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3화 (193/930)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안드로메다의 투덜거림에 다크는 짜증이 섞인 음성으로 답했다.

“좀 기다려 봐.”

<나는 기다리는 게 싫어. 나는 내 힘을 과시하고 싶어. 그렇게 마나를 막아 놓지 말고 개방해라. 그다음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기다리라고 했지.”

<모두들 잘 싸우고 있어. 이렇게 나가면 내 먹이가 줄어들 뿐이야. 나는 하나라도 더 죽이고 싶다. 너는 그것을 도울 힘이 충분히 있어. 사람의 몸속에서 흐르는 그 따스한 것. 그 따스함을 다시 한 번 더 느끼고 싶어. 나에게 힘을 줘.>

“으아아악! 제발 좀 닥치지 못해? 네 녀석 말을 듣고 있으면 옛날의 악몽이 다시 떠오른단 말이야. 나는 무인일 뿐 절대로 살인귀는 아니야. 아니, 살인귀는 안 되도록 노력해 왔다구. 그러니까 자꾸 옆에서 부추기지 말란 말이야. 알았어? 이 망할 살인귀 놈아.”

다크는 지금 전장으로 달려 들어갈 것이냐 마느냐를 가지고 한참 고심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의 타이탄이 한 번 피 맛을 보더니 거기에서 무한한 매력을 찾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피에 젖은 광기를 지닌 마교라는 단체에서 자라 온 그였기에, 다크 또한 살인이라는 것에 대해 무덤덤한 상태였다. 일부 고수들의 경우 살인을 미학으로까지 발전시켜 그것에서 쾌락을 찾는 진짜 미치광이들도 있었지만 다크는 예전부터 그것을 의식적으로 회피해 오고 있었다.

피, 피, 피…….

하지만 피에 굶주려 헐떡이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련한 과거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다크가 매우 특수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다크가 고심하고 있는 부분은 이 직설적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타이탄이 하고 있는 생각을 자신도 지금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자신은 그것을 억제해 왔고, 또 그것을 표현하는 것 자체를 꺼려했지만 단도직입적으로 피에 굶주려 헐떡이는 소리를 듣다 보니까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또 무슨 해괴한 일일까?

<흐흐…, 그걸 ‘살인’이라고 하는 거냐? 그래, 살인이라는 것이 그렇게 기분 좋은 것인 줄은 몰랐어. 너도 그걸 즐기고 있었잖아. 그런데 왜 지금 와서 부인하는 거야?>

“제길! 전번의 도로니아가 더 좋았어. 이 살인마 녀석아.”

<도로니아 따위와 나를 비교하려 들지 마라. 그런 형편없는 것과 비교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모욕이야. 도로니아를 가지고서 그때 한 것과 같이 멋지게 살인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를 소유하고 있는 한 너는 무적이야. 수많은 사람들과 타이탄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일 수 있어.>

“제기랄, 겨우 몇 명 죽이고 나서 이렇게 들뜨는 놈은 처음 보겠네. 처음부터 살인을 위한 병기로 제작되었기에 그런 건가? 그래, 나도 살인을 위해서 키워졌…, 그아악! 나는 아니야. 나는 사람 죽이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다구.”

다크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안드로메다는 매우 집요한 데가 있었다.

<아니야, 너도 좋아하잖아. 너와 나는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다. 내 성격이 싫다고 했지만, 처음 제작된 타이탄은 첫 번째로 만난 주인의 성격을 가장 많이 닮게 되어 있어. 나는 너의 거울이나 다름없어. 너는 지금 달려 나가서 나를 이용해서 저것들을 죽이고 싶지? 그렇지?>

“달려 나가서 죽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가도 네 녀석의 이죽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니 그럴 마음이 없어진다.”

<너는 지금 참고 있지만, 사실은 피가 끓고 있잖아. 안 그래? 뜨끈한 피의 감촉. 금속성의 내 몸의 말단을 통해 전해지는 간단한 감각인데도 이렇듯 나를 흥분시키는데, 너는 더욱 섬세한 감각 기관들이 있잖아. 너를 통해 느껴지는 저 뜨끈한 피의 향기. 너는 그것을 맡으면서 흥분하고 있다구. 너는 오래전부터 피에 굶주려 있어. 부인하려고 하지 마. 자 나를 움직이라구. 그런 후 죽이는 거야. 흐흐흐흐…….>

일방적인 전투

“으그그그…, 미치겠군. 피에 굶주려 헐떡거리는 네 녀석이 싫어서라도 전투를 하지 않겠다.”

