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의 핵심 인물들이 정찰을 핑계로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 남은 패거리는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파티의 위치는 드래곤의 레어에서 15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기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단, 이때 식사 준비에 사용할 나무는 모두 폭풍우 따위 덕분에 떨어진 죽은 나뭇가지를 사용해야만 했다. 그린 드래곤은 레어 주위의 숲에 마법을 걸어 침입자가 살아 있는 나뭇가지를 꺾으면 경보음이 전해지게 만들어 둔다는 전설 때문이었다.
숲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들을 주워서 불을 피워 스프를 끓이고 빵을 데우고, 또 베이컨 조각을 프라이팬에 굽고 하느라 숲 속에 구수한 향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들을 주워 나른 무리는 별로 할 일도 없었기에 식사 당번인 베티 사제가 스프를 끓이는 모습이나 라빈이 베이컨 굽는 모습을 느긋한, 그러면서도 무언가 만족스러운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파이어해머는 한쪽 구석에 앉아서, 이번에 합류한 일행이 가져온 짐들 사이에서 자신이 주문해 놓은 무기를 꺼내 조립하고 있었다. 그것은 특수 제작된 커다란 석궁이었는데, 루네아 왕국의 저격수들이 사용하는 대단히 강력한 것이었다. 이 강력한 석궁에서 발사되는 작은 화살의 위력은 엄청나게 강해서 상대가 그래듀에이트라 해도 10여 명이 모여 숨어 있다가 발사하면 저세상에 보낼 수 있을 정도였다. 루네아 왕국은 필레도르 산맥에 위치한 작은 산악 국가였지만, 산맥이 제공하는 천연의 엄폐물과 강력한 석궁 덕택에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작은 호랑이 같은 존재였다.
어쨌든 루네아 왕국에 거금을 주고 구입한 후, 그것을 자신이 직접 뒷손질까지 해서 더욱 강력해진 석궁을 조립하며 파이어해머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사실 이런 강력한 무기를 효과적으로 쓰기 위해서는 사용자에게 사격 연습이라도 좀 시켜 두는 게 좋겠지만, 상대는 드래곤이니 아무리 사격 실력이 형편없다고 해도 맞지 않을 리 없었다. 원체 덩치가 크니까 말이다.
석궁 다섯 자루를 완전히 조립한 후 또 다른 짐 꾸러미를 풀어 특수하게 제작된 화살을 꺼냈다. 그 화살은 다른 곳에서 보던 것과 거의 비슷한 모양이었지만 화살을 만드는 데 사용된 재료는 완전히 달랐다. 뻣뻣한 독수리의 깃털이 붙어 있는 화살대는 나무가 아닌 강철이었고, 화살촉에서는 짙은 초록색 광택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드래곤의 비늘은 너무나도 강력한 금속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그 드래곤을 잡기 위한 무기들도 드래곤의 비늘로 만들어야만 했다.
파이어해머는 화살 하나하나를 들어 이상이 없는지 자세히 살펴보고는 작은 휴대용 통 속에 담았다. 이 화살 하나의 가격은 엄청나게 비쌌지만 이것만 가지고 드래곤을 잡는 데는 무리가 있다. 드래곤의 크기로 봤을 때 화살 하나 꽂혀 봐야 바늘에 찔리는 것 이상의 타격을 주기는 힘들다. 물론 그 때문에 쏘기 직전 마법을 걸거나 독을 바르는 것이지만 말이다.
파이어해머는 석궁 조립과 손질을 다 끝내고 그것들을 나무 옆에 세워 둔 후 일행을 한 명씩 유심히 살펴봤다. 드워프는 저 오랜 옛날부터 드래곤이란 생물과 투쟁을 벌여 왔다. 광폭한 드래곤들로부터 보석들을 보호하기 위한 투쟁이었지만, 사실 드워프의 힘으로 그 강대한 생명체를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느 정도 자신들에게도 자존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는 했지만, 사실 드래곤에게는 크게 먹혀들지도 않았다.
