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리는 그라세리안이 부재중이었기에 그라세리안의 밑에 있던 마법사를 불러들였다. 그 마법사는 6사이클의 마스터였지만, 언제나 그라세리안 같은 인간 같지도 않은 인물과 함께해 왔던 키에리의 눈으로 봤을 때는 별 볼일 없는 3류 마법사처럼 보인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키에리는 급작스럽게 자신에게 불려 와서 당황한 표정을 감추기에 여념이 없는 노마법사를 영 미덥지 못한 시선으로 노려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지금은 이 영감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 없다는 데야 다른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자네도 별로 시간이 없을 테고, 나도 그건 마찬가지야. 쓸데없는 말은 빼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지. 자네도 보고를 받았을 테니 잘 알겠지만 놈들이 유성 소환 같은 금지된 마법을 썼다. 그라세리안이 없는 지금 자네가 가장 뛰어난 마법사인 것으로 나는 알고 있는데 대응 방법이 없을까?”
“예, 공작 전하. 지금 최선의 방법은 한 달 후에 있을 유성 소환에 대비하여 최대한 방어 마법진을 구축하는 것이옵니다.”
“그래, 막아 낼 가능성은?”
“수도를 포함한 5대 도시의 마법 방어 체계는 코타스 공작 전하께서 직접 설계하셨사옵니다. 그렇기에 그곳들은 문제가 없을 것이옵니다. 문제는 나머지 도시들이옵니다. 마법의 탑에서 조사된 바로는 10여 회에 걸쳐 마법이 사용되었기에 나머지 다섯 개의 도시들이 어디냐 하는 것이 문제이옵니다.”
“그거야 당연히 상업, 또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도시들 순으로 꼽아 보면 되겠지.”
“예, 5대 도시를 제외하고는 아무리 상업이 번창해 있다고 하더라도 전술상 군사 요충지가 아니기에 병력이 주둔하지 않사옵니다.”
“흐음, 자네가 하는 말은 잘 알겠네. 그렇다면 상업 도시를 지킬 것이냐, 군사 도시를 지킬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군.”
“예, 한 달이란 시간은 너무 짧사옵니다.”
“좋아. 한 가지만 묻지.”
“예.”
“만약 지금부터 준비했을 때 유성 공격을 막아 낼 수는 있나?”
노마법사는 미간을 찡그리며 이것저것 생각해 보는 눈치더니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유성 공격은 모든 공격 마법 중에서 최강의 위력을 발휘한다. 작은 유성 하나만 떨어져도 웬만한 도시는 완전히 가루가 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렇게 강한 마법인데도 왜 유성 소환이 잘 사용되지 않느냐 하면, 우선 9사이클급 마법이기에 마법진을 사용한다고 해도 최소한 6사이클급 이상의 인물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법진을 주도해 나갈 유성 소환 마법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는 인물이 한 명은 있어야 했다. 6 내지 7사이클급 인물이 9사이클급에 해당하는 마법을 이론상으로 완벽하게 알고 있기는 힘들기에 실패 위험률도 매우 높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꺼려지는 요소로서, 사실 이것 때문에 유성 공격 마법이 잘 사용되지 않고 있었는데, 마법을 시행한 후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너무 길다는 것이었다.
“예에,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시면 될 것이옵니다. 우선 거대 방어 마법진을 건설해야 하옵고, 또 그 방어 마법진에 마력을 공급하는 초대형 마법진도 여러 개씩 건설해야 하옵니다. 5대 도시의 경우 평상시에는 방어 마법진으로 가던 마력의 일부를 실생활에 사용하고 있사오나, 그걸 방어 쪽으로 돌리는 작업은 매우 간단하옵니다. 그런데 딴 도시들의 경우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이옵니다.”
“그렇다면 그걸 잘 알면서 왜 그라세리안은 딴 도시들에 방어 마법진을 건설하지 않았을까……?”
