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174/930)

희미한 용언의 힘

퍽!

쿠당.

처음에 키에리 발렌시아드 대공은 새로운 인재를 구해 왔다는 보고를 듣고는 매우 유쾌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보고가 이어지자 키에리 나으리는 마스터라는 그 이름값을 뽐내고 싶다는 듯 느긋하게 앉아 있던 자리에서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나, 자신이 사랑하는 셋째 아들의 뺨을 사정없이 날려 버렸다. 그야말로 전광석화(電光石火)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빨랐다. 한 대 맞고 거의 3미터는 날아가서 책장에 처박힌 후 뻗어 버린 아들을 향해 살기 가득한 시선을 보내며 키에리는 으르렁거렸다.

“다시 한 번 더 말해 봐!”

한 방에 기절해 버렸는지 미동도 하지 못하는 제임스를 대신해서 옆에 서 있던 까미유가 재빨리 대답했다. 굳건하게 서 있는 것 같았지만 그의 다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겨우 드래곤 본 탈취 실패에 이 정도로 이성을 잃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또 키에리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살기는 정말 자신들을 죽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드, 드래곤 본의 포획은 실패했사옵니다, 대공 전하. 최신형 타이탄 일곱 대에 호위되고 있던 선박은 격침했지만, 인양해 본 결과 그 안에 드래곤 본은 없었사옵니다. 도중에 어딘가로 빼돌린 것… 같사옵니다.”

도중에 까미유의 말이 멈춘 것은 키에리가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기 때문이었다. 한참 까미유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키에리는 멱살을 꽉 쥐고 있던 손의 힘을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여기서 자신의 동료의 아들이자 명문인 크로데인 가문의 후계자를 두들겨 팰 수는 없었던 것이다. 속마음 같으면 이 둘을 갈아 죽여도 시원치 않겠지만, 사실 가짜 미끼에 현혹되어 따라간 것은 제임스이지 까미유가 아니었다. 까미유는 마지막 순간에 지원을 하기 위해 나갔을 뿐 죄가 없었다. 그것까지 생각이 들자 키에리 나으리는 까미유의 멱살을 풀어 준 후 성질이 풀릴 때까지 사랑하는 셋째 아들을 지근지근 밟았다.

퍽! 퍽! 퍽!

“멍청한 자식들! 겨우 그런 것에 속다니.”

한참 제임스를 지근지근 밟아 대던 키에리는 이제 적당히 화가 풀리자 밖에 대고 외쳤다.

“우즈크를 불러 와라!”

그러자 방 밖에서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옛!”

곧이어 60세 정도의 노련해 보이는 마법사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우즈크는 발렌시아드 가문의 주치의(主治醫)이자 발렌시아드 공국(公國)의 궁정 마법사였다. 발렌시아드 공국은 코린트 외곽에 있는 커다란 국가였고, 발렌시아드 기사단이라는 웬만한 국가들을 상회하는 강력한 기사단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궁정 마법사도 몇 명 있었다.

키에리는 자신의 공국에 있는 것보다는 이곳 황궁의 한쪽 구석에 지어진 자신의 궁전에서 생활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대신에 자신의 영지는 지금 첫째 아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키에리는 방 안에 들어와서 자신에게 인사를 올린 후 구석에 처박혀 있는 제임스를 향해 안 됐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우즈크를 보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 녀석을 좀 치료해 주게.”

“예, 대공 전하.”

우즈크는 치료 마법에 매우 정통한 마법사인 듯 마법을 걸고, 포션을 쓰자 제임스는 곧 깨어났다. 제임스가 깨어나는 것을 보고 키에리는 우즈크를 향해 말했다.

“나중에 치료를 좀 더 해 주게나. 지금은 이 녀석들과 의논을 할 게 있으니까 자리 좀 피해 주겠나?”

“예, 대공 전하. 그럼 말씀 나누소서.”

제임스가 비틀비틀 일어서서는 까미유의 옆에 서자, 키에리는 한숨을 푹 쉬면서 평상시와 같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미 그의 화는 다 풀린 상태였다. 키에리는 엄청나게 다혈질인 인물이었는데, 그 자신도 화가 나면 절대로 참으려고 하지 않았기에 그의 성질을 건드린 인물은 언제나 피를 보게 되어 있었다. 물론 그가 마음껏 자신의 아들을 두들겨 팬 것도 마법사가 주위에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 정도로 패지는 못했을 것이다.

