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시작
“모두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전하.”
“좋아.”
그녀가 방 안에 들어서자 넓은 탁자에 빙 둘러 앉아 있던 인물들이 재빨리 일어서며 인사했다. 그녀가 가볍게 답례를 한 후 자리에 앉자 그들도 앉으며 저마다 인사를 건네 왔다.
“작전 성공을 축하드리옵니다, 전하.”
“고맙소.”
그녀는 앉아 있는 스무 명 남짓한 인물들을 천천히 빙 둘러본 후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경들, 갑작스런 회의에 시간을 내줘서 고맙소. 내가 경들을 소집한 이유는 이거요. 카드렛 경!”
그러자 한쪽에 앉아 있던 30대 초반의 남자가 일어서서 그녀의 호명에 답한 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예, 전하. 모두들 알고 계시겠지만 어제 선전 포고를 하기 위한 사절이 코린트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선전 포고는 물론 15일 후 그들이 코린티아의 수도에 도착한 다음 코린티아 황궁에 전달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전면전이 시작될 것입니다. 첩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코린트의 기사단들이 속속 국경 주위에 배치되고 있는 형편이기에 폐하께서는 전쟁을 하루라도 뒤로 미루기 위해 선전 포고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신 겁니다. 상대도 이쪽에서 선전 포고를 위한 정식 사절단이 파견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사절단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대국(大國)으로서의 예의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려진 결정이었습니다. 이로써 본국은 15일의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 15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본국의 흥망이 걸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공작 전하께서는 어떻게 하실 의향이시옵니까?”
“일단은 황궁에서 내려지는 결정에 따라야 하겠지. 하지만 본국의 관례상 전시의 모든 작전권은 총사령관에게 있는 만큼 본인도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겠기에 경들을 소환한 것이야.”
미네르바는 앉아 있는 인물들을 차근차근 훑어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경들도 알고 있다시피 코린트가 본국을 침공해 들어오기 위해서는 미란 국가 연합을 통과해야 한다. 그 때문에 코린트도 섣불리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 이동 마법을 이용해 소수의 기사단만을 투입한다고 해서 전쟁을 끝낼 수는 없다. 정규군을 격멸하는 데는 기사단이 최고겠지만, 점령지를 확보, 관리하는 데는 군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야. 문제는 코린트가 투입할 연합군 병력의 규모와 그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본국과의 전쟁에 투입되느냐 하는 것이지.”
그 말에 공작의 옆쪽에 앉아 있던 장년의 사내가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미란 국가 연합은 예로부터 본국과 코린트의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잡아 가면서 번성해 온 국가이옵니다. 그들은 지금의 이 균형이 깨지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오니 당연히 코린트는 미란을 짓밟지 않고서는 그들을 통과하기는 힘들 것이옵니다. 그 점도 생각해 두는 것이 어떠하올는지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쪽에서 그에 대한 반론이 튀어 나왔다.
“하지만 미란 국가 연합은 도저히 코린트를 막을 수 없소. 만약 코린트를 막으려고 든다면 자국이 전쟁터가 되어야 할 텐데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코린트의 군대를 막을 필요가 그들에게 있겠소?”
“막을 힘이 있다면 가능하겠죠. 본국이 병력을 지원해 준다면…….”
장년의 사내는 그의 말에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첨부해서 반박했다. 하지만 그는 뒷말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크루마의 군사력을 지원해 준다고 해도 코린트를 막는 데는 역부족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본국의 기사단은 본국을 지키기에도 벅찬 형국인데 타국을 지원해 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되오. 아마도 코린트는 현재 군사력으로 봤을 때 최소한 20개 보병 사단, 5개 기병 사단, 2백여 대가 넘는 타이탄을 투입해 올 거요. 물론 자국 방어 및 치안 안정을 위해 충분한 양의 기사단을 제외한다고 해도 말이오. 그 외에 코린트와 동맹을 맺은 국가에서 파견할 군대까지 감안한다면……”
“하지만 경의 생각은 좀 지나친 감도 있소. 왜 꼭 코린트가 전면전으로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이쪽에서 군사력을 증가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형식의 무력시위 정도로 끝날 수도 있소.”