“수십만이 생활하는 도시 하나를 방어 마법진으로 싸는 데는 엄청난 돈이 드옵니다. 또 그 마법진의 핵을 구동시키려면 최소한 6사이클급 마법사 다섯 명은 필요합니다. 수백 년에 한 번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마법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로는 엄청난 물적, 인적 자원이 필요하기에 가장 중요한 도시들만 보호하고, 나머지는 포기하는 것이 정석이옵니다.”
“흠, 알카사스도 그런가?”
“알카사스는 조금 다르옵니다. 그곳은 엄청난 수의 마법사를 보유한 국가. 그렇기에 30여 개의 도시가 방어망으로 보호되고 있사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늘어나고 있기는 하오나, 단시간 내에 만드는 것은 그들도 하지 못하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나?”
“공격 가능한 도시의 시민들을 대피시켜야 하옵니다.”
“대피라……. 좋아, 자네 생각이 옳아. 시민들을 일단 대피시켜라. 그리고 크루마의 도시 열 개를 골라서 똑같이 유성 공격을 퍼부어라. 물론 마법 방어막이 갖춰진 도시는 공격할 필요가 없다. 없는 도시로 골라서 열 개를 박살 내 버려.”
이때 노마법사와 키에리의 대화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까뮤가 끼어들었다. 키에리가 이성보다는 너무 감정적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보게, 키에리.”
“왜 그러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해야 해. 그래야지만 딴 나라들이 본국을 업신여기지 않아.”
“자네 말이 맞긴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게 아니야. 한 달이라는 시간이면 아마도 전쟁의 결과가 대충 결정된 후일 거야. 그런 상황에서 유성이 도시에 떨어진다 이 말일세. 나는 말로만 들었지만, 유성 소환 마법은 저 우주 어딘가에 모여 있는 유성을 끌어들여서 목표로 하는 도시에 낙하시키기에 웬만한 도시는 흔적도 없이 박살 난다고 하더군. 전쟁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 점령한 도시를 가루로 만들 셈인가?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야.”
까뮤의 말을 들은 키에리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했다. 한 달이라는 시간 차이를 자신이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들어 보니 자네 말도 옳군.”
“아예, 보복을 하고 싶으면 전쟁이 끝난 후에 유성 공격을 감행한 그 망할 놈의 엘프들을 몽땅 다 잡아서 노예로 팔아 버리든지, 아니면 죽여 버리든지 하면 끝날 일 아닌가? 번창하는 도시 하나하나에서 수입으로 거둬들일 수 있는 막대한 황금은 전쟁이 끝난 후 본국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줄 거야. 그런 도시들을 파괴한다는 것은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드는군. 물론 놈들이야 우리들과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으니까 그 짓을 한 것이겠지만 말일세.”
“흐흐, 최후의 발악이라는 건가?”
“그렇게 이해하는 편이 옳겠지.”
“좋아, 자네 말이 맞아. 전쟁이 거의 끝나갈 때쯤 되어 유성이 떨어질 거라면 그따위 공격은 안 하는 게 좋지. 대신 크루마에 있는 마법사들과 엘프들을 어떻게 처리하든지 상관 말게. 그건 인정해 주겠지?”
“물론이네. 원래가 엘프라는 나약한 족속들은 노예로 쓰이기 위해 만들어진 종족일 뿐이야.”
“역시 통하는 데가 있단 말이야. 하하하.”
이때 둘의 대화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노마법사가 끼어들었다.
“저…, 그렇다면 공작 전하. 유성 소환은 어떻게 하올지?”
“그 계획은 취소한다. 자네는 적 유성 공격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도록 하게.”
“옛, 전하.”
이때 밖에서 묵직하면서도 예의 바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 전하, 필립 드 알카파인 후작께서 만나 뵙기를 청하옵니다.”
“들라고 해라.”
“예.”
키에리는 새로운 손님이 있었기에 노마법사와의 대화를 빨리 종결하려고 했다.