“좀 더 경험 있는 놈들을 보냈어야 했는데, 내가 잘못 처리한 것 같군. 이제 몸은 좀 괜찮느냐?”

‘아직도 뼈마디가 쑤신다고 대답하면, 수련이 모자란다며 더 두들겨 팰 거면서 왜 물어요?’하는 말이 거의 목구멍 끝까지 나왔지만 제임스는 초인적인 노력을 통해 그 말을 다시 안으로 밀어 넣는 데 성공했다. 이것도 몇 번 자신의 아버지에게 죽도록 맞고 얻은 소중한 지식이요, 경험이었다. 제임스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예, 괜찮습니다, 아버님.”

“좋아. 데려온 애가 정령술사라고 했느냐?”

“예, 상당한 실력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정령술사인 지레느가 보장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녀가 관계하고 있는 정령은 아마도 뇌전의 정령일 것이라고 추정만 하고 있을 뿐,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녀의 실력을 확실히 알아보려면 좀 더 뛰어난 정령술사를 데려가야 합니다.”

“뇌전의 정령을 다스리는 정령술사라……. 뇌전을 다스리는 정령술사가…, 으음 그렇군. 코타스가 뇌전의 정령을 다스릴 줄 아니까 그에게 부탁해 보거라. 하지만 그가 바쁘다고 하면 딴 정령술사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해라. 나는 마법사 쪽으로는 잘 모르겠으니까 말이다.”

“예, 아버님.”

“이제 그만 나가 보거라.”

“예, 아버님.”

“예, 대공 전하.”

까미유는 방문이 닫히자마자 휘청거리며 주저앉는 제임스를 부축해서 우즈크가 있는 곳으로 갔다. 키에리 같은 엄청난 고수가 화풀이를 해 댔으니 몸이 멀쩡할 리가 없었지만, 우즈크에게 간단한 치료만을 받고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초인적인 정신력 덕분이었다.

제임스와 까미유는 일단 제임스의 치료를 끝낸 후 다음 날 아침 그라세리안 코타스 공작의 저택을 방문했다. 코타스 공작은 코린트 최고의 마도사로서 마법은 7사이클 정도밖에 사용하지 못했기에 그렇게 강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고 수준의 정령 마법을 구사하며, 뇌전의 정령왕 카르스타까지 불러낼 수 있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마도사였다. 하지만 그가 지금 모두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마법의 강함 때문이 아닌, 코린트 최강의 타이탄들의 엑스시온을 설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너라. 오랜만이구나.”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남자가 그들을 반겼다. 까미유나 제임스는 이 남자를 볼 때마다 도저히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놀랍게도 이 간편하면서도 아름다운 복장을 하고 있는 마법사는 60년쯤 전에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들과 만났고, 그때와 변함없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도 인간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아름다운 외모를 말이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하옵니다, 코타스 공작 전하.”

“자, 이리 앉아라. 이봐, 차를 내오거라.”

그의 말에 답하는 하녀의 목소리가 곱게 들려왔다.

“예.”

그라세리안은 친우들의 아들들을 정감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딱딱하게 궁정용 언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나는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들과 오랜 시간 우정을 지켜왔다. 나에게는 너희들이 아들이나 다름없지. 알겠냐?”

“예.”

“그래, 무슨 일이냐? 네 녀석들이 나한테 인사차 찾아왔을 리는 없을 테고, 또 뭔가 부탁하려고 찾아왔지?”

정곡을 찌르는 그라세리안의 말에 두 젊은이(?)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들은 나이만 많이 먹었을 뿐, 그들의 생애 대부분을 무술수련에 보낸 덕분에 비교적 때가 덜 묻은, 아직도 순진한 청년들인 것이다.

“저, 공작 전하. 저희들이 이번에 매우 유능한, 그러니까 아직은 아니지만 상당히 장래가 촉망되는 정령술사를 한 명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도 추측뿐이라서 정확하게 감정을 해 줄 정령술사가 필요합니다.”

“정령술사라, 정령술사는 매우 귀하지. 그래 어떤 정령들을 부리는 것을 봤느냐?”

그 말에 일순간 제임스는 주춤했다. 왜냐하면 소녀가 정령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 한 번도 보지는 못했습니다.”

“정령을 부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어떻게 정령술사라는 것을 알았지?”

그 말에 옆에 앉아서 잠자코 있던 까미유가 대신 대답했다.

