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6화 (196/930)

전멸을 당하더라도 오랜 시간만 버텨 주면 다행이라고 생각되던 지점에서 승전 보고가 나오자 미네르바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렇게 되면 예상과 달리 적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진격조차 불가능에 가까운 중앙 전선에서 적을 돌파하기 위해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제장(諸將)들. 기쁜 소식이 도착했소. 서쪽으로 나가는 길이 열렸소. 아직 전선을 유지하면 다행으로 생각했던 알렌 방어군이 대승을 거뒀다는 보고요.”

“알렌 방어군이라면 동맹 연합군이 아니옵니까? 설마 그들이…….”

“매우 강력한 기사단과 기사들을 보내 준다고 하더니, 진짜 그들이 해낸 것 같소.”

한 노장군이 지도 앞에 나서서 손가락으로 위치를 짚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빨리 이쪽으로 진격해서 적의 측면을 압박하라고 지시하시옵소서. 그렇게 된다면 지금 이곳에서의 힘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지게 될 것이옵니다. 코린트의 정예를 완전히 궤멸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옵니까?”

이때 미네르바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또 다른 노장군이 나서서 앞의 인물이 지도 위에 짚은 지점보다 훨씬 더 왼쪽 부분을 짚으며 말했다.

“그것보다는 뒤로 더욱 진격해서 아직 준비 태세가 갖춰지지 않은 동쪽의 관문 쟈크렌 요새를 점령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이옵니다. 본국에서 이곳 정면을 돌파한다면 적이 다음 전선을 유지하기에 쟈크렌 요새만큼 좋은 곳은 없사옵니다. 대타이탄 공격 무기를 대량으로 보유한 거대 요새일 뿐 아니라 북쪽으로는 웜급 레드 드래곤 브로마네스의 둥지가 있고, 남쪽으로는 웜급 그린 드래곤 그라시안의 둥지가 있사옵니다. 그 두 드래곤의 영토의 경계점에 교묘하게 세운 요새이기에 포위 공격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또 그곳에서 너무 장시간 치열한 접전을 벌이면 그 두 드래곤의 분노를 살 수도 있사옵니다. 그리고 그 일대는 20여 마리에 달하는 드래곤들의 집단 서식지이기에 그곳을 피해 우회하려면 너무 먼 거리를 돌아가야 하옵니다. 전략상 최고의 요충지라 할 수 있지요. 적들의 대비가 아직 갖춰지지 않았을 지금이 그곳을 공격하는 데 적기이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한 중년의 장군이 나서서 그의 의견을 지지했다.

“로젠나르 자작님의 의견이 옳사옵니다. 쟈크렌 요새가 점령된다면 적의 보급로는 드래곤들의 둥지를 우회해야 하기에 크게 늘어나게 될 것이 분명하옵니다. 퇴로 확보 및 보급로의 유지가 힘든 적들은 자연히 후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미네르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로젠나르 자작의 의견이 가장 좋은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뒤쪽에 서 있는 미녀를 보며 말했다.

“마리나.”

미네르바의 부름에 그녀의 뒤쪽에 조용히 서 있던 아름다운 여자가 얌전을 빼며 다소곳이 답했다. 그녀는 매우 젊어 보였지만 실은 60세가 넘은 6사이클급에 달하는 궁정 마법사였다.

“예, 공작 전하.”

“알렌 방어군에게 지시해라. 쟈크렌 요새 부근에 공간 이동할 만한 좌표를 알려 주고 즉각 기사단을 투입하라고 일러라.”

“예, 전하. 그렇게 이르기는 하겠지만…, 도착 지점에 수신 마법진이 없다면 크라레스의 실력이 낮은 마법사들로서는 대규모의 기사단을 공간 이동시키기 힘들 것이옵니다. 마법사에게 들으니 후방을 몇 대의 적 타이탄에게 기습당해서 본국에서 지원해 준 마법사들을 모두 잃었다고 하옵니다. 지금 자국에서 마법사를 몇 명 데려다가 통신망을 새로이 구축한 모양이던데, 그들의 실력으로는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옵니다.”

미네르바는 그녀의 의견에 동조하며 또 다른 가능성을 찾기 위해 지도를 쳐다보며 말했다.

“맞아, 그걸 생각하지 못했군. 음, 어디 보자. 쟈크렌 요새 부근에는 강이나 호수 같은 공간 이동하기 좋은 곳이 없군.”

“예, 전하.”

“그렇다면 자네가 해 주지 않겠나? 기사 몇 명을 붙여 줄 테니 그곳으로 먼저 가서 수신 마법진을 설치하고 그들을 불러들이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전하.”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의 추적

“뭐 알아낸 것 있어? 왕궁 앞을 기웃거린 게 며칠인데 도저히 알 수가 없잖아. 그녀 비슷하게 생긴 소녀도 못 봤다구.”

제임스가 투덜거리는데도 불구하고 까미유는 느긋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만날 거야. 한 번씩 그녀의 하녀가 심부름하러 나오거든.”

이때 오스카가 좋은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 말했다.

