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을 축하드리옵니다, 공작 전하.”
다크가 타이탄에서 내릴 때 크로아 백작과 린넨 백작이 달려와서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부하들의 인사를 대충 받아넘기며 땅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랜 격전에 둘 다 피곤하겠지만, 테세우스 20대씩을 끌고 가서 아직도 양쪽 날개를 담당하고 있는 기사단을 도와줘라. 벌써 다 죽어 버렸다면 별 문제겠지만, 살아 있다면 도와줘야 하겠지.”
“옛, 전하.”
두 명의 기사들은 자신들의 부하들을 끌어 모아 양쪽의 격전지로 달려갔다. 마법사가 없기에 격전지까지 달려가야만 했는데, 그러자면 30분 정도의 시간이 걸리니 어쩌면 그동안에 동맹군을 상대로 분전하다가 전멸당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뭐, 죽은 놈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
다크는 부하들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중얼거린 후, 곧이어 다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법진을 다 그린 후 상대방 마법사가 흘리고 간 수정 구슬을 주워 들고 마법진의 중앙에 놓고 일어서며 주문을 외우려는 찰나, 자신의 타이탄이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야, 너 아직도 안 돌아갔냐? 너 이제 볼일 끝났어. 더 이상 피 맛보기 힘들다구. 알았어?”
다크가 저놈의 타이탄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툴툴거리자, 그녀의 머릿속에 타이탄 특유의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당신이 돌아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에 기다리고 있었을 뿐, 다른 뜻은 없었다.>
“어쭈? 언제는 돌아가라는 말을 해야 돌아갔냐?”
그녀의 이죽거림에도 불구하고 안드로메다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주인이 타고 있지 않을 때 타이탄의 움직임은 그렇게 빠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천히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하며 안드로메다는 말했다.
<당신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한다. 당신은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다.>
그때 안드로메다 뒤쪽의 공간이 열리며 그 거대한 덩치를 삼켜 버렸다.
“별 싱거운 놈을 다 보겠군. 언제는 내가 주인이 아니었나?”
다크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곧이어 한 번씩 보이던 낯익은 마법사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시옵니까? 공작 전하. 첩자들에게 받은 보고로는 오늘 아침부터 격전이 시작되었다고 하던데, 전황은 어떻사옵니까?”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 거 보면 모르냐? 여기에 타이탄 2백 대 정도가 나뒹굴고 있으니까 까만 토끼보고 알아서 가져가라고 해.”
상대의 이죽거리는 말에 마법사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약간 토라진 듯한 모습이 보기에 귀여웠지만 그녀의 실력과 지위를 잘 알고 있는 마법사는 감히 그것을 표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일단 그녀의 말은 승전 보고였기에 반갑게 말했다.
“벌써 전투가 끝났사옵니까? 승전 소식을 들으신다면 폐하께서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그렇게 좋아할 것은 못 되지. 로메로 열두 대하고 테세우스 네 대가 박살 났으니까 말이야. 일곱 명 전사. 나머지는 모두들 뻗어 있으니까 한 몇 달 몸조리 잘하면 일어나겠지.”
“예, 피해 상황은 까만 토끼에게 전하겠사옵니다.”
“그래, 딴 곳의 전황은 어떻다고 하던가?”
“그쪽만 전투 결과가 나왔고, 딴 곳은 아직도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격전 중이옵니다. 미네르바 공작이 이끄는 가므 방면 기사단들은 조금씩 진격 중인 것으로 보고받았사오나 전황이 그렇게 유리한 것 같지는 않았사옵니다. 바로 그곳에서 코란 근위 기사단과 레디아 근위 기사단이 맞붙었다고 보고를 받았으니까요.”
“어떻게 되었든지, 어떤 문제가 생기면 빨리 보고를 해 주도록. 그리고 이쪽의 좌표를 일러 줄 테니 마법사 몇 명 좀 보내 줘. 불행한 사고에 의해 크루마에서 파견되었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모두 전사(戰死)해 버렸거든. 그 덕분에 휘하 기사단들 하고 통신도 안 되는 형편이야.”
약간 비꼬는 듯한 그녀의 어투에 어떻게 사건이 진행 중인 것인지 대충 감을 잡은 마법사는 그녀의 말에 동조하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아, 매우 불행한 사고였군요. 즉시 조치해 드리겠사옵니다.”