“예, 지난번 여행에서 지레느가 알려 줬습니다. 그 소녀에게서 정령의 냄새가 난다구요. 하지만 자신이 부리는 불과 바람의 정령도 아니고, 지레인이 부리는 대지와 물의 정령도 아니랍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뇌전의 정령뿐이죠.”

그라세리안은 꽤 흥미가 있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뇌전의 정령을 다스리는 아이는 극히 드문데……. 그리고 뇌전의 정령 하나와만 친화력이 있다면 교육시켜 볼 가치가 있긴 하지. 그래 그 소녀는 어디에 있느냐?”

“수정궁(水晶宮)이라는 고급 여관에 투숙하고 있습니다.”

제임스의 답변에 그라세리안은 아차 하는 심정이었다.

“수정궁?”

“예, 아그립파 대로변에 있는 고급 여관 말입니다.”

물론 ‘수정궁’이라는 여관을 그라세리안은 알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이렇게 놀란 것이다. 드래곤이 성룡의 단계를 넘어서서 그야말로 생의 전성기에 들어서면 다른 드래곤의 용언의 힘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걸 이용해서 상대 드래곤의 위치를 잡아내니까 말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용언 마법으로 자신의 기척을 숨기고 있는 다른 드래곤을 어떻게 찾아가겠는가? 드래곤들끼리 친분을 맺고 수다도 떨고 할 수 있는 것도 다 상대 드래곤의 위치를 파악해 낼 수 있는 능력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라세리안은 그 능력 덕분에 지금 이곳 코린티아시에 자신 외에 또 다른 드래곤이 한 마리 놀러 와 있다는 것과 그 드래곤이 아마도 ‘수정궁’ 근처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멍청한 녀석들이 뛰어난 정령술사랍시고 모셔 온 아이는 드래곤. 그것도 자신과 같이 뇌전의 정령을 다스릴 줄 아는 블루 드래곤일 가능성이 컸다.

그라세리안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너희들이 혹시 그 아이에게 뭐 원수질 만한 일을 한 것은 아니겠지?”

“예,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쓸 만하다고 판정되면 그다음은 납치를 해서…….”

그라세리안은 그 뒷말을 들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예전에도 몇몇 뛰어난 마법사나 정령술사가 될 만한 재목을 납치해다가 키운 적이 있으니까 말이다. 뛰어난 친화력을 지닌 엘프도 납치해다 써 봤지만 드래곤은…….

“안 돼!”

“예?”

“그 아이를 납치하거나 회유하는 것은 내가 허락하지 않겠다. 그냥 여기 구경이나 시켜 주고 돌려보내라.”

“저, 하지만 전하께서 그 아이를 보신 것도 아니잖습니까? 왜 그 아이가 쓸모없을 것이라고 단정을 내리십니까? 상당히 실력이 있어 보이던데요? 전하께서 감정을 좀 해 주시든지, 아니면 다른 정령술사를 소개해 주십시오.”

그라세리안은 잠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 아이가 드래곤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답한다면, 그에 따른 합당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걸 말했다가 잘못하면 자신의 정체도 탄로 날 우려가 있었다. 아무리 마법사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 마법사보다 더 강한 존재인 드래곤의 정체를 단번에 원거리에서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좋다. 내가 직접 만나 보기로 하지. 안내하거라.”

“예, 전하.”

용언의 힘을 가진 인간

드넓은 도나우강 위에 엷은 빛이 살짝 뿜어져 나왔다가 사라지는 그 순간 여섯 필의 말들과 그 위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공간 이동의 종착역이 마법진이라면 상관없지만, 마법진이 아닌 곳으로 워프할 때는 보통 강 위를 자주 애용한다. 그 이유는 워프가 종료된 후에 높직한 곳에서 떨어졌을 때, 사람은 상관없지만 말에게 피해가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풍덩! 풍덩!

다섯 필의 말과 사람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도나우강 속으로 다이빙을 했지만 유일하게 한 필의 말과 그 위에 탄 사람은 물 속으로 처박는 대신 우아하게 공중에 떠 있었다. 모두 허겁지겁 놀란 말들을 달래어 강변으로 헤엄을 쳐 나오는 사이 공중에 떠 있던 말과 사람은 유유히 날아 강변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사실 아르티어스 정도의 엄청난 마법 능력을 가진 경우 동료들까지 모두 다 하늘을 날아 우아하게 착륙하도록 만들어 줄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괜히 힘들게 그런 걸 해 줄 필요성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강변에서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지평선 쪽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기사 한 명이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아르티어스의 표정이 좀 심각했기 때문이다.

