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2화 (210/930)

후작을 호위하는 공작

크루마 제국과 코린트 제국 사이에는 지루한 소모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양쪽 다 간간이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대규모 격전으로 연결되지는 않고 있었다. 대부분의 전투가 쟉센 평원을 평정하려는 크루마군과 그 저항군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단순한 소모전이 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린트 제국의 경우 키에리가 생존해 있을 때의 군부(軍部)는 매우 강력한 힘을 자랑했었다. 키에리를 기점으로 까뮤, 리사, 그라세리안이 뭉쳐 코린트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그들이 권력을 잡은 후부터 코린트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그라세리안의 능력으로 타국에 비해 뒤처져 있던 마법을 부흥시켰고, 막강한 타이탄들을 대량 생산했다. 그리고 그 힘을 밑바탕으로 크라레스 제국 영토의 대부분을 빼앗았다. 그리하여 코린트를 세계 최강의 대국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집권 기간은 너무 길었다. 모두들 90세에 달하는 나이에 이르도록 50여 년에 가깝게 정권을 쥐고 있었으니 당연히 그에 불만을 품은 인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른 제국들처럼 이들이 늙어서 은퇴할 가능성이라도 보였다면 그들도 이렇듯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로서는 이번 기회를 이용하지 못한다면 자신들이 살아서 정권을 잡아 볼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그라세리안이 행방불명되었고, 리사는 전사했으며, 키에리는 크루마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중상을 입었다. 최고 권력자들의 대부분이 갑자기 사라졌기에 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황제를 설득하여 키에리를 실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키에리의 경우 아들이 셋이나 되었고, 그들은 각각 뛰어난 실력에다가 키에리라는 배경에 힘입어 매우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첫째는 발렌시아드 기사단장, 둘째는 제1근위대 기사, 셋째는 제3근위대장.

키에리를 처형한다면 그 아들들까지 모두 다 없애 버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사실상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타국과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마지막 남은 실력자 까뮤와 협상을 하기에 이른다. 전사로 발표하기로 하고 자살하는 것으로. 그 제의는 받아들여졌고 키에리는 권력의 전면(前面)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처음부터 승리를 자신하며 전쟁을 주장해 왔던 군부는 패전 덕분에 입지가 약화되었고, 현 황제의 먼 친척뻘이 되는 그로체스 공작이 권력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가 자신이 쥐게 된 권력을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 제일 먼저 행한 일은 크루마 제국과의 휴전이었다. 만약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승리를 거두게 되거나 또는 패전을 하게 된다면 좋을 게 없었다. 특히 승리를 거두면 군부의 입지는 다시 강화될 것이 확실했기에 그것만은 막을 필요가 있었다.

“휴전…이라고?”

아연한 표정으로 되묻는 까뮤에게 깔끔한 복장의 젊은 무인은 다소곳이 답했다. 그 무인의 복장은 매우 화려했는데 오른쪽 가슴 윗부분에 푸른 늑대의 문장이 붙어 있었다.

“예.”

로체스터는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허허…, 크루마 따위에게 땅덩어리를 뺏긴 채 휴전을 하려 한단 말이지. 이건 폐하의 뜻이신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키에리가 들으면 땅을 치겠군. 로젠, 너는 수도에 있었으면서도 그걸 막을 수 없었느냐?”

로젠은 분하다는 듯 답했다.

“불가능했습니다. 아저씨도 잘 아시겠지만 그로체스는 폐하의 인척(姻戚).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크라레스 기사단의 움직임을 좇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구요. 그 녀석의 움직임을 알았을 때는 이미 칙명이 내려진 후였습니다.”

“허허헛, 기가 차서 웃음밖에 안 나오는군. 그래, 휴전의 조건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길, 여기서 조금 더 밀어붙이면 크루마를 자신들의 영토 안으로 몰아넣고 전쟁을 끝낼 수 있어. 지금 녀석들은 후방의 보급로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야. 그런데, 그런데…….”

