는 아름다운 검신은 미세한 삐뚤어짐도 없이 완벽하게 곧았고, 완만한 곡선은 조금의 들쑥날쑥함도 없었다. 그야말로 최고의 예술품이었다.

“검집과 손잡이를 만들어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내일까지.>

그 말에 드워프 촌장은 식은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항변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시간을 조금 더 주십시오. 위대한 드래곤이시여.”

<닥쳐랏! 내일까지다. 단 황금이나 보석을 사용하면 안 된다.>

순간 촌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황금이나 보석은 드래곤이 매우 좋아하는 품목인데 그것들을 사용하지 말라니.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고 수수한 형태를 원한다면 많은 시간이 들지 않기에 그래도 조금의 희망은 있었다. 촌장은 점점 자신의 명줄이 길어지는 것 같은 고무적인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 조건을 말하겠다. 일단 검집은 수수한 모양이어야 한다. 절대로 황금이나 보석을 붙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칼날받이도 필요 없다. 검집과 손잡이만 있으면 돼. 그리고 손잡이의 길이는 20센티미터 정도로 양손용으로 해라. 더불어 그에 어울리는 수수한 모양의 검대(劍帶)도 만들어야 한다. 알겠느냐? 기간은 내일까지다.>

드래곤에 대한 반항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할 수 없이 촌장은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승낙을 해야지 내일까지라도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루가 어딘데…….

“예.”

<내일 검을 찾으러 오마. 만약 그게 아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모두 이 세상에 태어난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으하하하…….>

황금빛 드래곤은 호쾌한 웃음소리를 남기고 유유히 날아올랐다. 그 엄청난 덩치가 날아오르면서 강풍이 일었기에 드워프들은 거기에 휩쓸려 날려가지 않으려고 주위에 있는 아무거나 붙잡고 용을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모습을 비웃기나 하듯 드래곤은 아주 천천히 떠올랐고, 드래곤은 일정 높이까지 올라가자 그 거대한 날개를 몇 차례 퍼덕이더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제 그 자리에 남은 촌장은 이 빌어먹을 의뢰를 하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 제공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저 금빛 나는 사악한 괴물의 헤즐링이 범인일 것이다.

“제기랄! 이보게들! 들었지? 빨리 모여. 서두르자구.”

촌장의 지시로 드워프 마을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수고료를 땡전 한 푼 안 내는 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위협하는 빌어먹을 의뢰자를 위해 그들은 젖 먹던 힘까지 내어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

한참 물건을 만들고 있는 드워프들은 이 빌어먹을 의뢰를 한 드래곤이 누군지 생각할 틈도 없었다. 그거 생각하느라고 낭비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산맥에는 드래곤이 살고 있지 않다고 전해져 왔다. 아주 오랜 옛날 그러니까 한 2천 년쯤 전에는 성질 고약한 골드 드래곤 한 마리가 살았다고 전설에 전해지지만, 그 녀석은 죽었는지 아니면 이곳을 떠났는지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워프들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대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그 전설에 따르면, 그 탐욕스런 골드 드래곤은 보석과 황금을 매우 좋아해서 산맥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까지 날아가 각국의 국왕들을 협박해 보석류를 긁어모았다고 한다.

그 드래곤의 사악함에 치를 떨던 인간들 중에서 매우 용맹한 자들이 그 악독한 괴물을 없애기 위해 용사 파티를 구성하고, 드래곤 슬레이어의 영광을 얻기 위해 떠났지만, 돌아온 용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2천 년쯤 전에 그 드래곤은 돌연히 자취를 감춰 버렸고, 인간 세상에서는 아마도 마지막에 출발했던 용사 파티나 어떤 이름 모를 용사들이 그 사악한 드래곤을 죽였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 추측은 음유 시인들을 자극해 ‘가상적인’ 용사를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많은 음유 시인들이 많은 노래를 지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노래는 안젤리아나라는 여류 음유 시인이 지은 것이었다. 용맹한 용사 ‘아르티어스’가 매우 강력한 동료들을 모아 사악한 골드 드래곤과 싸워 그놈을 죽인다는 내용의 「아르티어스 애가(哀歌)」라는 노래이다.