“왜 그러십니까?”

“흐음, 이상하군. 코린티아에 있는 게 맞을까?”

“예, 거의 정확할 것입니다. 상대가 코린트의 근위 기사니까 말입니다.”

상대의 말을 듣고 아르티어스는 잠시 망설였다. 자신이 드래곤이란 것을 이 멍청한 놈들에게 말해 줄 필요는 없었고, 또 자신이 드래곤이기에 용언의 힘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말해 줄 필요가 없었다. 아들의 경우 엄청난 마나를 가진 인간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마법으로도 지평선 저 너머 코린티아 쪽에서 그 정도 엄청난 마나를 지닌 존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 못한 녀석들은 제법 있었지만 엄청난 기억력을 지닌 드래곤인 그가 아들과 다른 녀석들을 혼동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마법을 이용해서 자신의 기척을 숨기고 있다는 말이 되는데, 지금 코린티아시 쪽에서 느껴지는 용언의 힘은 두 곳이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둘 중 하나는 드래곤이고, 하나는 아들일 가능성이 컸다. 아들 녀석에게 그가 가르쳐 준 것은 용언 마법뿐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르티어스는 둘 중에서 좀 더 미약한 용언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상대가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을 내렸다.

“빨리 가자. 자세한 것은 코린티아시에 가서 알아보기로 하지.”

“예.”

코린티아 시내를 관통하는 드넓은 도로인 아그립파 대로(大路). 돌과 시멘트로 잘 포장된, 마차 네 대가 한꺼번에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이 도로는 코린티아시의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는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된 도로였다. 또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대로를 뮤리엘 대로라고 불렀는데, 그 두 대로의 이름은 건설되었을 당시의 황제, 황후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아그립파 대로변에 위치한 거대한 여관 수정궁(水晶宮). 수정궁 정도 수준의 여관은 이 넓은 코린티아시에서도 10여 개뿐일 정도로 대단히 호화로운 여관이었다. 그 수정궁의 앞에 서 있는 세 명의 젊은이들. 이들이 여관 안으로 들어가기를 망설이고 있는 것은 결코 돈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들 중 한 명, 즉 흑발을 길게 기른 상관이 들어가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라세리안은 수정궁 안에서 뿜어 나오는 용언의 힘을 느꼈고, 자신의 짐작이 정확했음을 확인했다. 이 젊은 녀석들이 잡아온 아이는 사람이 아니라 드래곤이었다. 용언의 힘이 그렇게 강하지 못한 것을 보면 나이가 많은 드래곤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갓 드래곤이 되어서 세상 구경을 하러 다니는 철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드래곤에게 자신이 뭐라고 충고를 해야 할까? 여기는 내 영역이니까 꺼지라고? 그건 사실이 아니었고, 또 다른 드래곤의 유희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라세리안은 잠시지만 갈등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라세리안으로서도 다른 해결책은 없었다. 만약 코린트 쪽에서 그 드래곤을 인간인 줄 알고 협박 같은 걸 하다가 잘못하면 수도가 묵사발이 날 수도 있었다. 젊은 드래곤은 아직 경험이 미숙해서 감정의 조절이 약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유희 도중에 그 유희에 휩쓸려서는 그게 진짜 자신의 삶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걸 그는 막아야만 했다.

“너희는 여기서 기다리거라.”

“예, 공작 전하.”

그라세리안은 까미유와 제임스를 밖에서 기다리게 한 후 소녀가 투숙하고 있는 방문을 두들겼다.

똑똑.

“들어와!”

그라세리안은 망설임 없이 곧장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한 소녀가 창밖의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탐스러운 긴 금발, 크고 아름다운 눈, 인간으로서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저 정도의 미모를 지닌 여자들을 볼 수 있는 곳은 신전뿐이었다. 즉,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공적인 아름다움이어야만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그라세리안은 찬찬히 소녀를 바라보다가 한 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소녀에게서 풍겨 나오는 희미한 정령의 냄새……. 정령과 단 한 번이라도 관계를 맺게 된다면 그 냄새가 몸에 배어 버린다. 그런데 그 냄새는 그의 수하들에게 전해들은 뇌전의 정령이 절대로 아니었다. 그 냄새는 바로 물의 정령. 그것도 정령왕 나이아드의 것이었다. 그라세리안은 오랜 시간을 살아온 드래곤이었기에, 자신이 불러내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정령왕급의 냄새를 모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급 정령인 운디네나 상급 정령인 닉스의 냄새는 하나도 나지 않고 정령왕의 냄새만 났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해도 어린 드래곤은 절대로 정령왕급을 불러낼 수 있을 정도로 친화력이 좋지 못하다. 우선은 하급 정령, 그다음은 상급 정령. 나중에 웜급(3천 살 이상)을 넘어서야 간신히 불러낼 수 있는 게 정령왕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미약한 용언의 힘밖에 발휘할 수 없는 젊은 드래곤이 정령왕의 냄새를 풍길 수 있을까?

