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의 마법사와 두 명의 수련 기사가 오우거, 아니 드래곤을 향해 용을 쓰는 것을 네 개의 눈동자가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사인 마리나와 기사인 샤트란이었다. 마리나는 재빨리 움직이며 파이어 볼을 날리고 있는 다크를 놀랍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저 아이 마검사(魔劍士)였어. 저 놀라운 움직임을 봐. 바리어나 실드를 치는 게 아니고 회피 동작으로 마법을 피하다니……. 보통 마법사들은 체력이 모자라서 절대 저렇게 못 하지. 남자 애들이 저 여자 아이에게 꽤 조심스럽게 대하기에 왜 그런가 했더니 저 아이들 중에서는 최고의 실력인 것 같아.”
샤트란도 검사에 못지않은 움직임으로 재빨리 드래곤의 마법 공격을 피하면서 공격 마법을 날리고 있는 다크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마법이 너무 단조롭네요. 썬더(Thunder), 파이어 볼, 윈드 에로우(Wind Arrow). 위력은 꽤 괜찮은 것 같지만 모두 초보적인 마법들뿐이잖아요?”
마리나는 시선을 싸움판에 고정시켜 둔 채 답했다.
“맞아. 확실히 수준은 5사이클급이지만, 저런 초보 주문으로는 제대로 된 위력을 내기 힘들지. 설마 상급 주문을 안 배운 것은 아니겠지?”
“글쎄요.”
이때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여태껏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고 있던 소녀가 뭔가 주문을 외우면서 손을 뻗치자 순간적으로 햇빛을 받아 빛나는 수십 가닥의 무언가가 드래곤 쪽으로 날아갔던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속도에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겠지만, 수련에 수련을 거듭한 뛰어난 무사인 샤트란은 볼 수 있었다.
“저게 뭐죠?”
“글쎄, 수계(水系) 공격 마법 같기도 하고……. 이 거리에서는 잘 모르겠는걸?”
하지만 그녀들의 한가한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드래곤이 갑자기 녹색 광채를 뿜어내며 본체로 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아래에서 싸우던 사람들은 숲 속으로 도망쳐 버렸고,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들에 가려서 곧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도망치는 지미, 라빈, 다크의 좌우로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수풀을 헤치며 달려 나오는 거대한 물체들이 있었다. 숲 속 저 뒤쪽에 숨어 있던 거대한 타이탄 두 대는 1조가 목표를 달성하자 엄청난 속도로 창 세 자루를 쥐고, 허리에는 검을 찬 채 돌격해 들어갔다. 그들은 이 정도 새끼 드래곤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고 가까이 접근해서 빨리 끝장내 버릴 작정이었다.
드래곤은 타이탄들이 접근해 오는 것을 본 순간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콧방귀를 뀌며 빈정댔다.
‘가소로운 것들, 계획이 겨우 이거였단 말이냐? 겨우 저 고철덩어리 두 개로 뭘 할 수 있다고…….’
드래곤은 인간들의 얕은 잔꾀를 비웃으며 변신하면서도 깊이 숨을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타이탄 두 대가 드래곤을 향해 창을 던진 그 순간 드래곤은 본체로 돌아가 있었고, 순식간에 몸속에 쌓인 대지의 기운을 토해 냈다. 드래곤의 몸속 깊이 쌓여 있던 대지의 기운은 드래곤의 폐 속에 들어 있던 공기와 섞여 짙은 녹색을 띠는 가스 같은 것으로 변해 거대하게 벌어진 드래곤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던 창은 녹색의 가스를 통과하던 도중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 정말이지 지독할 정도로 강한 부식력을 지닌 가스였다. 그런데 그 가스는 창을 녹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흘러가 곧장 타이탄들에게로 날아갔고, 두 대의 타이탄은 그 녹색의 가스를 피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타이탄들은 드래곤을 잡을 목적으로 너무 가까이 접근해 들어갔었기에 그 브레스를 완전히 피하기는 힘들었다. 타이탄의 외피가 가스에 녹아 들어갔지만 타이탄들은 머리 뒤쪽에 방패를 대고 탑승자를 보호한 채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타이탄의 외부 부식도가 엄청나서 그걸 수복하기 위해 타이탄은 기사의 마나를 대량으로 흡수해 댔다.
