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5화 (155/930)

다크가 투덜거리며 크라레스의 수도로 돌아가기 시작한 그날로부터 3개월 후, 팔시온은 사단장의 명령을 받고 사단 사령부로 불려 왔다. 팔시온은 갑작스런 사단장의 호출에 기분이 영 찜찜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짐을 정리하고 타지로 부임할 준비를 하고 오라는 지시였기 때문이다.

팔시온은 겨우 1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대대장이다. 그 말은 1만 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사단장이 직접 호출할 만큼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리고 겨우 부하의 전출에 왜 사단장이 끼어들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단장이 팔시온에게 원하는 일이 있다면 팔시온이 배속되어 있는 연대장에게 통고하면 되는데, 왜 직접 불렀을까? 어쨌든 명령이 내려왔기에 팔시온은 그의 대대를 부대대장에게 맡기고 짐을 꾸려, 이른 봄의 추위를 막기 위해 중무장한 갑옷 위에 두터운 망토를 두른 후 사단 사령부로 출발했다.

팔시온은 대기실에서 자신이 익히 알고 있던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미카엘, 가스톤, 미디아, 지미, 라빈, 로니에 사제를 말이다. 그들 역시 팔시온과 마찬가지로 정규군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3개월 전 크라레스가 가지고 있던 5개 용병 사단 중에서 3개가 정규군으로 편입되었다. 물론 용병 생활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남은 2개 용병 사단에 배속되었고, 정규군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만 정규 사단으로 편입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팔시온 일행의 경우 그걸 원하지 않았지만 정규군이 될 수밖에 없었다.

크라레스의 수도 크로돈에서 직접 그래듀에이트 한 명이 내려와서는 그들을 협박했던 것이다. 크라레스와 도난당한 드래곤 하트에 얽힌 속사정을 알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크라레스 입장에서는 그들을 놔 줄 수 없었다. 정규 사단에 편입되느냐, 아니면 막강한 그래듀에이트급 기사와 싸우다 장렬히 죽느냐―거절하면 곧장 죽일 거라고 아주 노골적으로 협박했다―둘 중 하나의 선택에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정규 사단에 편입되는 것을 택했다. 만약 상대가 약간이라도 만만했다면 반발을 할 수 있었겠지만 크로돈에서 파견되어 나온 인물은 팔시온 일행과 비교했을 때 너무 강했던 것이다.

팔시온까지 합류하자 그들은 오랜만에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크로돈에서 왔던 그 망할 기사는 서로 간에 작당할 수 없도록 사단장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같은 사단이긴 했지만 각 대대 단위에 뿔뿔이 흩어 놓아서 거의 만나기 힘들었다.

“이야, 미카엘, 번쩍거리는 정규군용 갑옷이 잘 어울리는군. 모두들 오랜만이야. 로니에 사제님도 오랜만입니다.”

“망할! 누가 입고 싶어서 입었냐? 안 그러면 죽인다고 협박하니까 입었지. 도망치면 기사단을 동원해서라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데 할 수 있어? 자기도 굴복한 주제에 왜 비꼬아?”

“비꼬는 게 아니야. 당당한 몸매에 잘 어울려서 하는 소리지.”

미카엘과 팔시온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미디아가 팔시온에게 물었다.

“너도 사단장 호출받고 온 거야?”

“응. 그럼 모두 다 호출받은 거야?”

“그래. 혹시 함정이 아닐까? 우리를 다 죽이려고…….”

“설마. 하지만 준비는 해야 할 거야. 나도 좀 찜찜해서 무장을 잘하고 왔지. 그러고 보니 모두들 중무장 아닌 놈은 하나도 없군. 하여튼 눈치 하나는…….”

“눈치 하나로 사는 게 용병인데, 그 재주라도 없었다면 벌써 땅속에 묻혔겠지.”

“이봐, 가스톤, 뭔가 이상한 점은 없어?”

가스톤은 약간 침울한 어조로 대답했다.

