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시아드 대공 전하.”
발렌시아드 공작은 중년의 장군 두 명과 널찍한 지도를 앞에 두고 토론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예상외로 가므 쪽에서 밀리고 있었기에 대책이 시급한 실정이었다. 서둘러 지원한 1백 대와 제1근위대를 보내 줬는데도 미네르바가 지휘하는 적의 주력은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물론 숫자에서는 코린트가 조금 우세했지만 타이탄의 질에서는 저쪽이 월등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전투가 벌어진 후에 까뮤의 요청에 의해 제2근위대까지 파견된 후였다. 그 후, 전세는 코린트 쪽으로 돌아서는 듯 보였지만, 놈들도 엘프리안에 주둔 중이던 레디아 근위 기사단의 남은 병력을 모두 전장에 투입했기에 점차 뒤로 밀리는 실정이었다.
코린트 최강의 코란 근위 기사단이 보유한 흑기사 30대와 두 명의 소드 마스터를 투입하고도 전세가 밀리고 있었기에 키에리는 긴급히 장군들을 소환했고, 이렇듯 대책 회의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또다시 위급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자신을 찾으니 약간 짜증이 났다.
“무슨 일이냐?”
“이변이 일어났사옵니다.”
다급한 어조와 표정과는 달리, 마법사의 입에서 답답한 소리만 흘러나오자 짜증이 난 공작이 으르렁거렸다.
“무슨 이변? 빨리 말해라.”
“예, 알렌 방면으로 침공해 들어간 지오르네 후작이 고전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밑도 끝도 없는 마법사의 말에 키에리는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뭐라고? 설마…, 놈들의 주력은 지금 가므에 있는데? 그건 무슨 말이냐?”
“이게 적 타이탄의 모습이옵니다. 디스플레이 이미지(Display Image)!”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자 곧이어 방금 전에 그 마법사가 전송받았던 기억이 영상으로 드러났다. 검은색 타이탄들과 가지각색의 코린트 동맹군들의 타이탄들이 엉켜서 격전을 벌이고 있는 뒤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방적인 학살극. 원체 거대한 타이탄이 주도하고 있었기에 마법사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키에리의 시선은 자연스레 뒤쪽으로 가 있었다. 그 거대한 타이탄의 움직임은 매우 간단했다. 빠른 돌격, 방패로 후려치기, 그런 후 찌르거나 베기. 물론 중간 중간에 검으로 찌르기 귀찮았는지 무릎에 붙은 거대한 스파이크를 이용해 찍어 올리거나, 또는 팔목 관절에 붙은 스파이크를 이용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그 엄청난 거구가 움직이는 모습이 거의 춤에 가까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 이쪽 타이탄은 걸레가 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군. 나는 저렇게까지 기본기를 충실하게 익히고, 또 써먹는 놈은 처음 봤어.”
솔직한 키에리의 감상이었다.
“저, 대공 전하.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지 하명해 주시옵소서.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가는…….”
“자네는 어떻게 봤나?”
키에리의 말에 여태껏 그와 함께 작전을 짜고 있던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장군이 즉각 대답했다.
“대단한 실력인 것 같사옵니다. 동작이 매우 단순하면서도 위력적인 것으로 보이옵니다.”
“그래. 그렇지? 허구헌 날 검술을 익히며, 더 뛰어난 검술만 찾는 멍충이들에게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움직임이야. 저게 바로 기본기라는 거야. 막고, 두들기고, 베고, 차고……. 누구나 다 아는 동작이지. 또 가장 간단한 동작이고. 자네도 저런 동작을 수도 없이 해 봤을걸?”
“예, 전하.”
“요즘도 저런 동작을 훈련하나?”
공작의 장난기 가득한 물음에 상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예? 저것은 오래전에 끝냈고, 지금은 로체스터 가의 고급 검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상대의 답변에 키에리는 짓궂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는 왜 고급 검법을 배우고 있나? 그렇다면 요즘 저런 것은 하지도 않고 있다는 말이겠군.”
