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가 단출한 일행들을 거느리고 치레아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녀가 온다는 것을 보고받은 부총독이 마중 나와 있었다. 부총독은 여태껏 있었던 기나긴 상황 보고를 하려고 했지만 다크는 대충 필요한 것만 몇 가지 물어본 후 회의를 끝냈다. 겨우 6일의 휴가밖에 없는 상태에서 영양가 없는 보고를 장시간 들어 줄 이유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총독의 입장에서는 조금 달랐다. 지금 이곳 치레아는 겨우 1개 경장 보병 사단과 친위 기사단이 보유한 전력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약소한 병력으로 막아야만 하는 상대는 거대한 아르곤 제국이었다.
“자네가 대충 알아서 대처하도록 해.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까만 토…, 아니 토지에르에게 보고하면 될 거야. 지금 전 병력을 코린트 전선에 쏟아 붓는다고 본국 방위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 둘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지.”
“그래도…….”
“아, 더 이상 필요 없는 얘기는 때려치우자구. 떠들어 댄다고 없는 병력이 튀어 나오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이제 회의를 끝내기로 하지.”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부총독은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밖에 기사 몇 명이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모두들 뭔가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더군요.”
부총독의 말을 듣고 다크는 의자에 다시 주저앉으며 말했다.
“좋아, 들여보내라고 해.”
부총독이 나간 후 조금 있다가 파시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약간의 긴장 때문인지 평상시에도 별로 표정이 없던 얼굴이 더욱 굳어져 있었다. 파시르는 들어서자마자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문 옆에 풀어 놓은 후 다가와서 필요 이상으로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그래, 무슨 일인가?”
“예, 전하께서 저에게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것은 알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염치없는 부탁이오나 친위 기사단을 은퇴하고 싶사옵니다.”
“뭐? 갑자기 왜?”
“아무리 대 제국 코린트와 대적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크라레스가 손잡은 국가는 크루마. 제 조국의 원수이옵니다. 원수와 손잡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전하께 말씀드리는 것이옵니다.”
다크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경은 영원한 동맹국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나?”
“예?”
“아마도 크루마와의 동맹은 1년도 지나지 않아서 깨질 거야. 그리고 10년 이내로 전쟁에 들어가게 되겠지. 내기를 해도 좋아. 그때를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만약 지금 여기서 나간다면 크루마를 상대로 복수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거야.”
“진정이시옵니까?”
“물론이지. 자네는 그동안 검술이나 좀 더 닦고 있으라고. 아마도 그때쯤이면 지금보다 더 좋은 타이탄을 지급받게 될지도 모르지. 드래곤 사냥 때도 보지 않았나? 크루마의 신형 타이탄은 엄청나게 강하다는 것을 말이야. 그것들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이쪽도 더 좋은 것을 많이 만들 수밖에 없어. 자 열심히 해 보게. 딴 생각 하지 말고.”
“예, 전하.”
파시르가 어느 정도 수긍하고 밖으로 나간 후, 이번에는 몇 명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미카엘, 팔시온, 미디아, 가스톤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다크는 미소를 지으며 환영했다.
“어서 와. 오랫동안 고생들이 많았지?”
반갑게 맞이하는 다크를 보며 미카엘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아…, 정말 죽을 지경이었지. 콜렌 기사단이 빠져나간 다음부터 그 공백을 메운다고 매우 바빠졌거든.”
“모두 앉아.”
다크는 그들에게 자리를 권한 다음 밖에 대고 외쳤다.
“세린! 차를 내와라. 그리고 술도.”
문틈 사이로 가느다란 목소리가 다크의 외침에 답해 왔다.
“예.”
술이라는 말이 나오자 팔시온이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대낮부터 술은 됐어.”
“왜? 너희들 술 좋아하잖아.”
“우리들이 좋아하는 것은 시원한 맥주지. 대낮부터 너처럼 그 독한 브랜디를 마시는 사람은 없다구.”
“그럴까? 이봐! 세린, 브랜디 한 병하고 맥주 좀 가져와.”
“예.”
“안 그래도 나중에 찾아갈 건데, 뭐 하러 이렇게 급하게 왔어?”
“실은 또 딴 곳으로 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렇게 찾아왔지. 우리는 도저히 여기서 하는 일이 적성에 안 맞아. 기왕이면 전쟁터에 좀 데려가 달라구. 모험가 생활을 하다가 한 곳에 박혀 있으려니 몸이 근질거려서 죽을 지경이야.”
미소 띤 그녀의 질문에 팔시온이 대표 자격으로 대답을 했고 덧붙여 미디아가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그걸 부탁하러 왔어. 코린트와의 전쟁터, 꼭 참전해 보고 싶어.”