“있어. 네가 오기 전에 마법으로 알아봤어. 사단장하고 지금 대화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두 명. 하나는 그래듀에이트고 하나는 마법사야. 아마 5사이클 정도 될걸? 치레아와의 전쟁에 가지 않은 덕분에 혼자서 한가한 시간에 수련을 좀 하긴 했지만, 그래도 저 정도면 힘들어.”

이때 문이 열리면서 부관(副官)이 나왔다.

“들어오시랍니다, 모두 다.”

가스톤은 공격 마법 하나를 외워 놓고 들어갔고, 나머지는 검집에서 검이 제대로 잘 빠지는지 확인을 하거나 아니면 평상시 걸어 다닐 때 검이 임의로 빠지지 않게 걸어 놓은 가죽 끈을 풀어 두었다.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게 말이다.

그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가자 제법 장대한 체구를 가진 무사가 자신의 소개를 했다.

“안녕하시오? 나는 드미트리 실바르요. 콜렌 기사단에 있었소. 그리고 이쪽은 같은 소속의 그라시에 마리온 양이오. 마법사지요.”

인사를 건네 온 기사는 인사가 끝나자 사단장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고 부탁했다. 사단장이 나가자 실바르가 입을 열었다.

“오늘부로 그대들은 스바시에 주둔 8사단에서 전출되어, 이번에 새로 부임하신 치레아 총독 전하의 제2친위 기사단에 배속되게 될 거요.”

“친위 기사단이라구요? 하지만 저희들은 용병 출신입니다. 어떻게 친위 기사단에?”

“위에서 결정한 거요. 의문을 가질 필요 없이 그대로 행동하기만 하면 되오. 짐은 모두 가져왔겠지요? 곧 출발합시다. 가면서 얘기하기로 하죠.”

“예? 가면서라뇨? 함께 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됐소. 자, 나갑시다.”

드미트리 실바르는 꽤 숙련된 행동으로 그들을 지휘해 사단 사령부를 출발했다. 사단 사령부 내에서 대화를 나누게 되면 이리저리 어떤 놈이 주워들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기에 그는 서둘러 출발한 후 떠나면서 그들에게 어떻게 돌아가는 노릇인지 설명해 줬다.

“나도 이번에 창설될 제2친위 기사단에 배속되었소. 앞으로 잘 부탁하오.”

“저희들이 부탁드려야죠. 저희들의 상관이 되실 게 확실한데…….”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소. 이번 일은 매우 기밀이 요구되는 것이오. 나는 지금 단 두 대만이 만들어진 카프로니아급 타이탄인 도로니아와 가계약을 맺은 후 운반하는 중이니까요. 솔직히 나는 타이탄을 조종할 줄 모르오. 카프로니아급은 두 명의 총독을 위해 특별히 주문 제작된 녀석이오. 그러니 도중에서 사고가 일어나도 타이탄의 보호를 받을 수는 없다는 말이오. 알겠소?”

“예.”

드미트리 실바르의 얘기에 따르면, 팔시온 일행이 배속되어 있는 제8경갑 보병 사단과 제9경갑 보병 사단이 스바시에의 치안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 치레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본국에 3개 보병 사단만을 남겨 두고, 5개 보병 사단, 3개 기병 사단, 그리고 40여 대의 타이탄이 동원되었기에 개전 일주일도 안 되어 치레아 왕국은 두 손 들고 말았던 것이다.

치레아 왕국과의 전쟁에는 이번에 새로이 대폭 보강된 콜렌 기사단만 동원되었고, 실바르는 콜렌 기사단에 소속되어 직접 치레아 전쟁에 참전했기에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을 해 줬다.

스바시에 왕국과의 전쟁에서 막대한 수의 고철 타이탄을 노획한 크라레스 제국은 그것을 살리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스바시에에서 노획된 타이탄들은 거의가 정규급(출력 1.0) 이하의 출력을 지니는 약한 타이탄들이었기에, 그것들은 모두 완전 분해되어 새로이 테세우스급 타이탄으로 재생산되었다.