“무력시위? 하! 유감스럽게도 코린트는 본국에서 드래곤 한 마리에 해당하는 막대한 양의 드래곤 본을 삼킨 것을 알고 있소. 그들이 본국의 군사력이 엄청나게 확대되기를 참고 기다려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나라도 그 정도 무력시위 좀 한다고, 아니 그 무력시위의 결과로 상대국에서 더 이상 무력 팽창은 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성명을 발표하고 각서를 쓴다고 해도 믿지 않을 거외다.”
두 사람이 열을 올리기 시작하자 한쪽에서 그들을 향해 손을 내저어 보이며 열기를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자, 자, 너무 열을 올리지 마십시오. 현재 코린트의 군대가 이동하는 것을 파악해 본 결과에 따르면 결코 무력시위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5개 사단 병력은 타렌 왕국과의 접경에 있는 쟈므시에 서서히 집결 중입니다. 그리고 군대가 이동할 수 있도록 미란 국가 연합과 물밑 접촉을 시도 중이죠. 그리고 본국을 둘러싸고 있는 세 개의 제국, 다섯 개의 왕국에 정치적 압력을 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모든 것을 보면 코린트는 본국을 멸망시킬 의사가 충분히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언제 전력을 투입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겠지요. 지금까지의 정보로 봤을 때 코린트는 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자신하고 있는 만큼, 한 번에 전 병력을 투입해서 끝장을 낼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런 식으로 전쟁을 벌인다면 코린트로서도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본국 주변의 국가들을 이리저리 쑤셔 대고, 또 본국의 동맹국들을 괴롭혀 이탈하게 만들어서 본국을 고립시키는 작전을 선행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전쟁은 본국이 완전히 고립되고 난 후에 시작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들의 말에 미네르바의 옆에 앉아 있는 지크리트 루엔 공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머리가 있는 놈들이라면 당연히 그 방법을 쓸 테지.”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 현재로도 서로가 병력을 동원한다면 10대 6 정도로 본국이 밀리는데…, 거기다가 동맹군까지 가세한다면 10대 5도 되기 힘드오. 그런데도 코린트가 정석적으로 행동해 줄까?”
“좋은 지적이십니다. 현재까지 첩자들을 통해 들어오고 있는 정보로는 완전 고립 정책을 우선 시행하면서 천천히 전쟁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기습전으로 나온다면 기사단을 후송해야 하는 군대가 어딘가에 대량으로 집결해야 함에도 그런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쟈므시에 집결 중인 5개 사단도 아직까지 국경을 통과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코린트의 동맹국인 타렌 왕국에서 아직 허가가 떨어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물론 타렌 왕국의 군함들이 렌트항에 속속 집결 중이라는 정보가 들어와 있는 것을 보면 곧이어 타렌의 국왕이 코린트의 5개 사단을 수송해 주겠다고 허가할 것 같지만 말입니다.”
“흠, 코린트에 바다가 없다는 것이 이런 때는 매우 다행이군. 바다를 통한 이동을 하려면 일일이 타국의 도움을 받아야 하니 그 과정에서 정보가 누설된다 이 말씀이야. 안 그렇소?”
“그 덕분에 바다 쪽은 거의 걱정하지 않고 있는 것 아니겠소? 하지만 타렌 왕국이 병력을 수송해 주려고 든다면 그 대비는 충분한가요?”
“예, 마틸다 장군이 정예 해군을 배당받아 지키고 있습니다. 마법사들까지 지원받았으니 아마도 무난하게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으음…, 이 상태로 코린트가 시간만 끌어 준다면 더 이상 좋을 것이 없을 텐데 말이오.”
“하지만 두 달 이상은 힘들 것이오. 겨우 두 달 동안 신형 타이탄을 생산해 봐야 몇 대나 만들겠소?”
