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나타난 까미유를 보고 제임스는 그가 급히 나타날 줄 이미 짐작이나 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앉게.”
의자를 권하며 제임스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여러 개의 잔들 중 하나를 꺼내어 브랜디를 한 잔 가득 부었다. 물론 자신의 앞에는 반쯤 마시다 남은 잔이 하나 놓여 있었다. 까미유는 미소 짓는 제임스의 표정과 잔에 가득 부어져 있는 짙은 호박색 액체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질문을 시작했다.
“언제 돌아가셨나?”
“아마도 새벽 두 시 정도…….”
“그럼, 자네는 거기 없었나?”
“아니, 옆에서 도와 드렸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장례식도 주관했었는걸.”
제임스의 대답이 상당히 비비 꼬인 것이 특이했기에 까미유는 다시금 물었다.
“도와 드려? 뭘?”
“임종을.”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까미유는 더듬거리며 외쳤다.
“설마…, 자살이란 말인가? 왜?”
멍청한 표정을 짓는 까미유를 바라보며 제임스는 히죽이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제임스는 슬쩍 일어서는 까미유의 옆에 앉은 후 귓속말로 속삭였다.
“살아 계셔.”
“뭐?”
경악한 듯 외치는 까미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제임스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쉿! 누가 듣는다구. 살아 계시지만 대외적으로는 돌아가신 거야.”
“그렇다면 적들을 속이기 위해서?”
제임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속삭였다.
“아니, 아군들을 속이기 위해서지. 멍청한 황제 폐하께서 칙명을 내리셨어. 아버지에게 패전의 책임을 묻고자 하니 수도로 최대한 빨리 귀환하라는 것이었네. 물론 벌이 뭔지는 짐작하겠지?”
“참수형(斬首刑)인가?”
“당연히. 로체스터 공작 전하께서 아버지의 구명 운동을 위해 수도로 달려가셨지만 실패하셨어. 내 목숨을 살리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고 하시더군.”
“그렇다면 그로체스 공작 그 자식이!”
“제발 목소리 좀 죽여.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이제야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대충 눈치 챈 까미유를 향해 제임스는 핀잔을 준 후 다시 나지막한 어조로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그 녀석 말고 또 누가 있겠나? 너구리같은 밥맛 떨어지는 녀석이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정권을 잡아 보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는 거겠지.”
“그래서? 대공 전하께서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따르셨다는 거야? 적이 얼마나 강했었는지는 자네도 잘 알잖아. 그리고 로체스터 전하도. 상대방의 전력으로 미뤄봤을 때 주력 부대가 살아서 후퇴한 것만도 아레스(Ares : 전쟁의 신)께서 도운 것이었어.”
“누가 그걸 모르나? 하지만 칙명이 내려왔어. 일단 폐하께서 말씀하신 이상 그것이 아무리 잘못된 것이라고 해도 우리들이 기사인 이상 지켜져야 해. 그 때문에 아버지께서 수도로 귀환하시겠다는 걸 만류한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자네는 아나? 로체스터 전하께서 만류하신 덕분에 떠나실 결심을 하신 거야.”
까미유는 주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방 주위를 다시 한 번 빙 둘러본 후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렇다면 시체는? 잘못 처리하면 들킬 수도 있어.”
“걱정하지 마. 아버지께서는 어젯밤 자결하신 것으로 했어.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하신 것으로 되었지. 영예로운 전사자로 처리되었기에 나한테까지 화가 미치지 않은 거야. 로체스터 전하께서 힘을 쓰신 덕분이었지만……. 그런 분의 시체를 확인하겠다고 여기까지 날아올 정도로 간 큰 놈은 없어. 그리고 죄인도 아니고 영예로운 전사자의 시체를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하지만 장례식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멋지게 할 필요가 있었거든. 그래서 밖에 나가서 아버지하고 체형이 비슷한 녀석을 하나 죽였지. 마법으로 얼굴 모양을 약간 변형한 후 장례식에 써먹었기에 부하들도 눈치 채지는 못했어. 나중에 몇 달 정도 지난 후 이장(移葬)하기 위해 파내면 다 썩어서 알아볼 수 없을 테니까 뭐 뒤탈도 없을 거야.”
“그렇다면 그 마법사 녀석의 입을 막아 두는 것이 좋겠군.”
까미유가 살기 띤 어조로 나지막이 말하자 제임스는 미소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후후…, 걱정 마. 아버지와 함께 갔으니까 말이야. 아직도 치료 마법을 좀 더 받으셔야 하니 잘되었지 뭐.”
“누군데?”
“누구기는…, 죠드지. 원래 처음 아버지의 상처를 치료한 사람은 메니테스였는데, 아버지로서는 죠드 쪽이 더 좋았던 모양인지 의식이 깨신 후에는 죠드로 바꾸라고 지시하셨지. 물론 메니테스는 아버님이 자살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 그러니까 별 문제는 없을 거야.”