로젠은 분해서 말도 잘 잇지 못하는 로체스터를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아마 그로체스 공작도 그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휴전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겠죠. 자신의 권력이 커지기 위해서는 먼저 폐하께 신뢰를 더욱 받아 내야 하니까요. 그 방법 중에 하나로 선택한 것이 휴전일 뿐입니다. 그런 후 나중에 자신이 사령관이 되든지 해서 쟉센 평원을 되찾는다면 영웅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계획이겠죠.”

“정말 치졸해서 말이 안 나오는군. 언제 떠날 거냐?”

“아마도 내일 떠날 것입니다. 단지 저는 호위를 위해 따라왔을 뿐이니까요.”

“흐음, 도중에 암살해 버릴 수는 없을까? 그렇게 해서 그 책임을 크루마에 뒤집어씌운다면……. 힘들구나. 만약 네가 호위로 따라오지만 않았어도 호위를 포함해서 모두 다 죽여 버렸을 텐데.”

로젠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그 녀석은 그걸 잘 알고 저를 보냈을 겁니다. 아버님이 전사하셨기에 이번에 저는 대공(大公)의 작위와 발렌시아드 공국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런 제가 고작 후작을 호위해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로젠은 멀리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델리피어 후작의 낯짝만 봐도 두 토막을 내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명을 내리신 이상 저는 따라야만 합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기사인 이상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지.”

로젠은 시선을 다시 로체스터 쪽으로 돌려, 똑바로 그를 쳐다보며 나지막하지만 힘 있게 말했다.

“아저씨께서 제 목숨을 거둬 주실 수는 없을까요? 델리피어 후작 녀석과 함께…….”

로체스터 공작은 그의 눈을 자세히 바라본 후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듯 중얼거렸다.

“그렇게는 할 수 없다. 먼 길 잘 다녀오거라. 겨우 그따위 일로 친구의 아들을 죽일 수는 없지.”

평화 협정

흰 깃발을 든 기사 한 명이 앞장선 가운데, 다섯 명의 기사들이 마차 한 대를 호위한 채 크루마군 진영을 향해 달려갔다. 한참 달려가자 수풀 속에서 기사 두 명이 달려 나와 그들의 길을 가로막았지만 그들은 적대감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곧장 멈춰 섰다.

“무슨 일입니까?”

앞을 가로막은 기사는 흰 깃발을 든 선두에 서 있는 기사를 향해 물었다. 하지만 그 흰 깃발을 든 기사의 뒤에 서 있는 기사를 향해 주의의 눈길을 거두지는 않은 상태였다. 푸른 늑대의 문장, 그 기사의 문장은 익히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키에리가 공들여서 키운, 근위 기사단을 제외한다면 코린트 최고의 정예라 할 수 있는 발렌시아드 기사단의 문장이라는 것을 모르는 기사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물론 발렌시아드 기사단 내에서도 오너가 아닌 기사들도 있었고, 또 마법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갑옷조차 입지 않고 태연한 표정으로 말 위에 앉아 있는 기사의 호화로운 복장 위에는 기사단장(騎士團長)임을 표시하는 자그마한 금빛 표식이 붙어 있었기에 그는 더욱 놀랐던 것이다.

“우리는 코린트의 평화 사절입니다. 양국의 평화 협상을 책임질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분에게로 안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크루마의 두 기사는 잠시 뭔가 쑤군쑤군 의논을 하더니 곧 한 명이 숲 속으로 몸을 감췄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이 그들을 향해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일단 본대에 연락해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숲 속으로 사라졌던 기사가 다시 나오더니 정중하게 말했다.

“미네르바 전하께서 면담을 허락하셨습니다.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만약 필요하다면 이쪽의 정찰조들이 나와서 길 안내를 할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말에 백기를 들고 있던 기사는 정중하게 답했다.

“예, 고맙습니다.”

