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토리오 산맥의 침입자들
드넓은 엘프리안 아카데미 연병장의 한쪽 구석에서 검술 교육을 받고 있는 일단의 젊은이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던 미네르바는 손을 들어 한 소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아이가 크라레스의 제1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엘리안 폰 그래지에트 왕자인가?”
미네르바의 물음에 노마법사는 재빨리 대답했다.
“옛, 전하.”
“제법 쓸 만해 보이는군. 그래 실력 테스트 결과는?”
“대단히 우수하옵니다. 이곳으로 오면서 많은 정예 무사들을 거느리고 왔었지만 정작 아카데미에 입교하면서 두 명의 시종을 제외하고 모두 다 돌려보냈사옵니다.”
미네르바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제법 배짱이 있군.”
“예, 전하. 그 시종들은 중년의 부부인 것으로 조사되었사온데, 열과 성을 다해서 왕자를 모시고 있었고 왕자 또한 그들을 대단히 세심하게 배려해 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미네르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군.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배려할 줄 모른다면 이미 윗사람으로서의 자격 미달이지. 꽤 탐나는 인재야.”
“아무리 탐나는 인재라도 적국의 왕자인지라…….”
“그건 별로 이유가 안 되지. 그건 그렇고 대인 관계는 어떻던가?”
“예, 잘생긴 외모에 동맹국의 왕자라는 직위, 거기에다가 세련된 매너로 다른 학생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있사옵고, 벌써 친구도 몇 명을 사귄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호오, 대인 관계까지 원만하시다 이거군. 일국의 왕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놈이로구먼. 프랑크 황제에게는 왕자가 저 녀석 하나뿐인가?”
“아니옵니다, 한 명 더 있사옵니다.”
“그래? 그 녀석은 어떻다고 하던가?”
“예, 첩보부의 조사 결과로는 성격이 완전히 정반대라고 하옵니다. 사색과 책 읽는 것을 좋아해 심성이 착하지만 유약한 젊은이온데, 낯가림이 심하여 사람을 잘 사귀지 못한다고 들었사옵니다.”
미네르바는 혀를 찼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동정을 나타내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게 잘되었다는 듯 기분 좋은 미소까지 어려 있었다.
“쯧쯧…, 그런 녀석은 일찍이 도태시켰어야지. 아니면 때려잡아서 교육을 좀 더 강압적으로 시켜 놓던지.”
“예, 그게 아무래도 형이 너무 잘나가는 바람에 그에 따른 열등감, 그리고 타고난 성격도 있고, 뭐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서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던 모양이옵니다. 최근에 엘리안 왕자가 황태자로 책봉되면서 제2왕자에게는 아예 황위 세습에 대한 교육을 중지한 것으로 보고받았사옵니다.”
“정말인가?”
미네르바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웬만한 제국들의 경우 세 명에서 다섯 명 정도의 황위 계승자를 교육시킨다. 물론 그들 중에서 정식 황위 계승권을 지닌 인물은 두세 명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두세 명을 더 기르는 것이다. 황제로서의 예비 교육을 받았지만 황제가 되지 못한 인물들은 대부분 황실의 중신(重臣)으로 성장할 정도로 그 교육은 대단히 치밀하고도 어려운 것이었다.
거기에다가 그들은 장차 황제가 될 인물과 함께 교육을 받으며 자라기에 서로 간의 우정을 나눌 기회도 많았다. 그 때문에 뛰어난 황제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신하와 친구인 경우도 흔했던 것이다.
“예.”
“으음, 그 부분을 철저히 조사해라. 그리고 만약에 불행한 사고에 의해 제1왕자가 황위를 계승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누구에게 황위가 갈 것인지에 대한 조사도 병행하도록 해. 알겠나?”
“옛, 전하. 그런데 그것은 갑자기 왜?”
“몰라서 묻나? 지금은 크라레스가 우방이라고 하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프랑크 황제야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해도, 제1왕자가 우리 손아귀에 들어와 있는데 그냥 교육 잘 시켜서 돌려보낸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
미네르바의 말에 상대도 슬쩍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엘리안 왕자의 여자관계도 철저히 조사하도록 하게. 만약 여자 친구가 없다면 하나쯤 만들어 붙이는 것도 좋겠지. 물론 인위적으로 맞출 생각은 하지 말고 엘리안 왕자가 사귀는 친구들의 여동생이라든지, 또는 같은 아카데미 안의 여학생들과 사귈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라는 말이야. 알겠나? 예를 들어서 본국으로 귀환하기에는 모자라지만 친구 집에 가서 놀기에는 충분한 정도의 휴가를 준다든지, 아카데미 내에서 전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무도회를 개최한다든지, 뭐 그런 식으로 말이지. 청춘 남녀들이란 것은 대충 사귈 여건만 마련해 주면 나머지는 자기들이 알아서 타오르게 되어 있으니까 너무 인위적으로 짝을 붙일 필요까진 없어.”
