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2화 (172/930)

드래곤 본의 행방

“제길!”

타론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핏빛, 즉 검붉은 기분 나쁜 색으로 도장해 놓은 코린트의 신형 타이탄. 처음에 방패를 들고 있지 않았을 때 대충 눈치 챘지만, 이 정도로 대단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대충 눈어림으로 봤을 때 흑기사하고 무게가 비슷한 것 같았는데, 그 파워는 흑기사는 따라가지도 못할 정도로 대단했다. 거기다가 그 속에 어떤 재수 없는 놈이 타고 있는지, 도대체 인간이라고 보기 힘든 능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투캉!

타론이 길이 3미터가 조금 넘는 그린 드래곤 본으로 만든 드래곤 킬러를 내려찍었으나, 상대는 가볍게 소드 스톱퍼로 막으면서 검을 휘둘렀다. 놀랄 만치 재빠른 움직임. 사력을 다해 방패로 막으면 그 방패에서 주어지는 충격까지 이용해 재빨리 뒤로 몸을 날려 도망치는 얄미운 놈. 거기에다가 엄청난 속도와 도약력이 있다 보니 상대의 공격 속도는 정말이지 눈으로 따라잡기도 힘들 정도였다.

벌써 타론의 안티고네는 방패가 너덜너덜해진 상태였고, 1차 장갑 곳곳에 흠집이 나고 패여 있었다. 타론이 이 정도나 버티고 있었던 것도 강력한 드래곤 본으로 만들어진 드래곤 킬러 덕분이었다. 안티고네의 기본 무장으로 채택된 강철검이었다면 벌써 두 토막이 났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상대의 실력은 대단했다.

또 타론이 살아 있을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타론이 제법 발악을 하자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그걸 즐긴 덕도 있었다. 흑기사들은 안티고네에게 상당히 밀리고는 있었지만, 어느 정도는 버텨 주고 있었고, 루엔 공작이 조종하는 안티고네는 적기사와 거의 대등한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타론의 안티고네만이 곤죽이 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마나를 충분히 실은 중후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 음성의 주인은 루엔 공작이었다.

“퇴각하랏!”

루엔 공작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안티고네들은 흑기사들에게 맹공을 가해 거리를 벌렸다. 그런 후 재빨리 뒤로 돌아서서는 타론이 상대하는 적기사 쪽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적기사는 일순간 앞과 뒤에서 적을 상대해야 하는 난감한 사태에 직면하게 되자 뒤로 조금 물러서며 곧장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시퍼런 강기(剛氣)가 달려드는 안티고네들에게로 폭사되어 날아갔고, 안티고네들은 재빨리 뛰어올라 피했다. 하지만 안티고네를 추격하던 흑기사들은 안티고네의 그 거대한 덩치에 가려 상관이 쏘아 날린 강기를 포착하는 시간이 조금 늦었다. 때문에 그들은 지척에서 도망치던 안티고네들이 뛰어오른 후에야 앞에서 대기를 관통하며 무서운 속도로 접근 중인 시퍼런 강기 다발을 발견했고, 그야말로 기겁을 해서는 회피 동작을 취했다.

흑기사들이 일순간 추격을 늦춘 사이 안티고네들은 급속도로 적기사와의 거리를 좁혔다. 적기사는 일단 포위당하는 것은 면하기 위해 재빨리 뒤로 후퇴했다. 아무리 적기사를 타고 있는 마스터급의 검객이라고 해도, 저런 거대한 덩치들에게 포위당하면 움치고 뛸 공간이 제약되고, 그다음은 죽음이었다.

적기사가 뒤로 재빨리 물러난 틈을 이용해서 안티고네들은 황급히 후퇴를 시작했다. 110톤이 넘는 거대한 덩치의 안티고네들이 시속 1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속도로 달려가자 지축이 흔들거리고, 땅바닥이 푹푹 파이면서 먼지가 솟아올랐다. 이때 부하들과는 달리 가장 뒤에 쳐져서 적기사와 상대하고 있던 루엔 공작은 자신의 마나를 있는 대로 끌어 모아 상대방에게 무시무시한 공격을 퍼부었다.