“호위 기사는?”
“아버지께서 거절하셨어. 죄인에게 무슨 호위가 필요하겠느냐고……. 기사의 맹세를 저버린 자신은 더 이상 기사가 아니라고 하셨지. 기사로서 자격도 없는 자신이 호위를 받는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떠나셨지.”
“제기랄! 적들이 코린트를 집어삼키려고 설치는 이때, 권력 투쟁이나 하고 있다니! 멍청한 자식들!”
열 받아서 외치는 까미유를 바라보며 술잔을 들고 쭉 들이켠 제임스는 또다시 한 잔 더 따르면서 말했다.
“누가 아니래나? 자네도 술이나 한잔하게. 나도 지금 기분이 더럽구먼. 그런 의미에서 한 잔 더 해야겠어.”
“그래, 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위대한 무인을 위해서 건배.”
까미유가 술잔을 높이 들고 외치자 제임스도 그것에 찬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자네 말 한번 멋지게 하는군. 그래, 건배!”
그날 밤 늦게까지 둘의 술자리는 계속되었다. 잘못되었다는 것이 뻔한지 알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기사인 이상 ‘기사의 맹세(Oath of the Knight)’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현실을 탈피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그들을 더욱 과음하도록 만들었다.
“큰일 났습니다.”
다음 날 점심때쯤 마법사가 뛰어 들어왔을 때 제임스와 까미유는 아직도 테이블 위에서 엎어져 자고 있었다. 그들의 주위에 굴러다니고 있는 수많은 빈 병들이 그들이 마신 술의 양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제임스는 아직도 술에서 덜 깬 얼굴을 천천히 들었다. 부스스한 그의 긴 머리카락이 시선을 가렸기에 그는 거친 동작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젖혔다.
“무슨 일이냐?”
아직도 약간 꼬부라진 음성으로 말하는 제임스를 향해 딱하다는 시선을 보내며 마법사는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레토 경께서 전사하셨습니다.”
레토는 제2근위대의 명성에 어울리는 매우 뛰어난 기사였다. 크루마가 기사보다는 마법사가 강한 나라라면 코린트는 크라레스와 마찬가지로 오랜 옛날부터 기사가 매우 강력한 대국이었다. 오죽하면 이 강대한 제국이 코타스 공작이 합류하기 전까지 고급 타이탄이라고는 생산조차 못 해 봤겠는가? 이번 전쟁에서 크루마의 강력한 신형 타이탄을 막아 낼 수 있었던 것도 기사 개개인의 실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강한 기사들 중에서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근위 기사단 소속 기사가 전사하다니? 제임스는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뭐라고? 레토가? 어떻게 된 일이냐?”
“예, 예정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연락이 안 되어서 정찰을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긴 막대기에 거꾸로 매달린 시체들을 발견했답니다.”
“거꾸로 매달아 놨다고?”
“예, 각하. 레토 경과 함께 갔던 기사들과 마법사였습니다. 정찰조의 보고로는 시체들은 거의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고 그 밑에는 목이 없는 레토 경의 시체가 있었답니다. 주위에는 수많은 타이탄 발자국들이 찍혀 있었는데, 아무래도 열 대 이상이 동원된 것 같았답니다.”
“타이탄의 종류는?”
“예, 놈들의 신형 한 대하고 나머지는 카마리에였답니다.”
“흑기사 한 대. 정말 딱 좋은 먹이였겠군. 제기랄.”
마법사는 품속에서 뭔가 종이쪽지를 꺼내어 제임스에게 건넸다. 제임스는 아직도 숙취가 풀리지 않은 손으로 천천히 펴며 물었다.
“뭔가?”
“레토 경의 시체 곁에 떨어져 있었다고 하옵니다.”
제임스는 쪽지를 펴다가 말고, 마법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정찰 나간 녀석들에게 흔적은 깨끗하게 지우라고 지시해 뒀겠지?”
“예, 일곱 군데의 이동 마법진을 거쳐서 이동해 왔습니다. 물론 숯을 사용했기에 흔적을 발견당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제임스는 쪽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좋아. 허…,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니까 알아서 꺼지라고? 빌어먹을 자식들!”
제임스는 종이를 꾸겨서 집어던지며 말했다.
“오늘 저녁에 출동할 수 있도록 모두 준비해 두라고 해.”
“예? 레토 경께서 전사하셨는데, 움직이실 겁니까? 위험하지 않을까요?”
의아한 듯이 물어오는 마법사를 향해 제임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오늘 놈들도 공을 세우고 기분이 좋을 텐데, 이런 때 뒤통수를 치는 게 더 좋아.”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