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기사 안드로메다의 첫 전투
로니에르 공작이 사령관으로 추대된 후에 그가 있는 살라만더 기사단은 알렌 왕국 방어군의 주력(主力)이 되었다. 중앙에 주둔한 살라만더 기사단을 보조하는 우익은 엠페른 기사단, 좌익은 연합 기사단이었다. 이렇듯 세 개의 기사단이 각기 떨어져서 주둔하다 보니 살라만더 기사단에는 다섯 명의 마법사들이 추가로 증원되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각 기사단, 그리고 각 기사단에서 파견한 정찰조로부터 지속적인 통신망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모든 정보를 살라만더 기사단에서 통합적으로 관리하게 되었기에 연합군의 식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살라만더에서 파견하는 기사단은 1이라는 숫자를, 엠페른은 2, 연합 기사단은 3이라는 숫자를 앞에 붙여 호칭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101이라면 살라만더 기사단 소속 제1정찰대라는 뜻이 되었다. 이렇듯 세 개의 기사단에서 연일 파견하는 정찰대의 수는 20개를 넘어서고 있었고, 그들로부터 적의 동태에 관한 정보는 끊임없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다크가 직접 상대의 진영에 들어가 정찰 활동이라는 미명 아래 거의 30명이 넘는 기사들을 학살하고 돌아온 후 이틀째부터 상대의 활동이 왕성해지기 시작했다.
“106매복조에서 적 발견. 다섯 명으로 추정. 아마도 정찰조인 듯합니다.”
“204조에서 적 발견. 다섯 명 정도가 국경 통과! 빨리 대책을 지시해 주십시오.”
“206조에서 적 발견. 세 명이 국경을 넘었답니다.”
“306조에서 적 다섯 명 발견. 국경 통과 중이랍니다. 대책을 지시해 주십시오.”
네 개의 통신용 마법진을 그려 놓고는 각기 한 명씩의 마법사가 붙어 앉아 있었다. 이들은 하루 2교대로 근무 중이었는데 쉴 틈 없이 저마다 상황을 외치기 시작했다. 지금 깔려 있는 정찰조가 20개 정도인 것을 감안한다면 딴 정찰조들도 적을 발견하고 통신을 보내오고 있을지도 몰랐다. 다만 그것을 수신할 마법사가 없기에 연결이 안 되는 것일 뿐.
이렇듯 한꺼번에 정찰조들을 발견했다는 것은 아마도 상대가 계획적으로 한꺼번에 투입한 것이 분명했기에 통신실을 지휘하고 있는 바지오 남작은 일순 난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각 정찰조에 전달. 교전을 최대한 회피하고 적을 감시하라. 그리고 자네는 이 사실을 사령관께 전하도록. 빨리.”
“예.”
곧이어 사령관인 크로아 백작과 마법사 소녀가 함께 들어왔다. 백작은 통신실에 들어서면서 외쳤다.
“예비 기사들을 출동시켜라. 그리고 각 기사단에서 타이탄을 소유한 기사들로 열 명씩 엄호 부대를 구성하여 파견하라고 전하라.”
“옛!”
크로아 백작의 지시를 받은 즉시 린넨 백작이 아홉 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재빨리 국경 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모든 기사단들은 국경에서 거의 80에서 1백 킬로미터쯤 후방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후속 부대가 국경에 도착하는 데는 거의 한 시간 정도가 경과되어 버렸다. 그동안에 마법사들을 거느린 상대의 정찰조들은 이쪽의 정찰조들을 찾아내어 각기 교전을 벌였고, 지원대가 도착할 때쯤에는 10여 명이 사망하고 20여 명 이상이 중상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자신이 도착했을 때는 상대는 이미 재빨리 후퇴하고 난 뒤였기에 뒷수습만 하다가 돌아온 린넨 백작은 곧장 사령관실로 들어갔다.