“자네는 빨리 가서 일 보게. 우선 주민들부터 대피시키고. 만약 방어 마법진이 별 소용이 없을 것 같거든, 모든 주민을 딴 곳으로 이주시키는 것도 한 방책이겠지. 방어 마법진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데 쓰는 거야. 소용도 없을 것 같은 방어 마법진 만든다고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그편이 더 좋을 것 같군.”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그럼 소신 물러가겠사옵니다.”
노마법사가 물러가고 나자 이번에는 장대한 체구의 무사가 들어왔다. 높은 직위에 오르면서 운동을 하지 않아 그런지 요즘 들어 배가 꽤 많이 나와 있었지만, 밖으로 드러난 신체가 매우 건장한 것을 봤을 때 한창때는 상당한 수련을 거친 것처럼 보였다.
“공작 전하를 뵈옵니다.”
“어서 오게나, 알카파인 후작. 그래, 무슨 일인가?”
“예, 다름이 아니오라 알카사스에서 무기를 구매하는 것 때문에 상의 드릴 일이 있어서 왔사옵니다.”
“무기 구매?”
“옛, 전하. 타이탄과 마법 장비들이옵니다. 전쟁 중이라고 가격을 높게 부르는 것도 아니고, 꽤 적절한 가격이기에 혹시 군부에서 필요하다면 구매를 할까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조건은?”
“대금의 10분의 1은 현금, 잔액은 20년 분할 상환이옵니다.”
“20년 분할 상환이라, 조건도 상당히 좋군.”
“그렇사옵니다. 또 크루마와 전쟁에서 승리하면 막대한 노획 물자가 들어올 것이 아니옵니까? 그렇게 된다면 타이탄 대금을 지불하는 데도 별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아옵니다.”
“좋아. 그 녀석들 타이탄은 얼마나 가지고 있다고 하던가?”
“각종 타이탄 1백여 대를 보유 중이라고 하옵니다. 그중 정규 출력 이상은 50대이옵니다.”
“모두 다 구입하도록 하게. 언제쯤 가져올 수 있나?”
“예, 일단 서로 간에 계약서를 주고받은 후, 타이탄을 지급받을 1백 명의 기사들을 뽑아 알카사스로 가서 가져와야 하니, 적어도 3일은 잡아야 할 것이옵니다.”
“최대한 빨리 구매할 수 있도록 하게.”
“옛, 전하.”
“참, 마법 장비들도 좋은 걸로 조금 구입해 두는 것이 좋겠지. 전쟁이 끝나고 나면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시작될 것인데, 그때 무훈(武勳)이 뛰어난 자들에게 그것을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시면 모두들 좋아할 테니까 말이야.”
“옛, 전하.”
알카파인 후작이 거구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조용한 걸음걸이로 물러나자 키에리는 싱긋이 미소 지으며 까뮤에게 말했다.
“알카사스에서 타이탄이 도착하면 곧장 전쟁을 벌이면 되겠군.”
“3일 후에 말인가?”
“전 군에 전령을 보내게. 3일 후에 전쟁을 시작한다고 말이야. 서로 간에 선전 포고는 주고받았으니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는 없겠지.”
“잘되어야 할 텐데 말이야.”
“그건 걱정하지 말게. 참, 가므 왕국, 그러니까 금십자 기사단이 있는 곳 정면에 크루마의 대군이 집결 중이라는 정보야.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지발틴 기사단과 근위 기사단이 주둔 중인 모양이더군. 물론 근위 기사단이야 일부만 와 있겠지만 하얀 유니콘의 문장을 달고 있는 기사를 몇 명 봤다는 첩자의 보고가 들어와 있어. 그렇게 된다면 가므에는 원래부터 있던 라이오네와 엠페른 기사단을 비롯해서 네 개 기사단이 모두 다 모여 있다고 봐야지. 그걸 금십자 기사단 하나만으로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자네가 그곳에 가 주겠나? 아니면 리사를 보낼까?”