미네르바를 만나기 위해 파견된 델리피어 후작은 거의 세 시간이 넘도록 마차 안에서 시달려야 했다. 미네르바는 적의 기습에 대비하기 위해 상당한 거리를 두고 기사단을 포진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미네르바의 본진에 도착했을 때 크루마 쪽에서는 다섯 명의 기사들이 마중을 나왔다. 크루마군의 병사 한 명이 마차 문을 열자 그 안에서 멋진 콧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자가 거만한 표정으로 천천히 내렸다. 그 사내는 꽤나 풍족한 귀족 집안에서 자란 듯 옷의 단추들은 모두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붉은색의 큼직한 보석이 박힌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차고 있는 검 또한 금은과 보석으로 도배가 되어 있어서 과연 이게 실전용(實戰用)인지 의심스러워 보였다.

크루마 쪽에서는 마차를 호위하고 있는 기사 때문에 사절로 온 인물의 신상에 대해 도착하기 직전까지 의논이 분분했었다. 발렌시아드 기사단장이 호위를 맡을 만한 인물이 거의 없다는 것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키에리는 상처의 악화로 인해 전사했다는 것이 첩보망에 걸렸으므로 그를 제외한다면 떠오르는 인물은 로체스터 공작인데, 그는 총사령관이었기에 이런 위험한 곳에 직접 나타날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렇다고 로체스터 공작을 제외하고 보니 키에리를 대신하여 대공의 작위를 물려받은 그가 호위할 인물은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마중 나왔던 인물들 중에서 가장 앞에 서 있던 중년의 기사는 마차에서 내리는 인물을 보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그는 그것을 환영의 미소로 대충 눈가림하며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미네르바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두들 말에서 내려 미네르바가 기다리고 있는 작은 농가로 들어가려고 할 때 농가의 문 앞에 서 있던 기사가 사신 일행의 앞을 가로막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무기를 맡겨 주십시오.”

로젠은 비무장인 상태로 이런 곳을 어슬렁거릴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그 말을 기회로 뒤로 처졌다. 또 이번 협상에서 모든 권한을 위임받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델리피어 후작이었다. 자신이 옆에 있든지 없든지, 델리피어 후작은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윗사람과 의논한 각본대로 밀어붙일 것이 뻔했기에 자신이 따라 들어가서 상대방의 눈요깃감이 되어 줄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로젠이 뒤로 처지자 세 명의 기사도 그를 따라 뒤로 빠졌고, 결국 델리피어 후작을 따라 무기를 맡기고 들어간 기사는 두 명뿐이었다.

“어서 오시오. 먼 길에 수고하셨소.”

미네르바가 반가이 맞이하는 가운데 델리피어 후작은 자리에 앉았다. 델리피어 후작이 자리에 앉는 모습을 보며 미네르바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 저런 겉만 번지르르한 얼뜨기가 나타난 것이 의외였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불리한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기에 미네르바는 본국에서 이동용 마법진을 이용하여 신속히 불러들인 외교 담당관을 왼편에 앉혀 둔 상태에서 매우 기분 좋게 델리피어 후작을 맞이했다. 하지만 협상이 진행되자 미네르바는 그냥 탁자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을 뿐, 협상은 미네르바의 왼편에 앉아 있는 날씬한 체구의 중년 사내에 의해 이루어졌다. 미네르바는 만일의 경우 상대방에서 로체스터 공작이 나타났을 때를 대비하여 앉아 있었을 뿐, 자신의 신분으로 봤을 때 델리피어 후작 따위와 상대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리를 뜨는 대신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을 택했다. 그녀는 강대한 크루마의 힘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협상은 매우 지루하게 천천히 진행되었다. 서로 상대로부터 최대한 많은 양보를 얻어 내려고 했고, 또 자신들이 가진 것을 줄 생각은 없었기에 사실 시간만 줄창 날아갔을 뿐, 대화는 제자리걸음이었다. 아마도 델리피어 후작은 이런 지루한 협상은 처음인지 그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슬슬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요 근래 30여 년간 코린트는 강압적인 외교만을 했을 뿐 이런 지루한 협상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델리피어 후작의 속마음이야 어떻든 시간이 지날수록 협상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쟈코니아 산맥을 기준으로 양국을 나눕시다. 본국은 쟉센 평원을 획득하기 위해 엄청난 피를 흘렸소. 그렇기에 절대로 그 땅을 포기할 수는 없소.”