“그렇사옵니다, 전하. 고급 검법으로 넘어가야 강력한 힘을 낼 수 있지 않습니까?”
“자네는 저 녀석을 상대로 싸운다면 어떻게 하겠나?”
“예? 글쎄요. 워낙 힘에서 밀리니까, 거리를 좀 두고 공격을…….”
“그래 맞아. 저 녀석의 움직임이 대단하기는 해. 하지만 고급 검술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주의해서 봐야 한다. 저런 놈을 상대하는 데는 저 녀석들 정도로는 무리가 있겠군. 제2근위대는 가므에 지원 나가 버렸고…, 어떻게 한다? 참, 제3근위대에 남은 놈들이 있나?”
“예, 페트릭과 크리스틴이 대기 중이옵니다.”
“그 녀석들을 보내라. 그러면 되겠지. 저 녀석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녀석은 상대를 잘못 골랐어. 저 녀석이 싸우는 모습을 자네들도 잘 기억해 두게. 그 예전에 익혔던 기본기만으로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낼 수 있는지 말이야. 저 녀석의 노력과 근성에 찬사를 보내고 싶군. 그건 그렇고, 하던 얘기나 마저 하지.”
키에리는 영상을 보는 것 하나만으로 적의 약점을 간단하게 알아챘다. 상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타이탄의 장점들을 극대화시켜 검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검술을 익혔는지는 모르지만 상대의 그 끈기와 노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익힌 검술은 전장에서는 정말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엄청난 고수와의 일대일의 대결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고수들에게는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진 상태에서도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그것도 엄청난 위력을 가진 기술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페트릭과 크리스틴이 전장에 마법진을 이용해 도착했을 때, 전세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단 한 대에게 수십 대의 타이탄이 파괴되어 나뒹굴고 있었고, 로안스엘 공작이 이끄는 공격조는 공작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겁에 질려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더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두려움이 서서히 전체 기사단에 파급되기 시작하여 상대를 저지하고 있던 포위망 자체가 붕괴되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도착과 동시에 자신들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후작은 본체만체하고 자신들의 타이탄을 꺼냈다. 후작은 새로운 증원에 갑자기 힘이 나기 시작하는지 웅장한 목소리로 기사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코란 근위 기사단에서 지원하러 오셨다. 모두들 힘을 내라고 전해라. 저 괴물 같은 놈만 처치하고 나면 승리할 수 있다. 모두들 전의를 잃지 마라!”
크리스틴과 페트릭은 그런 후작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본 후 자신들의 붉은 타이탄에 탑승했다. 웬만한 나라에서는 검술 실력이 뛰어나면 곧 작위도 상승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경우 아버지 대에서 검술이 뛰어나 공작의 칭호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아들이 뛰어난 검술을 유지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코린트 같이 거대한 제국의 경우 그런 식으로 귀족의 칭호를 남발했다가는 귀족의 수가 너무 많아지게 되기에 국가에 공을 세운 경우에만 작위가 상승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검술이 아무리 대단해도 높은 작위를 인정해 주지 않고 있었다.
작위를 가진 귀족들의 경우 세금을 내지 않기에, 세수(稅收)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귀족들의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유리했다. 물론 검술만 제대로 하면 받게 되는 작위의 최하 계급은 기사(Knight)다. 그렇지만 기사는 그 아들들에게 세습되지 않는다. 세습되는 최하 계급의 작위는 남작(Baron)부터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코린트의 경우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검술이 뛰어나서 높은 직위를 가진 인물이 있지만 작위가 낮은 경우가 있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크리스틴과 페트릭의 경우가 그러했는데, 둘 다 발렌시아드 가문이나 로체스터 가문에서 검술을 사사받았기에 발렌시아드 대공이 인정했을 정도로 엄청난 검술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경우 평민의 자식들이었다. 그렇기에 둘 다 기사 칭호를 검술 시험을 통해 자신들의 힘으로 확보해야만 했다. 아마도 이번 전투에서 공훈을 세운다면 남작으로 승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실력을 통해 올라오는 기사라는 작위. 그 작위는 무한하게 높은 자리일 수도 있었다.