파시르는 자신의 몸을 망토로 가린 채 타이탄에서 탈출했다. 그와 동시에 옆에서 지켜보던 다크가 재빨리 그의 몸에 아쿠아 바리어를 쳐 줬고, 파시르는 물에 잘 녹는 그 가스의 위협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파시르의 타이탄은 도망치는 그의 뒤에서 반쯤 녹아 버린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파시르는 자신의 생명을 우선시했고, 타이탄을 한낱 마음에 드는 도구 정도로 생각했기에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네르만은 완전히 그와 반대의 경우였다. 그는 타이탄 한 대가 어느 정도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걸 포기할 수 없었다. 타이탄은 정말 엄청난 재산적 가치가 있기에 그걸 저따위 브레스에 녹아 없어지게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몸속에 축적되어 있던 마나는 모두 고갈되었고, 그가 기절하자마자 타이탄도 그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주인과 함께 생명을 끝마쳤다.
“살려 줘서 고맙다. 예상 밖으로 대단한 마법사였군.”
파시르는 자신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소녀 덕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베티라는 사제는 브레스에 죽어 버렸는지 아니면 도망쳤는지, 부상자 치료를 위해 그녀가 대기해야 할 장소에 없었다. 그리고 저 절벽 위쪽에 있는 마법사보다는 이 소녀가 자신을 구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천만에. 죽기에는 아까운 인물인 것 같아서 도와줬을 뿐이야.”
다크는 넓은 면적에 걸쳐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는 방어 장벽인 아쿠아 바리어를 쳐서 드래곤이 뿜어내는 가스를 막고 있었다. 그 덕분에 그녀의 마법 장벽 안에 들어와 있는 파시르, 지미, 라빈은 멀쩡했지만 나머지의 생사는 알 길이 없었다. 다크는 한 번씩 장벽 윗부분에 구멍을 뚫어 아직도 가스가 날아다니는지 살펴보았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파시르가 무뚝뚝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직도 브레스를 토하고 있나?”
“글쎄, 거의 멈춘 것 같은데?”
“일단 브레스가 멈췄으면 일행에 합류하자. 절벽 밑은 전멸했다고 해도 절벽 위로 올라간 녀석들은 괜찮을 거야.”
모두 그게 좋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크의 생각은 달랐다. 다크는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아니, 일단 숨어서 지켜보기로 하지. 뭔가 이상한 점이 있으니까.”
다크가 반지로 흘러들던 기를 차단하자 거대하게 회전하고 있던 물의 장벽은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그 지독한 부식성 가스가 숲을 덮쳤지만 놀랍게도 숲은 깨끗했다. 물론 밑에 쌓여 있던 낙엽이나 나뭇가지, 돌 등은 완전히 녹아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녹아서 부드러운 흙 속으로 흘러든 지금 숲의 나무들은 더욱 더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확실히 대지의 기운을 갖는 그린 드래곤은 대지에서 태어나는 숲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존재인 모양이었다.
드래곤은 그 놀라운 가스를 전력으로 토해 낸 후 잠시 숨을 고르더니, 반쯤 녹은 채 쓰러져 있는 타이탄의 잔해를 보며 승리의 환성을 질렀다.
<캬오오오오오오오!>
드래곤 로어(Dragon Roar). 드래곤의 포효는 모든 생명체에게 두려움을 안겨 준다. 드래곤의 포효 한 번에 아예 굳어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식은땀만 삐질거리는 게 거의 모든 생명체의 공통 사항이었고, 이 소리를 듣고도 움직이는 놈이 비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비정상적인 놈들 세 명이 드래곤의 자화자찬이 아니꼽다는 듯 수풀을 헤치며 나타났다.
그 타이탄들은 파시르가 가지고 있던 로메로보다 월등하게 덩치가 컸다. 과거 시드미안이 몰던 안토로스보다도 더 덩치가 큰 것 같았다. 세 대의 타이탄들 중 한 대는 특히 더 컸는데, 어깨까지의 높이가 5.5미터, 머리 위의 뿔까지 합한다면 6미터가 넘는 거대한 타이탄이었다.