‘과연 이 녀석들이 드래곤을 잡을 수 있을까?’
아무리 1천 살도 안 된 드래곤이라고 해도, 또 드래곤 중에서 가장 약한 그린이라고 해도 드래곤은 드래곤이다. 한 방에 타이탄을 짓이기고 도시를 간단히 파괴하는…….
유심히 일행들을 바라보던 파이어해머의 눈길이 다크라고 불린 아름다운 소녀에게 멈춰졌고, 그는 놀라운 걸 발견하고는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처음 소개받았을 때 그 소녀가 자신을 냉담한 눈으로 힐끗 보고 고개를 돌렸기에, 파이어해머는 그녀가 자존심 있는 마법사니까 하고 생각했었다.
엘프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나이에 비해 엄청난 마법까지 익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저런 어린 나이에 5사이클급 공격 마법을 구사한다면 딴 곳에 신경 쓸 겨를 없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죽자고 마법만 익혔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녀의 무장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녀가 가진 검이 눈속임 정도의 용도밖에 안될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싸구려 검을 본다는 것은 타고난 장인(匠人)인 드워프에게는 고통이었다. 그 때문에 검푸른 투박한 모양의 칼집을 얼핏 보고는 아예 신경을 껐었다. 하지만 파이어해머는 지금 나무에 편안히 기대어 앉아서 어딘가를 보고 있는 그녀의 허리에 매달린 검집을 자세히 보고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검집의 검푸른색은 페인트나 도료를 칠한 것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드워프가 매우 아끼는 아름다운 금속들 중의 하나인 ‘크발티에’가 내는 광택이요, 색깔이었다.
그 검집을 쳐다보는 동안 어느덧 파이어해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녀에게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었다. 단조롭고 수수하지만 그 우아한 품격……. 파이어해머는 그 검을 절대로 인간이 만들었을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저 정도의 예술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자신과 같은 드워프뿐이었다. 그것도 대단히 뛰어난 실력을 지닌 드워프가 혼신의 정성을 기울여서 만든 것이리라.
“무슨 일이지?”
못생긴 애늙은이처럼 생긴 드워프가 자신의 몸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소녀는 차갑게 쏘아 붙였지만 파이어해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예술품인가? 가까이서 차근차근 보니 검집, 손잡이, 심지어는 검대(劍帶)에 사용되는 자그마한 쇳조각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드워프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야?”
다시 물어보는 소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파이어해머는 소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아름다운 커다란 눈을 가지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소녀를 말이다. 파이어해머는 이 소녀가 과연 이렇게 멋진 예술품의 주인이 될 만한 자격이 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의 감각과 경험으로 봤을 때 그 소녀는 검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었다.
“이 검은 어디서 난 거냐?”
파이어해머의 질문을 듣고서야 다크는 아르티어스가 이 검집을 드워프에게 주문하여 만들었다는 게 생각났다. 모두가 검집의 수수한 모양에 속아서는 대충 넘어가 버리는데, 이 못생긴 파이어해머라는 웃기는 성(姓)을 가진 드워프가 그 가치를 눈치 채자 다크는 속으로 매우 감탄했다. 그녀는 상대의 안목이 대단히 높은 것에 감탄하여 솔직히 대답해 줬다.
“아버지에게서 선물 받은 거야.”
파이어해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파이어해머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던 것이다.
“딸을 사랑하는 건지, 돈이 많은 건지 알 수가 없군. 검이 아깝다, 아까워…….”
아무리 파이어해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해도 그걸 못 들을 다크가 아니었기에 한소리하려다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 파티는 뭔가 조금 이상하기에 가급적이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 두고 보자.’
그날 저녁 식사를 배불리 먹은 일행은 불침번 한 명만을 남겨 두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15킬로미터에 달하는 산악 행군을 해야 하고, 드래곤을 사냥해야 하는 험난한 하루가 될 것이다. 자기 컨트롤이 뛰어난 인물들은 벌써 잠이 들었지만, 지미나 라빈 같은 풋내기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달래느라 잠을 자지 못하고 나무 틈으로 간간이 빛을 뿌리는 별들을 세고 있었다.