그라세리안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주고받는 말을 듣지 못하도록 마법 결계부터 쳤다. 그런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의 이름은 뭔가?”

“나? 나는 다크, 너는?”

“그것 말고 진짜 이름을 말하는 거야. 내 이름은 ‘카드리안’이다. 네 이름은?”

“다크, 다크 로니에르.”

“장난치지 말고 진짜 이름을 말해. 나도 내 이름을 말했잖나?”

살짝 신경질을 내고 있는 카드리안을 다크는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카드리안도 마법으로 자신의 모든 마나의 움직임을 차단하고 있었기에 다크로서는 상대에 대해 알기 힘들었다. 하지만 다크는 카드리안의 눈동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뇌전을 다스리는 광폭(狂暴)한 블루 드래곤 특유의 그 순수한 광기에 젖은 눈동자를 말이다.

소녀는 천천히 걸어가서 침대 위에 놓여 있던 검을 집어 들고는 허리에 차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엄청난 눈빛을 가지고 있지만…, 너는 인간은 아닌 것 같아. 사람이 제정신으로 그런 눈빛을 가지고 있기는 힘들지. 너는 누구지?”

카드리안은 소녀의 행동을 보고 있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너는 진짜 인간이란 말이냐? 어떻게 신께서 드래곤에게만 허락한 용언의 힘을 알고 있지?”

소녀는 피식 웃으면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마법을 해제해 버렸다. 이미 그녀는 이 정체불명의 마법사가 들어오면서 외부와 단절시켰다는 것을 눈치 챘기에 더 이상 자신의 정체를 숨길 필요는 없었다.

용언의 힘을 해제하면서 소녀는 이죽거렸다. 소녀는 상대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드래곤에게만 허락한 용언의 힘’이란 말에서 드래곤이란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 말인가? 이 정도는 별로 어려운 게 아니지.”

용언의 힘이 해제되면서 카드리안은 소녀의 단전에 모인 엄청난, 인간 따위가 모을 수 없는 그야말로 엄청난 마나의 덩어리를 포착할 수 있었다. 지금 코린트 최고의 검객이라는 키에리보다도 더 많은 양의 마나. 몸속에 저 정도의 마나를 축적한다는 것은 절대로 그녀가 마법사 따위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갑자기 나한테 찾아와서 시비를 거는 걸 보니까 별로 좋은 뜻으로 방문한 것은 아닌 모양인데, 나도 그걸 마다하는 사람은 아니야. 언젠가는 드래곤이란 것과 한번 싸워 보고 싶었어.”

그 말을 끝으로 소녀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카드리안은 금빛 찬란한 검신을 보며 그 검신이 골드 드래곤의 뼈로 만들어진, 그것도 드래곤 자신이 공들여 만든 최상품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소녀가 뽑아 든 검은 마력검(魔力劍)이었고, 그에 따라 복잡한 주문이 황금빛 찬란한 검신에 복잡하게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검신에 새겨진 주문이었다. 보통의 경우 마력검 종류는 봉인검(封印劍) 계열보다 훨씬 효율이 안 좋기에 진짜 마법에 필요한 마나의 다섯 배에서 열 배 이상까지도 소모한다. 그렇기에 고급 주문을 검신에 새기는 멍충이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소녀의 검에 새겨진 주문은 8사이클급 주문들 중에서도 대인 공격 주문으로는 최강이라는 헬 파이어(Hell Fire). 이 정도 주문을 새겨 놓고, 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면 이건 드래곤의 작품이었다.

감히 인간 따위가 8사이클 마법을 알고 있을 가능성도 거의 없었지만, 그렇게 효율 나쁜 마력검을 8사이클로 만들었다면 사용할 사람이 아예 없기 때문이었다.

