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자리에 앉으시지요.”
모두들 대충 인사를 끝내고 자리에 앉자 크로아 백작은 장중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이곳 알렌 왕국에 투입된 타이탄의 수는 엄청난 수입니다. 엠페른 기사단 6전대가 거느린 로메로 14대, 뮬러 후작의 노리에 4대, 로메로 8대, 무터 백작의 로메로 8대, 칸텔 백작의 로메로 7대, 작센 백작의 노리에 1대, 로메로 4대. 그리고 제가 가지고 온 신형 41대와 로메로 23대. 총 110대 중에서 알카사스에서 생산된 것이 69대나 되는군요. 그렇다면 크루마의 동맹군은 알카사스인가요?”
어느 정도 농이 섞인 어조에 모두들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타이탄이 알카사스의 수출용 타이탄인 것은 모두들 자신의 소속 국가가 어디인지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현재 최신 정보로는 전면에 99대의 타이탄이 집결 중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곳에 집결된 연합군의 타이탄도 모두 정규 출력 이상이므로 군사적으로 매우 우위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통일된 지휘 체계가 세워져 있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겠죠. 이번에 경들을 모신 이유는 연합군의 지휘자를 선임하기 위해서입니다. 혹시 의견이 있으신 분이 계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뮬러 후작이 주위를 슬쩍 둘러본 후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크루마에서 이곳에 오기 전 귀국에서 투입한 전력을 듣고 솔직히 조금 놀랬었습니다. 64대의 타이탄을, 그것도 귀국에 타이탄이 별로 많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렇듯 많은 타이탄을 투입한 것은 대단한 모험이겠죠. 본관은 로니에르 공작 전하께서 군을 지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귀국에서는 이번 전쟁에 흥망의 도박을 거신 모양인데, 타이탄 투입 규모로 봤을 때 그 지휘관 또한 그에 걸맞은 인물을 보냈을 거라고 본관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본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장 많은 병력을 투입한 쪽에서 지휘를 하는 것이 별 무리가 없겠지요.”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부족한 능력이지만, 제가 그 자리를 맡도록 하겠습니다. 부관, 지도를 가져와라.”
부관이 큼직한 지도를 펼쳐 놓은 후 밖으로 나가자 크로아 백작은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적의 병력은 계속 증원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조만간에 우리들의 전력을 훨씬 상회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뮬러 후작께서는 동맹 4개국의 기사단을 모두 거느리고 이곳에 주둔해 주십시오. 혹시나 퇴로가 막힌다든지, 아니면 적이 너무 강대하다면 아르곤이나 오실롯 왕국으로 후퇴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크라이슨 백작.”
“예.”
“귀하가 거느리고 있는 6전대는 이곳에 주둔해 주십시오. 만약 엠페른 기사단에서 증원이 있더라도 모두 여기에 배치해야 합니다. 혹시 퇴로 차단 등 악조건을 당한다면 쟈렌 왕국으로 넘어가서 그곳에 주둔 중인 7전대와 합류해도 좋고, 아니면 그쪽이 막힌다면 우리들과 합류해도 좋겠죠. 중앙은 저희 살라만더 기사단이, 왼쪽은 뮬러 후작의 기사단, 오른쪽은 6전단이, 이렇게 세 곳에서 지키며 적의 동태를 파악하여 대처해 가는 것이 가장 유연성이 높을 것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공작 전하, 만약 상대가 현재의 전력에 머무른다면 이것은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적의 전력이 이쪽을 훨씬 상회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각개격파당하기 딱 좋은 배치입니다. 오히려 한 군데 뭉쳐 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후작 각하의 말도 옳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단일 국가의 군대가 아닙니다. 동맹국이죠. 이런 상태에서, 언제 적들이 침공해 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한 곳에 뭉쳐 있다가는 잘못하면 서로 간의 갈등만 심화되어 자멸할 수도 있습니다. 놈들처럼 사기 충천하는 상황이라면 몰라도 적의 군사력에 대해 심한 압박감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말썽의 소지가 다분히 있습니다. 그 점도 생각해 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서로 간의 간격은 50킬로미터. 30분이면 달려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모두들 여분의 기사와 마법사들을 정찰대로 내보내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게 좋을 듯하군요.”
무서운 쥐새끼들의 침입
국경 근처가 잘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다섯 명의 인원들이 지도를 펴 놓고는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모두들 여행자처럼 담요 대신으로 쓸 수 있을 만큼 두터운 로브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 국경은 이미 폐쇄된 지 며칠이나 지난 상태였기에 여행자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저곳인가?”
“예, 저곳이 국경이옵니다, 전하.”
