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는 우선 자신에게로 할당된 방으로 간 후 뜨끈한 물에서 목욕을 하면서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그런 후 그녀가 목욕을 하는 동안 치레아에서 긴급 수송되어 도착해 있는 자신의 옷을, 옷과 함께 도착한 세린의 시중을 받으며 입었다.
“그동안 잘 지냈냐? 괴롭히는 녀석은 없었어?”
“아뇨, 주인님. 이곳에 비해 치레아는 아주 살기 좋은 곳이에요. 훨씬 따뜻하고…….”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왜 황제는 여기서 계속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 치레아나 스바시에의 왕궁이 여기보다는 훨씬 더 호화로운데 말이야. 검을 다오.”
“예, 주인님.”
그녀는 세린이 건네는 검을 허리에 찬 후 밖으로 나왔다. 더 이상 일행들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널찍한 방에서 모두들 목욕을 했는지 뽀송한 얼굴로 새 옷을 입고 있었다. 파이어해머는 맞는 옷이 없자 대충 자신에게 맞는 어린아이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게 체형에 잘 맞지 않았기에 거북한 부분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모두들 말쑥하군. 이제부터 치레아로 가기로 하지. 아버지도 함께 가세요. 거기서 한 이틀 머물고 다시 돌아올 거예요.”
“뭐? 갔다가 올 거라면 뭐 하려고 그 먼 곳에 가겠다는 거야?”
“예, 좀 할 일이 있어서요. 파시르 자네도 함께 갈 거지?”
“그러죠.”
“말 타고 갈 거냐?”
“아뇨, 마법진으로 곧장 그리로 갈 거예요.”
아들의 말을 들은 아르티어스는 히죽 미소 지으며 파이어해머에게 말했다.
“자네도 갈 거지?”
그 말에 파이어해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아래위로 휙휙 소리가 나게 흔들며 답했다.
“물론이죠, 헤헤.”
치레아로 돌아간 다크는 일단 자신의 타이탄 도로니아와의 계약을 종료시켰다. 도로니아는 처음부터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 주인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음 순번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안드로메다 때문인지 모르지만 순순히 계약 종료에 찬성했다. 그리고 다크는 자신을 대신해서 총독 노릇을 하고 있던 카알 폰 카슬레이 백작에게 도로니아를 인계했다. 카슬레이 백작은 자신의 타이탄 밀레토레와 계약을 종료한 후 월등히 뛰어난 타이탄인 도로니아와 계약을 맺고는 엄청나게 기뻐했다. 뛰어난 연주자들이 보다 더 좋은 악기를 원하듯 기사들도 더욱 뛰어난 타이탄을 원하기 때문이다.
“자네는 저 타이탄을 가지게. 내가 약속했던 녀석이야.”
“하, 하지만 저런 걸 받아도 될지…….”
“아니야. 내가 그냥 주겠다는 것이 아니고 자네를 제2친위 기사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거야. 이곳에 있으면서 검술도 수련하면 좋지 않나? 떠돌이 용병 기사가 되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좋을 거야.”
“감사합니다, 공작 전하. 이 은혜 잊지 않고 충성을…….”
“이봐, 그 말이 좀 틀렸어. 자네가 한동안 충성을 바칠 상대는 내가 아니라 저쪽에서 헤벌쭉거리고 있는 카슬레이 백작이야. 저 녀석이 한동안 여기 총독이 될 거거든.”
“예?”
“나는 내일 이곳을 떠날 거야. 몇 가지 일이 있어서 말이지. 자네는 빨리 저 녀석과 계약을 맺은 후 우정을 쌓아 나가는 것이 좋겠지. 한 두어 달 후에 만났을 때는 저 녀석과 좀 더 친숙해져 있기를 바라네.”
“예, 아, 알겠습니다. 그럼.”