여태껏 안티고네가 지니는 두터운 장갑과 방패를 이용해서 줄곧 방어만 해 오던 루엔 공작의 공격에 상대가 찔끔한 사이, 안티고네는 살짝 이동해서 화물선과 자신의 사이에 적기사가 자리 잡게 했다. 그런 후 안티고네는 1.5톤이나 되는 그 거대한 검을 번쩍 들어올리더니 아래로 힘껏 내려치며 시퍼런 강기를 뿜어냈다. 적기사는 그 기동력을 십분 이용해서 재빨리 옆으로 피했다. 강기 다발을 맞받아 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힘 빠지는 바보짓을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엔 공작이 노린 것은 적기사가 아니었다. 타이탄의 검에서 발사된 마스터만이 형성시킬 수 있는 유형의 검기, 즉 검강 덩어리는 루엔 공작의 의도대로 화물선을 직격했고, 화물선의 주위에 솟아오른 엄청난 물보라와 함께 두 토막이 되어 침몰해 버렸다. 화물선이 박살 나는 광경을 보며 코린트의 타이탄들은 잠시 동안 흠칫하며 동작을 멈췄다. 그사이에 루엔 공작은 재빨리 안티고네를 조종하여 이 난장판을 벗어나 버렸다.

공간 이동해 온 인물들 중에서 한 명이 슬쩍 앞으로 나서서는 난간을 짚고 화물선의 아래쪽을 바라봤다. 난간을 꽉 잡은 손은 투명하다고 할 만큼 한점의 티끌도 없는, 일이라고는 해 본 적도 없는 귀부인의 손처럼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녔는데도 그녀의 허리에는 고풍스럽고 아름답게 세공된 롱 소드가 매달려 있었다.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이 아름다운 여인은 허리까지 기른 갈색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그 섬세한 손으로 슬쩍 쓰다듬어 뒤로 넘긴 후 다시금 난간을 살짝 잡아 몸을 기대면서 싸늘한 어조로 외쳤다.

“멈춰랏!”

약간 앙칼진 듯한 그녀의 말을 성기사단이 들을 이유가 없었지만, 성기사단은 동작을 멈췄다. 보통의 성기사들은 모르겠지만 타이탄에 탑승한,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성기사들은 상대의 음성에 실린 그 강렬한 마나의 기운을 읽었기 때문이다.

여인은 우뚝 서 버린 성기사단의 타이탄들을 오만하게 둘러본 후 위엄 서린 어조로 말했다.

“여기는 아르곤의 영토. 하지만 본국의 근위 기사단을 공격한 이유를 듣고 싶다. 본국은 ‘도우러’라는 상인에게 의뢰해서 아르곤 특산의 양탄자, 금은 세공품, 도자기 등 황실 물품을 수입했고, 그 호위를 저 세 명의 근위 기사들에게 맡겼다. 그대들은 저 화물에 찍혀 있는 크루마 황실의 문장이 보이지 않는가? 저건 황제 폐하께 바쳐질 물건이다. 그런데 그걸 운반하는 것을 저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또, 모든 국가가 다 아는 레디아 근위 기사단의 타이탄인 카마리에를 세 대나 파괴한 이유는? 만약 합당한 이유를 대지 못한다면 나, 미네르바의 이름을 걸고 그대들을 응징하겠다.”

미네르바와 거의 20여 명에 달하는 기사들의 갑작스런 출현에 성기사단장 지넨은 상당한 혼란을 느꼈다. 그녀가 한 말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국제적 관례에 합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은 첩자의 보고를 토대로 확신할 수 없는 사항을 위해 달려왔다. 그리고 곧장 화물선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고, 레디아 근위 기사단임이 확실한 상대를 셋이나 해치웠다. 물론 나중에 심문할 목적으로 죽이지는 않았지만 타이탄은 확실하게 저세상에 간 상태였다.