“놈들의 공격은 계획된 것이었사옵니다. 뷰 마나 포스의 주문으로 이쪽의 정찰대 위치를 파악, 정찰대만을 공격하기 위해 온 것이옵니다. 부상자들의 증언이나, 시체에 난 검상을 살펴봤을 때 상대방은 모두 그래듀에이트급들로 추정되옵니다.”
“자네가 달려갔을 때는 놈들은 이미 철수한 후였나?”
“예, 전하.”
“흐음, 보고에 의하면 다른 기사단에서 보낸 증원대도 마찬가지였다고 하더군. 놈들은 아마도 조만간에 전투를 개시할 생각일 거야. 그 전에 이쪽의 정찰조부터 손을 봐 두겠다는 계획이겠지.”
“어떻게 하실 계획이시온지?”
“일단 전방의 모든 정찰조들을 조금씩 후퇴시켜라. 그리고 각 기사단에 통보해서 각 정찰조는 다섯 명 이상의 규모를 유지하도록 전하라. 바실리시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것이 본대다. 그리고 오늘 가장 피해가 컸던 것도 본대다. 여덟 명 사망, 여섯 명 중상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당분간 증원이 있을 때까지는 크루마 쪽에 정찰을 맡길 수 없다. 크루마 본국에는 더 많은 기사와 마법사 증원을 요청해 놨으니 그들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살라만더 기사단에서 정면의 정찰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적 기사들과의 교전 가능성이 큰 만큼 마법사를 지원받을 필요 없이 기사들만 투입하기로 하겠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했다가 잘못되면 치명적인 전력 감소의 요인이 될 수도 있사옵니다.”
“그건 상관없다. 오늘부터 3일간은 자네가 20명을 이끌고 가서 정찰하도록.”
여기까지는 자신 있게 말한 크로아 백작은 소녀 쪽을 힐끗 봤다. 그러자 소녀는 일부러 눈을 부릅떠 보였고, 백작은 마지못해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통신을 위해 저 아이를 데려가라.”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한 린넨 백작이었지만, 상관의 황소고집을 꺾을 자신이 없었기에 할 수 없이 대답했다.
“예, 전하.”
20명이 넘는 인원이 말을 타고 사라지는 것을 보며 바지오 남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정석대로라면 좌우에 포진하고 있는 다른 기사단의 인원을 보충받는 한이 있더라도 타이탄을 소유한 기사들을 투입하는 것은 금기(禁忌)였다. 만약 타이탄을 소유한 기사를 몇 명씩 분산시켜 배치했다가 순간적으로 벌어질 수 있는 적의 병력 우위에 의해 죽거나 부상당하면 상당한 전력 손실을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이런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 저들은 여분의 기사를 단 한 명도 데려오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들을 투입했다가 놈들이 타이탄을 투입해 오면 어쩌려고…….”
저 멀리 국경선이 보이는 위치에 포진하고 있는 것은 이제 정찰조들이 아니라 살라만더 기사단의 4개 조였다. 정찰조들은 살라만더 기사단 10킬로미터 정도에 배치되어 있었다. 겨우 오늘 하루 동안에 크루마에서 지원받은 기사들의 태반 이상을 잃었기에 어쩔 수 없이 취해진 행동인 것 같이 보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놈들은 왜 안 오는 거야?”
“제발 좀 참으십시오, 전하. 너무 위험하옵니다.”
린넨 백작은 애가 타서 외쳤다. 원래는 그와 소녀는 4개의 정찰조 뒤에서 지원을 해 줘야 정상이었지만, 사실은 4개의 정찰조는 그들 두 명의 훨씬 뒤쪽에 포진하고 있었다.
“뭘 참아. 나는 충분히 참고 있어. 더 이상 참으면 먼저 화병으로 죽을 거 같아. 이봐, 린넨.”
“예, 전하.”
“나중에 전투가 벌어지면 말이지. 자네가 책임지고 할 일이 있어.”
“뭣이옵니까, 전하. 목숨을 다 바쳐…….”