“좋은 생각이 있어요. 한 번씩 그녀의 하녀가 들락거린다면 저기 경비 무사에게 물어보면 안 될까요?”

하지만 그의 의견은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다.

“미친 녀석. 전에도 그녀를 납…, 아니 그녀가 있는 곳을 알아내기 위해 숱한 고생을 한 다음 겨우 왕궁에 있는 것을 알아냈는데, 기사도 아니고 경비 무사 따위가 어떻게 알겠어?”

까미유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오스카는 부스스한 노랑머리를 긁적거리다가 크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으아아암, 그래도 한번 물어볼 수는 있잖아요.”

일단 이곳에 도착한 후 까미유의 의견대로 왕궁의 정면에 위치한 여관의 제일 높은 층을 차지하고 앉아 교대로 감시하며 기다렸다. 마법사인 리카의 도움으로 까미유의 기억 속에 있던 그녀와 시녀인 묘인족 소녀, 그리고 그녀의 호위 무사의 인상착의를 모두 알아낸 후 밤낮으로 창문에 붙어 앉아 그렇게 생긴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린 게 며칠째. 좁은 방 안에 갇혀 있다 보니, 이제 서서히 짜증이 나기 시작하는 단계였다.

“제기랄,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며칠만 더 기다려 보면 나올지도 몰라. 전에도 한 번씩 그녀의 물건을 장만하러 세린이라는 묘인족 소녀가 나왔었거든.”

하지만 까미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스카는 방을 나서며 투덜거렸다.

“이렇게 가만히 기다리는 것은 죽어도 못하겠어요. 으아악! 스트레스 쌓여.”

밤새도록 정문을 감시하느라고 아침에서야 잠이 들었던 오스카가 아직도 잠에서 덜 깬 후줄근한 모습으로 정문 경비 무사에게 털레털레 걸어가는 것을 까미유는 창가에 앉아서 보며 못 말리겠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래 봐야 헛수고라니까. 그녀는 이곳 왕하고 뭔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게 분명해.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니까 그 녀석 고집은…….”

제임스도 까미유의 말에 동조했다. 사실 그렇게 간단하게 일이 풀릴 거였다면 뭐 하려고 이곳에 틀어박혀 며칠씩이나 밤을 새며 감시를 했겠는가?

“관둬. 아무것도 모르는 경비 무사한테 욕이나 한마디 듣고 열 받아서 씩씩거리며 돌아오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임스의 말대로 오스카가 씩씩거리며 올라왔다. 거보라는 듯한 표정으로 제임스와 까미유가 그를 바라봤지만, 오스카는 열 받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거봐요. 물어보자고 했잖아요. 그 녀석에게 다크 크라이드라는 남작을 모르느냐고 물었죠. 나이는 16세 정도 되는 금발에 아름다운 소녀라고 말했더니, 곧장 나하고 무슨 관계냐고 묻더군요. 나는 오빠라고 답해 줬죠. 그랬더니 그놈 이상하게 덜덜 떨면서 바로 가르쳐 주던데요.”

그 말에 까미유와 제임스는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뭐라고?”

“그녀는 지금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 전하가 되었고, 또 치레아의 총독 나리가 되셨기에 지금 치레아에 있다고 하던데요? 그런데 그 녀석 왜 갑자기 그렇게 덜덜 떨면서 말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되네…….”

물론 경비 무사가 덜덜 떤 이유를 그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이유를 만든 당사자가 얼마 전에 이곳을 방문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무시무시한 마법으로 다수의 경비 무사들을 말 그대로 통구이로 만들어 버렸고, 나중에는 그 뒷수습을 위해 황제에게 보검을 선물했었다. 황제조차도 고개를 조아린 인물이 그녀의 ‘아빠’라고 찾아와서 휘저어 놨으니, 이번에는 ‘오빠’라는 인물이 찾아와서 왕궁을 아예 박살을 내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을까? 그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 그녀의 매우 비밀스런 이름은 경비 무사들에게 자세하게 일러졌고, 찾아오는 인물에게 죽고 싶지 않다면 빨리 가르쳐 주라는 지시까지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 지시가 있었을 정도로 그녀의 옛날 이름을 알고 있는 외부인은 정말 극소수였다.

그들은 즉시 치레아로 마법진을 통해 날아갔다. 물론 치레아의 총독부가 위치한 도톤시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강 위로 공간 이동했다. 모두들 물에 빠진 생쥐 같은 몰골로 헤엄쳐 나오기는 했지만 일단 목적지에 최대한 빨리 도착할 수는 있었다. 그런 다음 그들이 똬리를 튼 곳은 전과 마찬가지로 총독부 관저가 잘 보이는 여관의 가장 위층이었다.

“이번에도 물어보면 안 될까요? 그게 훨씬 더 빠를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짐을 풀면서 투덜거린 오스카의 말은 곧장 받아들여졌다. 물론 그 말을 입 밖에 제일 먼저 뱉은 오스카가 경비 무사에게 가야 했지만.