만약 상대가 별 볼일 없다면 우선적으로 해치워 입을 막아 버린 후 뒷수습을 할 방법도 있겠지만 상대는 미네르바 켄타로아. 저 유명한 헬 프로네의 주인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녀가 왔다는 것은 그녀의 뒤쪽에 서 있는 자들 또한 근위 기사들이라는 말. 그들과 싸워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또 확실한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크루마 황제의 인장이 찍힌 화물을 수색하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첩자가 보고했을 때도 화물은 배를 이용하여 랜트 국가 연합을 거쳐 대해(大海)로 빼돌릴 예정이고, 그들은 또 다른 화물을 가지고 마차로 이곳으로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위에서는 이쪽이 아마도 ‘진짜’일 것이라고 보고 주력인 타리아 성기사단을 비밀리에 이곳으로 돌린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에 이쪽이 진짜가 아닌 ‘미끼’라면? 그걸 모르고 이쪽에서 강경하게 나간다면, 일단 미네르바는 후퇴해서 화물을 검사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여기는 아르곤의 영토니까 말이다. 그렇게 해서 크루마 제국 황제의 인장을 무시하고 봉인을 뜯어낸 후 화물을 검사했는데, 만약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국제적인 망신이었고, 최악의 경우 전쟁까지도…….

지넨은 자신의 타이탄의 머리를 들어 올린 후 상체를 드러내고는 정중하게 미네르바 공작에게 인사를 건넸다.

“켄타로아 공작 전하, 아무래도 서로 간에 오해가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들은 상부에서 사악한 무리들이 크루마의 정예인 것처럼 위장하여 본국의 보물들을 가지고 달아나는 중이라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이 배는 곧장 출항할 듯했기에 너무 시간이 없어 바로 수색, 체포를 명했고, 귀국의 근위 기사들이 곧장 타이탄을 꺼내 공격해 왔습니다. 저희들은 처음부터 무력을 사용할 의도가 없었습니다. 저들이 먼저 타이탄을 꺼내 공격을 해 왔기에 부득불 어쩔 수 없었습니다.”

물론 지넨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도중에 말하지 않고 건너뛴 부분은 많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샤이하드를 받드는 크로노스교도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상대가 숙이고 들어오자 미네르바도 어느 정도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성기사는 신을 받드는 사제. 보통의 무사들과 동급에 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대들의 문장을 보니, 아르곤의 정예인 타리아 성기사단임이 분명한데 왜 수도 근처가 아닌 이런 변방에 있는 거지요? 겨우 해적들 정도라면 변방에 있는 4개의 성기사단들 중 하나만 동원해도 충분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공작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본국에는 지금 정체불명의 무리들이 들이닥쳐 그곳에 2개 기사단이 동원되었기에 이번 임무는 어쩔 수 없이 저희들이 맡아야 했습니다.”

“좋아요. 그건 그렇다고 하고, 타리아 기사단 정도라면 타이탄 몇 대만 꺼내어 서로 대치하면서 서로 간에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을 거 아닌가요? 그런데 왜 본국의 그것도 황제 폐하께서 아끼시는 근위 기사단의 기사들을 다치게 만들었나요? 합당한 이유를 들려줘요.”

지넨은 여자라고는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광포한 기운을 내포하고 있는 미네르바의 눈길을 받으며, 쩔쩔 맬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상대가 카마리에를 꺼냈을 때 그걸 짐작했어야 하는데……. 도둑질을 하면서 내가 훔쳐갔다 하고 광고하지 않듯,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크루마의 근위 타이탄을 끌고 대담하게 드래곤 사냥을 한 후 꿀꺽할 가능성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넨의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저희 쪽에서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양해를 바랍니다. 저 타이탄에 탄 기사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물론 타이탄을 고물로 만든 것에 대해서는 사과와 함께 변상을 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여기서 ‘변상’은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타이탄 한 대의 가격이 술 한 병 정도의 가격이라면 몰라도…….

“좋아요. 그쪽에서 오해했다니,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외교 경로를 통해 교황(敎皇) 성하(聖下)께 엄중히 항의할 생각이에요.”

“예, 그건 지당하신 의견입니다.”

“좋아요. 저것들을 실어라.”