소녀는 상대의 말을 끊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 목숨을 바칠 필요까지는 없고, 저 크루마에서 파견되어 온 녀석들을 모두 다 죽여라.”
“예? 그건 무슨 말씀?”
“절대로 증거를 남겨서는 안 돼. 아마도 코린트와 전투가 벌어진다면 내 타이탄을 써야 할 거야. 그렇게 된다면 크루마 쪽에서도 청기사의 존재를 알 위험이 있지. 내가 왜 타국 기사단들을 멀리 분산시켜 놨다고 생각하나? 다 그것 때문이야. 크루마에서 파견되어 나온 그 바지오라는 녀석은 코린트라는 거대한 적을 앞에 둔 상황에서도 사령관실을 도청하고, 본국 기사단을 감시한다고 열을 올리고 있지. 크루마도 이 전쟁이 끝나고 난 뒤를 생각하고 있는 거야.”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전쟁터에서는 누구나 죽을 수 있다. 알겠어? 하지만 우리가 했다는 증거는 없어야 한다. 그렇기에 자네에게 부탁하는 거야.”
“황공할 따름이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기필코 그들을 없애겠습니다, 전하.”
“자네 혼자서 힘들 것 같으면 몇 명 더 써라.”
“그래도 괜찮겠사옵니까?”
“뭐, 몇 명 정도야 상관없지. 빨리 해치우고 합류한다면 말이야.”
“그 점 주지시켜 놓겠사옵니다. 제가…….”
“쉿! 밤손님이 찾아왔다.”
그녀의 말대로 먼 곳에서 다섯 명의 그림자가 맹렬한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상대는 마법을 이용해서 이쪽에 매복하고 있는 사람이 두 명뿐이라는 것을 알고 망설이지 않고 접근해 왔다.
“저쪽에 한 패거리 더 있어. 자식들, 오늘 아침에 한바탕 휘저어 놨으니 밤에 배치되는 정찰조에는 정규 기사들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한 건 올리려고 드는군.”
“타이탄을 꺼낼까요?”
“아니, 놈들도 아직 안 꺼내고 있는데 벌써부터 꺼낼 필요는 없겠지. 봐! 녀석들 국경을 서둘러 넘어오는 꼴이 정말 멋지군.”
소녀는 비웃으며 급속히 거리를 좁혀오고 있는 상대를 바라보다가 앞으로 손을 쓱 뻗으며 외쳤다.
“아쿠아 에로우(Aqua Arrow)!”
그러자 수십 개의 가느다란 물줄기가 상대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뭔가가 앞쪽에서 급속히 날아오자 그들은 재빨리 회피 이동을 했다. 그중에는 뛰어오르는 사람도 있었고, 좌로, 우로 뛰어오르는 인물도 있었지만 엎드리는 인물은 없었다. 일단 기사들의 싸움은 검을 통한 것이었고, 검을 쓰기 위해서는 우선 적과의 거리를 좁혀야만 했다. 그렇기에 일단 날아오는 것을 피하면서 더욱 거리를 좁힌 후 적의 궁수(弓手), 또는 마법사를 베어 버리는 것이 정석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향해 날아오는 그 무언가는 그게 뭔지 파악하기도 전에 엄청난 속도로 거리를 좁혀 왔고, 어두운 공간을 가로지르며 날아온 그것들은 눈이라도 달려 있는 듯 회피 이동을 하는 그들을 향해 휘어져서 날아오더니 곧장 구멍을 뚫어 버렸다. 사방으로 흩어지던 다섯 명이 일제히 땅바닥에 쓰러진 것은 바로 다음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공간이 열리며 다섯 대의 타이탄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이 죽은 이상 계약이 종료되었기에 새로운 주인을 찾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겨우 두 명으로 알고 달려들었던 동료들이 일제히 쓰러져 버리자 뒤에 포진하고 있던 10여 명의 적들은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다는 듯 타이탄을 꺼냈다. 일단 적을 없애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였고, 그다음은 저 주인 없는 타이탄들을 수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놈들이 타이탄을 꺼냈습니다.”