“잘하면 2차 증강분까지는 인도될지도 모르죠. 2차분의 타이탄은 자금 문제상 엑스시온만 아직 제작하지 못하고 있지 않소? 뼈대와 장갑판은 모두 제작된 상태니까 신께서 도우셔서 드래곤 본만 빨리 팔아치울 수 있다면 가능성은 있소.”
“하지만 그 정도 황금을 가진 국가는 거의 없습니다. 또 드래곤 본은 엄청난 고가의 물건이지만, 그걸 가공하는 것도 매우 힘든 일이죠. 웬만한 국가들의 경우 드래곤 본 가공은 생각도 못 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생각해 보나 마나 알카사스에 판매하게 되겠지. 하지만 알카사스에 대량의 드래곤 본이 유입되고, 또 엑스시온을 제작하기 위한 재료들이 대량으로 이곳으로 운반된다면 그걸 눈치 채지 못할 바보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야. 알카사스와 본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사이도 아니고 말이지.”
이때 여태껏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미네르바가 피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드래곤 본은 이동 마법진을 통해 알카사스로 운반될 것이니 경들은 걱정할 필요 없다. 문제는 엑스시온의 재료들을 어떤 경로로 가지고 오느냐 하는 것이겠지. 재료들 중에서 가벼운 것들이나 소량 사용되는 것들은 모두 다 이동 마법진을 통해 본국으로 전송될 것이야. 하지만 타이탄 생산에 대량으로 사용되는 미스릴이나 크로네, 황금, 은 따위의 금속성 물질들은 그 부피는 제쳐 두고 엄청난 무게를 가지고 있지. 하지만 그것들은 비밀리에 따로 운반될 테니 그대들은 걱정하지 말라.”
“예, 전하. 하지만 그렇게 하면 시간이 많이 걸릴 텐데…….”
그러자 미네르바의 옆쪽에 앉아 있던 지크리트 루엔 공작이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선 타이탄 몇 대 정도 제작할 수 있는 분량은 우선적으로 마법진을 통해 전송받았다. 나머지는 천천히 공급받게 될 거야. 그리고 금이나 은이라면 귀족이나 부자들을 통해서도 충분히 징발이 가능하니 수급에 약간의 차질이 생기더라도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네.”
“그 말씀을 들으니 안심이 되옵니다, 전하.”
일단 어느 정도 토론이 오고간 후 미네르바는 좌중을 둘러보며 조용한 어조로, 하지만 힘주어 말했다.
“일단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 2차 증강 작업을 완료해야만 해. 이건 칙명(勅命 : 황제의 명령)으로 들어라. 이제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경들은 각자의 군대를 확실히 장악하여 경거망동을 삼가도록 하라. 그리고 타이탄을 보유한 기사들은 이동 마법진이 갖춰져 있는 5대 도시에 모두 배치될 것이다. 그리고 마법사들을 철저히 보호하라.”
“존명!”
미란 국가 연합
미란 국가 연합은 다섯 개의 왕국들이 모여 이루어진 국가다. 서쪽으로는 강대국 코린트 제국, 동쪽으로는 강대국 크루마 제국의 사이에 끼여 있는 다섯 개의 왕국들. 이들이 어느 한쪽, 또는 몇 개씩 양쪽의 강대국들에 흡수, 통합되지 않고 살아남은 이유는 그 두 강대국 사이의 완충 지대 역할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크루마와 코린트가 그 오랜 시간 국경을 사이에 두고 있으면서 단 한 번도 충돌하지 않은 이유가 이 완충 지대 덕분이었다. 완충 지대가 없었다면 아마도 오래전에 크라레스와 코린트처럼 대규모 전쟁이 터졌을 게 분명했다.
이 작은 다섯 개의 왕국들은 일단 강대국의 사이에 끼인 채 살아남아야 했고, 그들이 살아남는 길은 중립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로가 뭉치는 방법뿐이었다. 그 때문에 등장한 것이 바로 이 ‘국가 연합’이다. 미란 국가 연합은 다섯 개의 국가를 다섯 명의 왕들이 통치한다. 그리고 5년 주기로 국가 연합의 의장(議長)을 선출하여 그가 국가 연합을 이끌어 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의장은 연임이 가능하기에 통상의 경우 한 번 의장으로 추대된 후 큰 과실이 없다면 종신토록 의장직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 관례였다.