일행은 한 시간씩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섰는데, 새벽녘에 불침번을 선 인물 중의 하나가 용병인 네르만이었다. 네르만은 아더가 단지 툭 쳤을 뿐인데도 재빨리 옆에 놓인 검을 잡았지만, 곧 자신을 깨운 상대가 누군지 깨닫고는 검을 놓았다. 평상시에는 우스갯소리나 해 대던 멍청해 보이는 인물이었지만 어쩌다 한 번씩 오랜 용병 생활을 한 표시가 나곤 했다. 네르만은 검대를 허리에 차면서 나직하게 물었다.
“이상한 점은 없었어?”
“응, 몬스터고 뭐고 한 마리도 안 보여. 이 정도 깊은 산속이면 야행성 몬스터 한 마리 정도는 나타나야 하는데……. 드래곤의 영역이라서 그런가?”
네르만은 지금껏 모포 대용으로 쓰던 두터운 망토를 집어 어깨에 걸쳤다.
“뭐, 안 보인다니 잘됐군. 이만 자게나. 참, 나 다음에는 누구지?”
“타론이야.”
“알았어. 잘 자게.”
네르만은 천천히 조금 걷다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굳어진 몸을 풀었다. 몸 여기저기서 뚜둑거리는 아우성이 들려왔다. 자고 일어나면 언제나 이런 식으로 몸을 풀어 왔기에 네르만은 이게 뼈 부러지는 소리가 결코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상 뚜둑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을 정도로 몸을 완전히 풀어 주고, 천천히 모닥불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초가을이었지만 이런 고산 지역에 오면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네르만은 모닥불에 나뭇가지 서너 개를 던져 넣고 시간이 가기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네르만이 모닥불 옆의 따뜻한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그로부터 50분 정도가 지난 다음이었다. 네르만은 모닥불 속에 나뭇가지 몇 개를 집어넣은 후 천천히 일어섰다. 천천히 일어서는 네르만의 눈동자는 평소의 그 유쾌한 장난기를 찾을래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냉랭했다. 네르만은 일어서기 전 동료들 중에 혹시나 잠에서 깬 사람이 없는지 유심히 기척을 살펴 두었기에, 조심조심 움직인다면 동료들이 깰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네르만은 조심조심 동료들이 빙 둘러 잠들어 있는 모닥불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닥불에서 한 20미터쯤 벗어나자 품속에서 단검(短劍)을 꺼내 조용히 모닥불의 불빛에 의지해서 작은 구덩이를 팠다. 적당한 구덩이가 생기자 그는 품속에서 지름 1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수정 구슬을 꺼내 구덩이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구덩이를 덮고 낙엽을 흩어 놓아 표시가 나지 않도록 만들었다.
‘좋았어! 이걸로 이 지긋지긋한 여행도 서서히 끝이 보이는군. 며칠 후면 나는 엄청난 부자가 되어 있을 거야. 흐흐흐흐…….’
물론 이건 네르만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그의 이상한 행동을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는 인물이 있는지는 네르만도 미처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곳이군. 정말 아름다워! 과연 드래곤이 살 만한 곳이야. 와! 저 절벽 좀 봐!”
유쾌하게 떠들고 있는 네르만을 보며 아더는 짜증이 났다.
“조용히 좀 해. 거의 다 왔어. 드래곤이 듣겠다.”
하지만 아더의 말에도 네르만은 입을 다물지 않았다.
“이봐, 저 동굴을 좀 보라구. 겨우 저 안에 드래곤이 들어갈 수나 있는 거야? 높이가 겨우 7미터도 안 되겠는데? 안에 오우거들이 떼거지로 사는 거 아닐까?”
“제발 좀 닥쳐! 드래곤이 현신한 채로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 몇 개나 되겠냐? 대개는 변신해서 생활하지.”
