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3화 (201/930)

나는 약속을 지켰다

다크는 한가로이 앉아서 자신이 매우 즐기는 술인 ‘레드 드래곤’을 마시고 있었다. 잔이 비면 옆에 서 있는 기사가 재빨리 채워 넣고 있었다. 이때, 미네르바가 땀에 후줄근하게 젖은 채 씩씩거리며 달려왔다. 그녀는 한가롭게 술을 마시고 있는 다크를 보고 더욱 열불이 치솟는지 검을 뽑아 들고는 다크를 향해 겨누면서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왜 키에리를 살려 보낸 거지? 중간에 불청객들이 끼어들었다고 하지만 너는 충분히 그럴 실력이 있었어. 추격전에 참가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처음부터 키에리를 죽일 생각이 없었던 것 아냐?”

그때의 상황은 미네르바가 따질 만도 했다. 다크의 실력은 그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그 이름만으로도 상대에게 공포를 심어 주는 키에리와의 격투를 시종 유리하게 전개해 나가다가 드디어는 헬 프로네의 왼쪽 깊숙한 곳에 검상을 만들었다. 그 정도 검상이라면 장갑판은 물론이고, 본체를 거쳐 그 안에 타고 있던 키에리에게까지 검상을 입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미네르바는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단 한 번만 더 검을 들이대면 키에리의 목숨은 끝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세 대의 붉은색 타이탄이 나타났고, 황당하게도 다크는 그들과의 전투를 포기해 버렸다. 총사령관이 중상을 입은 관계로 이때를 기점으로 코린트 기사단은 후퇴를 시작했다. 하지만 상대가 후퇴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미네르바는 더 이상 전과를 확대할 수 없었다. 붉은색 타이탄들과 흑기사들을 중심으로 크루마군의 추격을 저지하는 상태에서 벌어진 매우 질서 있는 후퇴였기 때문이다.

원래가 전과가 가장 극대화되는 시점이 정면 대결이 아닌 후퇴하는 적에 대한 추격전이다. 그렇기에 미네르바는 강력한 방어진을 형성하면서 후퇴하는 적들을 향해 무리하게 공격을 감행했다가 상대방 붉은색 타이탄 두 대한테 걸려서 목숨까지 잃을 뻔한 후 열이 뻗쳐서 돌아온 것이다.

다크는 ‘레드 드래곤’을 다시 한 모금 마신 후 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면서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검을 내려놔. 죽고 싶지 않다면…….”

미네르바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그 순진해 보이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힘과 광기가 그녀의 눈동자에 서서히 떠오르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미네르바는 황급히 검을 집어넣었다. 상대는 키에리도 당할 수 없었던 검의 고수. 타이탄이라도 가져다가 기습 공격을 하지 않고서는 없앨 가능성이 없었다. 미네르바가 검을 집어넣은 후에야 상대의 눈동자는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다크는 또다시 잔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신 후 약간 비웃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훗, 나는 분명히 약속을 지켰다. 너는 분명히 상대를 밀어붙일 때까지 키에리를 막아만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 또한 약속했었지. 키에리를 막아 주겠다고 말이야. 틀렸나?”

“그건 그렇지만…….”

“그래서 나는 막아 줬어. 나로서 할 일은 다 한 거야. 키에리를 죽이든 살리든 그건 약속의 내용에는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지 않았어.”

“그렇게 억지 부리지 마. 그 녀석이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엄청난 위협이 돼. 앞으로 세울 모든 작전에 키에리의 전투력이 포함되어야 하니까.”

그 말에 다크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당히 부드러웠다.

“자, 자……. 그 녀석을 내가 살려 주고 싶어서 살려 준 것은 아니었어. 너도 봤겠지만 격전의 와중에 그 시뻘건 놈들만 끼어들지 않았다면 아마 죽일 수 있었겠지. 너도 상대해 봤다면 그 녀석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텐데?”

미네르바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두 대의 적색 타이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상대방의 실력도……. 그때 미네르바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것이다.

“그건 알아. 둘 다 마스터급. 그리고 한 명은 거의 마스터에 근접한 인물이었지.”

“그런 패거리들을 뚫고 들어가서 키에리를 죽이라는 것은 나한테 조금 무리한 부탁이 아닐까?”

물론 상대의 말을 믿을 정도로 미네르바는 순진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미네르바는 찬찬히 상대의 눈을 쏘아봤다. 맑고 투명한 눈, 도저히 무술을 익혔다는 것 자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순진해 보이는 눈이었다. 일단 상대의 의도가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후퇴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괜히 동맹국끼리 자중지란을 일으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좋아, 그건 내가 잘못했어. 사과하지.”

“그 사과는 받아들이지. 오늘은 정말 멋진 날이었어. 키에리를 위해 건배.”

또다시 술을 입속에 털어 넣고 있는 소녀를 보며 미네르바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서둘러 말했다.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 나는 이만 가 볼 데가 있어서 말이야.”

