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 기사 녀석이 얼마나 꽁지가 빠지게 도망쳤는지, 첫 번째 놈을 황천에 보낸 후 돌아왔을 때 이미 녀석은 어디로 도망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놈의 흔적을 대충 뒤지다가 잡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아직도 쿵쾅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곳으로 달려갔다. 타이탄들끼리의 전투는 상당히 오래 끄는 것이 정석이었기에 서둘러 달려간다면 자신의 먹잇감이 한 대 정도는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격전지로 돌아갔을 때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기사들의 실력도 이쪽이 약간 앞서는 상태에서 등급이 앞서는 타이탄을 가지고 12대 10으로 싸웠으니 이렇듯 결과가 빨리 나와 버린 것이었다.
“제기랄! 내 것도 하나 남겨 둬야지. 그렇게 빨리 끝내 버리는 법이 어디 있어?”
사내의 투덜거림에, 자신의 타이탄을 이용해서 뒤처리를 하고 있던 동료가 낄낄거렸다.
“헤헤, 미적거리다가 지금에야 나타난 녀석이 무슨 잔소리가 그렇게 많아? 그건 그렇고 잡으러 갔던 놈들은 어떻게 됐어?”
“그놈들 어찌나 재빠르던지 한 놈은 놓쳤어.”
쓰러져 있는 적 타이탄을 들어 올리고 있던 타이탄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며 경악스런 외침이 들려왔다.
“설마?”
“아니야. 내가 뛰어가니까 아예 저항할 생각도 안 하고 바로 튀더라구. 그것도 한 놈은 이쪽, 한 놈은 저쪽! 내 몸이 두 개가 아니니까 어쩔 수 없었어. 자식들 반항이라도 좀 했으면 모두 다 황천길로 보낼 수 있었는데…….”
“뭐, 다음에는 기회가 오겠지.”
“그건 그렇고 대장은?”
“저쪽에서 포로를 심문 중이야. 뭔가 괜찮은 정보라도 건지면 좋을 텐데 말이지.”
“정말 거창하게도 해치웠군.”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시체 더미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내린 아르티어스 어르신의 소감이었다. 아르티어스와 다크가 들어선 곳은 제법 큰 마을이었는데, 식사나 하고 갈까 하는 생각에 들어선 후 그들이 본 광경은 반쯤 썩어 버린 수많은 시체들뿐이었다. 그런데 이 시체들이 문제였다.
군인들끼리 싸우다가 서로가 죽었다고 한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이건 아무런 힘도 없는 마을 주민들을 학살해 놓았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행해진 이 학살은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쓰러진 시체들 외에 광장 한복판에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인물의 시체가 가로수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반란 분자들에게 협조하면 이렇게 해 주겠다는 명확한 포고문까지 붙어 있었다.
다크는 이리저리 둘러본 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좀…, 심하네요. 아무리 보급 상태가 안 좋아지고, 또 게릴라들 때문에 힘들다고 해도 이런 방식은 별로 찬성하고 싶지 않아요. 이건 최후에나 쓰는 방법이지, 지금 크라레스에는 충분히 힘이 있는데…….”
“그건 아니야. 나도 오래전에 여행을 하면서 느낀 것이 있지. 이런 광경을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고 말이야. 이건 크라레스라는 나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야. 이 나라만 이런 식으로 행했다면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겠지만, 다들 그러는 것 같거든. 왜 호비트란 종족들은 이렇게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쓸데없는 곳에 정력을 낭비하지? 왜 쓸데없이 적을 만들어서 전쟁을 벌이는지 이해를 못 하겠구나.”
“글쎄요. 아마도 욕심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거겠죠.”
“욕심이 많다고? 그건 무슨 말이냐?”
“아버지는 그런 거 못 느껴 봤어요? 예를 들어 그러니까 으응…, 아버지가 예전에 살던 곳 주변에 혹시 다른 드래곤의 레어는 없었나요?”
원래가 생각이란 것을 깊게 하지 않던 인물이 뭔가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한 예를 찾아내려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물음에 아르티어스는 자부심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없어. 오래전부터 말토리오 산맥은 나 혼자만의 것이었지. 그 때문에 다른 드래곤들은 나를 말토리오의 지배자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겠냐?”
“말토리오 산맥은 아주 넓은 곳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혼자서 사세요?”