나지막하게 도란거리면서 걷다 보니 동굴에서 거의 1킬로미터 근처까지 접근했다.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는지 스펜은 걸음을 멈추고 일행을 불러 들였다.
“자, 모두들 좀 모여 봐. 작전을 일러 줄 테니까…….”
일행이 모이자 스펜은 대강 그려 놓은 지도를 펼쳐 보였다.
“저 동굴 속에 드래곤이 살고 있다. 지금 샤트란의 타이탄은 절벽 위에 대기하고 있어. 그리고 타론과 마리나는 절벽 위에서 석궁과 마법 공격을 하기 위해 가 있지. 드래곤을 도발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는 1조의 지미, 라빈, 다크가 한다. 1조가 해야 할 일은 동굴 속에 파이어 볼이라도 쑤셔 넣어서 드래곤을 화나게 만드는 거야. 그리고 이쪽의 힘을 적당히 과시해서 드래곤이 본체로 현신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구. 현신하지 않은 드래곤은 죽여 봐야 개 값도 못 받아. 알겠어? 현신하기 전까지는 적당히 위협사격을 해서 약을 올리라구.”
1조로 지명받은 인물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스펜은 말을 이었다.
“1조의 공격으로 드래곤이 현신하면 그다음 공격은 2조! 즉, 우리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파시르와 네르만이 해야 해. 너희는 각기 타이탄을 몰고 달려 나가 드래곤을 공격해라. 드래곤이 날아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3조가 절벽 위에서 대기 중이야. 그리고 베티 사제님은 뒤쪽에서 부상자를 좀 치료해 주시구요. 4조는 나와 아더가 맡는다. 우리 둘은 석궁 사격 실력이 뛰어나니까 뒤에 처져서 좋은 위치를 잡고 놈의 눈 등 연약한 부분을 노릴 거야. 파이어해머는 드래곤의 사체를 분해하는 일을 맡기기 위해 불렀으니 사냥에 참가하지는 않는다. 자, 질문 있나?”
스펜의 짙은 녹색 눈을 다크가 자신의 갈색 눈으로 탐색하듯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타이탄 두 대와 석궁 공격으로 잡을 수 있는 거야?”
다크의 질문에 스펜은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지만 그의 말투에 자신감이 넘친다고는 볼 수 없었다.
“충분할 거야. 어쨌든 놈은 8백 살 정도의 나약한 그린 드래곤이야. 또 절벽 위에 배치된 3조에서 지원 사격이 날아갈 거야. 타이탄이 던지는 투창의 위력은 대단하지. 2대 1이 아니라 3대 1이야. 승산은 충분하다구. 자, 행동 개시!”
드래곤 사냥
“저, 진짜 이걸로 놈을 해치울 수 있을까요?”
지미는 아침에 파이어해머로부터 받은 석궁을 들어 보이며 다크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건 다크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드래곤이란 생물과 싸워 봤어야 대답을 해 주지.
“몰라. 효과가 있기만을 빌어. 이번 일은 좀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해.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는 게 사실이거든.”
다크 일행은 숲이 끝나는 지점인 동굴에서 거의 1백 미터 전방까지 접근해 들어갔다. 여차하면 숲 속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 가급적 숲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니까 말이다. 지미와 라빈이 두터운 나무 뒤에 숨어서 석궁을 장전하는 동안 다크는 오래전에 가스톤에게 배운 대로 파이어 볼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단은 3사이클급으로 마나를 원반식으로 끌어 모은 후 외쳤다.
“파이어 볼!”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발사된 큼직한 불덩어리가 휙 날아가서는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1백 미터나 떨어진 원거리에서 발사해서 그런지 동굴에 이를 때쯤에는 파이어 볼의 위력이 상당히 약해졌다. 그 때문인지 동굴 속에 불덩어리가 들어갔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드래곤의 무반응에 약간 신경질이 난 다크는 또다시 마나를 끌어 모으면서 이번에는 좀 더 강력한 걸 준비했다.