“나도 눈 있어.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다구. 자, 이제 본격적으로 한바탕해 볼까?”
그녀의 뒤에서 공간이 열리며 거대한 타이탄이 튀어나왔다. 전체적으로 검은색을 칠한 타이탄의 방패와 오른쪽 흉갑(胸甲 : 가슴부분 장갑판)에는 크루마를 뜻하는 쌍두의 그린 드래곤이, 그리고 왼쪽 흉갑에는 불타는 듯 붉은 도마뱀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 더 이상의 문장이 그려져 있지 않은 이 타이탄은 누가 봐도 일부러 문장을 그리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자네는 여기서 기다려.”
달려오던 상대들은 어둠 속에서 엄청나게 거대한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내자 일순 찔끔한 듯 보였지만 자신들의 수를 믿는지 곧장 돌격해 들어왔다. 타이탄의 왼쪽 손목에 부착된 거대한 방패로 앞을 가리고 오른손에는 검을 든 채 달려오는 거대한 타이탄이 10여 대에 이르다 보니 그 굉음이 지축을 울릴 지경이었다.
“자, 처음 해 보는 실전(實戰)이니까 멋있게 장식하자구.”
드디어 청기사라고 불리는 타이탄이 처음 적을 맞이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6.1미터나 되는 거대한 높이. 그리고 그 높이에 걸맞게 로메로 두 대에 맞먹는 145톤이나 되는 육중한 체구. 방패와 검까지 더하면 160톤. 이 세계에서 최고로 육중한 타이탄이었다.
청기사는 그 거대한 몸체에 어울리지 않게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대지가 비명을 지르며 푹푹 들어가고 있었다. 양쪽에서 최고 속도로 접근하다 보니 쌍방 간의 거리는 급속도로 좁혀 들어갔다.
쾅!
서로 간의 거리가 제로가 되는 순간 청기사는 12톤이나 되는 그 거대한 방패를 휘둘렀고, 그 거대한 방패에 충돌한 상대방 타이탄의 왼쪽 손이 방패째로 부서져 나가며 뒤로 튕겨 나갔다. 그와 동시에 오른손에 들려 있던 3톤이나 나가는 거대한 검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휘둘러졌다.
쿠직! 쾅!
청기사의 오른쪽으로 접근했던 적 타이탄의 검이 부서져 나가며 그대로 머리통이 함께 떨어져 나갔고 그 뒤에 따라오던 타이탄은 간신히 방패로 청기사의 검을 멈추게 하는 데 성공했다.
“모두들 조심하랏!”
“상대의 힘이 보통이 아니야.”
왼팔이 부러져 나간 녀석을 포함해서 살아남은 아홉 대의 타이탄에 타고 있는 기사들은 뒤의 넓은 공간을 이용해 흩어지며 저마다 외쳐 댔다. 흩어져서 뒤의 넓은 공간을 적절히 활용하며 포위 공격하는 방식. 이때의 공격은 대부분이 일격을 가하고 이탈하는 방식이 애용된다. 이것은 가볍고 재빠른 타이탄이 무겁고 둔중한 움직임을 보이는 타이탄을 상대하는 최적의 기법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이 괴물 같은 시커먼 타이탄에는 통하지도 않았다.
제일 먼저 일격 이탈 전법을 구사하기 위해 달려들었던 타이탄은 상대방의 그 육중한 방패에 두들겨 맞고는 중심까지 잃으며 쭉 밀려났다. 검은색 타이탄은 첫 번째 공격자를 방패로 두들겨 패며 밀어 버린 후 자신의 공격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놈을 향해 곧장 검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그 녀석은 기겁을 해서 방패로 재빨리 막았고,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와 고막이 얼얼한 상태에서 자신의 타이탄이 뒤로 조금 밀리기는 했지만, 상대의 검을 막아 내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검은색 타이탄의 검은 그의 방패를 미끄러지며 옆으로 빠져나간 후 그의 오른편에서 아직도 12톤짜리 철판에 부딪친, 그것도 그 뒤를 받쳐 주는 145톤의 무게까지 합쳐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동료를 순식간에 베어 버렸다.