“옛, 공작 전하!”

미네르바의 명령에 기사 몇 명이 배에서 하선한 후 각자의 타이탄(카마리에)을 불러낸 후, 엄청난 마나의 소모로 기절한 기사들을 꺼냈다. 그리고는 검을 뽑아 들고 솜씨 있게 고철이 된 카마리에를 토막 내기 시작했다. 그래야 화물선에 싣기 편하기 때문이다.

미네르바는 부하들이 토막 낸 카마리에의 잔해들을 화물선에 적재하는 것을 건성으로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곳으로 크루마의 화물이 이동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번 작전을 위해 도우러를 고용해서, 일단 황실 소모품들을 구입하고, 그걸 상자에 담았다. 그런 후 그린 드래곤의 뼈 또한 상자에 담았다. 그걸 바꿔치기 한 곳은 창고였고, 창고에서 화물선에 곧장 적재된 화물은 황실 소모품이 들어있는 상자들이었다. 왜 미끼로 황실 소모품을 썼느냐 하면, 그걸 샀다는 것에 대한 정보가 상인들을 통해 널리 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아르곤은 당황할 것이고, 일단 아르곤 영토 내에서 소수의 정규군으로 전쟁을 벌일 수는 없었기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려면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그 일은 성공했고, 저기 있는 멍청한 성기사 녀석은 완전히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국의 황실 소모품을 뒤진다는 것은 자살 행위였기 때문이다.

“출항!”

미네르바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요란한 종소리와 함께 배를 항구에 묶어 두었던 밧줄들이 풀려 나갔고, 화물선이지만 상당히 날씬하게 생긴 크루마 황실 전속 화물선은 서서히 항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보통 연안 화물선이 노예들의 노동력으로 움직이는 갤리선(노를 저어 움직이는 배)인데 반해, 이 화물선은 외해에서도 활동이 가능한 거대한 돛들로 움직이는 배였다. 미네르바는 더 이상 육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나오자 생각을 정리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똑똑.

“예.”

맑고 청아한 음성이 방문객을 반겼다. 미네르바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선실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오랜 여행에 지친 아름다운 여인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커다란 눈망울로 방문객을 잠시 바라본 후, 그제야 상대가 누군지 생각이 난 듯 황급히 일어나서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공작 전하를 뵈옵니…, 컥!”

미네르바의 검이 언제 뽑혀 나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 아름다운 여인이 인사를 하는 그 짧은 순간 미네르바의 검은 검집을 벗어났고, 곧 그 검은 여인의 몸속에 들어가 있었다. 오른쪽 어깨 깊숙이 검이 꽂힌 여인은 고통에 부들부들 떨면서 가련한 음성으로 말했다.

“왜, 왜……?”

눈물에 젖은 가련한 여인의 눈을 노려보면서도 미네르바의 눈은 여전히 냉랭했다. 미네르바는 얼음장 같은 어조로 말했다.

“베티 도니안 사제, 너는 아르테미스 신을 섬기는 사제라고 했지? 그렇다면 내가 하는 말을 따라 해라. 샤이하드란 신은 없다. 크로노스교는 사이비(似而非) 종교다. 오직 신은 아르테미스뿐이다. 따라 햇!”

하지만 베티는 그 말을 곧장 따라 하지 않았다. 베티의 눈에 갈등이 어리기 시작했다. 구차한 삶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순교자(殉敎者)가 될 것인가?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섬기는 사제라면 응당 미네르바의 말을 따라 했겠지만, 그것을 순간이나마 망설였다는 자체가 그녀는 아르테미스의 사제가 아니라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다. 미네르바의 검은 곧장 옆으로 쭉 그어졌고, 곧 베티의 몸은 두 토막이 난 채 쓰러졌다. 미네르바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버린 후 검집에 천천히 꽂아 넣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생각대로였어.”