현재 코린트의 코란 근위 기사단은 3개의 부대로 나뉘어져서 관리되고 있었다. 흑기사 15대로 편성된 제1근위대는 까뮤 드 로체스터 공작, 흑기사 15대로 편성된 제2근위대는 리사 드 크로데인 후작 부인이, 나머지 적기사 5대로 편성된 제3근위대는 얼마 전 지휘권을 박탈당한 키에리의 아들 제임스가 지휘하고 있었다. 그중 최고의 정예는 제임스와 까미유 두 명의 소드 마스터를 보유한 제3근위대였지만 현재 최강의 타이탄이라고 볼 수 있는 적기사의 경우 집단전용 타이탄이 아닌 관계로 따로 관리되고 있었다.
타이탄이란 것이 일대일 대결일 때는 가볍고, 빠르고, 출력이 좋은 것이 물론 유리하지만, 집단적으로 치고받을 때는 얘기가 약간 달라진다. 사방에서 얽혀 싸우는 관계로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아지기에 격투에 넓은 공간이 필요한 스피드형 타이탄에게는 상당히 불리한 환경이 되는 것이다. 적기사는 원래부터가 더 이상 코린트를 대적할 적은 없다는 오만한 가정 하에서 제작되었다. 방패 없이 두 자루의 검만으로 무장한 검붉은 색의 타이탄은 비밀 작전 시 벌어질지도 모를 소규모 격투전에 유리하도록 제작되었다.
물론 2.3이나 되는 출력을 내는 엑스시온이 개발되어 있으므로 나중에는 흑기사들을 지휘할 지휘관용으로 좀 더 거대한 체구를 지닌 중장갑형도 만들 수 있겠지만, 최고의 타이탄 제작자라고 할 수 있는 코타스 공작이 부재중인 지금 그런 것이 가까운 시일 내에 만들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어쨌든 키에리의 말은 제1, 또는 제2근위대를 흑기사 15대와 함께 파병할 생각이 있음을 까뮤에게 비친 것이다.
“내가 가기로 하지.”
“자네가 가 준다면 나야 좋지. 하지만 명심해. 미란 국가 연합의 기사단도 결코 만만하지는 않아. 특히 20대의 라이온으로 구성된 라이오네 근위 기사단은 꽤나 정평이 있는 기사단이지. 그리고 크루마의 근위 기사단은 예전, 론드바르 제국과의 전쟁에서 그 무위를 떨치지 않았나? 하나같이 만만한 녀석들은 아니지. 가므에는 모두 다 합쳐서 170여 대의 타이탄이 집결해 있네. 만약 자네 혼자서 힘들 것 같다면 지체 없이 연락해 주게. 리사도 보내 줄 테니까.”
까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키에리에게 말했다. 자신은 누가 뭐래도 마스터라고 불리는 강자였다. 그렇게 강한 자신의 안전을 이렇듯 걱정하는 인물은 키에리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자네답지 않게 그런 소심한 말을 하는가? 나 혼자서도 충분해.”
“그렇지 않아. 만약 미네르바라도 거기에 와 있을 때는 자네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어.”
까뮤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네르바는 아마 자국을 지키기에도 버거울걸? 지금 크루마는 거의 텅 비어 있지. 예전에 우리가 크라레스를 상대로 써먹었던 방법을 또 쓸지 모르니까 강력한 기사들은 모두 다 크루마에 남아 있을 거야. 참, 놈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의미에서 제3근위대를 놈들의 수도 엘프리안에 투입해서 반쯤 박살 내는 것은 어떨까? 그러면 가므에 파견 나가 있던 근위 기사들도 모두 다 엘프리안으로 소환되겠지.”
“그 생각도 좋긴 한데, 제3근위대는 지금 공석이 너무 많아. 그라세리안의 실종을 추격한다고 세 명이나 빠져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리사를 보내기로 하지. 흑기사 15대면 놈들도 혼비백산할걸?”