페트릭과 크리스틴은 상대 쪽으로 다가서며 외쳤다.
“모두들 물러서라.”
강압적인 명령이었지만 모두들 ‘이런 시건방진’하고 따질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고 주춤주춤 뒤로 내빼고 있었다. 누가 자기들 대신 죽어 주겠다는 데야 절대로 반대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정말 덩치가 대단한데? 거의 백기사하고 맞먹겠어.”
크리스틴의 말에 자신의 타이탄 로마니아가 묵직한 음성으로 답해왔다.
<저기서 미세하게 느껴지는 엑스시온의 파워는 나보다 훨씬 높은 것 같다.>
그 말에 크리스틴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설마, 그럴 리가. 코타스 공작 전하께서는 너 이상 강력한 타이탄은 아직까지도 태어난 적이 없다고 하셨어. 자, 이제 한번 놈의 실력을 테스트해 볼까? 그동안 너는 상대의 파워를 측정하라구.”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걱정 마. 가자.”
상대편 타이탄도 이쪽에서 공격 준비를 갖추기를 기다려 주는 것인지 조용히 서 있었다. 적기사는 양손에 검을 단단히 쥐고는 천천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적기사가 엄청난 속도로 도약했다. 하지만 상대는 그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그 거대한 방패로 후려쳐 왔다.
“똑같은 패턴인데?”
크리스틴은 상대의 틀에 박힌 공격에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놈의 공격 패턴이 똑같다면 그다음은 보나마나였다. 그다음 순간 붉은 타이탄과 검은 타이탄의 대결을 지켜보던 이들은 모두들 입이 쩍 벌어졌다. 그 거대한 검은 타이탄의 방패는 헛되이 공간을 갈랐을 뿐이었고 적기사는 이미 거기에 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빠르면서도 기계처럼 정확한 동작이었다. 순간적으로 상대가 어디 있는지 놓쳐 버린 안드로메다. 그 순간 적기사는 재빨리 상대방 타이탄 뒤쪽으로 도약하며 있는 힘껏 검을 아래로 내리찍듯 휘둘렀다.
캉!
그 순간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거대한 타이탄의 뿔 세 개 중 두 개가 잘려나갔고, 양쪽 어깨의 견갑(肩甲) 일부가 잘려 나갔다. 물론 견갑은 아래쪽에서부터 맹렬한 속도로 재생되었고, 또 잘려진 뿔도 천천히 재생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헤헤헤, 역시 덩치뿐이야. 놈은 숙련되어 있을 뿐이지, 검술은 별 볼일 없는 것 같아. 이봐, 그 순간 저 녀석의 파워를 측정해 봤어?”
<믿을 수 없게도 엑스시온 출력이 3.0을 넘어서는 것 같다. 그리고 저 타이탄, 기사와 타이탄이 별로 공조가 되지 않는 것 같아. 그 둘의 합쳐진 힘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야? 타이탄과 공조도 못 하다니, 정말 형편없는 녀석 아니야?”
<그렇지 않다. 우리를 만든 코타스는 적기사의 프로토타입을 보고 가장 큰 문제점 하나를 발견했지.>
“응? 우리 대장이 몰고 있는 녀석 말이야?”
<그렇다. 드라쿤은 우리들보다 훨씬 자아가 강하다. 만약 제임스 같은 뛰어난 기사가 아니었다면 드라쿤은 주인의 말을 잘 듣지 않았겠지.>
“호오, 그럼 두 번째부터는 자아를 좀 약화시켰다는 말이겠군. 그렇다면 놈의 자아도 강하다는 말이 되나?”