통신이 끝난 후 그녀는 여기저기 앉아서 쉬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서 말했다.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전장에 남아 있는 청기사의 흔적을 없애라.”
그녀의 날카로운 외침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섰다.
“옛! 전하.”
그들은 각자의 타이탄을 꺼낸 후 청기사가 남겨 놓은 큼직하면서도 깊숙한 발자국들을 찾아 짓이기기 시작했다.
예상 밖의 승리
“뭣이라고? 전멸?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아무리 여러 나라에서 끌어 모은 손발이 잘 안 맞는 기사단이라고 해도, 자그마치 3백 대의 타이탄이다. 그런데 어떻게 전멸을 당할 수 있지? 더군다나 제3근위대의 엘리트들을 두 명이나 지원해 줬는데.”
“황송하옵니다, 전하. 그때 그 검은색의 초대형 타이탄을 막아 내지 못한 것이 알렌 방면의 패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조사되었사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그렇다면 페트릭과 크리스틴이 놈을 막지 못했다는 말이냐?”
“예, 전하. 유감스럽게도 그렇사옵니다.”
“그럴 수가…, 그렇다면 그때 전송되어 온 전투 자료가 있는가?”
“예, 있사옵니다.”
마법사는 알렌 방면 기사단이 붕괴되기 직전에 보내 왔던 전투를 회상하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법사는 매우 머리가 우수했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디스플레이 이미지!”
곧이어 검은색 타이탄과 붉은색 타이탄들이 싸우는 모습이 나타났다. 초반에는 붉은색 타이탄들이 압도적인 우세 속에 전투가 전개되었다. 하지만 곧이어…….
“이럴 수가……. 저놈은 마스터급이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왜 처음에는 그 기술을 쓰지 않고 힘들여서 한 대씩 부숴 나갔지? 이해할 수가 없군.”
전투 모습을 보고 충격 받은 키에리가 중얼거리고 있자, 마법사는 재빨리 주의를 환기시켰다.
“바실리시에 집결했던 모든 동맹 기사단은 저 단 한 번의 전투로 괴멸당했사옵니다. 놈들은 중앙에서 승리를 거둔 후 좌우에서 압박해 들어오고 있던 동맹군의 좌우익을 간단히 제압했사옵니다. 이렇게 된 이상 가므에서 결전을 벌이고 있는 중앙 부대가 위험하옵니다. 아마도 곧이어 적의 좌익 부대가 아군 중앙 부대의 측면 내지는 후미를 공격해 들어올 것으로 예상되옵니다. 빨리 결정을 내려 주시옵소서.”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사옵니다. 일단 전 군을 쟈크렌 요새 부근으로 후퇴시키심이 어떠하올는지요? 놈들의 좌익 부대에게 퇴로를 차단당하기 전에 전 군을 후퇴시켜야 하옵니다. 그런 후 동쪽 최강의 요새 쟈크렌을 중심으로 놈들을 막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 될 것 같사옵니다.”
“구스타프 백작의 의견은 잘못되었사옵니다. 그런 식으로 급속히 후퇴시킨다면 기사단은 건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군대는 적에게 포착되어 괴멸당할 우려가 있사옵니다. 그것보다는 적의 좌익 부대를 막기 위한 기사단을 급파하는 것이 옳을 것이옵니다. 본국에는 아직도 두 개 기사단이 남아 있지 않사옵니까?”
“그건 틀립니다, 후작 각하. 3백 대의 타이탄을 전멸시킨 엄청난 저력을 가진 기사단을 어떻게 철십자나 동십자 기사단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저 괴력을 자랑하는 적 기사단장을 제압할 수 있는 기사는 두 기사단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놈을 해치울 수 있는 기사는 따로 파견하면 되지 않나? 왜 그걸 생각하지 못하는 거지?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나 크로데인 백작님을 파견하면 저 녀석을 충분히 없앨 수 있단 말일세.”
“하지만 그분들은 중요한 일로 타국에서 작전 중이 아닙니까? 어떻게 그분들을 돌릴 수 있단 말입니까?”
모두 시끄럽게 떠들어 대기 시작하자 키에리는 손을 들어 그들을 조용히 시키며 말했다.
“자, 자, 조용히들 하게나. 상대 기사단이 중앙을 덮친다면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소?”
“예, 일단 놈들도 대격전을 벌인 후이니만큼 휴식과 재편성을 필요로 하옵니다. 그런 후 마법진으로 투입한다면 시간은 매우 절약될 것이니…, 아마도 24시간?”