미네르바가 베티 사제의 선실에서 나간 후 선원 몇 명이 그 선실에 들어가서 시체를 들고 나왔다. 선원들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두 토막 난 시체를 푸른 바다 속에 던져 버렸다. 시체에서 뿜어 나오는 붉은색은 배가 지나감에 따라 생긴 흰 항적에 묻혀 사라져 갔다. 화물선은 멀리 외해로 나간 후 빙빙 돌아서, 혹시나 모를 추격자를 따돌리며 ‘바다’라는 드넓은 공간 속으로 사라져 갔다.

이렇게 해서 크루마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그린 드래곤의 뼈를 세금 한 푼 안 내고 꿀꺽해 버리는 데 성공했다. 물론 차후에 침몰한 화물선에서 나온 잘 포장된 물에 젖은 카펫이나 각종 금은 세공품 따위를 보고, 아르곤은 크루마가 드래곤 본을 털도 안 뽑고 꿀꺽했다는 것을 알고 광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아르곤과 크루마는 인접한 국가도 아니었고, 서로의 국력은 거의 대등한 상태. 전쟁을 벌일 수는 없었다.

물론 아르곤의 기사단 1개가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기에 크루마로서도 맨입으로 사건을 무마할 수는 없었다. 크루마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이번 일을 묵인해 준다면 카마리에에 들어가는 엑스시온 30개를 5년 내에 아르곤에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겠다는 제의를 했다. 1.5라는 고출력 엑스시온을 판매하는 나라는 없었기에, 아르곤은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들도 이번 전투를 통해 신앙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아르곤이 자랑하는 성기사단의 타이탄은 너무 구형이었고, 아르곤의 미래를 위해서는 신형의 고출력 타이탄이 많이 필요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아르곤은 대대적으로 타이탄을 신형으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속임수

“추격 중지!”

제임스의 외침에 안티고네를 추격하여 달려가던 흑기사들이 멈춰 섰다. 제임스는 상대방의 저 강력한 타이탄들 중 한 대라도 박살 내서 본국으로 끌고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잠시 갈등했다. 비록 파괴된 엑스시온일망정 그걸 가지고 가면 코린트 제국이 자랑하는 대마법사 그라세리안 코타스가 저 신형 타이탄의 비밀을 하나하나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엑스시온에 새겨진 각종 주문은 더없이 중요한 자료들 중의 하나이니까 말이다. 물론 그걸 보자고 멀쩡하게 살아 있는 타이탄을 죽여서 분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가 좋아할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제임스에게는 적국 신형 타이탄의 포획이 아닌, 드래곤 본의 포획이라는 명령이 먼저 떨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우선적으로 침몰한 화물선에서 드래곤 본을 꺼내 본국으로 수송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우선이었다.

“끌어 올려라.”

제임스의 지시를 받은 흑기사 한 대가 방패와 검을 놔둔 채 운하 속으로 뛰어들었다. 엄청난 물보라를 일으키며 흑기사는 물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물론 타이탄은 육중한 무게 덕분에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물속을 걸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타이탄의 조종석은 방수가 되는 구조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종자가 물속에서 버틸 수 있는 순간까지는 상관없었다. 보통 사람이 죽자고 물속에서 호흡을 멈춘다면 3분 정도밖에 못 버티지만, 그래듀에이트급에 이르는 무술의 고수는 3분이 아니라 10분 이상이라도 버틸 수 있었다. 약 8분 정도가 지나고 나자 흑기사는 화물이 들어 있는 상자 몇 개를 가지고 나왔다.

“흐흐흐흐, 이제 드래곤 본은 본국의 것이군.”

제임스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흑기사가 내려놓은 상자 몇 개를 지켜봤다. 이윽고 부하 한 명이 검을 꺼내서는 상자를 열었다. 잔뜩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상자 안을 들여다본 제임스의 얼굴은 똥색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 이게 뭐야?”

그 속에는 물에 잔뜩 젖은 지푸라기로 조심스럽게 감싼 도자기 몇 개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다른 상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제임스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타이탄을 공간 저편으로 보내 버린 까미유가 다가오더니 상자 속을 훑어보았다.