8사이클 최강의 대인(對人) 공격 주문 헬 파이어. 이것은 사실상 작은 목표물을 공격하는 최강의 마법 주문이었다. 왜냐하면 7사이클 이상의 주문들은 대부분이 광범위 마법이기에 부분적으로 봤을 때는 파괴력이 떨어진다. 그걸 유추해 본다면 저 검신에 새겨진 헬 파이어라는 마법이 발동된다면 거의 9사이클급 마법에 직격당하는 정도의 피해를 볼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검이 좋다고 해도 그걸 사용할 수 없다면 위협이 될 수는 없는 노릇. 보통 인간들이라면 저 주문을 발동시키지도 못하고 마나의 고갈로 사망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카드리안은 소녀의 몸속에 쌓여 있는 마나의 양과 헬 파이어에 사용되는 마나의 양을 살짝 따져 봤다. 충분히 두세 번의 헬 파이어를 쓰고도 남을 정도의 마나였기에 카드리안은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지금 자신의 몸으로는 5사이클급 용언 마법이 한계였다. 본체로 돌아가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소녀가 마력검에 새겨진 마법을 발동시키는 그 순간 자신이 소멸할 가능성이 컸다. 그만큼 헬 파이어는 강력한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본체로 현신한다면 이곳 코린티아시는 박살이 날 것이다. 또 공간 이동 마법으로 도망친다고 해도 그 마법에 의해 이 일대가 완전히 박살이 날 것이다. 헬 파이어의 위력은 그야말로 자그마한 성(城) 하나쯤은 통째로 박살 낼 수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카드리안은 무턱대고 한판 하자고 하는 소녀를 향해 다급히 말했다.

“잠깐, 여기는 시가지야. 여기서 싸운다면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구.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는 게 어때?”

카드리안으로서야 인간이 얼마나 죽든 별 상관없었고, 또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 코린티아시가 이 정도로 커진 것은 자신의 노력에 의한 성과였기에, 쓸데없는 일로 잿더미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재미로 만들어 놓은 모래 탑이라도 자신이 만든 것이라면, 그게 무너지는 걸 본다는 것은 약간은 가슴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직접 재미 삼아 때려 부순다면 몰라도…….

상대가 살짝 숙이고 들어오자 다크는 슬쩍 비웃음을 흘렸다. 상대가 드래곤이라고 하지만 인간으로 모습을 바꾼 상태에서는 힘을 별로 못 쓴다는 것을 아르티어스를 통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체로 변신하기 전 한 칼에 끝장낼 수 있는데, 뭐 때문에 장소를 바꾼다고 난리를 칠 필요가 있을까?

“왜? 까짓 거 몇 명 죽는다고 별 문제될 것은 없잖아?”

소녀의 말에 카드리안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정말 인간이 맞냐? 여기서 너와 내가 싸운다면 이 도시는 완전히 파괴될 수도 있는데?”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지. 몇 명 죽어 봐야 별 문제될 것도 없고 말이야.”

“흐음, 그래도 이곳은 내가 몇십 년이란 시간을 들여서 만든, 내가 아끼는 작품들이 많은 곳이야. 될 수 있다면 딴 곳에서 싸우기로 하지. 어때? 너도 쓸데없이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좋아할 것 같지는 않은데?”

잠시 상대의 의도를 짐작해 보기 위해 다크는 카드리안의 눈을 쏘아봤다. 하지만 카드리안의 눈에 떠올라 있는 것은 교활함이 아닌, 드래곤만이 지닌 자신감과 광포함이었다. 장소를 옮기는 데 있어서 그 어떤 속임수 따위는 없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슬쩍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좋아, 자리를 옮기기로 하지. 어디가 좋을까?”

블루 드래곤 카드리안과 다크가 싸울 장소를 의논하는 그때, 아르티어스 일행은 다크를 찾기 위해 코린티아시로 접근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코린트 제국 중신(重臣)들은 드래곤 본을 입수한 관계로 몇 년 내에 비약적으로 군사력이 증가할 가능성이 있는 크루마를 멸망시킬 모의(謀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크루마에서는?