그 노래는 아르티어스가 자신이 드래곤 슬레이어임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아르티어스는 결국 기지를 동원하여 드래곤을 죽이는 데 성공하지만, 그의 약혼녀를 비롯한 동료 여덟 명 모두 포악한 골드 드래곤에게 죽임을 당하고, 아르티어스도 지독한 부상을 당한다. 친구와 연인을 모두 잃은 그는 양심상 혼자만 영웅이 될 수 없었기에 역사의 뒤안길로 이름을 감춘다는 것이었다.

이 노래는 앞뒤가 잘 맞았고 설득력도 있었다. 거기다가 곡조도 매우 아름답고, 단조로웠기에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거의 전설을 뛰어 넘어 역사책에까지 나오는 정설로 굳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드워프들은 아마도 저 드래곤이 그 사악한 드래곤의 자식이거나 아니면 죽어 버린 그의 레어를 차지하고 들어온 또 다른 골드 드래곤일 것이라고만 얼핏 추측했다. 방금 봤던 그 파렴치한 드래곤이 그 옛날 자신의 조상들을 고생시킨 그 나쁜 녀석이란 생각은 꿈에도 못 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로는 그 여류 시인 안젤리아나가 아르티어스가 변신한 모습이라는 사실은 죽었다 깨어나도 짐작조차 못 할 것은 당연했다.

어쨌든 드워프들은 죽자고 열과 성을 다해 자신이 가진 기술을 다 동원하여 검을 완성했지만, 일단 만들어 놓고 보니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만들 때는 최고의 열과 성을 다해 예술성을 부여한다고 난리를 쳤었는데, 다 만들고 나서 생각해 보니 드래곤이 좋아하는 타입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끝장이군.”

“드가체프, 아무래도 이거 그 녀석 마음에 들까 몰라.”

“내 생각도 그렇다네. 아무래도 애들과 여자들은 대피시켜야겠어. 일단 몇몇은 남아야겠지. 그 미친 드래곤의 분풀이를 받아 줘야 할 테니까 말이야.”

“내 생각도 그래.”

촌장은 자신의 친구 드가체프와 눈앞에 놓여 있는 완성품을 바라보며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놈의 주문이 ‘수수한 모양’이었기에 그런 쪽으로만 신경 쓰다 보니 너무 수수한 모양이 되어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번쩍번쩍 빛나는 것을 선호하는 드래곤의 천박한 안목에 맞을지 은근히 걱정되었던 것이다.

“드가체프, 자네가 무리를 이끌고 떠나게. 아무래도 자네 외에는 다음 촌장이 될 만한 드워프가 없으니 어쩔 수 없군.”

드가체프는 여기 남아서 정들었던 이 마을과 또 가장 절친했던 친구와 함께 생을 마치고 싶었지만, 친구의 간절한 마지막 소원을 뿌리치기는 힘들었다. 드가체프는 일단의 드워프들을 데리고 떠나면서 촌장의 손을 굳게 잡았다.

“3일 후에 와 보지. 그때쯤 되면 결판이 나지 않았겠나. 자네 부인과 아들 걱정은 말게나.”

“고맙네.”

착잡한 표정으로 마을을 등지고 떠나는 일행을 촌장은 드래곤의 분노를 맨몸으로 때워야 할 불쌍한 희생양들과 함께 전송했다. 그 후 두 시간쯤 지나자 황금빛 찬란한 드래곤이 그 엄청난 거구를 자랑하며 당당하게 나타났다.

<완성했느냐?>

“예, 여기 있습니다. 위대한 드래곤이시여.”

촌장은 떨리는 손으로 완성된 검을 드래곤에게 바쳤다. 드래곤은 그 거대한 손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섬세한 동작으로 드워프에게서 검을 받아 들었다.