테세우스는 근위 타이탄인 카프록시아에 사용되던 엑스시온(출력 1.3)에 겉장갑만을 바꾸어 만든 것으로, 모두 다 유령 기사단에 납품되어 국적 불명의 용도로 쓸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카프록시아의 외장 갑옷 형태를 완전히 바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카프록시아의 설계도는 30년 전의 전쟁에서 황궁이 파괴되는 수난 속에서도 지켜졌기에 카프록시아의 엑스시온을 생산하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었다. 테세우스급은 노획한 물자로 짐작했을 때 총 42대가 생산될 예정이었고, 한 대씩 생산되면서 유령 기사단에서 가지고 있던 저급 타이탄들이 두 대씩 콜렌 기사단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대외적으로 발표하기에는 미가엘이나 루시퍼, 푸치니 같은 저급 타이탄들로 재생산될 것이라고 발표했기에 타국의 눈을 속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타이탄이란 게 자기 보수 능력이 있어 처음 생산된 모양이나 50년쯤 지난 모양이나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런 속임수를 쓸 수 있었던 것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새로이 보급된 대량의 타이탄으로 증강된 콜렌 기사단은 40여 대의 타이탄을 끌고 가서, 스바시에와 크라레스 간의 전쟁에 타이탄을 10여 대 보태 줬다가 몽땅 상실한 탓에 군사력이 매우 약화된 치레아를 단숨에 으깨 버렸다. 물론 치레아 후방에 버티고 있던 저 광신도들의 천국 아르곤 제국에서 갖은 외교적 압력을 가했지만, 크라레스는 그걸 묵살해 버렸다. 그 때문에 지금 크라레스에서는 아르곤과 한판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소문이 조용히 퍼지고 있었다.

팔시온 일행은 드미트리 실바르를 통해서 크라레스가 영토를 대폭 확장한 만큼 상당히 많은 군사 편제를 재편하고 있다는 것도 주워들을 수 있었다. 크라레스 정규 기사단의 가장 큰 변화는 콜렌 기사단이었다.

이번에 추가로 생산된―실바르는 그렇게 설명했지만 사실은 유령 기사단에서 보내온―것을 합쳐 17대가 된 정규급 타이탄 미가엘(출력 1.0)을 반으로 나눠서 10대는 스바시에 총독이 지휘하는 제1친위 기사단에, 7대는 치레아 총독의 제2친위 기사단에 배치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각 친위 기사단을 지휘할 총독을 위해 특별히 총독의 취향에 맞춰 주문 제작된 타이탄이 카프로니아급이었다.

두 총독은 모두 매우 뛰어난 검술 실력을 자랑했기에 방어력보다는 공격력을 더 선호했고, 그렇기에 출력이 좋으면서도 가벼운 타이탄을 원했다. 그 때문에 그들의 주문으로 제작된 카프로니아급 타이탄은 테세우스급에 들어갈 엑스시온 둘을 빼내어 장착했다. 그래서 테세우스는 40대만이 생산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만큼의 희생은 감수해도 될 정도로 그들을 조종할 기사들의 능력은 대단했다. 카프로니아는 외형상으로는 카프록시아와 같았지만 군살이 많이 빠진 날렵한 형태를 가졌다. 물론 그것은 속도를 높이기 위해 무게를 줄였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크라레스는 외형상 4개 기사단, 총 91대의 타이탄을 보유하게 되었지만, 이건 현실적으로 가진 숫자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 이유는 유령 기사단 때문이었다. 유령 기사단은 이번에 새로 보급된 40대의 신형 타이탄 테세우스와 로메로 22대, 미가엘 7대를 보유해 총 69대를 가지고 있는 크라레스 최강의 기사단이었다.