파시르는 대충 인사를 한 후 갑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타이탄을 향해 달려갔다. 파시르도 이런 식으로 타이탄을 주는 것이 어느 정도로 파격적인 대우인지 잘 알고 있었다. 용병 기사로 떠돌이 생활을 하기 전에 그 또한 부푼 꿈과 높은 이상을 가지고 정규 기사단에 소속되어 수련을 쌓았던 무인이었기 때문이다. 크라레스가 아무리 요 근래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기로는 총 106명의 그레듀에이트에 타이탄 97대, 그것도 정규급 이상의 출력을 가진 타이탄은 29대뿐인 약소국이었다. 물론 나중에 국력을 더 키워 나간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현재로 봤을 때는 형편없는 전력을 소유한 국가였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정규급 출력을 가진 타이탄을 자신에게 줬으니 엄청나게 감동했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파시르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사실상 크라레스의 전력은 치레아와 스바시에를 병합한 후 최고조를 달리고 있었다. 그 두 곳에서 포로로 잡은 거의 180여 명이나 되는 그래듀에이트들의 세뇌 작업이 끝나가고 있었고, 노획한 타이탄들을 이용해서 50여 대의 신형 타이탄이 대량 생산되었다. 그것도 출력 1.3인 녀석들만. 현재 크라레스의 전력은 새로 포섭된 기사를 포함한다면 기사 총원 450여 명, 그리고 타이탄 178대였다. 숨겨진 전력인 유령 기사단이 차지한 정규급 타이탄이 80대인 것을 안다면 그 누구도 크라레스가 약소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살라만더 기사단
희뿌연 빛이 사라지는 순간, 거대한 영구 마법진 앞에 나열해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마법진 위에 크라레스에서 오기로 되어 있는 동맹군 선발대 3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마법사나 되는 듯 두터운 로브(Robe)를 걸치고 있었는데, 워낙 깊게 눌러쓰고 있어 얼굴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이 나타나자 기다리던 사람들은 일순 흠칫했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욱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는지 그들 중의 한 명이 달려 들어오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어서 오십시오, 동맹군 여러분들.”
그 사람은 우글우글 서 있는 사람들 모두가 로브 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어서 대충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광범위하게 인사를 건넸다. 상대가 인사를 건네 오자 그들 중의 한 명이 약간 앞으로 나서며 정중하게 답례를 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가까이서 보니 40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믿음직스러운 장년의 사내였는데 바로 그가 크루마 파견대 부대장(副隊長) 발칸 폰 크로아 백작이었다.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을 배출한 크로아 가문은 크라레스에서 대단한 명문이었다. 그렇기에 그 명문의 일족답게 크로아 백작의 답례는 예절에 어긋남이 없었다.
동맹군을 파견하기 전에 크라레스 지휘부는 파견군 사령관을 선정함에 있어 가장 골머리를 앓았던 부분이 이거였다. 다크는 실력에 있어서는 나무랄 곳이 없었지만 귀족층이 익혀야 할 필수 과목이라고 할 수 있는 궁중 예절은 완전히 빵점이었고, 말투 또한 거칠며, 또한 너무 어려 보이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이 ‘가짜’였다. 가짜는 될 수 있는 한 말투나 예절 등 모든 것을 확실히 마스터 한 인물을 세우고 그를 뒤에서 다크가 조종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서로 간의 인사가 끝난 후, 크로아 백작은 자신의 일행들이 묵을 숙소를 마련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좀 더 상층부의 인사와 만나기를 청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다크는 크로아 백작만이 들을 수 있도록 음성을 전달하는 고도의 기술인 어기전성(御氣傳聲)을 통해 지시를 내렸고, 크로아 백작은 그대로 따라서 격식에 맞게 상대를 향해 전달했다.
거의 10여 명 이상이 모여 앉은 널찍한 테이블 위에는 넓은 지도가 펼쳐져 있었고, 그 위를 이리저리 가리키며 작전 설명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현재 저희들이 구상하고 있는 작전입니다, 공작 전하.”
물론 이들은 대 크루마 제국의 높은 직위에 있는 무사들이었기에 로니에르 공작을 향해 극존칭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크루마에 비했을 때 크라레스는 형편없는 소국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크라레스가 파견해 주기로 약속한 전력은 엄청난 것이었지만 실지 그들의 타이탄을 직접 보고 검사해 본 것은 아니었고, 또 그것이 그들이 장담한 대로 강력한 타이탄이라고 하더라도 크루마보다는 훨씬 약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상황이 바뀌기 전까지 전하의 기사단은 미란 국가 연합에 배치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죄송하지만 이번에 가지고 오신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알기 쉽게 설명 드리면, 제가 가지고 있는 본국의 최신형 1.5짜리 한 대, 1.3짜리 40대 그리고 1.0짜리 23대라고 생각하면 과히 틀리지 않을 겁니다. 오늘은 절반만 왔고, 내일 나머지가 도착할 겁니다. 그리고 3차분 1.3짜리 8대는 15일 후에나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오, 1.3이면 대단하군요. 그게 크라레스의 차세대 주력 타이탄입니까?”
“예.”