“하지만 나하고 같이 다녀 봐야 싸울 일은 거의 없을 텐데? 나는 유령 기사단에 합류할 거니까 말이야. 흥분을 맛보고 싶다면 콜렌 기사단 쪽이 좋지 않을까? 그쪽이 반군 토벌을 담당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모두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아니, 그런 곳에는 전쟁이 끝난 후에라도 갈 수 있잖아. 우리는 타이탄들끼리 치고받는 것을 구경하고 싶다구.”
“그래, 나도 흑기사라는 것 한번 구경해 보고 싶었어.”
“하지만 너희들에게는 위험해. 너희들은 정찰조에 배속되게 되는데, 재수 없으면 상대방 그래듀에이트와 싸울 가능성도 있지.”
“그런 것은 상관없어. 싸나이는 말이지, 검을 잡고 죽는 것이 소원…, 으갸갹!”
미카엘이 폼 잡고 말하자 미디아는 얄밉다는 듯 미카엘의 살덩어리를 잔뜩 틀어쥐고 비틀어 버린 후 투덜거렸다.
“야, 사나이만 그런 소원을 가지고 있냐? 이 멍충아. 그리고 저 가스톤이 검을 잡고 싸울 수는 없잖아. 이봐 다크, 우리들은 죽어도 상관없으니까, 다만 전사답게 역사가 만들어지는 현장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함께 가기로 하지.”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모두들 환성을 질러 댔다.
“끼얏호, 빨리 준비를 해야겠군. 언제 출발하지?”
“6일 후. 크라레인시 공방전에 참가하게 될 거야.”
“좋아. 기대가 되는군. 흐흐흐…….”
다크가 오랜만에 주어진 휴가를 즐기고 있을 때 미네르바의 사정은 완전히 달랐다. 그 주 원인은 제임스 패거리 덕분이었다. 기사단들끼리의 대규모 접전을 통해 광대한 영토를 점령할 수 있었지만 아직은 완전히 뺏은 것이 아니었다. 기사단을 격퇴한 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영토에 주둔 중인 군대를 격파하는 일이다. 그걸 단시간 내에 해내지 못하면 그 군대는 퇴각을 완료하든지 아니면 산속에 숨어서 게릴라가 되는 것이다. 또 지방 영주들도 토벌해야 한다. 지방 영주들은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자신들의 토지를 지키기 위해 휘하의 사병들과 함께 끝까지 싸우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봉건제에 의해 농노들을 통치하는 방식은 새로운 점령지를 확보했을 때 대단히 유용하다. 기사들이나 마법사 등 자신의 군주를 ‘정한’ 사람들이나 영지를 ‘하사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군을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는 다르다. 이 시대의 경우 한 국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의식은 거의 없었다. 농노들의 경우 자신들의 주인이 바뀔 뿐이었고, 자유 무역 지대에 있는 상인들이나 평민들의 경우 세금을 납부할 대상이 바뀌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용병(傭兵)들의 경우도 자신의 주인이 돈을 낼 수 없을 것 같거나, 아니면 돈을 지급하지 못하면 부담 없이 떠나 버린다. 그런 다음 새로운 주인을 위해 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오직 국왕이나 황제를 위해 충성의 서약을 했던 지방 영주나 귀족, 또는 기사들만이 저항하게 되는데 이들의 저항을 재빨리 뿌리 뽑는 것이 점령지의 안정을 위해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그리고 대규모 전쟁이 벌어진 후에 발생하게 되는 게릴라성 산적들 또한 토벌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미네르바는 이러한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점령지를 완전하게 통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저항 세력 안에 타이탄을 지닌 오너들이 일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략 3∼6대의 타이탄을 거느린 것으로 추정되는 적은, 상당수의 기사들이나 마법사를 포함한 소규모 기사단이라고 봐야 했다. 그들은 지방 영주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크루마 군대를 괴롭히고 있었고, 그곳에 파견 나온 타이탄 한두 대 정도는 간단히 박살 내 버렸다.
“제8경장 보병 사단으로부터 제536보병 연대의 패잔병들과 합류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사옵니다.”
“뭐라고? 그렇다면 거기 파견 나가 있던 쿠로닌 남작은?”
“쿠로닌 남작 이하 두 명의 기사는 전사한 것이 확실하옵니다.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쿠로닌 남작은 타이탄을 꺼내 들고 달려들었지만 상대방의 붉은색 타이탄에 목숨을 잃었다고…….”
쾅!
얼마나 세게 내려쳤는지 탁자가 나무 조각을 흩날리며 박살 나 내려앉았다.
“제기랄! 이게 지금 몇 대째야?”