또 근위 기사단에 배속된 8대의 청기사도 빠져 있었다. 그렇기에 실지 크라레스가 보유한 전력은 5개 기사단, 총수 174대의 타이탄이었다. 거기에다가 아직 일이 밀려 해체 작업에 들어가지 못한, 치레아에서 노획한 로메로 8대와 크메룬 5대까지 합한다면 앞으로 테세우스 7대는 더 만들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대 제국 코린트를 박살 내기 위한 것이었지만, 코린트의 전력은 너무나도 강력했다. 사실 지금 크라레스나 다른 모든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코린트의 전력(戰力)에 대한 자료는 10년 전의 것이었다.

30년 전 전쟁에서 승리한 코린트는 막대한 부와 노획한 타이탄을 이용해서 흑기사 30대를 제작했고, 그들의 부를 자랑하기 위해 그 귀하디귀한 드래곤 본으로 만들어진 황제 전용 타이탄 백기사를 완성했다. 이들의 신형 타이탄 생산 계획이 완료된 것이 그러니까 10년 전이었다.

만약 이 10년 동안 코린트가 그 어떤 타이탄도 생산하지 않았다고 해도 상대하기 벅찰 정도로 강한 상대인데, 만약 그들이 뭔가를 더 만들어 냈다고 한다면 그들을 이긴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기에 크라레스의 왕실에서도 첩보망을 이용해서 코린트의 타이탄 생산 계획이 있는지 조사했지만 아직까지는 알아낸 것이 없었다. 만약 생산 계획이 있다면 최고의 기밀을 요하는 것, 그러니까 흑기사가 아닌 또 다른 더욱 강력한 타이탄이 있다는 말과 같으리라.

제2친위 기사단 조직

때는 봄, 여행하기에 좋은 계절이었다. 그들의 여행로는 이제 크라레스 제국에 병합된 영토들이었기에 도중에 산적패를 한 번 만났을 뿐, 어떤 조직적인 습격도 받지 않았다. 그것도 다 타이탄 수송이라는 것이 밖에 드러나지 않았기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드미트리 실바르가 거느린 일행은 8일에 걸친 강행군으로 크라레스 제국, 치레아 지구의 도톤시에 위치한 총독 관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총독 관저는 과거 치레아 왕국의 왕궁이었기에 매우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그리고 관저 안은 역대 왕들의 초상화는 다 치워 버렸지만 아름다운 왕비들의 초상화는 남겨 뒀기에 아주 보기 좋았다.

팔시온 일행은 관저 안으로 들어서면서 왕궁 건물이 하나도 손상되지 않았다는 것과, 자그마한 예술품까지도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꽤나 감명을 받았다. 통제가 안 되는 군대라면 산적 떼와 같아서 왕궁 안은 철저히 약탈, 파괴되었을 것이기에, 이 왕궁을 점령한 크라레스 군대의 군기가 얼마나 엄격한지를 대변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실바르는 총독 관저에 도착한 후 그를 향해 반갑게 인사를 건네 오는 묘인족 소녀를 향해 마주 인사하고는 대화를 나눴다. 팔시온 일행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묘인족 소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약간 눈에 익은 것처럼 느껴졌지만, 묘인족들은 대부분 원체 미모가 뛰어나 오히려 모두 비슷비슷해 보였기 때문에 도대체 어디서 봤는지 유추해 내기는 더 힘들었다.

“총독 전하를 뵐 수 있을까?”

“예, 실바르 경. 그리고 일행들도 함께 들어가시죠. 로니에르 공작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묘인족 소녀의 ‘공작 전하’란 말에 주눅이 들어 버린 팔시온 일행은 어색한 걸음걸이로 실바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공작이면 왕자하고 동급에 놓이는 엄청난 직위다. 아무리 돈 없고 힘없는 공작이라도 그 작위가 가지는 힘은 엄청나다는 말이다. 그런데 새로운 점령지에 우선적으로 배치된 공작이라면 아마도 제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실세일 가능성이 컸다. 거기다가 공작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타이탄에, 타이탄이 포함된 친위 기사단까지 준다면 그에 대한 황제의 믿음이 보통 크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었다.