사실 뿔이야 가져다 붙이면 그만이기에 타이탄의 높이는 어깨 높이를 말하는 것이 표준이었지만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타이탄들은 모두 사각형의 방패를 가지고 있었는데, 방패에는 우아한 유니콘(머리에 한 개의 긴 뿔이 달려 있고 날개가 달린, 말처럼 생긴 전설상의 동물)이 그려져 있었다. 그 외에 여러 색상으로 채색된 타이탄의 본체에도 갖가지 문장들이 그려져 있었다.
세 대의 타이탄이 나타나자 승리의 기쁨에 넘쳐 있던 드래곤은 상당히 놀랐다. 타이탄이 두 대뿐인 줄 알고 자신의 몸속에 쌓여 있던 모든 대지의 기운을 토해 냈기에, 드래곤에게는 마법 외에 딱히 그것들을 상대할 무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나이가 많은 드래곤은 나누어 쓴다면 세 번에서 다섯 번까지도 브레스를 뿜을 수 있지만, 이 드래곤은 나이가 많지 않았기에 그의 몸속에 쌓인 대지의 기운은 전력을 기울인다면 한 번의 브레스를 뿜을 정도밖에 안 되었던 것이다. 만약 적이 더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껴서 두세 번까지 뿜을 수도 있었겠지만, 처음부터 신나게 뿌려 댄 게 화근이었다.
세 대의 타이탄이 드래곤을 향해 돌격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숲 속에 숨어 있던 일행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다크는 그들의 표정을 보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뭔가 이상한 녀석들이라고 말이야. 역시 그놈들이 가진 타이탄은 한 대가 아니었어.”
다크의 말에 자신들이 성난 드래곤의 브레스까지 처리해 주는 소모품 역할이었다는 것을 눈치 챈 지미와 라빈은 놀란 표정에서 곧 성난 표정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파시르는 다크의 말에도 불구하고 계속 놀란 표정이었다. 파시르는 지금 자신의 타이탄이 소모품으로 쓰였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릴 정도로 놀라고 있었던 것이다. 파시르는 거대한 드래곤을 향해 창을 던지는 육중한 타이탄의 뒷모습을 보면서 얼이 빠진 듯 중얼거렸다.
“순백(純白)의 유니콘……. 저 저주받은 문장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되다니.”
드래곤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매우 위험한 처지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드래곤은 지체 없이 타이탄들을 향해 용언 마법을 날렸다. 그러자 세 대의 타이탄들 중 좌우의 것들은 양 옆으로 피하면서 드래곤을 압박하는 형태로 움직였고, 중간에 남은 덩치 큰 타이탄은 이 정도 마법쯤이야 볼 것도 없다는 듯 피하지도 않고 방패로 막았다.
7사이클급에 해당하는 강력한 용언 마법이 불러일으킨 화염이었지만, 고작 방패의 표면에 입힌 페인트만을 태웠을 뿐이었다. 곧 화염이 걷히면서 방패는 겉으로 드러난 미스릴이 뿜어내는 옅은 금빛으로 번쩍거렸다. 이것만 봐도 어중이떠중이 타이탄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타이탄의 대마법 주문은 타이탄의 등급에 따라 수준이 다르다. 엑스시온의 등급이 높을수록 마법에 대한 내성도 증가하고, 또 타고 있는 기사의 등급에 따라서도 그게 증가할 수 있다. 그렇기에 드래곤은 상대가 보통내기가 아니란 것을 눈치 채자마자 마나의 힘으로 그 육중한 몸체를 공중으로 띄워 올리기 시작했다. 역시 위험 부담이 큰 상대인 만큼 완전히 포위당하기 전에 날아올라, 공중에서 공격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드래곤은 하늘을 날 수 있지만 타이탄은 날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래곤이 날기 위해 그 거대한 날개를 폈을 때, 절벽 위에서 날아온 6사이클급에 해당하는 마법 공격과 거대한 투창 공격이 시작되었다. 물론 마법 정도야 드래곤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없었지만 그 거대한 창이 드래곤의 날개를 꿰뚫었을 때는 얘기가 달랐다. 창촉을 드래곤 뼈로 만든 묵직하고도 거대한 강철 창은 순식간에 드래곤의 바리어를 찢고 들어와 드래곤의 거대한 날개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잠깐 사이에 드래곤의 왼쪽 날개에는 절벽 위에서 날아온 두 개의 창이 박히면서 그 거대한 금속성의 날개가 본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두 토막이 나 버렸다. 드래곤은 곧 엄청난 먼지를 일으키며 땅바닥에 추락했고, 그 옆으로 짙은 녹색의 거대한 금속성 날개가 떨어졌다.