크루마 또한 코린트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루엔 공작을 대장으로 하는 타이탄 부대가 코린트의 근위 기사단과 맞붙었다는 것은 일찍이 보고되었다. 양측 다 총력전을 펼쳤기에 상대가 누군지는 거의 눈치 챘을 것이 뻔했다. 일단 사력을 다한 한 판이었기에, 자신이 가진 필승의 기술들을 숨겨 놓고 싸울 정도로 한가한 싸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마도 코린트도 이쪽의 정체를 대강은 파악하고 크루마를 박살 내기 위한 계획을 짜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때는 상대보다 먼저 뒤통수를 치는 사람이 이기는 법. 하지만 크루마로서는 자신들보다 월등한 강대국인 코린트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 엄청난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코린트와 일대일로 싸우는 것도 힘든 판에 코린트의 동맹국들까지도 계산에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홀의 중앙에는 직사각형의 거대한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탁자의 좌우에는 열두 명의 신하들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탁자의 끝에는 다른 신하들이 앉은 좌석보다 조금 더 높은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곳에는 50세는 족히 넘어 보이는 흰 수염을 멋지게 기른 당당한 체구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바로 이 인물이 현재 크루마의 63대 황제인 알카파이네 드 크루마였다.

“그린레이크 경, 어느 정도 의견이 모아졌다면 마법사들을 대신해서 의견을 말해 보라.”

황제의 말에 왼쪽에 있던 마법사들 중에서 가장 황제에게 가깝게 앉아 있던 아름다운 용모의 엘프가 입을 열었다. 인간의 기준으로 봤을 때 거의 30대 중반도 안 되어 보이는 이 엘프의 이름은 티란 엘 그린레이크. 이 엘프는 크루마에 둘뿐인 대마법사들 중의 하나였다.

원래 엘프는 평화를 사랑하는 조용한 종족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린레이크는 너무나 오랜 시간 인간들과 함께 생활한 때문인지 호전적인 인간의 성격에 많이 물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희들의 소견으로는 우선 마법으로 코린트의 중요 도시들을 파괴한 후,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가장 파괴력이 좋은 도시 공격용 마법은 유성 소환이온데, 그것을 사용했을 때 유성이 지구까지 도착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게 큰 단점이옵니다.”

이때 황제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노기사(老騎士)가 황제를 향해 말했다.

“폐하, 유성 소환은 절대로 아니 되옵니다. 그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기사도에 어긋나는 행동이옵니다. 될 수 있다면 힘없는 백성들에게 전쟁의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야만 하옵니다.”

황제는 노기사를 힐끗 보더니 그린레이크를 향해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음, 전쟁에 기사도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소. 문제는 본국이 국제 협약에서 금지한 유성 소환 마법을 사용했을 때, 잘못하면 국제적으로 고립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오. 그래, 유성 소환을 했을 때 필요로 하는 시간은?”

하지만 황제의 얼굴에서는 수만 톤짜리 유성이 한 도시에 낙하하여 그 때문에 도시가 파괴되고, 수많은 죄 없는 시민들이 죽어 나갈 것이라는 가책감 따위의 표정을 절대로 찾아볼 수 없었다. 승리할 수만 있다면 수만, 아니 수백만의 무고한 시민들을 목매달아도 상관없었지만, 그로 인해 타국의 지탄을 받는다면 끝장이었다. 코린트와 전쟁을 벌여 살아남으려면 타국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예, 한 달이옵니다. 폐하.”

“한 달이라…….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판국에 한 달은 너무 길지 않소?”

“예, 하지만 도시 파괴에는 유성 소환 마법이 최고이옵니다. 그것은 시간이 많이 걸려서 그렇지 웬만한 방어 마법 따위로 막을 수 있는 마법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유성 소환과 함께 몇 가지 도시 공격용 마법을 병행하여 사용한다면 코린트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첩자들을 풀어서 그들의 방어 마법진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함께 병행한다면 더욱 큰 효과를 보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금지된 마법인 만큼 효과야 확실할 것 같지만, 한 달이나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 좀 아쉽군. 하지만 상대가 그걸 눈치 채고 방어하지는 않을까?”

“아마 유성 소환 마법이 실행된 직후에 곧바로 방어 체계에 들어갈 것이옵니다. 8사이클급 마법을 사용한다면 상대가 눈치 챌 것은 당연하옵니다. 하지만 유성 소환 마법을 방어하기는 힘들 것이옵니다. 본국의 전 마법사들을 모아서 마법진을 발동한다면 코린트의 42개 중요 도시에 유성 하나씩을 안겨 줄 수 있사옵니다. 42개 도시를 모두 방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옵니다.”

그 말을 듣던 노기사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었지만 황제 앞에서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보니 속만 탈 수밖에 없었다. 지금 크루마의 중요한 기사들은 모두 다 드래곤 본을 획득하기 위한 일명 ‘초록 도마뱀’ 작전에 투입되어 있었다. 그렇다 보니 갑자기 긴급 소집된 회의에서 기사들의 발언권이 상대적으로 마법사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42개 도시라……. 하지만 그 마법을 발동시킨 후에 모든 마법사들이 탈진되어 며칠은 쉬어야 할 텐데, 그동안에 적들이 행동을 취한다면?”