<우리들의 자아도 강한데, 우리보다 더 월등한 엑스시온이라면 그 자아를 통제하기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그것 때문인지 기사와의 공조가 전혀 되지 않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건 잘된 일이군. 빨리 해치우고 돌아가자.”
<크아아아, 내 뿔이 잘렸다. 내 자존심인 뿔이 두 개나 잘렸어. 그동안 네 녀석은 뭐 했냐?>
“뭘 하긴 뭘 해? 여태껏 네놈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고 있었잖아. 뿔까지 잘려 나가고 보니까 제정신이 드냐?”
<크아아악! 저 자식 죽여 버릴 거야.>
그 순간 안드로메다는 또다시 자기 마음대로 돌격해 들어갔다. 다크의 몸에서 거의 무한대라고 볼 수 있는 마나를 흡수하고 있는 만큼 그 속도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또다시 청기사가 달려들어 방패로 후려치는 순간 상대는 훨씬 뒤쪽으로 도약해서 도망친 후였고, 방패가 힘에 밀려 몸 밖으로 약간 벗어난 그 틈을 노리고 상대의 검이 쑤시고 들어왔다. 물론 서로 간의 거리가 있었기에 검이 박혀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대기를 가르며 뭔가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 들어왔다.
쾅!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는 뭔가는 1차 장갑을 꿰뚫고, 2차 장갑을 반쯤 박살 낸 상태에서 멈췄다. 그 정도 피해에서 끝난 것도 다 이 청기사의 장갑판이 덩치에 어울릴 정도로 무지하게 두꺼웠기에 얻어낸 행운이었다.
<그게 뭐였지? 분명히 피했는데…….>
“피한 게 아니야.”
<그렇다면 내가 포착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른 공격이었나? 나는 못 믿겠다. 어떻게 그렇게 빠른 공격이 있을 수 있나?>
“멍청한 녀석! 저건 검기(劍氣)라고 하는 기술이야. 검을 통해 응축된 마나를 뿜어내는 기술이지. 네 녀석의 피 냄새로 굳어진 돌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들걸?”
쾅!
그 순간 뒤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배부(背部 : 등 쪽)에서 둔중한 진동이 느껴졌다. 등 쪽에 서 있던 붉은색 타이탄이 똑같은 기술로 등 쪽을 공격해 온 것이다. 그로부터 몇 분 동안 안드로메다는 놈들을 박살 내기 위해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하지만 그때마다 상대의 공격에 치명상을 간신히 면할 정도의 막심한 피해만 입었을 뿐, 놈들의 장갑판에 가벼운 흠집 하나 만들 수 없었다. 붉은 기사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대단했던 것이다.
“자, 이제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끼겠지? 지금부터는 내 명령에 따라, 이 멍충아.”
<다, 닥쳐라. 내가 질 것 같으냐?>
“방금 전 공격에 꽤 심하게 당한 것 같은데? 그런 식으로 몇 번 더 당하면 네 녀석 목숨도 위태로울 거야. 안 그래? 죽을 거면 빨리 죽어 버려. 그래야 나도 본국에 가서 도로니아와 다시 사이좋게 계약을 맺을 수 있지. 나는 말 잘 듣는 놈이 좋더라.”
<웃기지 마라.>
또다시 단순무식하게 이어지는 공격. 만약 상대가 도망칠 충분한 공간이 없었다면, 아마 진작에 적기사들은 저 분노에 불타는 안드로메다의 검에 두 조각이 났을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혼자 본대와 멀찌감치 떨어져서 싸우다 보니 상대의 움직임을 저지할 만한 방해물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 순간 다크는 엄청난 기의 흐름을 느꼈다. 타이탄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기라면 자신이 뿜어내는 검강과 거의 엇비슷한 위력을 낼 정도였는데, 그렇다면 바로 이것은? 다크는 그 기의 흐름이 날아오는 직선거리에 자신이 앉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도로니아를 조종했듯이 재빨리 안드로메다를 움직였다. 여태껏 다크가 안드로메다를 가만히 놔두고 있어서 그렇지, 조종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움직일 수 있었다. 불협화음이 계속되는 한 원활한 움직임을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저놈들 정말 한가락 하는 놈들이야. 검강을 쓰다니…….”