퍅!
베어져 나간 철갑 조각들이 흩어지는 가운데 그 타이탄은 서서히 무릎을 꿇고 있었고, 악마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검은 타이탄은 또 다른 먹이를 찾아 도약했다. 그 거대한 덩치가 대지를 박차고 오르자 엄청난 흙먼지가 뿜어져 올라왔고, 순간 대지가 푹 파였지만 어두운 밤이었기에 그것을 본 인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다음 순간 검은색 타이탄은 방패로 앞에 있는 타이탄을 후려치고는 상대의 방어벽이 허물어진 틈을 타서 오른손 팔꿈치에 붙은 스파이크를 상대 타이탄의 머리 깊숙이 쑤셔 넣었다. 탑승자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사망했고, 그 거대한 스파이크는 탑승자를 관통한 것도 모자라서 탑승자의 아래에 위치한 엑스시온까지 뚫어 버렸다. 곧이어 상대 타이탄은 서서히 무릎을 꿇으며 침몰해 버렸다.
이때 검은색 타이탄의 뒤쪽에 위치한 적 타이탄은 상대의 등이 빈 이 호기(好會)를 놓치지 않고 등을 찔러 왔다. 그 순간 검은색 타이탄의 허리가 왼쪽으로 거의 180도가 넘게 급속도로 회전했다. 상대가 찔러 넣은 검은 그 거대한 방패에 막혀 튕겨져 버렸고, 곧이어 검은색 타이탄의 거대한 검이 그대로 무방비 상태인 그 타이탄의 허리를 갈라놓았다.
이쯤 되자 제일 처음의 충돌로 왼팔이 날아가 버린 타이탄이 슬금슬금 뒤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때 검은색 타이탄은 다섯 번째 먹이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 상대 녀석은 재빨리 뒤로 후퇴했지만 오히려 덮쳐드는 거대한 타이탄의 이동 속도가 더욱 빨랐다.
쾅!
방패와 방패가 충돌하며 굉음이 울렸고, 곧이어 그 거대한 충돌로 자세가 허물어진 틈을 타고 검은색 타이탄의 검이 그대로 상대의 흉갑을 뚫고 들어가 버렸다. 다섯 대째의 타이탄이 어이없이 허물어지자 살아남은 다섯 대는 재빨리 뒤로 돌아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타이탄의 수거보다도 자신들 목숨의 안전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순간 검은색 타이탄의 검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시퍼런 색의 빛은 순식간에 대기를 관통했고, 곧이어 달아나던 다섯 대의 타이탄은 상체 부분이 토막 나며 굉음을 울리며 쓰러졌다.
다크는 자신의 청기사를 돌려보낸 후 어둠 속 저편에서 걸어오는 린넨 백작에게 외쳤다.
“마법사는?”
“예, 두 명 다 처치했사옵니다. 마지막에 쓰신 그 기술 때문에 제 타이탄을 꺼내지 못하게 막으신 것이옵니까?”
“그래, 제법 쓸 만하지?”
“쓸 만한 정도가 아니옵니다. 그런데 왜 처음부터 그 기술을 쓰지 않으시고…….”
“뛰어올라서 피해 버리면 그만이잖아. 그리고 한 번에 모두 다 없애 버리면 재미가 없기도 하고. 부하들을 불러 모아서 이 고철 덩어리들을 회수해라. 하루 저녁에 열다섯 대를 노획했군. 이 정도면 돈벌이가 엄청난데? 가만있자…, 그건 그렇고, 이걸 회수해서 어떻게 하지? 만약 그냥 가져가면 크루마 놈들한테 뺏길 거고…, 옳지, 그러면 되겠군.”