이제 드래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법으로 몸을 보호하면서 드래곤은 처절한 육탄 공격을 시작했다. 드래곤의 몸은 강력한 금속성. 그렇기에 드래곤은 뱀처럼 머리를 뒤쪽으로 꼬았다가 포위해서 접근해 오는 왼쪽 타이탄을 향해 재빨리 머리를 날렸다. 드래곤의 긴 목 덕분에 머리는 엄청난 속도로 상대 타이탄에게 다가 들었다. 그러나 타이탄은 재빨리 드래곤의 아가리를 방패로 막으면서 검을 휘둘렀다.
타이탄이 가지고 있는 검의 몸체는 짙은 녹색을 띠고 있었다. 이 드래곤을 잡기 위해 거금을 투자해서 만든 세 자루의 드래곤 킬러 중 하나. 그 검은 드래곤의 뼈로 만들어진 만큼 가벼웠으므로 길이를 4미터나 되게 만들 수 있었다. 그 검을 보고 드래곤이 재빨리 머리를 뒤로 뺐지만, 드래곤의 작은 두 개의 뿔 중에서 하나가 검과 부딪치며 어이없게도 두 토막이 나며 떨어져 나갔다. 정말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준비가 잘된 강한 놈들이었다. 이때 오른쪽에 있던 타이탄이, 드래곤이 왼쪽의 동료에게 정신 팔려 있는 틈을 이용해서 재빨리 창을 던졌다. 역시나 이 창의 촉도 드래곤의 뼈로 만든 드래곤 킬러. 드래곤은 몸속 깊이 뚫고 들어온 창이 전하는 아픔에 분노했다.
<크아아아아!>
평소에 벌레 보듯 해 온 인간이, 그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이 감히 자신에게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지독한 고통을 선물한 것이다. 분노에 가득 찬 드래곤은 오른쪽에 있는 타이탄을 향해 그 거대한 채찍과 같은 꼬리를 내려 쳤다. 드래곤의 꼬리가 날아오자 그 망할 타이탄은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오르며 자세가 허물어진 드래곤을 향해 또 하나의 창을 던졌다. 그와 동시에 다른 타이탄들도 드래곤을 향해 창을 던졌다. 엄청난 고통에 신음하며, 드래곤은 끓어오르는 분노에 점점 이성을 잃어 갔다.
사실 이 어린 드래곤에게 이성이 남아 있다면 이동 마법을 통해 재빨리 도망치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엄청난 드래곤의 덩치로 봤을 때 이동 마법을 시전하려면 엄청난 마나가 필요했고, 그 마나가 모일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인내심 따위가 드래곤에겐 남아 있지 않았다. 우선 눈앞에 보이는 저놈들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을 뿐이었다.
순간, 드래곤의 그 거대한 덩치가 대지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이 놀라운 움직임을 만든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앞발에 비해 놀랍도록 큰 뒷다리였다. 드래곤은 재빨리 뛰어오르며 왼쪽에 있는, 자신의 자존심인 뿔을 잘라 버린 타이탄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워낙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고, 설마 저 덩치로 저렇게 재빠르게 움직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던 타이탄은 고작 방패로 앞을 막을 시간 여유밖에 없었다.
아무리 방패로 막았다고 해도 드래곤의 덩치는 어마어마했고, 그 덩치에 밀리면서 왼쪽의 타이탄이 붕 떠오르더니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다. 드래곤은 재빨리 뻗어 있는 타이탄에게 다가가 그 육중한 다리로 타이탄을 짓밟으면서도 동료를 구출하려는 두 대의 타이탄을 견제했다. 덩치 큰 타이탄은 드래곤이 피하기를 바라면서 창을 던졌지만, 드래곤이 한눈을 팔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 창은 드래곤의 공격 주문에 막혔고, 창촉을 제외한 대부분이 박살 나며 튕겨 나갔다.
<크아아아아아아!>
드래곤은 한차례 울부짖은 후 대지의 기운을 발에 끌어 모았다. 타이탄을 짓밟고 있던 발이 짙은 녹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드래곤이 재빨리 그 발을 들어 올렸다 내리 찍어 타이탄을 떡으로 만들려는 순간, 절벽 위에서 여태껏 지원 사격을 해 주던 타이탄이 방패를 놔둔 채 양손으로 창을 꽉 쥐고는 뛰어내렸다.