“좋은 생각이야. 리사한테 말해 두겠네.”
까뮤는 약간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키에리에게 말했다.
“이번 기회에 자네도 한번 가서 몸 좀 풀어 보지 그러나?”
그 말에 키에리는 별로 감흥이 없다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자신같이 높은 경지에 이른 인물이 그런 난잡한 싸움에 끼어든다는 것이 기사도 정신에 걸렸기 때문이다.
“별로 할 일이 없으면 가 보기로 하지. 별 볼일도 없는 녀석들하고 싸우는 것은 내 타이탄에게 미안한 일이니까 말이야.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므 쪽 전선은 자네에게 부탁하네.”
“걱정하지 말게. 타이탄의 목 수십 개를 잘라서 자네에게 보내 주지. 그럼 가 보겠네.”
내일 출발할 준비를 하기 위해 까뮤는 서둘러서 밖으로 나갔다. 제1근위대의 주력은 모든 국가가 공포심을 가질 정도로 막강한 타이탄인 흑기사 15대를 가진 뛰어난 기사 열다섯 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을 서포트(Support)하기 위해 열 명의 기사와 세 명의 마법사가 배치된다. 합계 스물여덟 명의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그들이 전장에 갈 때는 시중들 하인이나 하녀들을 보통 두세 명씩 데려간다. 그렇기에 모두 합하면 최소한 60명이 넘어가는 대 부대가 되는 것이다.
밖으로 나가는 까뮤를 보며 키에리는 왠지 뭔가 찜찜함을 떨쳐 버리기 힘들었다. 이번 크루마와의 전쟁에서는 너무나도 많은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코린트 최고의 대마법사―원래는 정령 마법도 구사하므로 대마도사가 정확하지만 정령 마법을 구사하는 것은 신변 안정상 비밀이기에 대마법사라고 불렀다―그라세리안 드 코타스 공작의 돌연한 실종. 모두에게는 그가 정령 마법도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이 비밀로 되어 있지만, 순간적으로 마법의 힘을 뿜어낼 수 있는 정령 마법의 마스터인 그가 갑작스럽게 적에게 당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키에리는 천천히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자네가 왜 지금 떠났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겠군. 요즘 들어 갈등을 하고 있다는 것은 눈치 챘었지만, 꼭 지금 떠났어야 했나?”
최고의 기사 세 명을 시켜 찾게 했으니 그라세리안이 행방불명된 이유를 곧 알 수 있게 되겠지만, 키에리는 차라리 그가 납치되었기를 바라고 있었다. 만약 그가 자의로 은퇴나 은둔 같은 것을 했다면 다시는 그를 만날 가능성이 없었다. 그만큼 그라세리안은 키에리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그 녀석들이 잘해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건 그렇고 이번 전쟁은 시작부터 너무 찝찝해. 밖에 누구 있느냐?”
“옛, 공작 전하.”
“너는 이 전문을 즉시 알렌 전선에 가 있는 지오르네 후작에게 전해라.”
키에리가 건네주는 전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기습하기 위해 투입되었다가 행방불명된 15대의 타이탄이 격투한 흔적을 정밀 추적할 것. 크루마의 발표대로 국지적 병력 우세인지 알아볼 것. 조금이라도 수상한 점이 발견되면 즉시 보고할 것. 또 전쟁이 벌어진 후 적이 동원한 타이탄의 종류를 파악하여 즉시 보고할 것.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
전문을 건네받은 장교가 서둘러 밖으로 나서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키에리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15대의 타이탄이 행방불명. 처음에는 알렌 왕국과의 전선에 투입되고 있는 타이탄이 289대나 되었기에 별로 주의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키에리는 그것을 생각해 보면 볼수록 찜찜했던 것이다. 크루마의 발표로는 5대의 타이탄이 국경을 침범해 들어온 것을 격파했다고 했다. 물론 겨우 5대만 투입되었다면 잘하면 전력의 손실 없이 괴멸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투입된 것은 무려 15대나 되는 타이탄이었고, 그것을 아무런 피해 없이 괴멸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첩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그곳 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녀석들은 신상 파악이 불가능한 놈들로 구성되어 있는 살라만더 기사단이라…….”