청기사가 약간 움직이는 그 순간 청기사가 원래 있었던 그곳을 관통하는 엄청난 빛 무리가 있었다. 안드로메다는 자신의 몸이 움직이고 나서야 다크의 시각을 통해 옆으로 흘러가는 빛의 흐름을 볼 수 있었다. 안드로메다는 아직 못 느끼고 있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둘 다 목숨을 구했던 것이다.
<검강? 검강이 뭔데?>
‘바로 저 빛을 말하는 것인가?’하고 생각하며 안드로메다가 물어왔다.
“검강도 모르는 애송이가 나한테 반항하다니. 이게 바로 검강이다.”
그 순간 청기사의 검이 안드로메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휘둘러졌고, 그 검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갔다. 순식간에 대기를 관통하며 덮쳐 오는 빛 무리에 상대방 타이탄은 기겁을 한 채 회피했다. 그들은 이쪽 타이탄이 그 어떤 고급 검술도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 방심한 상태였는데, 자신들이 여태껏 사용했던 검술에 바탕을 둔 검강보다도 더욱 강력한 것이 밀려들자 혼비백산했던 것이다.
안드로메다가 자신의 몸 안을 관통한 그 엄청난 마나의 흐름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그가 인정하지 않고 있는 ‘주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제발 아무것도 모르면 좀 닥치고 내 말을 들어. 네 녀석은 내가 너를 타게 되었기에 무적이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야. 내가 타는 모든 타이탄은 무적이야. 알겠어? 도로니아보다도 형편없는 타이탄에 타고 있었어도 너 따위는 1분도 안 되어 고철로 만들 수 있다구.”
다크의 투덜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다크의 의지대로 청기사는 상대편 적기사를 향해 돌진해 들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 속도는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빠르기였다. 그리고 그 순간 청기사의 검은 엄청난 빛을 뿜으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상대편 적기사는 재빨리 회피하며 청기사의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청기사의 검은 진로를 가로막은 적기사의 검을 두 토막 내며 밑으로 미끄러졌고 곧 1차 장갑판을 가르며 밑으로 훑어 내렸다.
뒤로 재빨리 회피를 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몸이 두 조각 나는 것은 면했지만, 그래도 흉부의 1차 장갑이 날아가고 2차 장갑의 반 이상 깊이까지 들어온 매우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하지만 공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뒤로 후퇴하는 적기사가 채 정신을 가다듬기도 전 상대는 아래로 휘둘러졌던 검을 즉각 위로 쳐올리며 순간 엄청난 빛을 뿜어냈다. 그와 함께 붉은색 타이탄은 두 토막이 나 버렸다.
그다음부터 안드로메다는 자신이 ‘닥치고’ 주인의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는 위치로 떨어져 내렸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강하다고 자부를 하고 있었지만, 그의 주인은 자신보다 월등하게 강했다. 냉철했고, 정확했으며 검을 휘두르는 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두 번째의 붉은 타이탄이 간단하게 두 조각으로 잘린 후, 청기사는 멈추지 않고 적 타이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다음에 이어진 것은 그야말로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처음에 로니에르 공작이 탑승하고 있던 청기사가 상대방의 붉은색 타이탄에게 밀리기 시작했을 때 모두들 당황했지만, 순식간에 공작은 언제 자신이 그랬냐는 듯 엄청난 기술을 써서 상대들을 죽여 버렸고, 또 밀집해 있는 상대 타이탄들을 베기 시작하자 거기에 새로운 힘을 얻은 그의 부하들도 맹렬히 도망치는 적을 뒤쫓아 확실하게 죽여 나갔다. 코린트와 크루마 간의 전쟁에 참여했던 크라레스 기사단의 첫 번째 승리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