“그렇다면 내일쯤 퇴로를 차단하고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예, 공작 전하. 물론 적 마법사들의 능력이 따라 줄 때의 가정이옵니다.”
“그렇다면 후속 부대를 투입시키기에도 빠듯한 시간이 아닌가?”
“예, 공작 전하. 그리고 전방 부대들을 후퇴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구요.”
“어쩔 수 없지. 철십자 기사단을 끌어 모아라. 철십자 기사단을 그곳에 투입하기로 하자.”
“하지만 전하, 그 괴물 같은 기사단장을 없애기 위해서는…….”
“그건 내가 직접 가겠다.”
코린트는 적의 좌익 부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수많은 첩자들을 파견했고, 아직 크루마와 격전을 벌이고 있는 중앙과 우익 부대는 전방만이 아니고 후방에까지도 정찰조를 파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뒤통수를 얻어맞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모두가 관심을 쏟고 있던 크루마 동맹의 좌익 부대는 현지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남의 전쟁이야 어찌되든 간에 다크가 거느린 살라만더 기사단은 전쟁 외에도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바로 3백여 대에 달하는 노획 타이탄의 처리 문제가 그것이었다. 이들은 노획한 타이탄 중에서 아직 살아 있는 것들은 계약을 맺어서 운반했고, 죽어 버린 타이탄은 또 다른 타이탄이 가지고 공간으로 사라지게 만든 후 기사들을 공간 이동시키는 방법으로 운반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 전투에서 살아남은 엠페른 기사단과 연합 기사단의 생존 타이탄들은 모두 다 살라만더 기사단의 50킬로미터 후방에 위치시켜 퇴로 확보를 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들도 그 결정에는 찬성이었다. 그들은 우선 자신들과 격전을 벌이다가 파괴된 노획 타이탄을 챙겨 본국으로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나중에 적의 힘에 밀려 중앙 쪽으로 후퇴하다가 중앙부에서 지원 나온 타이탄들과 협동하여 적을 무찌르긴 했지만, 모두들 거의 30여 대 정도로 50여 대의 적을 막다 보니 피해가 막심한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제대로 된 전력을 내기 위해서는 휴식과 재편성이 꼭 필요한 상태였다.
“여기는 살라만더 기사단입니다.”
마법사가 자신의 수정 구슬에 모습을 나타낸 처음 보는 인물에게 말했다. 통신용 마법진의 경우 서로 간의 접속 신호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어야 했기에, 딴 사람의 도청은 거의 불가능했고 또, 접속 신호를 모르는 다른 인물이 무작위로 그 신호를 알아맞혀 끼어들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자신이 처음 보는 인물이 수정구에 모습을 드러냈다면 이 수정구의 접속 신호를 알고 있는 사람, 즉 동맹국의 어떤 인물인 것이 확실했다.
“여기는 살라만더 기사단 임시 마법사 본부입니다. 불렀으면 답을 해 주십시오.”
상대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예. 저는 살라만더 기사단에 파견 나온 마법사입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당신은 내가 모르는 사람인데?”
“아, 예. 오늘 오전에 있었던 격전으로 인해, 후방 기지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때 크루마에서 파견 나왔던 모든 마법사가 전사했습니다. 그렇기에 공작 전하께서는 또다시 크루마에 인력 지원을 할 수는 없다고 결정하시고 본국에서 마법사와 기사의 지원을 요청하셨습니다. 저희들이 이곳에 도착한 후에 마법 통신망이 재구축되었습니다.”
상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모두 전사했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파견 나왔던 기사들은 전쟁 직전에 벌어졌던 정찰대끼리의 치열한 교전에서 모두 전사했습니다. 그러니까 크루마에서 파견된 분들은 지금 아무도 없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그…, 그렇다면 전투는 어떻게 되었나요? 연락이 워낙 오랜 시간 불통되어 있었기에 우리들은 귀 기사단이 전멸당한 줄 알았습니다.”
“전투는 승리했습니다.”
그 말에 상대방 마법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승리? 승리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거의 3백여 대의 적 타이탄을 파괴했고, 이쪽은 50여 대가 파괴되었습니다. 특히 적 기사단의 우회 공격조를 끝까지 막아 줬던 엠페른 기사단 쪽의 피해가 큽니다.”
“이럴 수가……. 곧 미네르바 공작 전하께 이 승전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