“후방 각지에서 타이탄 전투가 동시 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사옵니다. 아무래도 상대는 최정예 기사들을 남겨 둔 모양이옵니다. 흑기사를 봤다는 패잔병까지 있을 정도이옵니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안 돼. 그렇다고 전방의 타이탄을 뺄 수는 없다. 쟈크렌 요새에는 적의 주력 부대가 남아 있어. 만약 이쪽에서 병력을 뺀다면 역으로 치고 나올 가능성마저 있다.”
“하지만 그들을 계속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옵니다, 전하.”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마법사들에게 일러서 통신 채널을 한두 개 정도 더 만들라고 해. 그 채널은 놈들을 발견했을 때만 써야 하고, 그러면 제때 보고를 받을 수 있겠지. 그런 후 오너 10여 명을 대기시켜 둬라. 언제든지 투입이 가능하게 말이야.”
“전하, 오너들의 등급은 어느 정도로 하는 것이 좋겠사옵니까?”
“놈들도 근위 기사단을 투입했으니 이쪽도 최소한 카마리에는 되어야 하겠지.”
“예, 곧 조치를 취해 놓겠사옵니다.”
“제길, 루엔이 살아 있었다면 많은 도움이 되었을 텐데. 루엔 자네에게 가르칠 것이 너무나도 많았었는데, 그걸 다 배우지도 못하고 그렇게 빨리 가 버리다니…….”
미네르바는 무술을 익히는 일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았다. 결혼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가사(家事)라는 것에 시간을 뺏기게 되고, 또 아이를 낳기라도 한다면 거의 1년에 가깝게 무술을 익히기도 힘든 사태가 벌어진다. 그렇기에 그녀는 결혼을 포기했던 것이다. 자식을 낳아 보지 못했던 미네르바였기에, 자신의 대를 이을 루엔 공작을 자식처럼 아껴 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요즘같이 바쁠 때 자신보다도 먼저 가 버린 루엔의 존재가 그리운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참, 스펜과 아더, 샤트란은 치료가 끝났나?”
“예, 지금 거의 치료가 끝난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때 아르곤 성기사단과의 전투에서 탈진했을 뿐, 부상을 당한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좋아. 타론이 죽은 지금, 그 녀석들은 유일한 드래곤 슬레이어들이야. 3차분으로 생산되는 안티고네를 그 아이들에게 우선적으로 지급하도록 해라.”
“예, 전하.”
“코린트의 주력 부대가 살아 있는 한, 이쪽도 대비를 최대한 해야겠지. 그린레이크 공작에게 연락해서 이번에 노획한 코린트 타이탄을 해체한 것은 모두 다 에프리온으로 생산하라고 전해.”
에프리온은 대마법사 안피로스가 크루마 제국의 근위 타이탄으로 생산했던 것으로 헬 프로네를 제외한다면 그의 설계작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타이탄이었다. 즉, 1.5의 출력을 가지는 카마리에에 비했을 때, 전투 중량이 5톤 정도 늘었다고 하지만, 출력은 0.2나 상승했기에 전체적인 파워는 훨씬 더 뛰어난 타이탄이었다.
“예? 하지만 전하, 그건 본국의 주력 타이탄 골고디아와 비교해 너무 등급 차이가 나옵니다. 그리고 에프리온으로 만든다면 두 배 이상의 시간이 들어가니까, 계획대로 차세대 주력 타이탄인 카마리에를…….”
미네르바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어조는 확고한 것이었다.
“그게 아니야. 경은 이번에 코린트와 전투를 하고도 느끼지 못했나? 코린트의 기사들은 강하다. 한 등급 떨어지는 타이탄으로도 본국의 기사들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단 말이야. 기사들의 검술 실력이 떨어지니까 타이탄의 질이라도 올려놔야 균형이 맞는단 말이다. 알겠나?”
“예, 전하.”
“폐하께 드린 요청은 어떻게 되었나?”
미네르바의 말에 상대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말했다.
“예, 전하의 요청은 기각되었사옵니다. 모처럼 얻은 점령지를 포기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단호한 결정이셨사옵니다.”
“제기랄, 지금 승리를 얻은 김에 코린트와는 화해를 해 버려야 해. 점령지로서 유지도 안 되는 이따위 땅덩어리가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이야? 또 우리의 적은 이제 코린트가 아니야.”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
의아해하는 노장군을 향해 미네르바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크라레스다. 크라레스에 그녀가 있는 한 조만간 크라레스는 코린트 이상의 강대국으로 성장할 거야. 크라레스의 기사단이 강대해지기 전, 그러니까 기사단이 그녀의 힘을 받쳐 주지 못하는 지금, 무슨 일이 있더라도 크라레스를 멸망시켜야 해. 그런데 본국의 그 머저리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빌어먹을 자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