로니에르 공작이 기다리는 방에 들어간 팔시온 일행은 모두 멍청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놀랍게도 로니에르 공작은 그들이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과거 헤어졌을 때보다는 더욱 성숙한 분위기에 키도 좀 더 커진 듯한 소녀가 창밖을 보고 있다가 그들이 들어서자 고개를 돌려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무릎이 살짝 가려지는 짧은 스커트에 허리에는 푸른 광택이 나는 검을 차고는 그들을 향해 활짝 미소 짓는 소녀를 보고 그들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하지만 이때 실바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를 드리자, 그들도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일어서. 오랜만에 만났는데 딱딱한 인사는 생략하기로 하지.”

“정말 오랜만이…옵니다, 전하.”

습관적으로 평어로 말하려다가, 어색하게 뒷말을 잇는 팔시온을 보고 소녀는 미소 지었다.

“혓바닥이 잘 굴러가지도 않으면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하지 말고 그냥 말해. 그런 식으로 하면 잘 못 알아듣겠어. 익숙하지 않은 말투라서 말이야. 그건 그렇고 실바르.”

“예, 전하.”

“그 녀석은 가져왔나?”

“예, 전하.”

“좋아, 그럼 지하실로 가지. 너희들은 여행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먼저 목욕이나 하고 쉬어. 일 끝나면 곧 찾아갈게.”

소녀가 스커트 자락을 나풀거리며 실바르와 함께 나가 버리자 팔시온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미카엘을 향해 말했다.

“다크가 언제 공작 나으리가 되어 버렸지?”

미카엘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만약, 힘을 되찾았다면 가능하겠지. 하지만 우리는 헤어진 지 일 년도 채 안 되었는데 그게 가능할까?”

총독 관저는 과거 치레아 왕국의 왕궁이었기에, 치레아 왕실의 근위 타이탄을 보관하던 넓은 지하 공간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텅 비어 있었지만 다크는 거기에 자신의 청기사를 보관해 둘 생각이었다.

지하실에 도착한 다크 로니에르 공작은 자신의 타이탄 안드로메다를 불러냈다. 곧이어 공간을 열고 위압적인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청색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색 타이탄에는 크라레스 황실 근위 기사단의 문장 외에도 황금색 드래곤의 문장이 추가로 그려져 있었다. 그 황금색 드래곤의 문장은 다크가 황제로부터 로니에르라는 성(姓)과 작위를 하사받을 때 선택한 로니에르 가(家)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로 불렀는가?>

“잠시 너와 맹약을 해지하고 싶어.”

<거절한다.>

설마 저 덩치가 거절할 줄은 생각도 못 해 봤기에 다크는 다시 한 번 더 물을 수밖에 없었다. 타이탄에 해당되는 골렘의 맹약은 일대일이었다. 이 녀석이 맹약 해지를 찬성하지 않는다면 다른 타이탄의 주인이 될 수는 없었다.

“뭐?”

<과거 너를 처음 만났을 때는 정말 실망스러웠지만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너를 선택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너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봤고, 지금의 너에 필적하는 인물은 한 명도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런데 내가 왜 너를 포기하겠는가?>

“대책이 없는 놈이군. 하지만 너는 너무 눈에 띄어서 사용할 수가 없어. 그렇기에 황제가 보내 준 딴 녀석을 쓰려고 해. 대신 나중에 전쟁이 벌어지면 너를 꼭 쓸 거야. 그리고 나도 그 전에 타이탄을 어떻게 부리는지 배워야 할 거 아냐?”

<그런 이유라면 허락하겠다. 하지만 맹약을 완전히 취소하지는 않겠다. 나는 너의 종이다. 그 사실은 네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나는 네가 다시 부를 때까지 공간의 저편에서 기다리겠다. 맹약이 완전히 취소되지는 않았기에 너와 나는 아주 가는 맹약의 실에 연결되어 있다. 나는 그것을 통해 너의 생과 사를 확인할 것이며, 네가 죽는다면 그때부터 새로운 주인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동의하는가?>

“동의해.”