“어디 가는데?”

“왜 붉은색 타이탄들이 우리 쪽 진영에서 뛰어나왔는지 알아 봐야지.”

총총히 사라지는 미네르바의 뒷모습을 보며, 다크는 천천히 잔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미네르바의 뒷모습을 향해 잔을 살짝 쳐들면서 말했다.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 수확도 함께하면 좋을 텐데 말이야. 꿀꺽!”

다크가 빈 잔을 내려놓자 옆에 서 있던 기사는 또다시 잔을 채워 넣고 있었다. 그런 기사를 지긋이 바라보며 다크가 말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무엇을 말씀이옵니까? 전하.”

“이번 전쟁의 끝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소신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모를지도 모르지. 술수가 이렇듯 판을 치니 뒤 수를 읽기가 참 힘드니까……. 통신 마법진을 준비하라고 일러라.”

“옛, 전하.”

잠시 후 그 기사는 준비가 다 되었다고 전하러 달려왔다. 그는 자신의 상관이 천천히 일어서서 술이라고는 전혀 한 방울도 마신 것 같지 않은 걸음걸이로 막사를 향해 걸어가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소녀가 이 자리에 앉아서 마신 술은 거의 한 병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오, 까만 토끼. 웬일인가? 자네가 통신에 다 나오고 말이야.”

토지에르는 싹싹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예, 전하. 일은 어떻게 되셨사옵니까?”

“뭐 어떻게 되기는…, 키에리는 지금쯤 상처 입은 야수가 되어 있을 테니 조심하는 게 좋겠지.”

“승리하셨군요.”

“당연히.”

“축하드리옵니다, 전하.”

“축하할 필요는 없어. 원래 저런 녀석은 죽여 버려야 개운한데 말이야.”

“잘하셨사옵니다. 제가 드린 부탁을 잊어버리지 않으셨군요.”

토지에르는 미소를 띠고 말했지만 다크의 대꾸는 매우 퉁명스러웠다.

“뭐, 마지막 순간에 운이 좋아서 떠오른 것뿐이야. 그때 잠시 멈칫하니까 코린트의 신형 타이탄들이 달려들어서 녀석을 구출해 갔지. 그건 그렇고, 전황은?”

“예, 크로아 공작 전하께서는 전선을 돌파하고 맹진격 중이십니다. 전황이 매우 순조롭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녀석들한테는 지금 마스터가 세 명에 키에리까지 있어. 그런데 키에리를 살려 뒀으니 루빈스키의 목숨이 위태롭지 않을까?”

토지에르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전하께서 돌아오신다면.”

“호, 그런 계획이었군.”

“예,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빨리 회군하시옵소서.”

“알겠다.”

여러 제국들이 얽히는 힘의 시대

전 세계는 의외의 사태에 경악했다. 처음부터 크루마가 코린트와의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가정은 현실로 드러났다. 그 때문에 가장 놀랐던 것은 정작 크루마 자신들이었을 것이다. 크루마는 동맹국들을 향해서는 이길 수 있다느니, 어쩌느니 하며 막대한 전리품을 약속하는 감언이설로 그들을 꼬드긴 것일 뿐, 처음부터 크루마가 승리를 거둘 가능성은 아예 없었던 것이다.

크루마의 수뇌부들은 코린트의 선발 공격대를 어떻게 해서든지 막아 낸 후, 지루한 장기전으로 몰고 가다가 휴전 협정으로 끌고 갈 생각이었다. 코린트가 미란 국가 연합 전선에서 벌어지는 지루한 전쟁 때문에 진이 빠져서 휴전 협정에 서명만 해 준다면 크루마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휴전이 가능하려면 먼저 사력을 다해서 1차 공격대를 막아 내든지, 아니면 그들을 격퇴해야만 했다. 물론 크루마로서도 엄청난 희생을 치를 것은 분명했다. 코린트의 근위 기사단과 금십자, 은십자 기사단을 막는 데 희생이 적다면 오히려 그게 사기(詐欺)라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그런 후에 코린트가 전쟁에 지칠 때쯤, 혹은 의외의 피해에 경악해서 이번 전쟁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권력 투쟁의 암투에서 밀려 버린다면, 그때부터 슬쩍 외교 사절을 파견하여 휴전으로 몰고 가면 일은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제1차 공격진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데 있었다. 그것도 크루마가 생각하지 못했던 대승을 거뒀다. 코린트의 기사단들은 막심한 피해를 입고는 전선에서 재빨리 후퇴하여 쟈크렌 요새로 향했고, 이동 속도가 떨어지는 군대들은 크루마 기사단의 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코린트 기사단의 패퇴가 던지는 의미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제 코린트는 더 이상 무적이 아니었고, 최전선에서의 패퇴 덕분에 잘못하면 쟈코니아 지방의 일부까지 잃을 가능성마저 안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예정에는 없지만 슬며시 탐욕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막아 내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코린트 땅의 일부라도 뺏으려고 들게 되는 것이다.