다섯 명의 왕들 중 가장 능력이 뛰어난 왕이 의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나이가 많은 인물이 의장이 되는 이 독특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미란 국가 연합의 의장이 가진 힘은 다른 왕들보다 조금 더 발언권이 강하다는 정도뿐이었다. 그렇기에 아직까지 별 말썽 없이 잘 유지되어 오고 있었다. 의장의 힘이 약하다는 것은 평상시에는 유리한 점이 많았지만 전시에는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기에 크라레스가 멸망했을 때,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30여 년쯤 전에 전시에는 모든 권력을 의장에게 집중시킨다는 법안을 통과시킨 바 있었다.
미란 국가 연합은 두 강대국 사이에 끼여 있어서 불리한 점도 많았지만 유리한 점은 더욱 많았다. 양대 대국의 사이에서 중개 무역만 해도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코린트의 경우 바다를 가지지 못한 내륙 국가였기에 모든 물자는 육로, 또는 운하를 통해 운송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란 국가 연합의 5개국 토란, 가므, 쟈렌, 스므에, 알렌 왕국 중에서 현재 미란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은 가므 왕국의 국왕 지크프리트 데 가므 3세였다. 가므 왕국의 수도는 마로니카라는 아름다운 호반 도시였다. 그곳에 단 한 번이라도 가 본 사람이라면 호수 옆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규모의 왕궁을 아마 죽을 때까지 기억하게 되리라. 미란 국가 연합 자체가 무역을 통해서 모두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기에 각각의 왕궁들의 규모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장엄하고 호화찬란했기 때문이다.
성내의 수많은 문들에는 최소한 두 명 이상의 근위병들이 붉은색과 금은색의 수실을 사용한 호화로운 복장으로 창을 든 채 경비를 서고 있었고, 복도를 쭉 따라가면 좌우 양쪽에 아름다운 그림이나 조각물들이 빈틈없이 배치되어 자신들의 부를 자랑하는 듯했다. 수많은 방들과 복도가 얽히고설켜서 처음 와 보는 사람이라면 안내자 없이는 길 잃어버리기 십상인 곳이었다. 또한 5개국에서 엄선한 기사들로 이루어진 의장 직속의 라이오네 기사단이 똬리를 틀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각국에서 네 명씩, 제1기사를 제외한 랭킹 2위부터 5위까지의 기사들이 모인 집합체가 라이오네 기사단이었다. 겨우 20대만이 생산된 근위 타이탄 라이온을 지급받게 되는 이들 라이오네 기사단은 사실상 근위 기사단이나 마찬가지였고, 대우 또한 그러했다. 대개의 국가들의 경우 타이탄을 전쟁 도구 정도로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이곳 미란 국가 연합은 조금 달랐다. 50년 전에 한참 이름을 떨치던 매우 고명한 조각가였던 리카르도 파바네가 외장 장갑을 설계했다고 전해지는 라이온은 전쟁에 사용하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외형을 치장하는 데 금과 은, 그리고 보석까지 사용된 라이온은 거의 예술품에 가까웠다.
미란 국가 연합의 의장을 만나러 가게 되면 거대한 접견실 좌우에 그날 비번인 여덟 명의 기사들이 놔두고 간 여덟 대의 라이온을 볼 수 있다. 이게 자신들이 돈이 많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라고 욕하는 인물들도 있었고, 접견실 좌우에 그 거대한 쇳덩어리를 세워 둬서 상대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유치한 술수라고 욕하는 인물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외형과 강력한 존재감에 자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대부분이 미란 국가 연합의 국민들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지름 3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원형 탁자를 사이에 두고 다섯 명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원형 탁자 위에는 토란, 가므, 쟈렌, 스므에, 알렌 왕국을 합해 놓은 길쭉한 형태의 미란 국가 연합이 상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종이 위에 그린 것이 아니라 탁자에 파놓은 형태였기에 그렇게 정밀하지는 못했다. 이 원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다섯 명이 현재 미란 국가 연합을 이끌어 가는 왕들이었다. 그들은 뭔가 큰 일이 벌어졌을 때는 이렇듯 서로가 같은 위치임을 상징하는 원탁에 둘러앉아 회의를 벌이곤 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습니다, 의장. 이제 단안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말에 의장이라 불린 사내, 즉 가므 왕국의 국왕 지그프리트 데 가므 3세는 주위를 천천히 돌아본 후 힘주어 말했다.