똑같은 얘기가 벌써 몇 바퀴 돈 상태였기에 일단 그 뒤로 넘어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에 델리피어 후작은 크게 인심이나 쓰듯 말했다. 물론 쟉센 평원은 처음부터 돌려받을 가능성이 없었다. 하지만, 이걸 따지고 들면 다른 부분을 크루마에 양보할 필요가 없었기에 델리피어 후작은 그걸 계속 물고 늘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인심을 쓰는 척해야 했다.

“귀국에서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요. 좋소. 일단 이쪽에서는 쟉센 평원을 잃은 것이니 그건 어쩔 수 없다고 하고, 휴전이 선포되고 나면 쟉센 평원에 남아 있는 본국의 귀족들 이하 전쟁 포로들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줘야 하오.”

델리피어 후작의 제안은 흔쾌히 받아들여졌다.

“그건 당연하지요. 휴전 선포와 동시에 길을 터줄 것이오. 조국을 위해 피땀 흘려 싸우고 있는 그런 인물들을 본국에서 학살한다면 후세에까지 욕을 듣게 되죠. 그건 인도적인 차원에서 당연히 해 드려야 하는 것이죠.”

물론 지금 크루마군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그 귀족들이 거느리고 있는 게릴라들이었다. 상대가 그들을 데려가겠다는 데야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함에도 죽인다면 욕을 듣는다고 말해 대는 이 외교 담당관도 꽤나 얼굴 가죽이 두꺼운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 정도면 어느 정도 해결은 난 듯싶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습니다.”

또 뭔 소리를 하나 싶어 델리피어 후작의 눈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갔다.

“무엇을 말하는 것이죠, 가레신 후작?”

상대의 표정이 어떻건 신경 쓰지 않고 가레신 후작은 얼굴 가죽도 두껍게 말했다.

“귀국이 침공해 들어와서 잿더미로 만든 미란 국가 연합에 대한 피해 보상금이죠. 만약 본국과 귀국만이 얼렁뚱땅 휴전을 맺고 넘어간다면 본국의 혈맹이라고 할 수 있는 미란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 아니겠소? 그리고 귀국의 침공을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다섯 동맹국들에게도 어느 정도 손해 배상은 해 줘야 합니다.”

순간 델리피어 후작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현재 이 일대에 포진하고 있는 군사력의 균형은 당연히 코린트 쪽이 우세했다. 그런데도 저따위 소리를 하다니. 저것들이 정말 협상을 제대로 할 생각이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덕분에 델리피어 후작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귀국은 본국과의 전쟁에서 막대한 전리품을 챙기지 않았소? 그것을 가지고도 모자란다는 말이오? 정 그대들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전쟁 쪽으로 계속 밀고 나갈 수밖에 없소.”

델리피어 후작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가레신 후작은 눈도 깜짝 안 했다. 그는 오히려 미소를 지어 보이며 능글맞게 말했다.

“호오, 그것은 본국에서도 원하는 바요. 이미 본국으로부터 새로운 사단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고, 용병 사단 6개도 편성을 마쳤소. 그리고 귀국이 이번에 입은 피해는 막대한 정도를 넘어섰지 않소? 본국이 쟈코니아 산맥을 넘어 쟈코니아 지방 전체를 병합하려고 해도 막을 힘이 없을 텐데?”