코린트는 편의상 쟈코니아, 코린토비아, 스웨인, 크로나사라는 거대한 네 개의 지구로 나뉘어져서 관리되고 있었다. 그 네 지역의 경계는 강이거나 산맥이었기에 국경선으로 삼기에도 그만이었다. 그렇기에 크루마로서는 그 네 개의 땅덩어리 중에서 최소한 크루마에 가장 가깝게 위치하고 있는 쟈코니아 평원만이라도 차지하려고 드는 것은 아마도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문제는 예상을 뒤엎고 크루마가 코린트의 대군을 막아 낸 것은 둘째 치고, 이제 입장이 뒤바뀌어 코린트 내로 진격해 들어갈 준비를 시작하자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된 것은 미란 국가 연합이었다. 미란 국가 연합이 양 대국의 전쟁에서 크루마의 손을 들어 준 이유도 지금의 현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었을 뿐, 절대로 양국의 균형이 파괴되기를 원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양국의 균형이 무너진다면 그사이에 위치한 미란 국가 연합의 미래는 매우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도 이제 손을 떼는 것에 찬성입니다.”

지그프리트 데 가므 3세는 원탁에 둘러앉은 왕들을 쭉 둘러본 후 예상대로라는 듯 말했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군. 본인 또한 더 이상 크루마를 도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오. 문제는 크루마가 본국에서 발을 빼는 것을 용납해 주느냐 하는 것인데…….”

“용납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이번 전쟁에서 본국의 피해는 막심합니다. 주 전장이 되어 버린 가므는 거대한 타이탄들이 뛰어다녔으니 엉망진창이 된 상태고, 또 전화에 휩쓸려서 국민들의 피해도 엄청납니다. 그 문제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본국 기사단이 너무나 약화되었다는 것이죠. 라이오네 기사단이 전멸했고, 또 중앙 기사단은 보유 타이탄을 반 이상 상실했습니다. 이제는 전후 복구 사업에 총력을 다해야 할 때입니다. 이런 현실을 크루마에 인지시켜야만 하죠.”

“그건 자네 말이 맞아. 양 대국의 전쟁에 끼여 싸웠으니 그 정도 피해는 당연하겠지. 또다시 알카사스에서 타이탄을 대량으로 구입해야겠군.”

“노획한 타이탄 중에서 저희들 몫으로 떨어진 것들과, 고물이 된 본국 타이탄들을 해체한다면 라이온 20대와 타이거 30대 정도는 구입할 수 있을 겁니다. 이미 알카사스에 주문을 하긴 했는데, 현금 인도 조건을 요구하더군요. 그들도 이번 전쟁이 예상외로 풀려가기 시작하자 매우 당황하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큰일이야. 만약 일이 잘못되어 크루마가 쟈코니아 지방을 차지하고 앉아 버린다면 우리들로서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게 되는 거지. 크루마가 원정에서 패배한다면 좋겠는데 말이야.”

“의장, 동맹 협약을 좀 더 철저히 해 두고, 크루마와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어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가므 의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것도 좋겠군. 동맹국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참 불행한 일이지. 자네가 힘 좀 써 주겠나?”

“예, 좋은 소식을 가져올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좋아, 부탁하겠네. 그리고 크루마가 본국에 마수를 뻗을 우려도 있으니 그 대비책도 생각해야 하네. 아르곤과 동맹을 맺는 것은 어떨까?”

“아르곤은 곤란합니다. 원래 아르곤은 동맹을 맺는 조건에 자국의 크로노스교를 포교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꼭 집어넣습니다. 그 때문에 아르곤과 동맹을 맺었던 세 개의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종교를 악용하여 마법사들과 기사들의 반목을 부추겨 내전이 발생하게 한 후 동맹국의 입장에서 내전을 수습해 준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투입, 결국은 그들을 흡수해 버렸습니다. 그런 전례가 있는 만큼 아르곤과의 동맹은 절대 불가합니다.”

“그렇다면 크라레스는 어떨까? 이번 전쟁에서 예상외의 힘을 발휘한 크라레스와 외교적으로 가까워진다면 큰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크라레스도 가까운 동맹국이 거의 없으니 말이지. 그들이 본국과의 동맹을 받아들인다면 좋겠는데 말이야.”

“아마도, 이번 전쟁에서 크라레스는 잃었던 크로나사 평원을 되찾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본국에 매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죠. 이제부터 전 세계를 코린트 혼자서 지배하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바야흐로 한동안은 여러 제국들이 얽히는 힘의 시대가 도래하겠죠. 이런 상황을 잘 극복하려면 뛰어난 우방이 많을수록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부로는 힘을 키워야 할 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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