“화물선은 내륙 항해용 중형(中形) 선박이야. 150톤의 화물은 실을 수 있는 놈이었지. 드래곤 본은 제아무리 무거워 봐야 대형 마차 일곱 대로 옮길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워. 그 배에는 드래곤 본 외에도 많은 화물들이 들어 있다는 말이야. 배를 아예 꺼내서 보는 게 빠를 거야.”

“자네 말도 일리는 있군. 이봐! 죠드!”

그러자 뒤에서 껄끄러운 노마법사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예, 후작 각하.”

“저 화물선을 꺼낼 수 있나?”

“화물선을 꺼내기는 힘듭니다. 화물선의 전체 무게는 3백 톤이 넘습니다. 설혹 그게 두 토막이 나 있다고 해도 제 능력으로는 들어 올리기가 힘듭니다. 저와 동급의 마법사가 두 명 더 있다면 양 방향에서 물을 막고 토네이도(Tornado)를 사용해 물을 퍼낼 수 있겠지만, 그 모든 마법을 6사이클급 마법사 한 사람이 한 군데씩 맡아도 벅찬 작업이죠. 코타스 공작 전하라면 모르겠지만…….”

“하기야, 운하를 막고 물을 뺀다는 게 누구 말대로 쉬운 거라면 마법사가 이 세상을 지배했겠지. 어떻게 한다?”

제임스는 죠드의 말을 되새기며 생각에 잠긴 채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의문에 까미유는 별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곧장 답했다. 마법으로 안 된다면 물리적인 힘으로 해결하면 되니까 말이다.

“끌어당기면 되지. 밧줄 하나 구해다가 토막 난 선체를 묶은 후 타이탄들로 그 줄을 당기는 거야. 간단하게 들어낼 수 있지.”

노마법사는 까미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임스의 지시를 기다리지도 않고 비행 마법을 사용해서 어디론가 날아갔다. 노마법사는 거의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굵직한 밧줄이 가득 실린 마차 한 대를 끌고 돌아왔다. 노마법사가 돌아왔을 때 모든 일행들이 운하 옆에 모여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일을 벌이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 버렸기에, 어쩔 수 없이 일은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시작해야 했다.

다음 날 침몰된 화물선을 끌어 올렸지만, 아무리 뒤져도 드래곤 본은커녕, 비룡(飛龍)이라고 불리며 드래곤 사촌쯤으로 취급되는 와이번 뼛조각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자신들이 완전히 상대방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고 제임스는 신경질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기껏 끌어 올린 화물선을 운하 속에 다시 처넣어 버렸다.

“젠장할! 지원까지 받고도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가야 하다니……. 으윽! 아버지 얼굴을 어떻게 보지?”

뒷일을 상상하며 새파랗게 질려 있는 제임스의 어깨를 부드럽게 툭툭 두들기며 까미유가 능청을 떨었다.

“걱정하지 마. 공작 전하께서 신경질 나 봐야 별일 있었냐? 한 번씩 실수할 때마다 외출 금지에 수련이었잖아? 뭐, 매번 실수할 때마다 일주일씩 그 기간이 늘었으니까, 아마 이번에는 5주일의 수련이겠지. 나야 자네가 부럽다네. 모든 코린트의 젊은이가 꿈에도 그리는 공작 전하와의 비무도 매일 하고 말이야. 이번 수련이 끝나면 또다시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겠군.”

하지만 그것은 말이 좋아 비무였고,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수준이 비슷해야 비무가 되는 것이고, 또 서로 간에 어느 정도 양보를 해 줘야 비무가 될 것이 아닌가? 게다가 상대는 아버지인 관계로 이쪽은 공격을 하는 데 문제가 있었고, 저쪽은 아들이면서 하급자니까 사정 안 보고 몽둥이질을 한다. 거기다가 그 아버지란 양반은 아마도 세계 최고의 검객이 아닐까 생각되는 인물이다. 그렇다 보니 이건 비무가 아니라 그야말로 개 맞듯 매일 두들겨 맞아야만 했다. 까미유도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짐짓 위로하는 척하면서 제임스를 놀렸던 것이다.