확실히 자신의 주문대로 수수하게 만들어진 검집이고 손잡이였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단순했기에 드래곤은 혹시나 아들이 이걸 싫어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이 앞섰다. 만약 자신에게 이따위 물건을 바쳤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몽땅 다 저녁 식사거리로 삼았겠지만, 아들의 취향을 알 수 없으니 지금 다 죽여 버릴까 하는 생각을 억눌렀다. 일단 물어보고 와서 분풀이를 해도 늦지 않으니까 말이다.

<아들 녀석에게 보이고 나서 결과를 알려 주겠다.>

“예.”

<아들의 마음에 안 들면 오늘이 네 녀석들 제삿날인 줄 알아라. 크흐흐흐.>

아름다운 아르티어스 옹께서는 신들의 실패작이라고 일컬어지는 못생긴 드워프 녀석에게 일침을 가한 후 천천히 자신의 몸을 띄워 올렸다. 당연히 금속질인 그 거대한 몸집을 날개 하나만으로 띄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에 강렬한 마나의 폭풍을 일으키며 서서히 날아올랐다. 마나를 이용해 자신의 몸을 가볍게 만들어 날아올랐기에, 그 거대한 덩치가 하늘로 올라가면서도 그렇게 거센 바람이 몰아치지는 않았다.

물론 허술한 담이 무너지고 밑에 서 있던 드워프 몇 명이 중심을 잃고 뒹굴기는 했지만, 그건 그 녀석들 사정이었다. 몸이 조금 높은 곳까지 떠오르자 그는 그 거대한 날개를 이용해 쏜살같이 레어로 날아갔다.

아르티어스가 검을 들고 애지중지하는 아들에게 도착했을 때 그녀는 치마를 입은 채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다. 치마를 입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으면 어떤 꼴이 되는지는 누구나 다 상상할 수 있다. 아르티어스는 이 말괄량이에게 유익한 조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다 큰 애가 앉아 있는 자세가 그게 뭐냐? 도대체 그러는 처녀를 누가 데려간다구……. 으이그.”

“걱정 마세요. 시집갈 생각은 없으니까. 그거 다 된 거예요?”

“응.”

아르티어스로부터 검을 빼앗듯이 받아 든 소녀의 눈동자가 빛나기 시작했다.

오, 이 멋진 세공 기술. 정말 단조로운 옅은 청색이 나는 금속질의 검집과 그 손잡이는 소박했지만, 오직 드워프만이 가지고 있는 그 섬세한 세공 기술로 인해 소녀의 눈에는 너무나 화려해 보였다. 이건 검집이 아니라 아예 예술품이었던 것이다. 소녀가 그걸 받아 들고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자, 조금 오해한 아르티어스 옹께서는 주먹을 불끈 쥐며 울분에 찬 어조로 외쳤다.

“그래, 내 그 마음 안다. 마음에 안 드는구나. 그렇지? 내 이 빌어먹을 드워프 녀석들을!”

소녀는 고개를 들고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황홀한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니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정말 이렇게 아름다운 검을 받아도 될지 모르겠어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소녀의 말에 아르티어스 옹의 기분은 저 밑바닥에서 꼭대기로 순식간에 순간 이동했다. 갑자기 마음이 매우 흡족해진 아르티어스는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아냐, 아냐. 내 사랑하는 아들에게 이 정도 선물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하하하.”

“정말 고마워요.”

정말이지 모처럼 맞이하는 오붓하고 정감 넘치는 부자간의 따뜻한 분위기였다. 그날 아르티어스 옹께서는 매우 기뻐했고, 그 덕분에 결과를 두고 가슴 졸이던 드워프들은 그 망할 드래곤으로부터 수고료를 받지 않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죽음이라는 수고료 말이다.

홀로 서기

“제발 내 말 좀 들어라. 여자의 행복은 그게 아니라는데 그러는구나.”