<그럴 수가……. 너도 지금 흥분하고 있잖아. 나는 느낄 수 있어. 너와 나는 함께 연결되어 있으니까. 인간들의 속은 이해할 수가 없다. 왜 그렇게 싫은 척하는 거지? 너도 살인귀잖아.>

다크는 정말 미치고 싶었다. 만약 이게 사람이 옆에서 떠들어 대는 거라면 청각을 막아 버리면 된다. 하지만 이놈의 미치광이 타이탄은 자신의 ‘마음’에 직접 대화를 걸어 오기에 그걸 막을 방법은 전혀 없었다. 다크가 지금 가장 곤란하게 느끼고 있는 것은, 자신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이놈이 워낙 ‘너도 그렇잖아’하는 식으로 물고 늘어지고 있었기에, 슬며시 ‘진짜 그럴까?’하는 의구심이 싹트고 있었다.

다크가 망할 놈의 타이탄 덕분에 예정에도 없던 ‘마음의 시험’을 받고 있는 동안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기사들의 전체적인 실력도 유령 기사단이 뛰어난 데다가 타이탄마저도 상대방에 비해 월등하게 우수했다. 48대나 되는 테세우스를 중심으로 그들은 상대를 압박해 나가며 우세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상호 2백 대가 넘는 거대한 타이탄들이 치열한 격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월등한 실력을 지닌 인물이 없었기에 파괴되어 쓰러지는 타이탄은 의외로 적었다.

살라만더 기사단의 경우 전체적으로 중앙에 포진하고 있는 기사들의 기량과 타이탄이 월등했기에 전투가 전개되면서 중앙이 적을 향해 점점 압박해 들어가면서 돌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좌우 측면을 받치고 있는 로메로들은 상대방에 비해 그렇게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 자리를 지키는 수준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상대방의 지휘관은 뒤에서 쉬고 있는 타이탄들을 좌우 측면으로 돌려 상대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전세가 이렇게 흘러가자 다크는 어쩔 수 없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적의 포위망이 완전히 갖춰지게 되면 수적으로 훨씬 불리한 이쪽이 나중에는 괴멸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런 후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을 때 이제부터 쾌락이 시작된다고 느꼈는지 안드로메다는 듣기 껄끄러운 낮은 음성으로 음침한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걸 들으니 다크의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에구구, 내가 전생에 죄를 너무 많이 지었던 모양이지. 이런 미친놈이 걸린 걸 보면. 에라 모르겠다. 그래, 가자구.”

그와 동시에 기본 전투 중량 160톤이나 나가는 거대한 타이탄이 육중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색의 거대한 타이탄의 모습만을 주시하고 있던 마법사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 녀석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에 후작은 전장의 뒤쪽으로 시선을 재빨리 돌렸다. 진짜 움직이고 있었다. 엄청나게 큰 타이탄이……. 여태까지 6미터가 넘어가는 거대한 타이탄은 전 세계를 다 뒤져 본다고 해도 단 한 대가 제작되었을 뿐이다. 코린트의 황제용 타이탄 백기사(Knight of Chrome)는 6.5미터나 되는 거대한 타이탄이었지만 드래곤 본과 와이번 본만으로 제작되었기에 실질적인 무게는 54톤밖에 나가지 않았다. 백기사는 막대한 코린트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제작된 의장용(儀仗用) 타이탄의 성격이 짙었기에 몇 번인가 있었던 근위 기사단의 대규모 기동 연습에서만 모습을 나타냈을 뿐, 실전에 나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실상 타이탄이 개발된 지 얼마 되지 않던 시절, 그 옛날에는 수많은 형태와 크기를 가진 시험용 타이탄들이 제작되었었다. 아직 확실하게 최고의 파워를 낼 수 있는 크기나, 형태가 정립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7미터가 넘어가는 초대형 타이탄도 제작되었고, 초소형 타이탄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무게를 최소화시켜 기동력에 중점을 둔 타이탄도 만들었지만 그 어떤 것도 그렇게 우수한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당시 처음 개발되었던 엑스시온이 지금으로 하면 0.1도 출력하지 못했던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육중한 덩치를 지닌 타이탄이 힘을 못 쓰고 비실거렸을 것은 당연했다.