까미유의 말에 제임스의 안색이 더욱 핼쑥해졌다. 생각하기도 싫은 비무 장면이 기억났던 것이다. 무려 5주일 동안이나 화풀이 대상이 되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5주일, 35일…, 840시간…, 5만 4백 분…….

“제기랄! 그게 부러우면 네 녀석이 대신 햇!”

제임스의 말에 까미유는 짐짓 몸서리쳐진다는 듯한 행동을 과장해서 표현하며 느글느글하게 말했다.

“무슨 그런 끔찍한 악담을……. 자네니까 그걸 견디지, 보통 사람이면 일주일도 못 버티고 자살할걸? 더군다나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아주 섬세한 사람이라구. 그건 그렇고 자네한테 만회할 기회가 있지.”

그 말에 제임스는 솔깃해서 물었다.

“뭔데?”

까미유는 턱으로 슬쩍 운하 옆 바위 위에 앉아서 나른한 듯 하품을 하고 있는 소녀를 가리켰다.

“저 애는 대단한 실력자야. 정령술에 있어 꽤나 높은 실력과 함께 가능성까지 가진 아이지. 또 상당한 실력의 검술까지 익히고 있어. 저 아이를 납치해 간다면 인재를 아끼시는 공작 전하께서 꽤나 흡족하게 생각하실걸? 그런 후 공작의 기분이 좋을 때, 이번 사건에 대해 말하고 크루마의 처분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이 자네 장수에 도움이 되겠지. 어때?”

하지만 제임스는 까미유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상 다크의 마법이라고는 풀 위를 걸어 다닌 것 외에는 본 게 없으니 당연했다. 비행 마법을 이용해서 몸을 가볍게 한 후 풀 위를 걸어 다니는 척하는 거야 별로 고난이도의 기술이 아니었다. 또 마법사라면 뷰 마나 포스 정도의 마법으로 상대의 위치를 잡아내는 것도 매우 쉬울 것이다. 그렇기에 못 믿겠다는 듯이 제임스는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그 정도로 대단해?”

“정말이라니까. 지레느의 말로는 잘만 교육시키면 정령왕의 힘까지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

“정령왕이라고? 그럼 마법으로 치면 어느 정도야?”

“놀라지 마. 무려 7사이클이야. 그것도 정령 마법의 특성상 주문 없이 7사이클이라구. 1백만 기간트라급의 위력이지. 물론 지금은 그 정도가 아니지만 말이야.”

“좋아, 한번 해 보자구.”

까미유와 제임스는 머리를 맞대고는 소녀를 어떻게 유괴(?)할 것인지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물론 뒤통수 한 대 때린 후 기절시켜서 운반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었지만, 납치만 하고 끝낼 것이 아니라 코린트 제국의 정령술사로서 포섭할 것이기에 어린 소녀에게 그런 무식한 방법을 동원할 수는 없었다. 첫인상이 좋아야 그다음 일도 부드럽게 진행될 것이 아닌가?

한참 의논을 한 후 그들은 미끼를 동원해서 제 발로 찾아들게 만드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입을 맞췄다. 만약 말을 안 듣는다면 마법으로 잠재우든지, 그도 안 된다면 최후에 무력(武力)을 동원하기로 했다. 또 상대가 정령술사이기에 시동어를 외울 시간을 주지 말아야 하므로, 그들은 함께 천천히 소녀에게 걸어갔다. 소녀를 꾀기로 한 제임스는 소녀의 앞에서 말을 걸고 까미유는 슬쩍 소녀의 뒤쪽에 위치했다. 협상 결렬과 동시에 주문이고 뭐고 외울 시간 여유를 주지 않고 기절시킬 생각으로 말이다.

“다크?”

“왜?”