‘감히 나를 무시하다니……’
드래곤이 현신하기 전에 통구이가 되어 버린다고 해도 그녀로서는 아무런 아쉬움이 없었기에, 다크는 오기로 마나를 있는 대로 끌어 모았다. 그녀의 주변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다섯 개 마나의 흐름이 만들어졌고, 그 흐름은 맹렬한 속도로 회전했다.
“파이어 볼!”
그녀의 손에서는 처음 날아갔던 불덩어리는 아예 반딧불 정도로 느껴질 만한 엄청난 불덩어리가 생겼다. 다크는 동굴 속을 힐끗 쳐다본 후 냉랭한 미소를 지으며 그 불덩어리를 동굴 속으로 던졌다.
“죽어 버렷!”
파이어 볼이 동굴 쪽으로 날아가자 갑자기 동굴 속에서 오우거 한 마리가 밖으로 튀어 나왔다. 오우거는 재빨리 마법을 외워 마법의 장벽을 만들었고, 그 장벽에 파이어 볼이 격중되었다.
쾅!
엄청난 화염이 흩어졌을 때는 약간은 놀라운 표정을 짓고 있는 4미터 정도의 키에 우람한 근육질, 지독하게 못생긴 얼굴을 가진 오우거만 남아 있었다. 한쪽 손에는 1.5미터는 되어 보이는 바스터 소드를 들고 있었다. 엄청나게 큰 바스터 소드였지만, 그걸 오우거가 들고 있다 보니 롱 소드처럼 보였다.
그 오우거는 놀랍게도 사람의 음성과 비슷하지만 좀 굵직하면서도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엄청난 파이어 볼이군. 너희들은 뭔데 나의 보금자리에 파이어 볼을 던지는 거냐? 목숨이 아깝다면 돌아가라.”
하지만 오우거의 부탁을 들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다크는 라빈에게 지시했다. 검은 지미가 조금 실력이 나았지만 활은 라빈 쪽이 약간 나았기 때문이다.
“저 녀석 다리에 한 방 날려.”
퓽!
확실히 엄청나게 강한 석궁이라 그런지 1백 미터의 거리를 거의 순간에 가로질러 오우거의 다리 깊숙이 박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관통해 버렸다. 그 엄청난 석궁의 위력에 오우거도 약간은 놀란 것 같았다. 오우거는 자신의 살을 관통한 후 10미터쯤 뒤쪽의 절벽에 3분의 1쯤 박혀 들어가 있는 화살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석궁의 위력이 의외로 강하다는 데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오우거는 아직까지도 인간들을 깔보고 있었다.
마법의 원조하면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이다. 자신이 조금 마법 수련에 게을렀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겨우 저 정도 마법사 하나 해치우지 못할 이유는 없었고, 활이나 창 따위를 가진 전사 몇 명이 부록으로 딸려 있다 해도 그건 상황 변화에 아무런 보탬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박혀 있는 화살을 뽑아내어 본 후에 그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오우거는 화살촉이 자신과 같은 그린 드래곤의 뼈로 제작된 것을 알고는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들의 목적이 뭔지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이 녀석들은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이다.
“드, 드래곤 킬러! 네놈들은 드래곤 슬레이어였나? 쓰레기 같은 것들! 죽어랏! 지굉파(地轟波)!”
확실히 대지의 기운을 지닌다는 그린 드래곤답게 그 오우거의 첫 번째 공격은 대지의 정령 마법이었다. 꼭 파도가 몰려오는 듯 땅이 파동을 일으키며 급속도로 다크 일행에게 접근해 왔다. 그러나 서로 간의 거리가 1백 미터나 떨어져 있었기에 피할 수 있는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지미와 라빈은 대지가 꿈틀꿈틀 파동을 일으키며 자신들에게 접근해 오자 놀라서 양 옆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다크도 왼쪽으로 피했다. 다크는 방금 자신들이 있던 그 주변의 나무들이 뿌리부터 산산조각이 나서 쓰러지는 것을 보며 마법의 위력이란 것이 꽤나 대단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그따위 것에 감탄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다크는 마법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자 재빨리 정신을 집중해서 마나를 집중시킨 후 외쳤다.