그렇듯 수많은 시험작들이 제작되는 과정에서 엑스시온의 성능도 끊임없이 향상되었고, 또 그것으로 기동 연습이나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타이탄의 크기와 무게는 점차 고정화되기 시작했다. 일단 국가 간에 전투가 벌어진다면 수십 대가 넘는 타이탄들이 집단 전투를 벌이게 되었기에, 그 집단 전투에서 최고의 힘을 발휘하는 형태로 고정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확립된 것이 출력 1.0의 엑스시온이 탑재된 경우 80톤 정도의 무게가 가장 효율성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각국에서는 출력 대 무게의 비율이 0.0125에 비교적 비슷하게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게의 비율을 무시한 저렇게 거대한 타이탄이, 그것도 이런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가히 쇼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타이탄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후작의 입은 쩍 벌어졌다. 후작의 예상과 달리 그놈의 속도는 엄청났던 것이다. 엄청난 속도로 도약한 후 포위하기 위해 뒤로 돌아온 이쪽 타이탄을 그 거대한 방패로 후려쳤다. 그와 동시에 그 타이탄은 엄청난 충격에 중심이고 뭐고 다 잃어버리고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순간 상대의 거대한 검은 흉갑(胸甲)을 꿰뚫고 있었다. 탑승한 기사가 앉아 있을 것이 확실한 바로 그 위치였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당황한 후작을 향해 마법사는 전장을 향해 호기심 어린 시선을 계속 유지한 채 답했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의 꿈이 바로 타이탄 제작자가 되어 이름을 날리는 것이었다. 지상 최강의 생명체가 신이 만드신 드래곤이라면, 인간들이 만든 최강의 병기는 타이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타이탄 앞에서는 거의 모든 마법이 무력(無力)했다. 그렇기에 그 마법사 또한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그러하듯 타이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저 타이탄은 놀랍게도 강철로 제작된 것이 분명합니다. 단 한 번 방패를 휘두른 것만으로 이쪽의 방패가 튕겨 나갔습니다. 만약 드래곤 본과 같은 가벼운 금속으로 만들었다면 저렇게 엄청난 파워를 낼 수 없습니다.”

마법사의 말에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그래, 바로 저 녀석이야. 놈들이 숨겨 두고 있는 비밀 무기가 바로 저 녀석이야. 그렇다면 크루마의 근위 기사단이 이곳에 있다는 말인가? 빨리 본국에 알아봐.”

마법사는 아르곤 지역에서 포착된 적이 있었던 크루마의 신형 타이탄이 그 녀석인지 본국에 문의했다. 하지만 본국에서 답신하고 있던 마법사는 자료를 뒤진 후 즉시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고. 그 마법사는 자료를 뒤져 대략적인 형태를 전송해 줬는데, 크루마의 신형 타이탄은 무게가 대략 110톤 정도 나가는 것으로 추정되며, 양 옆으로 두 개의 뿔이 길게 솟아오른 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육중한 타이탄이었다. 그리고 크루마의 타이탄들이 흔히 그렇듯 사각형의 방패를 들고 있었다.

“아닙니다, 각하. 아르곤에서 접촉했던 크루마의 신형 타이탄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이지? 이봐, 로안스엘 공작은 아직도 멀었나? 빨리 이곳으로 오라고 지시해라, 빨리.”

이성을 잃어 가고 있는 후작의 목소리는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후작이 허둥대고 있는 그사이에도 뒤쪽으로 돌아왔던 운 없는 타이탄이 여섯 대째 그 거대한 타이탄의 밥이 되고 있었다. 검과 방패를 가진 대결을 할 때는 상대의 방어의 주축이 되는 방패를 무력화시키는 작업이 우선이었다. 검을 사용한 웬만한 공격은 방패로 충분히 막아 낼 수 있다. 그렇기에 보통 방패로 상대의 방배를 후려치며 중심을 무너뜨린 후 검으로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것이 정석이었다. 저 거대한 타이탄은 그 육중한 무게 덕분인지 그런 전술을 힘들이지 않고 간단히 해내고 있었다.

간단하게 동료들이 피의 제물이 되어 버리자 뒤로 돌아 적을 포위하려던 연합군의 타이탄들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자신도 그쪽으로 가면 죽을 것을 뻔히 알기에 망설이는 사이 옆쪽으로 돌아온 동료 타이탄의 수는 점차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 수십 대의 타이탄들이 모이자 그들은 다시금 힘을 얻었다. 적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쪽은 수가 월등했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며 그들은 적군의 후방을 지키고 있는 그 거대한 타이탄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으하하하, 바로 이거야, 이거. 이 느낌이야. 흐흐흐…….>

“으아아…, 소름끼치니까 제발 그만해. 닥치라구.”

그러는 와중에도 이 최고의 궁합을 가진 최악의 콤비들은 상대의 검을 흘리거나 막아 내며, 죽이고 또 죽이고 있었다. 원칙상으로 상대와 싸움을 했다면 다크가 지닌 고도의 검술로 적을 간단히 제압해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강대한 힘과 피 맛을 알아 버린 안드로메다는 다크의 지배를 거부하고 있었다. 다크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충분히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고, 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스파이크로 찍고, 검으로 베고, 찌르면 거기에 감질나게 살짝살짝 묻어 나오는 적의 피. 그 끈적함이 안드로메다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크하하하, 죽어라! 죽어.>

“아주 신이 났구먼. 이제는 아주 자기 혼자서 멋대로 움직이고 있어. 야, 이 빌어먹을 타이탄아. 내 말을 들으란 말이얏!”