“혹시 코린트 제국에 가 보실 생각은 없습니까? 전에 보니까 드래곤에 꽤 흥미가 있으신 모양이던데, 코린트에도 드래곤은 많이 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지기로는 열 마리 정도 살고 있죠. 아마도 더 많은 드래곤이 살고 있을 겁니다. 또 마법사시니까 마법에도 꽤 흥미가 있으실 겁니다. 저희 코린트에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대마법사 그라세리안 코타스 공작께서 살고 계십니다. 그분께 마법을 배우실 수 있는 영광된 자리를 주선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코린트에는 아주 경치 좋은 곳도 많고 볼거리도 많습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강대한 제국이기 때문이죠. 또 오는 길에 보니까 술도 즐기시는 모양이던데, 코린트의 특산품인 ‘칼레온’은 독하면서도 그윽하고 깊은 향기를 지녀 많은 사랑을 받는 술입니다. 절대 코린트를 여행하신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어떻습니까?”

며칠 함께 여행하면서 제법 상대의 취향을 파악하고 있던 제임스의 말은 꽤나 다크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다. 드래곤, 마법, 술, 거기다가 새로운 볼거리. 다크가 어느 정도 제임스의 말에 흥미를 가지는 듯한 눈치를 보이자 제임스는 더욱 신이 나서 떠들었다.

“거기에다가 황도(皇都)인 코린티아 시가지(市街地) 주위를 흐르는 도나우강에서 잡히는 민물고기 요리는 매우 유명합니다. 송어, 잉어, 메기 등을 주로 이용하는데, 특히 송어 요리는 모든 여행객들이 즐기는 최고급 요리지요. 거기에 크로나사 지방에서 생산되는 백포도주까지 곁들이면 정말 입에서 살살 녹습니다.”

제임스는 교활하게도 배 인양 작업이 다 끝나고 점심때가 다 되어간다는 점까지 이용해서 음식 얘기로 말을 마쳤다. 안 그래도 배가 슬슬 고파오는 형편에 맛있는 음식 얘기까지 들으면 솔깃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흐음, 하지만 코린트는 너무 멀잖아?”

“아닙니다. 가져갈 화물도 없으니 바로 마법진을 그려서 공간 이동을 하면 됩니다. 시간도 얼마 안 걸리죠. 점심 식사는 백포도주로 찐 맛있는 송어찜을 드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식후에는 코린티아 시내에 있는 많은 볼거리들을 구경하실 수도 있을 거구요.”

바로 갈 수 있다는 것에 적잖이 마음이 움직인 소녀는 옆에서 지미나 라빈이 제지하기도 전에 승낙하고야 말았다.

“좋아, 코린트에 가기로 하지.”

소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지미와 라빈이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외쳤다.

“안 됩니다!”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파이어해머도 한마디 덧붙였다.

“나도 그 악의 제국에 갈 생각은 없소.”

파이어해머는 반쯤은 포로나 다름없는 형편이었기에 스리슬쩍 벗어날 방도만 궁리하던 중이었는데, 코린트로 간다면 재수 없으면 사형까지 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소녀는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이들을 쭉 훑어본 후, 마지막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파시르까지 슬쩍 바라보고는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간다고 했으면 가는 거야.”

소녀의 말에 파이어해머는 하마터면 욕설을 퍼부을 뻔했다. 이런 멍청하고, 저 잘난 맛에 사는 어린 계집하고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의 저주였다. 자신은 거의 포로나 다름없으니 거기 가서 재수 없으면 사형당할 가능성이 다분했다. 저들이 소녀를 왜 데려가려고 하는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녀 외의 인물들도 거기에서 환영받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코린트 일당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저 두 명이 꽤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소녀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이어해머의 의견은 묵살되었고, 소녀가 한 번 결론을 내리자 반대하던 두 수련 기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파시르야 처음부터 조용했으니 어쨌거나 싫든 좋든 코린트행은 결정되고 말았다.

제임스가 손짓을 하자 노마법사는 재빨리 거대한 이동용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물론 손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품속에서 꺼낸 작은 병 속에 들어 있던 하얀 가루를 조금씩 뿌리면서 마법진을 그리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마법진을 그리면 바람 한 번 불고나면 마법진이 완전히 없어지므로, 추격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이들의 행방을 알아내기는 거의 불가능했기에 마법사들 간에 상당히 애용되는 방법이었다. 마법진이 완성된 후 그들은 모두 마법진 위에 올라섰고, 곧이어 뿌연 광채를 흘리면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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