“본 연합은 여태껏 모든 결정을 다수결로써 집행해 왔소. 그렇기에 지금 본 연합이 처한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겠군요. 그렇지 않소?”
“그렇습니다.”
“그럼, 자네가 정리를 좀 해 주겠나? 다수결을 하기 쉽도록.”
“예. 첫째, 코린트와의 동맹입니다. 그리고 둘째 코린트를 막기 위해 크루마와 동맹을 맺는 것이죠. 셋째가 있다면 좋겠지만……”
어느 정도 간단명료하게 정리가 되자 가므 3세는 입을 열었다.
“좋아. 자네들도 알다시피 첫째 안건을 선택한다면 크루마는 멸망할 수밖에 없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본 연합은 거대한 코린트 제국의 내부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지. 아마도 몇 년 지나지도 않아 본 연합은 코린트에 흡수될 것이네.”
“코린트가 동맹국을 집어삼킬 수 있을까요? 그리고 동맹을 맺을 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본 연합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정서를 받아 낸다면 어떻겠습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국가 간의 일에서 약정서 따위는 휴지 조각에 불과해. 약정서를 지키도록 위협할 만한 힘이 본 연합에 있다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그건 무의미하지. 얼마 전에 코린트 연방에 소속된 작은 왕국, 트루비아가 멸망하는 것을 보고 자네들은 느낀 점이 없었나? 지금 현 시점에서 코린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나라는 하나도 없어.”
“그렇다고 크루마와 손을 잡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코린트는 곧장 본 연합에 대군을 투입해 올 것입니다.”
“크루마의 황제에게 그것을 타진 중이야. 만약 서로 동맹을 맺게 된다면 어느 정도의 군사력을 지원해 줄 수 있는지 말일세. 본 연합의 군사력은 겨우 10개 보병 사단, 4개 기병 여단이다. 거기에 4개 용병 사단까지 합해 봐야 코린트와 상대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도 해 볼 수 없는 수준이지. 하지만 만약 크루마 쪽에서 그에 준하는 병력을 파견해 준다면 일단 전쟁 억지는 될 수 있을 듯도 해.”
“만약 전쟁 억지에 실패한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된다면 본 연합은 두 강대국의 전쟁터가 될 겁니다. 아무리 본 연합이 정격 출력 이상의 타이탄 123대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기사단의 질이나 수에서 도저히…….”
“그렇다고 크루마가 멸망하도록 놔둘 수는 없지 않겠나? 코린트의 손을 들어 준다고 하더라도 코린트는 본 연합에 동맹군 파병을 요청해 올 테지.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걸 거절할 입장은 못 돼. 크루마가 무너진 후에 그걸 빌미로 시비를 걸어 올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동맹군 파병이 현실로 들어난다면 크루마가 선제공격을 가해 올 수도 있어.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어쨌든 이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비껴갈 수 있는 길은 없다네. 알겠나?”
쟈렌의 왕이 의장의 말에 한숨을 쉬며 푸념을 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군요. 어떻게 해서든지 두 국가의 전쟁을 막아야 합니다. 알카사스에 중재를 요청해 보시지 그러십니까?”
“그것도 해 봤다네. 하지만 알카사스는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대량의 군수 물자를 팔아먹을 궁리만 하고 있어. 30년 전의 크로나사 대전 이후 그렇게 대규모의 전쟁이 없었다는 게 그들로서도 문제겠지.”