쓱삭쓱삭, 통신용 마법진을 그리기는 했는데 막상 주문을 외우려고 하다 보니 뭔가가 빠진 것 같았다.
“앗차! 수정 구슬. 그걸 놔두고 왔군. 그렇다면 어쩐다? 이봐, 자네 수정으로 된 거 아무거나 가진 것 없나?”
“예? 수정… 말이옵니까? 수정이라면 이것도 되옵니까? 이건 자수정(紫水晶)인데요.”
그러면서 린넨 백작은 자신의 검집을 가리켰다. 그 검집에는 큼직한 자수정이 두 개 붙어 있었다. 검집이나 손잡이를 보석으로 장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치레아와 스바시에를 점령하기 전의 크라레스는 매우 가난한 국가였기에 황제가 기사들에게 하사하는 보검에는 모두 다 자수정 같은 싼 보석을 박아 넣었다.
“자수정? 그놈도 수정은 수정이니까 한번 시도를 해 보기로 하지. 빨리 줘.”
린넨 백작이 품속에서 꺼낸 단검을 이용해서 자수정 하나를 뽑아 건네자 다크는 그걸 마법진 위에 올려놓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곧 작은 자수정 안에 자수정의 보라색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피곤한 듯한 모습의 마법사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십니까? 잘 보이지 않는데, 관등성명을 말씀해 주십시오.”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이기는 했지만 약간의 짜증을 내포한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 크루마 파견군 사령관이다.”
하지만 그 마법사는 좀 더 언성을 높여서 짜증스러운 듯 다시 되물어왔다.
“잘 들리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십시오.”
이번에는 다크가 짜증을 내포한 어조로 말을 하자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상대는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몰라 뵈어 송구하옵니다, 전하. 그런데 어떻게 통신 상태가……”
“잔말 말고 들어. 이곳 좌표를 알려 주겠다. 즉시 이곳으로 타이탄을 가지지 않은 그래듀에이트 다섯 명과 마법사 한 명을 보내라. 이쪽에서 대응 마법진을 그릴 테니 안전에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거야.”
그런 후 그녀는 품속에서 책을 꺼내어 좌표를 불러준 후, 평탄한 대지를 골라 책자에 그려진 대로 널찍한 마법진을 그렸다. 저쪽에서는 이 마법진을 목표로 공간 이동을 시키면 되기에 훨씬 안전성이 높아지게 된다. 다크가 마법진을 다 그린 후 한 10여 분 정도 기다리자 뿌연 빛이 번쩍이더니 여섯 명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나타나자마자 자신들의 앞에 서 있는 엄청나게 높은 상관을 알아보고는 즉시 인사를 했다. 다크는 대충 인사에 답한 후 즉시 본론으로 넘어갔다.
“저쪽에 다섯 대의 타이탄 보이지?”
“예, 전하.”
“각자 저 타이탄들과 계약을 맺어라. 그런 후 각 타이탄들보고 저쪽에 널려 있는 고철 덩어리 한 대씩을 가지고 공간 저편에 기다리게 해라. 그런 다음 자네.”
“예, 전하.”
“여기서 본국으로 저 다섯 명과 함께 돌아갈 수 있겠지?”
“예, 전하.”
“좋아. 빨리빨리 해. 저 열 대의 타이탄을 가지고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 그리고 린넨 경.”
“예, 전하.”
“자네는 부하들을 불러들여라. 남은 다섯 대는 사령부로 가져가야지. 그래야 다른 기사단의 사기도 오를 거고 말이야.”
“그렇게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사옵니다, 전하. 그럼 저는 부하들을 부르러 가겠사옵니다.”