어제의 그 따뜻한 분위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다음 날 아침 또다시 부자(父子)는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여자의 행복 따위 필요 없어요. 나는 내가 살던 세계로 돌아가고 싶고, 또 예전에 했던 그 빌어먹을 토지에르란 마법사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요. 그는 자신의 일을 도와주면 내가 살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했다구요.”

“하지만, 외로운 이 아빠를 위해서 일 년, 아니 한 달이라도 시간을 내어 줄 수는 없겠냐?”

“안 돼요. 아버지는 언제나 볼 수 있고, 그게 의심스러우면 같이 가면 되잖아요. 이제 더 이상 쓸모도 없는 마법 따위 배운다고 허송세월하기 싫어요. 또 밥하고 빨래하기도 싫구요. 나는 저주 때문에 이 빌어먹을 모습이 되어 있지만 분명히 남자고 또 무사(武士)라구요.”

“이런 빌어먹을! 여자는 여자다워야지 검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냐? 너는 도대체 왜 그렇게 이 아빠 말을 안 듣는 거냐?”

“내가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해요? 나는 여자가 아니라구요.”

“으윽! 이런 못된 것!”

분노를 억눌러 왔던 아르티어스 옹은 이제 완전히 이성을 잃고 버릇없는 아들의 왼쪽 뺨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을 날렸다. 물론 그의 이성은 사랑하는 소녀의 뺨에서 “짝!”하는 경쾌한 소리가 나면 가슴 아픈 죄책감과 함께 돌아올 예정이었지만, 그의 이성을 돌아오게 만든 소리는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퍽!

쿠당탕!

“아구구구, 이젠 아들놈이 아예 마음 놓고 아빠를 패는군.”

아르티어스는 인정사정없이 왼쪽 뺨에 작렬한 그녀의 펀치를 느꼈다. 아들놈은 그가 느끼기에도 매우 뛰어난 무사였기에, 충분히 힘을 뺄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이토록 심하게 팬 것에 대해 그는 투덜거렸다.

볼썽사납게 한쪽 구석에 처박혀서는 시뻘겋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왼쪽 뺨을 주무르는 ‘아빠’를 부축해 일으키며, 소녀는 매우 죄송하다는 듯한 말투로 사과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전혀 죄송한 표정이 아니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의도적으로 뒷말을 흐렸다. 처음에 아르티어스의 손을 왼손으로 막고 반사적으로 오른손이 뻗어 나간 것은 정말 무의식적인 동작이었다. 하지만 손이 날아가는 도중에 그녀는 충분히 그 오른손을 되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힘을 하나도 빼지 않고 처음의 힘에다가 오히려 힘을 더 보태어 그대로 ‘아빠’의 왼쪽 뺨을 사정없이 때린 것은 정말이지 말이 안 통하는 멍청한 드래곤에 대한 징계의 의미였다.

“에휴, 그래 너하고 싸워 봐야 뭐가 남겠냐. 떠나고 싶으면 떠나거라. 하지만 이건 알아 줬으면 좋겠구나. 나는 너와 지낸 이 짧은 순간에 대한 기억을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야. 얘야, 나에게는 정말 행복한 시간들이었단다. 하지만 그게 너에게는 불행한 시간이 된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니까 말이다.”

아르티어스의 체념한 듯한 말에 다크는 매우 큰 감동을 받았다. 사실 아르티어스가 그녀에게 강요해 온 ‘여성적인 것들’이 결코 그녀를 괴롭히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가 아님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기억이 없을 때는 자신을 그렇게나 아껴 주고 사랑해 주는 그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보답해 주기 위해 안 돌아가는 머리를 억지로 굴려 마법을 암기했고, 열과 성을 다해 가사 일을 익혔다. 또 굳어진 얼굴 근육을 열심히 연마하여 아빠가 주문하는 여성스런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했고, 아빠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기법들을 익혔던 것이다.