“대단하군요. 크라레스가 코린트에게 짓밟혔을 때 저희는 이제 크라레스가 더 이상 일어설 힘이 없다고 판단했었는데, 그 정도의 저력을 가지고 계시다니 놀랐습니다. 오래지 않아 역사의 전면으로 다시 등장하실 날이 오겠군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크라레스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대국이 아니었습니까? 이번 코린트 대전만 잘 마무리 지어진다면 크로나사 평원을 되찾으시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코린트를 반드시 이겨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최신형 타이탄을 이렇게 대량으로 보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다는 말을 우선 드리고 싶습니다. 자, 그럼 일단 여기를 좀 봐 주십시오.”
지도의 한 지점씩을 짚으며 그는 말했다.
“지금 현재 첩자들이 보내오는 적 기사단 및 군대의 위치입니다. 아무래도 상대는 본국을 점령한 후, 미란 국가 연합이 그 중간을 막고 있어 여러모로 곤란한 점이 많이 생기기에 미란 국가 연합까지 점령해 버릴 것 같습니다. 우선은 본국이 매우 강성하기에 미란과 본국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보다는 미란을 자신들 쪽으로 끌어들이려고 하겠지만, 결국에는 미란도 코린트에 점령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미란 쪽에서도 은밀히 본국과 행동을 함께 하겠다며 동맹군 파병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 때문에 저희들은 미란 국가 연합에 대군을 파병하여 그곳에서 코린트를 막을 계획입니다.”
“미란 국가 연합의 전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10개 보병 사단, 4개 기병 여단, 4개 용병 사단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타이탄 123대. 모두 다 정규급 이상의 출력입니다. 하지만 코린트를 상대함에 있어 그렇게 대단한 전력이라고 하기는 어렵죠. 코린트에서 크루마로 들어오려면 수십 개의 길이 있지만 많은 군대가 이동하기 위해서는 세 개 정도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를 맡아서 방어해 주십사하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그는 세 개의 길들을 하나하나 짚으면서 상세히 설명을 시작했다.
“최신형 타이탄 미노바를 다량 보유한 코린트의 주력 금십자 기사단이 이동, 집결 중인 이곳 중앙은 본국의 제네리아 기사단과 근위 기사단의 일부가 막을 것입니다. 그리고 측면에 집결 중인 은십자 기사단의 정면에는 본국의 정예 지발틴 기사단이 위치하게 됩니다. 공작 전하의 기사단이 막아야 할 곳은 이곳이죠. 코린트는 아직까지 철십자나 동십자 기사단을 움직이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코린트는 낙승을 예상하는 만큼 근위 기사단의 움직임도 없습니다. 그 때문에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 엘프란 기사단과 근위 기사단의 일부는 투입하지 않을 계획입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의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예, 코린트의 남쪽에 서서히 집결 중인 코린트의 동맹군들입니다. 현재까지 집결된 군세는 7개 보병 사단, 3개 기병 여단급입니다. 아직까지 동맹국이 지원해 준 타이탄의 수는 확실히 파악되지 않았지만 적으면 50대, 많으면 1백 대 정도일 것입니다.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지만 정보국의 분석으로는 1백 대를 상회할 가능성은 거의 없답니다. 물론 최악의 경우 1백 대가 넘는 적 타이탄과 교전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에 대비해서 수십 대의 타이탄을 증원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그것들도 본국의 기사단은 아니고 동맹군들입니다. 강력한 코린트의 중앙군들은 저희가 막아 낼 테니, 코린트의 동맹군들은 다섯 개 동맹군 중에서 최대의 전력을 이끌고 오신 전하께서 동맹군 전체를 인솔해 막아 주시면 좋겠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정작 미란의 기사단은 어디에 투입되는 겁니까?”
“예, 미란 국가 연합의 기사단들은 원래 자국의 영토니까 지리에 밝을 것은 당연하겠죠. 저희들이 막는 길 이외의 길로 이동을 시작하면 그들이 막을 겁니다. 그리고 본국에서는 기사단 외에 8개 보병 사단과 4개 기병 여단을 파병할 예정입니다. 저희들의 계획은 상대가 아직 철십자와 동십자 기사단을 투입하기 전에 금십자와 은십자 기사단을 괴멸시킨다는 것입니다. 코린트의 전력을 각개 격파(各個擊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야 합니다. 만약 그게 힘들다면 전쟁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참, 이리 오실 때 여분의 병력을 가지고 오지 않으신 걸로 아는데,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정찰대로 쓸 그래듀에이트 20명 정도, 그리고 마법사 10명 정도를 지원해 주십시오.”
“그 정도로 충분하겠습니까?”
“토지를 지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상대의 군대를 막는 것뿐인데 더 이상의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면 언제 출발하실 생각이신지?”