크라레스에서 왔던 기사들이 타이탄 열 대를 수거해서 돌아갔을 때쯤 린넨 백작은 사방에 퍼져 있던 기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그는 이끌고 온 부하들을 동원해서 자국의 최고 기밀이라고 할 수 있는 청기사의 발자국들을 없앴고, 또 상대방 타이탄들의 발자국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지워 버렸다. 물론 그걸 하나하나 깨끗하게 지워 버린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므로 이끌고 온 부하 20명에게 각기 자신들의 타이탄을 꺼내게 한 후 그 위에서 기동 연습을 행함으로써 뭐가 뭐의 발자국이고, 누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아예 알아 볼 수 없도록 모든 발자국을 짓뭉개 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알렌 왕국에서 벌어진 코린트 연합군과 크루마 연합군의 처음 전투는 크루마 연합군 쪽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전투는 이곳 알렌 왕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가므와 토란 왕국에서도 벌어졌고, 그 다음 날 집계된 쌍방의 타이탄 손실은 간단한 접촉이라고 하기에는 도가 지나치게 피해가 컸다. 약간 파손된 것은 제외하고 파괴된 타이탄만 헤아려도 크루마 파견 기사단 18대, 엠페른 기사단 9대, 코린트 15대, 코린트 연합 15대를 기록했을 정도의 피 터지는 전투를 벌였지만, 자국군의 사기 앙양을 위해 자신들의 피해는 축소하고 상대의 피해는 과대하게 선전했기에 정확하게 누가 누구의 타이탄을 얼마나 부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코린트는 35대의 적 타이탄을 파괴했다고 주장했고, 크루마는 40대의 적 타이탄을 고철로 만들었다고 선전했다. 그런데 전투는 국경에서 벌어졌고, 전투 후 쌍방은 상대의 타이탄들을 견제하며 파괴된 타이탄 및 시체나 부상자들을 수거했기에 정확한 적의 손실을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딴 곳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알렌 왕국 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크루마 연합군 쪽에서 대승을 거둔 것은 명확한 사실이었다.
“승전을 축하하오, 린넨 백작!”
각본에 따라 린넨 백작은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승전 보고를 사령관에게 올렸고, 사령관은 그의 공적을 치하했다.
“국경을 침범해 온 적의 기사 15명과 마법사 둘을 타이탄 다섯 대와 함께 몰살시키다니 정말 대단한 전과요.”
“송구하옵니다, 공작 전하. 이쪽이 타이탄 21대를 동원했기에 국지적인 병력 우세를 통해서 얻을 수 있었던 승리였사옵니다. 속하보다는 공작 전하께서 어젯밤 놈들이 도발해 올 것을 미리 파악한 그 심원하신 안목이 적중한 것이옵니다.”
“너무 겸손하게 말할 필요는 없소. 그건 그렇고 바지오 남작.”
“예.”
“첫 승리를 통한 노획물이니만큼 분배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원래는 전과에 따라 이쪽에서 노획물을 모두 다 가지는 것이 상례이긴 하지만, 첫 승리인 만큼 모든 동맹 기사단에 한 대씩 나눠 주어 그들의 사기를 부양(扶養)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이곳에 있는 크루마 동맹국이 다섯 나라니까 다섯 대의 노획 타이탄을 한 대씩 나눠 가지는 게 좋겠다는 말이었다. 공작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하자 바지오는 지금 나눠가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전과에 따라 모두 가진다는 말이 신경 쓰였다. 만약 그런 식으로 분배된다면 나중에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 다음 이쪽 전선에서 크루마로 돌아올 몫은 단 한 대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크루마의 타이탄이 한 대도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바지오 남작이 잠시 어떤 식으로 대응을 해야 할지 생각에 빠졌던 사이, 각 동맹국들은 공작의 안을 받아 들여 버리고 말았다. 그들로서야 전과에 따라 나누든, 아니면 크루마가 생각 중이던 비율 분배제, 그러니까 고정된 어떤 비율을 정하여 전과가 어떻든 간에 그 비율대로 나누면서 자신들도 한 다리 걸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적 타이탄은 지금도 엄청난 숫자였고, 중요한 것은 타이탄 한 대가 공짜로 생긴다는 데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