절벽 높이가 50미터가 넘었기에 타이탄은 엄청난 도약을 이용해 그 거대한 창을 드래곤의 등 깊숙이 찔러 넣는 데 성공했다. 거기에다가 86톤이 넘는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강철 덩어리가 드래곤의 등에 부딪쳤으니, 드래곤이 아무리 덩치가 크다고 해도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드래곤이 충격을 받고 앞으로 쓰러지는 순간, 덩치가 조금 작은 타이탄이 이때가 기회라는 듯 재빨리 창을 던졌다. 그리고 덩치가 큰 타이탄은 검을 뽑아 들고 드래곤에게 과감하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일어서려고 버둥거리던 드래곤의 목 부위를 순간적으로 검이 훑고 지나갔고, 서서히 그 긴 목이 앞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일정 각도 이상 아래로 쳐지자 드래곤의 잘려진 목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쿵!
거대한 드래곤이 쓰러지자 네 대의 타이탄의 머리가 뒤로 들리면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가장 큰 타이탄에 타고 있던 인물은 타론이었다. 타론은 엄청난 드래곤의 사체를 질렸다는 듯 바라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스펜! 아더하고 함께 레어 안을 조사해라.”
“옛!”
스펜은 아직도 드래곤의 발아래 깔렸던 그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더를 재촉하여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그들이 타고 있던 타이탄들은 공간 저편으로 사라졌다. 타론은 타이탄에서 뛰어올라 쓰러져 있는 드래곤 위에 올라서서 드래곤의 거대한 비늘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휴, 이 거대한 녀석을 우리가 잡았단 말이지? 폐하께서 기뻐하시겠군. 그런데 예상외로 재빠른 몸놀림이었어. 이 큰 덩치가 그렇게도 엄청난 속도를 낸다는 것이 놀랍군.”
이때 타론의 옆으로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짧게 기른 예쁜 여자가 뛰어내렸다. 드래곤의 등을 창으로 찍었던 샤트란이었다. 그녀는 황금으로 멋을 낸 검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갑옷은 와이번의 비늘로 만들어진 최고급품이었기에 상당히 두툼해 보였지만 매우 가벼웠다.
“드래곤이라고 해서 엄청 힘들 줄 알았는데 별로군요, 대장.”
타론은 피식 웃었다.
“잘해 줬다. 몸은 괜찮냐?”
샤트란은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떨어진 충격에 몸이 좀 욱신거리고, 군데군데 멍이 좀 들었지만…….”
“다행이군. 원체 드래곤이란 생명체에 대한 자료가 부족했으니까 말이야. 놈이 그 정도로 재빠를 줄은 예상도 못 했으니까 일어난 일이었지.”
“그래도 잡긴 잡았잖아요? 그것도 별 피해 없이…….”
“마리나의 추측에 의하면 이 녀석의 나이는 8백 살 정도. 기척도 제대로 숨기지 못하니까 마법도 그렇게 뛰어나다고 할 수 없었다. 1천 살도 안 된 드래곤이라면 브레스를 잘 뿜어 봐야 한 번, 나눠서 두 번 정도? 그렇다면 답은 나오지. 자살 공격조만 희생시킨다면 이 드래곤은 누구라도 잡을 수 있었어. 이 녀석만을 보고 전체 드래곤의 힘을 추측한다는 것은 드래곤에 대한 실례야. 아더가 당할 뻔한 것만 봐도, 이 어린 드래곤이 이 정도인데, 다 자란 놈들은 어떻겠나? 너무 자만해서는 안 돼. 알겠나?”
“예, 대장. 하지만 사실 이렇게 나약한 드래곤이라면 저희들이 나설 필요는 없었잖아요? 엘프란 기사단 정도만 동원했어도, 약간의 피해는 있었겠지만 그래도…….”