“내일 후발대가 도착하는 대로 출발하죠. 혹시 이동용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 하루가 급한데 그 정도는 해 드려야겠지요. 그리고 내일 말씀하신 20명의 기사와 10명의 마법사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다음 날 다크가 거느리고 있는 유령 기사단 크루마 파견대의 나머지가 도착했고, 크루마 기사단에서 약속한 증원대도 도착했다. 크로아 백작은 합류한 크루마 기사들에게 감사를 표시한 후 마법진을 통해 곧장 미란 국가 연합의 국가들 중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국가인 알렌 왕국으로 향했다.
알렌 왕국은 미란 국가 연합의 모든 국가가 그러하듯 매우 부유한 상업 국가였다. 알렌 왕국은 동쪽으로는 스므에와 산악 국가 스완 왕국, 북쪽으로는 쟈렌, 서쪽으로는 코린트 제국, 남쪽으로는 아르곤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엄청난 교통의 요지를 차지하고 있는 국가였다. 물론 뛰어난 외교전이 없었다면 일찍이 어느 한쪽에 병합되고 말았겠지만 알렌 왕국의 국왕은 미란 국가 연합이 탄생하기 전에 매우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불행한 사태를 막아 내는 데 성공했다.
이런 약소국의 경우 뛰어난 외교적 센스가 있다면 이렇듯 강대국들의 사이에서 살아남게 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상업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발자국만 실수를 하게 된다면 강대국들 사이의 전쟁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동 마법을 통해 먼저 알렌 왕국의 국경 부근의 도시에 도착한 마법사가 남은 일행들이 도착하기 쉽도록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초장거리 이동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나 장거리 이동이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 이동 거리보다 이동 인원이 문제였다. 거의 1백 명에 가까운 사람을 움직여야 했기에 그만큼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려면 아주 넓은 공터가 필요했다.
거대한 마법진을 통해 파견대가 도착했을 때 수백 명의 인파들이 그들을 성대하게 맞이했다. 한쪽에서는 50여 명은 족히 되는 악사들이 모여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고, 광장에 그려진 마법진 위에 모습을 드러낸 맹방의 전우들을 위해 수십 명의 소녀들이 바구니에서 꽃잎을 꺼내 뿌려 댔다.
시민들이야 로브 자락으로 몸을 숨긴 약간 복장이 수상해 보이는 인물들을 향해 열열이 환호했지만, 군대라는 조직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습을 드러낸 맹방의 전우들을 보며 미간에 주름살을 긋고 있었다. 마법사나 여행자들도 아닌 주제에 저토록 두터운 로브로 몸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고, 사람들 앞에서도 로브의 모자를 벗지 않는 예의에 어긋나는 무례한 행동을 했다. 거기에다가 명문의 기사들이라면 의례히 로브에 가문을 표시하는 문장이라든지, 소속 부대를 나타내는 문장 등등 각종 문장들을 붙여 놓기 마련이다. 물론 그런 것들을 붙여 놓으면 멋이 있기도 했지만, 사실 이 시대에는 그 문장들을 보고 상대의 출신 성분과 그 지위를 알게 해 주어 상대방으로 하여금 실수하지 않게 하는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만약 적지 어느 곳에서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라면 모르겠지만 이곳은 동맹군을 환영하는 환영식장이었고,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공식적인 복장을 해야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 것을 잘 아는 인물들이 문장을 살펴보기 위해 이들을 자세히 바라보면 오른쪽 가슴 윗부분에 자그마한 문장이 마지못해 하나 붙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 도마뱀 문장. 그것은 바로 불의 상급 정령 살라만더를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문장을 가진 기사단이 크루마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곧 동맹군을 파견한다고 있는 생색은 다 내고는 급히 서둘러 편성한 엉터리 기사단을 보내 왔다는 것과 같았다.
“모두들 서둘러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여기 지휘관이 누구신지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상대의 정중한 말에 크로아 백작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접니다.”
“시간이 있으시다면 함께 대화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시간은 그렇게 많이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보다도 먼저 저희들이 주둔하게 될 곳을 안내해 주십시오. 주변 지형 정찰도 해야 하고 할 일이 많습니다.”
“아, 예. 매우 듬직한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기사단 주둔지는 반나절 정도만 말을 타고 이동하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30킬로미터만 더 나가면 중앙 기사단 제8전대가 주둔 중이죠. 그리고 거기서 50킬로미터 앞이 국경이고 말입니다. 참, 그 전에 저하고 상의할 일이 있으니까 따라오세요. 이봐, 자네는 기사님들 이동하실 수 있도록 빨리 준비를 해 주게.”