“알겠사옵니다, 전하.”
“실수 없이 잘해야 하네.”
재삼 당부하는 미네르바에게 노마법사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맡겨 주시옵소서, 전하.”
아르티어스라는 망할 드래곤에 대한 수색 작업은 정말 치가 떨릴 정도로 어려웠다. 엄청난 면적에 걸쳐 촘촘하게 깔아 놓은 마법 트랙들. 그것도 험준한 말토리오 산맥 안에 깔려 있었기에 일단 그 안에 들어서면 어디가 어딘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는 관계로, 마법 트랙이 좀 더 세밀하게 깔린 곳이라든지 뭐 그런 생각으로 찾아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 덤빌 때만 하더라도 그렇게 아르티어스의 영역이 넓은 줄 몰랐던 일행들은 인식을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법 트랙이 깔려져 있는 면적을 기반으로 추리해 봤을 때 아르티어스의 영토로 짐작되는 면적은 무려 반경 20킬로미터에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린레이크는 부하의 보고를 듣다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뭔가 인식의 전환이 필요했다. 이렇게 무작정 찾아서는 아무리 많은 시간이 있다고 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1년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서는 몇 달이 지나더라도 찾을 수가 없겠다. 일단 지도를 가져오너라.”
그린레이크의 말에 기사는 재빨리 자신의 주머니를 뒤져 고급 양피지로 제작되어 있는 지도를 꺼내어 상관에게 건넸다.
“여기 있사옵니다, 전하.”
그린레이크는 지도를 펴 놓고 한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이곳이지?”
“예, 그렇사옵니다, 전하.”
“그리고 탈출용 마법진을 준비해 둔 곳이 이곳들일 거야. 그렇지?”
“그렇지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말이야. 아르티어스의 영토는 엄청나게 넓어. 내 기억에는 반대편 마법 트랙이 끝나는 곳이 여기니까 일직선 거리로 따져도 40킬로미터에 가깝다는 거지. 아르티어스의 영토가 얼마나 넓은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마법 트랩이 깔려 있는 곳만을 잡아내자 이거야. 그것도 알기 쉽게 마법 트랩이 끝나는 경계선만을 계속 연결한다. 그렇게 되면 대충 이런 모양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면서 그린레이크는 지도 위에 큼직하게 원을 그렸다.
“이렇게 외곽이 잡히고 나면 아마도 드래곤의 레어는 이 영토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지 않을까?”
부하도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면서 상관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다면 의외로 간단하게 알아낼 수 있겠군요.”
“그렇지. 일단은 외곽 경계선을 정확하게 알아내라. 그렇게 되면 지도를 통해서 중앙 부분을 정확하게 잡아낼 수 있겠지. 그런 후 중앙을 기점으로 집중적으로 찾는다면 시간이 조금은 단축될 것 같아.”
“옛, 즉시 시행하겠사옵니다, 전하.”
시종이 쟁반에 레드 드래곤과 컵 두 개를 담아 가져왔다. 다크는 이번에 새로 시종이 된 소년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아주 눈치가 빠른 데다가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크는 소년에게 방긋이 미소를 보냈다.
“수고했다.”
시종에게 간단하게 고마움을 표시한 후 다크는 레드 드래곤을 한 컵 가득히 부어서 아르티어스에게 건넸다. 아르티어스는 술잔을 들어 향기를 쓱 맡아 본 후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아르티어스는 이렇게 강한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술 말고는 안 마시는 거냐?”
“그것밖에 없으니까 할 수 없죠. 디지드는 다 마셔 버렸잖아요?”
“디지드? 우욱!”
아르티어스는 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며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말했다.
“디지드보다는 이게 낫지. 아니, 내 말은 이거 말고 좀 순한 술은 없냐는 거지.”
아르티어스의 투정에 다크는 간단하게 자신의 술에 대한 취향을 피력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좋아하는 술을 따로 확보할 정도로 세심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의 의견은 바로 이거였다. 싫으면 안 마시면 되지.
“술이야, 찌르르 울리는 그 맛에 마시는 거지 뭐 딴 이유가 있어요? 안 그래도 이것도 별로 남아 있지 않으니까 마시기 싫으면 관둬요.”
“아니, 마실게. 마신다구.”
레드 드래곤을 한 모금 마신 후 컵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아르티어스가 심각하게 말했다.
“으음, 느낌이 좋지 않아.”
“예? 술맛이 이상해요? 아니면 제가 그 안에 독이라도 넣었다는 거예요? 으음, 드래곤이 쪼잔하게 독을 겁내요?”
“그 말이 아니야. 레어 주위에 접근하는 녀석들 말이야. 처음에는 화전민(火田民) 정도인 줄 알고 놔뒀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이제는 아주 레어 근처까지 다가왔어.”