국경이라고 해 봐야 다른 곳과 그렇게 크게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잘 포장된 도로 근처에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알렌 왕국의 검문소와 코린트 제국의 검문소는 1백 미터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었고, 두 곳 다 서너 명 남짓의 인원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양국을 관통하는 이곳 주 도로(主道路)는 하루에도 수천 명의 인원이 통과했기에 위법 물건 따위가 반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경비병이 수십 명씩 배치되었지만, 지금은 양국의 국경이 통제되어 더 이상 통행인이 없어지자 경비원의 수를 줄인 것이다.
“국경 치고는 너무 인적이 없는 것 같군. 녀석들의 최전선 기지는 어디지?”
“옛, 이곳에서 2킬로미터 정도 더 들어간 곳에 위치한 카라엔 요새이옵니다. 코린트는 이곳 국경 검문소보다는 카라엔 요새에서 검문을 한다고 여기 적혀 있사옵니다. 주둔 병력은 1개 여단 정도이옵니다.”
“카라엔 요새라. 그건 그렇고 정말 잘 포장된 도로군.”
“옛, 도로의 너비만 봐도 열 명의 중장 보병이 횡대로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이옵니다. 이렇게 넓은 포장도로는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아마도 기사단은 몰라도 병력의 90퍼센트 이상은 이곳 크라무스 대로를 따라 이동해 들어올 것으로 예상되옵니다.”
“맞는 말이다. 놈들의 병력이 많은 만큼 잔재주 부리지 말고 힘으로 밀어붙여 준다면 서로가 편하겠는데 말이야. 안 그런가?”
“옛, 전하.”
“좀 더 깊숙하게 들어가 보자.”
“예? 하지만 너무 위험하옵니다, 전하.”
“상관없어. 말은 여기다 세워 놓고 가기로 하지. 믹, 자네가 여기를 지키도록.”
“예, 전하.”
믹이라고 불린 사내는 다섯 필의 말을 돌보기 위해 남았고, 나머지 넷은 국경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이 달려가는 속도는 도저히 인간들이 낼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거의 시속 1백 킬로미터는 될 것 같은 엄청난 속도. 그들은 도로 위를 달리지 않고 국경 경비대를 피해서 국경을 넘었다.
“저곳이 카라엔 요새이옵니다.”
“상당한 규모로군.”
“옛, 전하. 이걸 쓰시지요.”
부하가 건네는 길쭉한 원통형의 막대기를 보며 다크는 물었다.
“어? 이게 뭔가?”
“예? 이걸 한 번도 보신 적이 없사옵니까? 망원경이라고 하는 것이옵니다. 멀리 있는 것을 보는 데는 그만이지요.”
“어떻게 쓰는 거지?”
“이렇게 해서 초점을 맞추면 되옵니다.”
부하는 슬쩍 원통의 길이를 늘였다 줄였다 하는 방법을 가르쳐 줬고, 다크는 부하가 가르쳐 주는 대로 늘였다 줄였다 하는 도중에 선명하게 보이는 위치를 잡을 수 있었다.
“오, 대단하군. 아주 잘 보이는데? 이런 물건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어.”
“흔히 사용되는 물건은 아니옵니다. 매우 고가의 물건인 데다가 구하기도 쉽지 않지요. 각국의 군대나 첩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걸로 아옵니다.”
“그래. 요새가 대단히 큰 규모로군. 하지만 군기가 그렇게 엄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보초병들끼리 웃고 떠드는 걸 보니 승리의 여신은 자신들의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야.”
“그럴 만도 하겠죠.”
“이거 가지고는 잘 모르겠는데? 조금 더 들어가 보자. 아니, 놈들이 집결 중이라는 바실리시에도 한번 가 보기로 하지. 얼마나 호화찬란하게 하고 있는지 한번 구경을 해 주는 게 예의 아니겠어?”
“전하, 아니 되옵니다. 만약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부하는 아차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상관의 검술 실력은 최고 중의 최고. 일이 잘못되더라도 그녀가 다칠 확률은 적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뭐야?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내가 어떻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야? 네놈은 그곳에 나를 능가하는 실력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묻자 부하는 일단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검술 실력 하나만으로 공작에 추대된 인물. 말로만 듣던 소드 마스터. 하지만 자신들이 직접 상관이 검 쓰는 것을 본 적도 없었고, 더군다나 상관을 아무리 자세히 봐도 뛰어난 검객에서 뿜어 나오는 그런 강인한 힘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이 봤을 때 입만 거친 예쁘장한 계집아이에 불과했기에 도대체가 신뢰성이 가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전하. 하지만 놈들의 기습을 당할 수도 있고, 마법사를 만날 수도 있사옵니다. 마법사의 기습 공격은 위험하옵니다, 전하.”
“헛소리 말고 가자.”
소녀가 먼저 달려가기 시작하자 그 부하들도 마지못해 그녀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