“우리 드래곤들의 경우 누군가가 먼저 둥지를 틀고 살고 있는 곳 주변에 새로이 정착하고자 하는 녀석이 생겼을 때는, 새로 정착하는 녀석이 그곳에 먼저 둥지를 튼 드래곤을 찾아가서 정중하게 부탁을 해야 하지. 여기에 둥지를 틀고자 하는데 괜찮겠느냐고 말이야. 그때 먼저 살고 있던 드래곤이 좋다고 허락을 해야 둥지를 틀 수 있는 거지.”
다크는 미심쩍은 시선을 아르티어스에게 던지며 비꼬았다.
“그렇다면 다른 드래곤들에게 허락을 안 했다는 말이에요?”
아르티어스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변명을 늘어놨다. 아들이 자신을 그렇게 속 좁은 드래곤으로 생각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나는 그렇게 속 좁은 드래곤이 아니야. 이웃이 하나쯤 있어도 좋을 텐데, 이상하게도 우리 골드 일족 주변에는 다른 드래곤들이 잘 정착하지 않아. 아마도 녀석들이 봤을 때 지혜나 힘에서 모두 다 우리 골드 일족에게 밀리니까 근처에 살기에는 자존심이 상한다는 거겠지. 하하하핫!”
다크는 호기스럽게 웃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마도 골드 드래곤들은 모두 다른 드래곤보다는 자신들이 훨씬 잘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고, 또 그것을 유감없이 다른 드래곤들에게 표현을 하니까 모두들 “에잇, 재수 없어”하면서 그 주변에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충 그 전말을 짐작한 다크는 헤시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헤헤헤…,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렇다면 옆에 드래곤의 레어가 있다고 가정하자구요.”
“그래, 그렇게 가정한다면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그 레어에 가 보니까 아버지의 레어보다 훨씬 근사하고 쾌적하더라 이거죠. 그때는 어떤 생각이 들어요?”
아들이 말하는 의도가 뭔지 잘 알 수 없었기에 아르티어스는 얼떨떨한 어조로 답했다.
“그…, 글쎄? 나도 드워프 몇 마리 잡아다가 이렇게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
“아니, 그렇게 말구요. 이 녀석을 해치우든지 아니면 내쫓아 버리고 이 둥지를 뺏고 싶은 생각은 안 들어요?”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말을 서슴없이 해 대는 아들을 보고, 아르티어스는 그녀의 정신 상태를 의심한다는 듯 질책했다.
“뭐? 뭐라고? 너 지금 제정신이냐? 드래곤들끼리 겨우 레어 하나 뺏자고 집안싸움을 벌이라는 말이야? 그냥 드워프들을 찾아가서 족치는 편이 훨씬 쉬운데 뭐 하려고 그러냐? 또 우리들에게 있어서 레어가 크든 작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그렇기에 일부 드래곤들은 그냥 동굴에서 살기도 해.”
‘으음, 주택 문제로는 해결이 안 되는군’하고 생각하면서 다크는 뭐 또 다른 것이 없을까 궁리했다. 그러다가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르티어스의 창고 가득히 쌓여 있던 그것.
“그렇다면 황금은 어때요? 전에 둥지에 가 보니까 많이도 쌓아 놨던데. 다른 드래곤의 레어에 아버지가 모은 것보다 더 많다면 그걸 뺏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아르티어스의 대답은 전과 동일했다.
“드래곤의 것을 탐내는 것보다는 드워프나 호비트를 족치는 쪽이 빠르고 더욱 쉽지. 또 겨우 황금 따위 뺏자고 그렇게 치고받을 필요는 없어. 많이 쌓아 둬 봐야 그거 1년에 한 번 구경할까 말까 하는데 그렇게 많이 모아 봐야 별 소용이 없거든.”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군요. 그렇다면 관점을 바꿔서 이렇게 생각하기로 하죠. 사람들이 만약 황금이나 토지 따위를 원한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드래곤을 잡아다가 족칠 수도 없으니까 만만한 상대를 고를 거 아니에요? 드워프 따위 족쳐 봐야 모아 놓은 황금도 별로 없을 거고, 이웃 나라를 박살 내서 황금을 뺏는 게 더 쉽죠. 뭐 그런 식으로 서로들 치고받는 거예요.”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아르티어스가 끄덕거렸다. 그리고 다크의 말을 통해 몇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드래곤이 드래곤들끼리 싸우지 않고 호비트나 드워프, 또는 엘프를 족치는 이유는 동족인 드래곤을 족치는 것보다 그편이 편하고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호비트나 드워프, 또는 엘프가 만약 드래곤보다 더 강력하다면? 그렇다면 당연히 족치기 쉬운 드래곤을 택하겠지.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드래곤도 동족들끼리는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뿐, 호비트보다 욕심이 적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이 아닌가?