“도둑인가요?”
“글쎄, 그건 가 봐야 알겠구나.”
다크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잘 다녀오세요.”
하지만 아들의 대답이 아르티어스에게는 의외라는 듯 그는 급히 반문했다.
“뭐? 애비가 가는데 너는 함께 안 갈 거냐?”
“제가 왜 가요?”
“애비의 집이 털릴지도 모르는 이런 중대한 사건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하나뿐인 아들 녀석이 나 몰라라 하다니 이럴 수가 있는 거냐?”
“그럴 수도 있죠. 황금도 엄청나게 많던데, 조금 나눠 준다고 해서 뭐 그게 대수인가요?”
“내가 황금 때문에 이러는 줄 아느냐? 드래곤의 둥지인 줄 뻔히 알면서 접근해 왔다면 그 목적은 뻔하지. 하나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꿈꾸는 멍충이들이고, 또 하나는 마법이야.”
“마법이요?”
“그럼, 레어에는 내가 연구하던 마법서들이 가득 쌓여 있는데, 그걸 훔치려고 들어온 거야. 말토리오에 둥지를 튼 후 3천5백 년 동안 내 둥지에 접근해 온 녀석들의 목적은 그 둘 중 하나였어.”
“글쎄요. 그렇다면 처음 하신 말하고 약간 앞뒤가 안 맞는데요? 드래곤 슬레이어라면 최소한 둥지가 털릴 염려는 없잖아요. 주인이 없으면 그냥 돌아가지 않을까요? 오래전에 드래곤을 잡으려는 사람들을 봤는데, 그들의 목적은 황금이나 마법책 따위가 아닌 드래곤 자체였다구요. 아버지는 여기 있는데 뭐가 걱정이세요?”
아들의 말이 대충 맞는 것 같았기에 아르티어스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말이 그렇게 되나? 아니잖아! 내가 없다면 빈집을 털어 갈 가능성도 있다고 봐야지. 갈 거야 말 거냐? 솔직히 할 일도 없잖느냐? 이렇게 애비가 부탁하는데 할 일도 없으면서 안 가겠다는 거냐?”
아르티어스가 이렇게 사정조로 나오면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예, 따라가 드리죠.”
다크는 자신이 응답함과 동시에 눈앞이 희뿌예지는 것 같더니 돌연 눈앞의 사물이 명확하게 보이면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의자에 앉은 자세 그대로 의자를 놔둔 채 공간 이동을 했으니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윽!”
주저앉은 채로 주위를 둘러보니 과거 아르티어스와 단란하게 지냈던 바로 그곳, 아르티어스의 레어에 자신이 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그때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먼지가 조금 쌓여 있었다는 점만 빼고 말이다.
‘그때는 열심히 청소를 했었는데…’하는 기억이 떠올랐고 추억 어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르티어스가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방금 전에 자신이 엉덩방아를 찍었다는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말을 하고 공간 이동을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짜증스럽게 말하는 아들에게 아르티어스는 멋쩍은 웃음을 흘려 댔다.
“헤헤…,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이동한다는 것이 그만 그렇게 되어 버렸구나. 미안하다, 얘야.”
아르티어스는 손을 뻗어 다크가 일어서는 것을 도와줬다.
“정말 오랜만이지? 너와 처음 만난 게 엊그제처럼 느껴지는데…….”
아르티어스가 이렇게 감상적으로 나오면, 일이 빨리 진척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다크는 모질게 말을 끊었다. 아르티어스에게는 시시때때로 자신들이 거기에 왜 있는지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수명이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이 드래곤들은 게을러 터져서 오늘 못 하면 내일 하면 된다는 신념을 가진 족속들이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해치우고 돌아가자구요. 참, 식사도 대충 하셨는데 디저트로 드시는 것은 어때요?”
아들의 무지막지한 말에 아르티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가끔씩 아들 녀석과 함께 살면서 느끼는 의문이 또다시 일었다.
“너 정말 호비트 맞냐?”
“물론이죠. 도와 드려요?”
“아니, 도와줄 필요는 없을 게다.”
슬쩍 아르티어스가 튕겼다. 물론 여기까지 따라왔으면 도와주려고 들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아들 녀석은 언제나 그렇듯 자신이 마지못해 도와준다는 듯 말을 이었다. 짜식! 자기도 한판 하고 싶으면서 말을 돌려 대긴…….
“함께 가 드릴 수는 있지만, 그걸 나눠 먹지는 못해요. 내가 먹지 않는 유일한 동물이 ‘인간’이니까.”
“그렇다면 도와주려고?”
“아뇨, 드래곤이 사람 먹는 것은 한 번도 못 봤거든요. 꽤나 자극적일 것 같은데…….”
“으이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