하지만 기억이 돌아오자 자신이 여태껏 살아왔던 남성으로서의 기억과 뼛속까지 심어진 그 자부심이 그녀가 해야 할 일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아르티어스에게 잘 잤느냐는 인사와 함께 뽀뽀를 해 주면 아주 좋아할 것이고, 하다못해 그를 아빠라고만 불러 줘도 그가 매우 기뻐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그런 ‘여성스런 행위’를 그녀는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 이유도 그에게 설명해 줬다. 자신의 과거를……. 그런데도 이 빌어먹을 드래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열불이 치민 그녀는 이왕에 나간 손이니 아예 힘을 조금, 아주 조금만 더 보태서 힘껏 두들겨 버린 것이다. ‘제발 내 처지도 이해해 달라구요!’하는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하지만 아들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는 아르티어스의 진심 어린 말을 듣고 그녀는 더 이상 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다크는 자신도 모르게 아르티어스 옹의 가르침에 따라 몸이 저절로 움직여 그를 꼭 껴안아 버렸다. 아르티어스의 덩치는 그리 큰 편도 아니었고, 또 우람한 근육질도 아니었지만 다크보다는 훨씬 큰 편이었기에 그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꼭 마주 껴안자 그녀의 몸은 포근히 감싸졌다. 다크는 매우 편안하고 안락한 의지할 만한 그 어떤 존재를 느낄 수 있었고, 그런 생각이 떠오른 자신에게 당황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었던 그녀로서는 겨우 이런 가벼운 포옹에 이토록 큰 만족감을 얻었다는 것 자체가 믿을 수 없었고, 또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크가 새로이 솟아나는 이놈의 감정과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줄도 모르고, 아르티어스는 아들을 꼭 껴안고 오른손으로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모는 아무리 귀여웠던 자식이라도 그들이 품속에서 떠나고자 할 때는 놔 줘야 하지. 끝까지 놔 주지 않는다면 그건 자식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만족감을 위한 것일 뿐이야. 그건 서로를 해칠 뿐이거든. 너는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된 것 같구나. 아들아!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마 나는 너를 절대로 잊지 못할 거야.”

“평생 안 볼 것처럼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그렇군. 다음에 찾아가 보지. 크라레스 왕국이라고 했냐?”

“예, 거기서 다크 크라이드 남작을 찾으시면 돼요.”

“허허허, 출세도 빠르군. 이제 떠나거라. 만남의 시간은 길수록 좋지만, 이별의 시간은 짧을수록 좋은 거야.”

차분해지려고 애쓰는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될 수 있으면 부드럽게 말하는 아르티어스에게 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의 의지를 배반하고 뭔가 목구멍에 꽉 찬 듯한 괴상한 음성을 냈다.

“예, 꼭 찾아뵐게요.”

“몸 건강하거라.”

“예.”

자신을 여자로 개조하려고 무던히도 애쓰던 노망난 드래곤으로부터 떨어져서 매우 기분이 유쾌해야 할 텐데도 그와 헤어진 다크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가슴에 얽매여 오는 고통을 뿌리치기 위해 그녀는 전력으로 질주했고, 어느 정도 마음을 바로 잡았을 때쯤에는 완전히 경치가 변해 있었다. 높은 산은 끝났고,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다크는 이제 주위의 경치를 감상하며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을이라도 나오면 거기서 수소문을 하여 크라레스 왕국으로 찾아갈 생각이었다. 한참 걷다 보니 작은 마을이 나타났고, 다크는 문득 시장함을 느꼈다. 그렇게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지만 때 되면 찾아 먹는 편이 건강에 좋았기에 마을 한쪽 구석에 있는 식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런, 돈을 안 가져 왔잖아.”

헤어지는 데만 급급해서는 달랑 허리에 검 한 자루 차고 드래곤의 레어를 출발했으니,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머리 좋은 드래곤이나 다크나 둘 다 헤어진다는 그 사실에 감정이 싱숭생숭해진 관계로 정작 필요한 것은 하나도 챙기지도, 챙겨 주지도 못했던 것이다.

“할 수 없지. 몇 끼 굶는다고 죽는 건 아니니까.”

다크는 투덜거리며 꽤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크라레스의 수도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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