그 말을 들은 젊은이는 약간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상관의 지시가 그러하니 서둘러서 마구간으로 뛰어갔다. 원래는 오늘 이곳에서 성대한 환영 무도회를 열고 다음 날 주둔지로 출발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상대는 정식으로 인사를 건네 왔다.
“저는 이곳 도시를 책임지고 있는 시장 로베르 카지마트라고 합니다. 혹시 술을 하십니까?”
“아니요.”
카지마트 시장은 술병과 술잔을 꺼내서는 한 잔 따른 후 서둘러 한 모금 마셨다. 그런 식으로 끓어오르는 노기(怒氣)를 약간 가라앉힌 후에 그는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그렇게 대단한 명문 귀족도 아니고, 권력을 가진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 처지에서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당신에게 따지고자 하는 것은 이겁니다.”
“말씀하시죠.”
“예, 그럼 말씀드리죠. 저도 예전에 군대에서 근무를 해 봤던 사람입니다. 바로 옆에 있는 크루마 제국의 기사단 문장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귀하가 달고 있는 문장은 제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문장입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아무리 당신들의 전쟁이 아니라고 그렇게 급조한 기사단을 보낼 수 있습니까? 그것도 겨우 1백 명도 안 되는 인원을 가지고 말입니다. 이건 동맹국인 알렌 왕국을 모욕하는 처사가 분명합니다.”
카지마트 시장의 분노는 어느 정도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원래가 정상적인 기사단이라면 열 대의 타이탄을 보유했을 때 최소한 열다섯 명 정도의 그래듀에이트를 가진다. 그리고 아직 그래듀에이트가 되지 못한 수련 기사나 기사들 열다섯 명 정도가 포함된다. 이런 수준의 두터운 기사층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그 열 대의 타이탄은 최적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야만 타이탄을 몰고 있는 기사가 은퇴를 하거나 사망했을 때 재빨리 그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각종 정찰 등을 통해 타이탄을 적재적소에 투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런 통상적인 개념으로 봤을 때 90명 남짓한 이 기사단이 보유해야 할 타이탄의 수는 많아봐야 30대 정도가 고작이었다.
“알렌 왕국의 접경 지역에 상대방의 10만에 가까운 대군과 수십 대가 넘는 타이탄이 집결 중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보는 없습니다. 수많은 여행객이나 상인들이 소문을 퍼뜨리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겨우 30여 대의 타이탄…, 엠페른 기사단 8전대하고 합류해 봐야 45대를 채울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방을 막아 낼 수 있다고 여기에 온 겁니까? 이런 식이라면 아예 코린트에 두 손을 드는 편이 시민들을 위해 훨씬 더 좋을 겁니다. 이번 전쟁은 귀국 때문에 벌어지는 것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상대의 말에 크로아 백작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가 이번 전쟁은 코린트와 크루마 사이의 갈등에 의해 벌어지는 전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재수 없게 중간에 낀 것이 미란 국가 연합인데, 미란이 크루마의 손을 들어 준 이상 크루마는 전력을 다해서 미란을 도와줘야만 했다. 만약 미란이 뚫린다면 그다음은 곧장 크루마니까 미란의 군세가 아직 튼튼할 때 협동 작전을 벌이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었다.
“시장님은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군요.”
“오해? 무슨 오해를 한단 말이오?”
“제가 가지고 온 기사단은 본국에서도 최정예급입니다. 그리고 64대의 타이탄들의 성능도 상당히 좋은 편이고요.”
“64대라고 하셨습니까?”
“예, 정찰대로 30명을 데려왔을 뿐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수십 명의 기사들이 또 도착할 겁니다. 저희들은 선발대일 뿐이지요. 아마도 크루마에서 지시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우리들과 동행이 아니니까 따로 숙소를 할당해 주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을 겁니다. 참, 나중에 우리들과 같은 문장을 달고 있는 녀석들이 도착한다면 주둔지에 빨리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만!”
천천히 말을 타고 주둔지로 향하면서 크로아 백작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본 후 낮은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일이 더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거의 혼잣말에 가까울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는데도, 그 옆에서 말을 몰고 있던 백작과 같은 복장에 로브의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인물이 그걸 들었는지 느긋한 어조로 답해 왔다.
“왜? 아까 그 영감한테 불려 가더니, 무슨 소리를 들었는데 그러나?”
“예, 여기 있는 일반 시민들이 모두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코린트 쪽에서 병력을 끌어 모으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런 식의 무력시위가 계속된다면 시민들이 동요하게 되죠. 아마도 코린트는 급히 전쟁을 치를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그건 시간이 말해 줄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