<좋다. 내가 안식을 취하는 동안 너는 타이탄을 다루는 기법을 배워라. 앞으로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주인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 말을 끝으로 청기사는 공간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다크도 이런 식이 될 줄 알았다면 구태여 청기사를 보관해 둘 넓은 장소를 찾는다고 고생할 필요조차 없었기에 약간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청기사가 사라지고 나자 다크는 실바르를 돌아봤다.

“그 녀석을 불러.”

“예, 전하.”

그와 동시에 방금 청기사가 사라진 옆 공간을 열고는 청색과 붉은색을 칠한 거대한 타이탄이 나타났다. 이 타이탄에는 제2친위 기사단을 나타내는 검은 드래곤의 문장과 그 문장의 중간에 쓰인 흰색의 ‘Ⅱ’라는 숫자. 또 로니에르 가문을 나타내는 황금 드래곤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카프로니아는 크라레스가 보유한 최고의 검객들을 위해 제작된 것인 만큼 처음부터 단가를 줄이기 위해 아예 미스릴을 입히지 않았다. 미스릴을 입히지 않아도 그들은 이 정도 타이탄에게 주종 관계를 거절당하지 않을 자신감이 있는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카프로니아는 페인트 밑으로 대마법 주문(對魔法呪文)의 형상이 울퉁불퉁하게 드러나 있었다.

카프로니아가 거대하다고 하지만, 방금 봤던 청기사가 원체 크고 뚱뚱했기 때문에 둘은 자연스럽게 비교되었다. 어떻게 보면 연약하게 보일 정도였다. 이 카프로니아급 타이탄은 다크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졌기에 현재 다크가 차고 있는 검처럼 유연한 곡선을 가진 검 한 자루가 검집에 들어간 채로 허리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방패 대신에 소드 스톱퍼(Sword Stopper : 손목 위에 장착하는 강철 구조물. 검을 막을 수 있는 것으로 아주 소형화된 방패와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만이 양 손목에 달려 있었다.

그 녀석이 나타나자 실바르는 재빨리 수송을 위해 맺었던 가계약을 취소했다. 맹약으로 맺어진 인물만이 그 타이탄과 대화를 할 수 있기에, 옆에서 봤을 때는 실바르 혼자서 떠들어 대는 것처럼 보였다. 실바르가 맹약 취소를 선언한 후 다크는 카프로니아를 향해 말했다.

“이봐.”

<나를 불렀는가?>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그대에게는 안드로메다가 있지 않은가? 너는 그의 주인이고 또 그는 나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쓸 수 없지. 쓸 수 없는 타이탄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 때문에 그 녀석과 맹약을 거의 반 이상 해지해 놓은 거고. 그러니 나와 맹약을 맺지 않겠는가? 나는 타이탄의 조종술도 익혀야 하고, 나중에 안드로메다를 쓸 수 있을 때까지 다른 타이탄이 필요하다.”

<정말인가? 하지만 겨우 나 따위와…….>

“정말이야. 너는 황제가 나에게 직접 선물한 녀석이거든.”

<나에게 있어서 황제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대는 어마어마하게 강하다. 그대는 숨기고 있지만 그대에게서 풍겨 나오는 강렬한 마나의 기운을 나는 느낄 수 있다. 나라도 괜찮다면 맹약을 수락하겠다. 후회하지는 않겠지?>

“후회는 안 한다.”

<좋다. 이제부터 그대와 나는 태곳적부터 내려오는 골렘의 맹약에 따라 주종이 되었다. 내 이름은 도로니아. 그대의 이름은?>

“다크, 다크 로니에르. 지금은 필요 없으니 일단 공간 저편에 들어가 있어.”

그 말과 동시에 카프로니아는 사라졌고, 그 거대한 덩치들이 이 지하실을 꽉 채웠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 같이 느껴질 정도로 공간은 다시 텅 비었다.

“좋아, 일이 잘되었군. 이제 친구들을 만나러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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