“코린트 본국의 병력은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사옵니다. 처음부터 강공으로 밀어 붙여 코린트의 동맹국들이 군사 파견을 주저하도록 유도해야만 하옵니다. 하루 정도만 쉬어도 상당수의 마법사들은 기력을 회복할 수 있사오니, 그 후에는 다른 마법 공격으로 적들의 후방을 교란시키면 되옵니다.”

“좋소. 하지만 유성 소환은 조금 더 있다가 결정하기로 합시다.”

“예, 폐하.”

황제는 자신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노기사를 향해 말했다.

“튜블란 경.”

아직도 기사도에 어긋나는 그린레이크의 말에 노기를 억누르느라 벌건 혈색을 유지하고 있는, 위풍당당하게 생긴 노기사(老騎士)가 정중한 어조로 답했다.

“예, 폐하.”

“경의 의견은 어떻소?”

“예, 마법사들로만 따진다면 본국이 결코 코린트에 밀리지 않겠지만, 군사력으로 본다면 코린트는 힘든 상대이옵니다. 모든 군비 증강 계획이 완료된 후에나 그들과 맞설 수 있는 만큼, 될 수 있다면 시간을 벌면서 동맹국들을 끌어들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줄 아옵니다. 이번에 받은 보고로는 안티고네의 실전 테스트는 완벽했으며, 흑기사를 상대로 줄곧 우위에 선 전투를 벌였다고 들었사옵니다.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끌려면 안티고네가 최소한 30대는 있어야 하옵니다.”

“하지만 곧 전쟁이 시작된다면 그건 불가능한 주문이란 것을 그대도 알고 있잖소?”

“예, 폐하. 또 이번 전투에서 코린트의 신형 타이탄이 등장했사옵니다. 붉은색의 페인트를 칠한 1백 톤 내외의 거대한 타이탄이온데, 안티고네를 상회하는 파워를 지닌 것으로 추측되옵니다. 그게 전투용이 아닌 결투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전쟁이 시작되면 본국의 후방에 침투하여 게릴라전을 벌일 확률이 높사옵니다. 그 점 또한 대비해야만 하옵니다. 이미 첩자들을 대량으로 코린트에 투입했사옵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공간 이동 마법을 통해 기사들을 한 곳에 집중 운용하여, 국지적이긴 하지만 군사력의 우위를 노린다면 그렇게 밀리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그 작전을 실행하려면 마법사들의 지원이 필요하옵니다.”

“좋소. 그린레이크 경, 기사단에 마법사들의 파견이 가능하오?”

“가능하옵니다, 폐하. 유성 소환 마법을 위한 마법진을 발동시키려면 많은 마법사가 필요하지만, 그 일이 끝난 후라면 마법사를 각 기사단에 지원해 주는 것은 가능하옵니다.”

“좋아. 르미란 경.”

왼편의 네 번째에 앉아 있는 인물이 즉시 대답했다.

“예, 폐하.”

르미란은 외교 등 국제적인 일을 맡아 처리하는 관료로서 뛰어난 외교 수완을 지닌 늙은이였다. 그는 주름진 얼굴 사이에 위치한 눈동자를 빛내며 황제의 말을 기다렸다.

“경은 비밀리에 동맹국들에게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알리고, 그들의 지원을 받아 낼 수 있도록 노력하시오.”

“예, 폐하.”

“경이 생각하기로는 몇 나라나 지원해 줄 것으로 생각하오?”

“폐하, 소신의 솔직한 의견으로는 상대가 코린트라는 것이 알려지면 다섯 나라도 힘들 것이옵니다. 우선 적이 누군지 철저하게 숨긴 후 큰 무도회 같은 걸 열어서 각국의 왕자나 공주 등을 초청하여 인질로 잡는다면 그들도 마지못해 응할 것이옵니다. 하지만 초전에 코린트에 큰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면 인질만으로 그들을 제어하기는 힘들 것이옵니다.”

“우선 무도회를 대대적으로 여는 것이 좋겠군. 동맹국의 중요 인물들의 자제들을 대부분 초대하고 말이야.”

“예, 폐하.”

이렇듯 크루마에서도 강대국 코린트와 어차피 싸우게 된 이상 무슨 짓을 해서라도 승리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각종 모략과 술수를 짜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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