“흐음, 그러니까 호비트들이 이렇듯 난리를 치는 이유가 욕심 때문이라 이거지?”
“그럼요. 욕심에는 아주 많은 종류가 있죠. 재물에 대한 것, 권력에 대한 것, 무술에 대한 것 등등 별별 것들이 다 있다구요.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싸움을 걸고, 남을 중상모략하고…….”
다크가 줄줄이 나열하기 시작하자,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야, 그건 아닌 것 같아. 만약 그런 식으로 엉망진창인 종족이라면 오래전에 멸망의 길로 들어섰어야 해. 하지만 호비트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발전해 가고 있거든.”
“아뇨, 욕심이 없다면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니죠. 하지만 모두들 그렇게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했다가는 엉망이 되기에 법이라는 것을 만들었지요. 남을 이유 없이 죽이든지, 또는 물건을 훔치든지, 폭력을 가했다든지 하면 잡아다가 벌을 주죠. 그 때문에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합법적인 노력을 하는 거죠.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이 탐난다면 훔치거나 빼앗지 않고 일을 해서 번 돈으로 구입하는 식이 되는 거죠. 전에 제가 살던 곳도 그랬고, 여기도 대충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하지만 국가들 간에는 제제를 가할 만한 다른 국가가 없으니 당연히 강한 국가가 마음대로 하게 되죠. 이제 이해하시겠어요?”
이제 모든 것이 이해가 간다는 듯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흐음…, 대충은 이해가 가는구나. 그러니까 여기 내가 보고 있는 작품은 그런 이유로 만들어진 거로구먼?”
“그럼요, 당연한 거죠. 뺏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가 충돌하면 이 모양이 되는 거죠. 물론 이들이야 지키려는 자는 아니지만, 지키려는 자를 도와줬다든지 뭐 그와 비슷한 이유겠죠.”
“그건 그렇고, 식사는 어디서 하지? 시체들보고 밥해 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뭘 그런 것을 가지고 걱정을 해요? 딴 마을로 가면 되죠. 이런 식으로 본보기를 보이는 것은 딴 사람들이 보라는 뜻인데, 주변에 있는 다른 마을들까지 몽땅 다 이렇게 만들지는 않죠. 왜냐하면 와서 볼 사람이 꼭 있어야 ‘본보기’라는 것이 빛을 발하거든요.”
“그도 그렇군. 어디 보자.”
아르티어스는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어 뒤적거리다가 말했다.
“여기 있군. 저 길을 따라 한 10킬로미터쯤 내려가면 마을이 또 하나 있어.”
브로마네스의 영토
죠드는 키에리가 짐 보따리를 들고 움막집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자 기겁을 하며 말했다.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으셨는데 어디로 가시려고 하십니까?”
죠드의 말에 키에리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대충 회복되었으니 걱정 말게나. 가 보고 싶은 데가 있어서 말일세.”
“어디 말씀입니까?”
“테롯사 산맥의 남쪽.”
“예에? 거기는 갑자기 왜 가시려고 하십니까?”
“그냥 가 보고 싶구먼.”
“가만…, 테롯사 산맥이라면.”
“깊게 생각할 것 없네. 자네도 제임스가 올린 보고서를 봤으면 알겠지만 그라세리안이 실종된 곳이지.”
“예, 그런데 거기는 왜?”
“그리고 우리들이 처음 그라세리안을 만난 곳이기도 해.”
“예?”
“나는 아들 녀석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라세리안이 사망하거나 납치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아마도 그는 또다시 은둔을 시작했는지도 모르지. 처음 그를 만난 곳과 마지막으로 그가 사라진 곳이 같다면 죽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죠드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그야 그렇지요.”
“나는 한 번 더 그에게 부탁하려고 하네. 코린트를 위해 조금만 더 일해 주지 않겠느냐고 말일세. 여기서 그곳까지는 너무도 멀지. 자네가 함께 가기 싫다면 그쪽으로 공간 이동만 시켜 주면 돼.”
“아닙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짐이 별로 없으니까 시간도 별로 안 걸릴 겁니다.”
죠드는 재빨리 집으로 뛰어 들어가서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사실 키에리를 은밀하게 이곳으로 모시고 와야 했기에 가지고 온 것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가 그 와중에도 가지고 온 이 작은 보따리 안에는 마법사로서 여행을 하는 데 거의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들어 있었기에 그것을 놔두고 갈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