샤트란의 말에 타론은 마치 철부지 애를 보는 듯한 조롱기 어린 눈으로 지그시 그녀를 쳐다봤다. 그 눈길에 그녀가 발끈하려는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
“이런 어린 드래곤은 있는 곳을 몰라서 그렇지 알기만 한다면 잡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걸 본국까지 가져가는 것은 어렵지. 그것 때문에 너희가 투입된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을 보호하라고 나를 보내신 거지. 그렇지 않다면 본국 최고의 기밀이라고 할 수 있는 안티고네를 왜 끌고 왔겠나? 이번 작전은 안티고네의 실전 테스트를 겸한 것이기도 하다. 알겠나?”
타론의 말에 샤트란은 약간 풀이 죽었다. 사실 카마리에를 지급받은 자신들과 타론 같은 최신형 타이탄, 안티고네를 지급받은 인물들은 엄청난 등급 차이가 있었다. 안티고네를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거대한 크루마 제국의 수많은 기사들 중 최고라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예, 대장.”
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절벽 위에 홀로 남아 있던 마리나가 더 이상의 위험은 없다고 판단하고 에이비에이션(Aviation : 비행 마법)의 주문을 사용하여 곧장 내려왔다. 그녀는 샤트란과 타론을 슬쩍 바라본 후 곧장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마법사였기에 드래곤이 소장하고 있는 마법 서적에 대단히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타론과 잠시 잡담할 시간도 아까웠던 것이다. 하지만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그녀에게 타론은 한마디 안 할 수 없었다.
“빨리 나와.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구. 마법책은 나중에 궁에 돌아가서 천천히 연구해. 알겠어?”
썩은 시체를 찾아
모이는 까마귀들
다크 일행은 드래곤과 타이탄들의 격전이 벌어지자 숨소리까지 죽여 가며 그 장대한 싸움을 구경했다. 약간의 볼거리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 어린 드래곤은 드래곤이란 이름값도 제대로 못한 채 고깃덩이가 되어 버렸다. 정말 싱거운 싸움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여태껏 열심히 구경하던 다크가 드래곤이 쓰러져 버리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백색 유니콘이 저주받은 문장이라니 무슨 말이야?”
파시르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약간의 두려움과 원망, 절망 등 여러 가지 색채를 띠며 변하고 있었다.
“나는 옛날 론드바르 제국의 기사였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기억이 나지. 론드바르 최후의 날. 화염이 충천하던 왕궁, 비명을 지르며 뛰어가던 시민들……. 나에게 힘이 없다는 것이 그렇게도 원망스러웠던 때가 없었다. 시민들을 학살하고, 도시를 파괴하던 그 문장. 하얀 유니콘의 문장을 절대로 잊을 수 없었어.”
파시르의 중얼거리는 말만으로는 도대체 유니콘을 문장으로 쓰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기에 분위기가 좀 그렇기는 했지만, 지미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유니콘을 문장으로 쓰는 나라가 어딘데요?”
갑작스런 지미의 질문에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린 파시르는 쓴웃음을 잠시 머금은 후 내뱉듯이 말했다.
“레니아 근위 기사단 문장이다. 저 강대한 크루마 제국의…….”
“레니아 근위 기사단이라구요? 그렇다면 방금 보았던 타이탄들은 근위 타이탄이란 말입니까?”
놀라서 묻는 지미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파시르는 다시 드래곤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 대는 카마리에야. 들리는 소문으로는 출력이 1.5나 되는 괴물이라고 하더군. 그런데… 방금 드래곤의 머리를 날려 버린 그 거대한 타이탄은 잘 모르겠어. 크루마의 신형 타이탄인가?”
원체 과묵했기에 잘 몰랐지만 슬쩍 드러나는 파시르의 유식함에 라빈은 감탄했다.
“타이탄에 대해 아주 잘 아시는군요. 나중에 시간 있을 때 좀 가르쳐 주세요.”
파시르는 살짝 미소 지었다.
“사실 너는 그걸 알 필요가 없어. 나같이 타이탄을 조종한다면……. 아니군, 그 녀석은 죽어 버렸으니 이제는 나도 알 필요가 없어졌군. 타이탄을 조종하는 사람은 강한 타이탄의 목록과 유명한 기사단의 문장은 외워 두는 게 장수하는 데 보탬이 되지. 특히 나 같은 용병들한테는 말이야. 그것 하나 가지고 목숨이 왔다 갔다 하니까 말이야. 하지만 나한테 타이탄이 없다면 얘기는 달라져. 타이탄이 나타나기만 하면 무조건 도망치는 게 최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