살라만더 기사단은 크루마 제국과 론드바르 제국 간에 벌어졌던 첫 번째 대회전에서 상대국의 기습을 받아 소멸한 크루마의 기사단 이름이었다. 그 사건이 벌어진 이후 크루마에서는 ‘살라만더’라는 이름이 재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 이름을 붙인 기사단은 절대로 만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그 이름을 붙인 기사단을 만들었을 가능성은 있었다. 신형 타이탄을 보급 받아 새롭게 편성된 기사단에 옛날 재수 없었던 명칭을 다시 쓰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키에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새롭게 편성된 강력한 기사단을 마주하고 있는 적들 중에서 가장 강한 전력을 보유한 금십자 기사단 쪽으로 돌렸어야지, 왜 알렌 왕국 쪽으로 보냈는가 하는 것이었다.
“아니야, 크루마의 새로운 기사단일 가능성은 없어. 모두들 두터운 로브로 얼굴을 가리고, 가문의 문장도 붙이지 않는 놈들. 기사단 문장도 로브에만 붙어 있을 뿐, 제복 따위를 입지도 않은 놈들. 그렇다면 대답은 몇 가지 안 되지. 첫째는 용병이고, 둘째는 본국의 이목을 속이고 크루마를 도와주는 놈들이야.”
첩자의 보고로는 1백여 명 정도라고 하니까 절대로 용병일 가능성은 없었다. 그 어떤 용병대도 그렇게 많은 수의 기사들을 보유한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코린트 몰래 크루마를 도와주는 국가들이었다. 한 번씩 드러나는 개개인의 얼굴들을 전쟁의 신전에 알아봤고, 벌써 도움을 주는 나라들 네 개는 알아낸 상태였다. 아무리 슬쩍 변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일단 전쟁의 신전에 등록된 그래듀에이트라면 그 데이터를 가지고 알아보면 웬만하면 신상을 파악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라만더 기사단의 경우는 그게 되지 않았다. 여러 명의 얼굴을 가지고 알아봤지만 놀랍게도 그 누구도 전쟁의 신전에 등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이 그래듀에이트급이라던데…, 60명이 넘는 인원을 전쟁의 신전에 등록시키지 않았다니. 어떤 나라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군. 그렇게 해서라도 본국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들다니. 설마 타이렌 제국인가?”
타이렌 제국은 세 명의 헬 프로네의 주인공들 중의 한 명인 그래플 마스터 엘빈 코타리스를 배출한 저 남쪽의 강력한 국가였다. 타이렌 제국은 저 머나먼 서쪽 대륙과의 해상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국가였는데, 그때 서방 대륙에서 맨손 격투기를 수입해 들였다. 놀랍게도 맨손으로 사람을 죽이는 기술을 익힌 그들은 타이탄들 중에서도 특이하게도 맨손 격투용으로 제작된 ‘가이사르Ⅱ’를 생산해 냈다. 물론 그렇게 많이 생산된 것은 아니었기에 대략적인 형태가 코린트 쪽에 알려졌을 때, 도대체 가이사르를 조종하는 기사들은 어떤 방식으로 상대 타이탄을 해치우는지, 또는 상대 타이탄의 공격을 어떻게 막아 내는지를 놓고 정보부에서 열띤 토론을 벌였던 것이다.
“맞아. 그놈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고 봐야 하겠지. 지금은 증거가 없지만,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다면 그 녀석들도 타이탄을 꺼내 놓을 수밖에 없을 테고, 그렇게 되면 정체가 드러날 거야. 3백 대에 가까운 타이탄이 그곳에 있으니 놈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