가레신 후작의 말은 반은 진실이었고, 반은 거짓이었다. 그의 말대로 새로운 사단들이 속속 쟉센 평원으로 이동해 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들은 몽땅 다 게릴라들에게 발목이 잡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있소. 더 나아가 쟉센 평원까지 탈환할 정도의 여력도 남아 있다 이 말이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두 나라가 싸워 봐야 남는 게 뭐가 있소? 이번 전쟁을 벌이느라 양국 다 막대한 재화를 낭비했고, 또 뛰어난 병사들과 기사들을 잃었소. 그러고도 더 싸우고 싶다는 거요?”

“필요하다면 싸워야지요. 자,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시겠소?”

가레신 후작의 최후통첩과도 같은 말에도 불구하고 델리피어 후작은 우직스럽게 대답했다. 대 코린트 제국이 크루마 따위에게 전쟁 배상금을 지불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너무 심하게 기우는 협상을 하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분의 명성이 올라가기는커녕 오히려 황제의 총애를 잃게 될 가능성마저 있었다.

“배상금은 단 한 푼도 줄 수 없소. 만약 이쪽에서 배상금을 줘야 한다면 그쪽에서는 금지된 마법을 사용한 대가를 본국에 지불해야 하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이 협상은 결렬된 것으로 합시다. 잘 가시오.”

상대가 이렇게 단호하게 나오자 델리피어 후작은 잠시 당황했다. 이 틈을 이용해 여태껏 조용히 지켜보던 미네르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었으면 풀기도 해야 하는 것이 외교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짐짓 나무라는 듯한 어조로 가레신 후작을 향해 말했다.

“가레신 후작, 먼 길을 찾아온 손님에게 너무한 것이 아닌가? 델리피어 후작도 황제로부터 명령을 받고 왔을 텐데, 그를 그렇게 핍박하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니지. 서로 간에 휴전을 하여, 전쟁 난민을 줄이고 또 쌍방 간의 피해를 줄이자는 좋은 목적에서 온 것이 아닌가?”

그녀의 참견에 델리피어 후작은 그녀의 속셈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고마워했다. 그는 이 길고 지루한 협상 덕분에 정신적으로 너무나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미네르바 전하. 서로 간에 될 수 있는 한 평화롭게 해결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좋소, 이렇게 하기로 합시다. 귀국에서 본국에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는 대신, 그쪽도 유성이 떨어진 데 대한 피해 보상을 요구할 수 없소. 어떻소?”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하. 대신, 유성 공격의 목표 도시들을 알려 주십시오.”

“당연히 알려 주는 것이 도리죠. 물론 그것은 협정서에 서명이 된 후에 알려 줄 것이오. 이의는 없지요?”

“예.”

휴전 협정을 맺은 후, 유성 공격의 목표 도시의 목록을 받아 들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돌아가는 델리피어 후작의 뒷모습을 보며 미네르바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표정이 가관이군, 그렇지 않나?”

“그렇사옵니다, 공작 전하.”

“왜 저런 얼뜨기를 보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그렇사옵니다, 전하. 크라레스에서 왔던 그 돼지 같은 녀석은 정말 상대하기 힘들었는데, 그 녀석에 비하면 저런 녀석은 어린애나 다름없습지요. 헤헤…….”

“좋았어! 이제부터 그 지긋지긋한 게릴라로부터 해방이군. 조금 지나면 이 쟉센 평원도 확실한 본국의 영토가 되어 줄 거야. 그건 그렇고, 미란 국가 연합에다가 황금 몇 톤 정도는 보내 줘야 하겠지? 가장 큰 피해를 본 국가니까 말이야.”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전하.”

“자네가 가서 가므 의장을 잘 다독거려 주라구.”

“염려 놓으시옵소서, 전하.”

“저놈들은 지금 우리를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 착각하고는 우리와는 휴전을 맺고, 아마도 크라레스를 뭉갠 후 이쪽으로 다시 군사력을 돌릴 계획인 모양인데, 그게 잘될지 궁금하군.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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