“파이어 볼!”
또다시 5사이클급의 거대한 화염 덩어리가 오우거를 향해 날아갔다. 오우거는 그걸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 이번에도 오우거 가까이까지 날아간 거대한 화염 덩어리는 마법의 벽에 막혀 흩어져 버렸다. 5사이클급 파이어 볼치고는 엄청난 위력인 것을 보고, 오우거는 약간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제법이군. 하지만 그 정도로는 드래곤 슬레이어 놀이를 꿈꿔서는 안 되지. 뇌(雷)!”
그와 동시에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의 스무 차례에 걸친 날벼락이 떨어져 내렸지만 숲의 나무들만 작살냈을 뿐 별 효과는 없었다. 사람보다 더 큰 나무라는 존재들이 벼락에 먼저 맞아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무에 맞고 양 옆으로 튀어 대지를 흐르는 번개와 불타서 쓰러지는 나무들은 다크에게는 별로였는지 몰라도 지미와 라빈의 생명을 위협하기에는 충분했다.
지미와 라빈이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는 꼴을 보면서 드래곤은 이런 보잘것없는 존재들 때문에 현신할 필요도 없다는 듯 여러 가지 마법으로 ‘간 큰 벌레’들을 공격했다.
다크 또한 틈틈이 자신이 알고 있는 마법을 오우거에게 쏴 봤지만 상대의 바리어를 깨지 못하자 약간 초조해졌다. 검을 쓴다면 간단히 해결되겠지만 여기서는 원체 지켜보는 눈들이 많기에 마법만을 써야 했다.
화염과 뇌격을 몇 방 날렸지만 그녀가 지닌 마법은 원체 날림으로 배운 것들이라 위력은 형편없었다. 5사이클급 파이어 볼은 구사할 줄 알면서도 5사이클 마법 중에서 최강의 위력을 낸다는 익스플로우전(Explosion) 같은 마법은 모르니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녀의 마법은 보기에는 거창했지만 위력은 별로였던 것이다.
“제기랄!”
상대의 마법을 민첩한 몸놀림으로 또다시 피한 다크는 아쿠아 룰러를 사용하기로 작정했다. 아쿠아 룰러로 만들 수 있는 것은 강력한 수계의 정령 마법. 가능성은 있을 것 같았다.
“아쿠아 에로우!”
거의 20여 개에 이르는 엄청난 물 화살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들자 오우거는 혼비백산했다. 석궁에서 발사하는 화살보다도 더 강력한 위력의 물 화살. 이건 수계 마법들 중에서도 매우 높은 수준의 것이었다.
정령 마법은 마법보다 물리력에 의한 피해가 더욱 큰 마법. 서로 간의 거리가 거의 1백 미터에 이르는데도 그 물줄기의 위력은 하나도 줄어들지 않고 순식간에 오우거 쪽으로 날아들었다. 다크가 아직 물 화살들의 방향 조종이 미숙했기에 오우거에게 격중된 것은 불과 다섯 개 정도였지만, 그 위력은 엄청났다. 바리어는 간신히 깨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었지만, 자신의 뒤 절벽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걸 보고 오우거는 중얼거렸다.
“강철도 뚫어 버리는 물 화살. 최상급 물의 정령 마법? 정말이지 나를 놀라게 하는군. 너는 나에게 도전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우거의 몸이 녹색 광택에 휩싸이면서 커지기 시작했다. 그걸 본 지미와 라빈은 재빨리 나무를 헤치며 뒤도 보지 않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오우거인 상태에서도 이놈의 석궁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본체로 현신한 후에는 안 봐도 뻔하기 때문이다. 조금 뒤늦게 다크도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