“하지만 본 연합의 경우 알카사스에서 타이탄을 전량 들여왔지 않습니까? 로메로, 노리에, 타이거, 라이온. 모두 다 알카사스에 의뢰해서 제작 또는 구입한 것들인데요. 그것들을 장만한다고 본 연합에서 알카사스에 준 금(Gold)은 막대한 양입니다.”
“어쩔 수 없지. 모두들 자국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일세. 오늘 저녁에 크루마에서 전권대사(全權大使)가 오기로 되어 있네. 자네들도 동석할 텐가?”
“일단 그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제 서서히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입니다.”
밝은 적색이 주를 이루는 비단 제복에 금색 수실을 이용해 멋을 더한 화려한 복장. 거기에다가 금과 은, 보석이 수놓아져 있는 보검까지 허리에 찬 것이 라이오네 기사단의 정식 복장이었다. 만약 이런 복장을 하고 시내를 돌아다닌다면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될 듯도 하겠지만, 왕궁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왕궁의 문을 지키는 경비 무사들조차도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풍요로운 미란 국가 연합이었기 때문이다.
왕궁의 아침은 7시에 시작된다. 7시에 경비 무사들의 교대식이 벌어지고 있을 때 궁녀들은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고, 정확히 8시가 되면 각 식당에서 무사들이 모여 식사를 하게 된다. 물론 왕족들이나 지체가 높은 양반들은 침실에서 식사를 하게 되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때 식사가 각 방에 배달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또 그날 대기했던 2개 조의 라이오네 기사단 기사들이 국왕의 접견실 좌우에 네 대씩의 타이탄들을 정렬시키는 것도 7시 정도다. 타이탄을 반납한 기사들은 이틀간 자유 시간을 얻게 되고 자유 시간을 즐긴 기사들은 앞으로 사흘간의 근무를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5일 중에 3일을 일하게 되는 이 순번이 언제 정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모두들 예전부터 그래왔다는 말로 넘어가는 걸 보면 매우 오래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지미 크로스비는 성의 한쪽 구석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근무의 마지막 날은 야간 근무를 하는 것이 관례였기에 밤을 새웠다. 하지만 그는 오늘 아침 부족한 잠을 만회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는 서둘러서 기사단 제복을 한곳에 벗어 놓은 후 옷장에서 새 옷을 꺼내 입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옷을 벗어서 정해진 곳에 놔두면 하녀가 와서 세탁을 한 후 다림질까지 깨끗하게 해서 옷장 안에 넣어 두게 된다.
그는 시민들이 보통 즐겨 입는 옷을 입은 후 짧은 단검을 옷 속에 감춘 후 서둘러서 밖으로 나갔다.
이곳 미란 국가 연합은 코린트와 크루마라는 양 대국의 사이에 위치한 만큼, 많은 양의 화물 외에도 수많은 여행자들이 거쳐 가는 교통의 요충지요, 관광지였다. 오래전부터 미란 국가 연합의 국왕들은 여행객들이 뿌리고 지나가는 돈의 액수가 상당하다는 것에 착안하여 일찍부터 수많은 관광 도시들을 개발해 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요양을 한다든지 관광을 위해 이곳을 들르는 인구가 증가 추세에 있었다.
미란 국가 연합에서는 관광지의 평화로움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될 수 있다면 무장을 한 채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또 엄청난 돈 덕분에 막대한 군사력까지 보유하고 있으므로 몬스터라든지 산도적 따위는 애당초 말살시켜 버려 매우 평화로웠다. 간혹 여행객들이 자신들의 무장 때문에 국경 경비대원들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우호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만약 자신의 검 따위를 모포 같은 것으로 돌돌 말아서 등에 지고 다니지 않는다면 아예 국경 통과가 되지 않는다는 데야 그들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지미 크로스비는 서둘러 말을 몰아 목적지로 달려갔다. 그가 달려가는 길은 대부분의 주요 도로가 그렇듯 시멘트와 돌을 이용해 잘 포장되어 있었다. 한 시간 반쯤 달려 목적지 부근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일부러 말에서 내려 포장되지 않은 흙길로 말을 걷게 하면서 조용히 끌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