그러나 세 시간 정도 지나서 오스카는 싱글거리며 돌아왔다. 그곳에 찾아간 덕분에 매우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왔던 것이다. 왜 그렇게 그녀의 옛날 이름만 말하면 뻣뻣하던 사람들이 상세하게 가르쳐 주고, 모든 것이 즉각 해결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말이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냐?”

“예, 아주 쉽던데요. 가서 말했더니 곧장 이곳 총독 대리를 만나게 해 주더라구요. 그 사람 말이 그녀는 지금 여기에는 없고 크루마로 갔다고 하던데요? 아마 한두 달 있으면 돌아올 거라면서 그때 찾아오시면 꼭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귀빈 숙소에 묵으시겠느냐고 정중하게 요청하는 걸 거절하고 빠져나오는 데 참 애를 먹었죠. 모두들 아주 친절하더군요.”

싱글거리면서 말하는 오스카를 보면서 제임스와 까미유는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갑자기 공작이 되어 권력의 전면에 나선 것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녀의 옛날 이름을 한 번 말했다고 해서 거의 조사도 하지 않고 총독 대리라는 높은 위치의 인물이 즉각 만나 주는 것도 이상했던 것이다.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어. 그건 그렇고 크루마에는 왜 간 거지? 그녀가 크루마에 갈 이유가 있나?”

제임스의 말에 까미유는 될 대로 되라 하는 식으로 대답했다.

“글쎄, 알 수 없지. 한번 가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이번에도 크루마 황실에 들어가서 크라레스에서 오신 다크 크라이드 남작, 또는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 전하를 아십니까? 그렇게 물으라는 거야? 너 지금 제정신이냐?”

하지만 여태껏 자신의 말대로 모든 것이 풀리고 있는 것에 기분이 매우 우쭐해진 오스카는 그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태까지 그 이름 두 개만 대면 무조건 무사 통과였는데, 그쪽도 그럴지도 모르잖아요. 자, 어쨌건 확률의 문제라니까요. 지금까지는 적중률 1백 퍼센트였잖습니까? 물론 다음에 실패한다면 67퍼센트로 떨어지겠지만 말이지요.”

“으이그. 그래, 네 녀석 소원대로 한번 해 봐라.”

이 단순 무식한 패거리들은 진짜 성질대로 그렇게 하고야 말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들의 예언이 거의 적중되었다는 데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제임스 일행은 일단 경비병의 안내를 받아 그날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기사를 만났다. 그 기사가 물어오자 오스카는 버벅거리며 답했다.

“예, 저 그러니까 크라레스에서…….”

그런데 어느 정도 자신의 구미에 맞는 답이 나오자, 기사는 다짜고짜 오스카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떠들기 시작했다. 상대는 한눈에 척 봐도 마법사 두 명과 기사 세 명이었다. 그런데다가 크라레스에서 왔다고 하니 복장은 약간 다른 것 같았지만 살라만더 기사단에 네 번째로 파견되어 온 무리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오, 크라레스에서 파견 오신 동맹국 기사 여러분이시군요. 3진이 도착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또 오셨군요. 그런데 황실 마법진의 좌표를 알려 드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그리로 안 오시고?”

‘예리한 곳을 찌르는군’하고 생각하며 오스카는 얼렁뚱땅 넘겼다.

“헤헤…, 뭐 그럴 수도 있죠. 저희들은 볼일이 좀 있었기에 그쪽에 들렀다가 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다크 크라이드 남작, 또는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 전하를 아십니까?”

오스카의 말에 상대 기사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파견군 사령관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진짜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 알다 뿐이겠습니까? 처음 그분께서 도착하셨을 때 제가 안내해 드렸었는데요. 귀국의 전폭적인 지지에 황제 폐하께서도 만족해하고 계십니다. 언제 출발하시겠습니까? 지금 한창 코린트와 전쟁 중이니까 빠른 것이 좋겠죠?”

오스카는 속으로 ‘벌써 전쟁이 시작되었나?’하고 생각했지만 그걸 겉으로 나타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렇죠.”

“그럼 즉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로니에르 공작 전하는 알렌 왕국의 국경 부근에 위치한 도시 카지마트시 외곽에 계십니다. 카지마트시에 반영구적으로 만들어 놓은 수신 마법진을 통해 급행해야 하는 모든 물자와 인원이 공급되고 있죠. 그곳에 도착하신 후 카지마트 시장의 안내를 받으시면 공작 전하를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제임스 일행은 거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세운 계획이었는데, 워낙 전시(戰時)가 되다 보니 모두들 대충 자신의 상식선에 맞는 대답만 해 주면 동료인 줄 착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렇기에 제임스 일행으로서는 자신들도 믿기 힘들 정도로 모든 일이 간단하게 척척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크라레스에서 왔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 하나만으로도 거의 무조건 통과에 가까운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쪽에서 병력을 파병한다는 것이 1급 비밀에 해당하는 극비였기에 가능한 사실이었다. 크라레스에서는 여태까지 3차에 걸쳐 35명, 31명, 16명을 보내왔다. 그러니 또다시 다섯 명을 보내오지 말라는 법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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