수십 대의 적이 포위 공격을 해도, 이 거대한 타이탄을 제압하지 못했다. 그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움직임이 얼마나 재빠른지 공격을 한 순간, 이미 상대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 타이탄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닥치는 대로 자르고, 베고, 두들기고 있었다.

쿵!

무작스런 힘과 무게로 그 거대한 방패를 휘두르자, 그 방패에 두들겨 맞은 상대 타이탄이 아예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80톤에 이르는 육중한 타이탄이, 단 한 번의 충격으로 튕겨 나갈 정도라면 그 방패를 막아 낸 팔이 무사하지 못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강철로 된 외피와 달리 내부에 있는 타이탄의 몸은 주철이다. 그렇기에 강렬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박살 나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수십 대의 타이탄이 겨우 한 대의 적을 상대로 고철이 되어 나뒹굴고 있을 때쯤, 후작이 그렇게 기다리고 있던 로안스엘 공작이 거느린 별동대가 마법진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로안스엘 공작도 처음에는 갑작스럽게 작전을 무시하고 자신을 호출한 후작에 대해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후작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린 순간,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수십 대의 타이탄이 엉켜 붙어 싸우는 난전이 벌어지고 있는 뒤쪽에 그야말로 일방적인 도살극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타이탄들보다 거의 1미터는 확실히 더 커 보이는 시커먼 타이탄이 지축을 울리며 날뛰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박살 나고 있는 상대가 자기편이라는 것이었지만.

“저 괴물을 죽여라, 빨리.”

핏발 선 후작의 눈을 바라보며 로안스엘 공작은 중얼거렸다.

“저런 괴물은 정말 자신 없는데요.”

“그렇다면 어쩔 건가? 저놈 한 대가 무서워서 후퇴하자는 것인가? 상대는 단 한 대다. 자네가 거느리고 있는 것은 50대고. 빨리 해라. 아직 수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 때 녀석을 없애야 해.”

“알겠습니다. 해 보죠. 자, 모두들 돌격 준비. 창을 준비해라.”

로안스엘 공작은 부하들을 이끌고 전장의 뒤편으로 달려갔다. 자신이 달려가는 그 순간에도 다섯 대의 타이탄이 그 괴물에게 쓰러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 모두들 거리를 두고 접근해라. 그리고 켈빈, 자네에게 열 대의 타이탄을 줄 테니 놈들의 후미가 저놈을 도와주기 위해 달려오지 못하게 막아라.”

“예, 공작 전하.”

“자, 모두들 멀리 떨어진 채 창으로 공격하라. 놈의 덩치로 봤을 때 근접전은 매우 불리하다.”

로안스엘 공작의 지휘에 따라 고전(苦戰) 중인, 아니 학살을 당하는 중이던 포위 공격대는 뒤로 물러서며 한숨 돌릴 여유를 되찾았다. 그리고 공작의 지시에 따라 놈은 저 멀리 뒤편으로 분리, 포위되었다. 물론 그 와중에서 로안스엘 공작의 의도를 파악하고 큰 타이탄을 돕기 위해 뒤로 빠진 적 타이탄도 있었지만 켈빈이 지휘하는 저지대(沮止隊)에 막혀 버렸다.

일단 상대를 분리시키는 작업만을 수행하는 와중에도 다섯 대의 타이탄이 더 고철이 되어 뒹굴었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 덕분에 로안스엘 공작은 상대를 후미에 멀찍이 고립시킬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여태까지와는 다른, 독립된 명령 체계에 의한 일사불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괴물 같은 상대의 힘 앞에서는 그 공격도 오래가지 못했다. 무작정 한쪽 방향으로 돌진해 들어오며 방패와 검을 휘두른다. 그렇게 되면 이쪽에서는 뒤로 빠지고, 적 타이탄의 뒤쪽에 있던 아군이 상대의 등을 공격해야만 하는데…, 그런데 놈의 속도가 원체 빠르다 보니 뒤로 빠지던 아군이 미처 뒤로 빠지지도 못한 채 고철이 되어 뒹굴어야 했고, 뒤에서 덮친 아군은 헛되이 허공만을 찔러야 했다.

일부 타이탄들은 창을 던지기도 했지만 그 정도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괴물 같은 타이탄의 두터운 외장 장갑만을 가까스로 뚫을 수 있었을 뿐. 치명타를 가할 수는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상대는 동료들을 계속 죽이고 있었다. 그 괴물 같은 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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