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꼭대기를 깎아서 거창하게 지어놓은 성. 어떻게 보면 한 폭의 그림처럼 장엄했지만, 거기에 쳐들어가야 한다고 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루빈스키 공작은 손가락으로 그 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가 미투랑 요새인가?”
“옛, 전하.”
“산꼭대기에 잘도 만들었군.”
“예, 엄청난 인력이 동원된 작업이었다고 들었사옵니다. 산을 깎아서 만든 데다가 북쪽과 동쪽을 40미터 정도 되는 절벽이 막아 주고 있는 천험의 요새입지요. 요새 부근의 나무들은 가지치기를 해 놨기에 기습을 당할 염려도 없사옵니다.”
“겨우 몬스터나 상대하려고 만든 성치고는 규모가 너무 크구먼. 돈이 남아도는 모양이야.”
“슬슬 준비를 하라고 지시할까요?”
“그러세. 일단 다섯 대만 꺼내라고 지시하게.”
공작의 지시에 따라 오너들은 각자의 타이탄을 불러냈다. 그에 따라 대량 생산을 위해 단순한 형태를 한 타이탄 테세우스들이 그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성 아래 저 먼 곳에서 갑자기 타이탄들이 튀어나오는 것을 본 성의 경비병들은 요란하게 경종을 울려 댔다. 적군이 아니라면 이렇듯 타이탄을 끄집어낼 이유가 없었기에 울려 댄 경종이었고, 성내의 모든 인원들은 그 경종이 뜻하는 바가 뭔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들이 맡은 지역으로 신속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물론 새벽에 시작된 갑작스런 경종이었기에 모두들 자다가 일어난 듯 복장들이 엉망진창인 것은 당연했다.
특히 그 복장 상태가 엉망인 사람들은 대타이탄용 공격 무기를 다루도록 지시받은 인물들이었다. 일반 병사들이나 기병들은 침착하게 자신의 무장을 갖춘 후에야 자신의 구역으로 이동했다.
물론 이런 일이 벌어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타이탄의 이동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기 때문이었다.
“적의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후작 각하.”
“어디?”
“저곳에 있습니다. 여기 이걸 사용하시지요.”
다리엔 후작은 성의 상당히 높은 위치에 마련되어 있는 중앙 지휘탑에 서 있었다. 이곳은 매우 높은 곳에 위치했기에 사방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전망이 좋았고, 또 성의 곳곳에 마련되어 있는 각종 무기들과 병력을 총괄 지휘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있는 곳이었다.
성주가 내미는 망원경을 받아 들고 후작은 여명 아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타이탄들을 관찰했다. 성을 중심으로 반경 3킬로미터 주위로 낮은 관목 정도만을 남겨 두고 키 큰 나무들은 전부 없애 버렸고, 그나마 1킬로미터 근방에는 그런 관목조차도 없애 버렸다. 그렇게 해야만 교활한 오크들을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후작은 성주가 가리키는 곳을 자세히 관찰해 본 결과 여명 아래 숲을 뚫고 솟아올라 있는 다섯 개의 시커먼 물체들을 볼 수 있었다.
“겨우 다섯 대뿐인가?”
“그렇습니다.”
“으음, 투르넨 후작을 불러라.”
투르넨 후작을 불러오라고 지시할 누군가를 찾기 위해 뒤를 돌아보던 성주는 수행원 두 명을 거느리고 느긋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투르넨 후작을 보고 급히 다리엔 후작에게 속삭였다.
“저기 오고 계십니다, 각하.”
“그래?”
다리엔 후작은 뒤를 돌아보며 느긋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시오, 투르넨 후작. 기사단에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오는 길이오?”
투르넨 후작은 다리엔 후작의 속을 태우려고 일부러 늑장을 부리면서 천천히 나타났는데도, 상대가 그걸 무시하고 준비 운운하자 인상을 찡그렸다. 상대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하고 보니 꼭 자신이 다리엔 후작의 충실한 부하인 듯 들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늑장 부리다가 왔다고 맞받아 말하기도 껄끄러웠다. 명목상이기는 했지만 상대는 자신의 상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투르넨 후작은 일부러 다리엔 후작을 무시하고 옆의 수행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찰조로부터 보고는 없었나?”
자신의 말이 묵살당하자 다리엔 후작의 눈꼬리가 올라갔지만 투르넨 후작은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아직까지는 없었습니다.”
수행원은 급히 답한 후 그들의 앞쪽에 삐죽이 나와 있는 금속제 관(管, Pipe)이 있는 곳으로 재빨리 다가갔다. 금속제 관은 두 개나 솟아나와 있었는데, 혹시나 비가 올 때를 대비해서 위쪽에는 작은 뚜껑이 붙어 있었다. 관을 통해서 대화하면 말을 훨씬 더 멀리 전달할 수 있기에 이런 장치를 붙여 놓은 것이다. 물론 아무리 관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 거리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기에, 중앙 지휘탑 내에 위치해 있는 통신실과 사격 통제실, 이 두 곳에만 연결되어 있었다.
관 위의 뚜껑은 벗겨져 있었기에 그는 관에다가 대고 곧장 외쳤다.
“통신실! 정찰조로부터 들어온 보고가 있소?”
그러자 관 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찰조로부터의 보고에 의하면 적은 70명 정도로 구성된 부대라고 합니다. 아직 주위가 어두워서 적들의 정확한 구성은 알 수 없답니다.”
관 속에서 들려온 말을 수행원은 재빨리 복창(復唱)했다. 그 말을 듣고 다리엔 후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적군의 정확한 구성을 모른다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70명? 그렇다면 70대의 타이탄을 거느리고 왔다는 말인가?”
투르넨 후작은 얼토당토않은 말을 꺼내는 다리엔 후작에게 노골적인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대는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니 인원 구성을 이해하기 힘들 거요. 보통 타이탄 한 대가 움직이려면 최소한 두 명의 기사와 한 명의 마법사가 타이탄을 서포트하기 위해 움직이게 되지. 그러니까 대략 네 명에 타이탄 한 대라고 보면 맞을 거외다. 물론 이것은 통상적인 전투에나 맞는 인원 대비이고, 이렇듯 목표가 단순하게 정해져 있는 경우에는 정찰을 위한 인원이 감소한다고 보면 맞겠지.”
투르넨 후작의 태도가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일단 그에게서 정보를 획득해야만 했기에 다리엔 후작은 최대한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
“경의 의견대로라면 17대 정도라는 말이오?”
투르넨 후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간단하게 답했다.
“아니, 17대 이상이라는 말이오.”
일부러 말을 짧게 짧게 끝내는 바람에 자신이 계속 질문을 하도록 만드는 상대를 향해 다리엔 후작은 짜증 어린 어조로 다시금 물었다.
“그렇다면 상한선은 얼마요?”
“돌아가기 위해 최소한 마법사 한 명. 그렇다면 적 인원이 70명이라면 69대가 되겠지.”
“흐음, 17에서 69라. 오차가 너무 크군. 좀 더 오차를 줄일 수는 없소?”
이번에는 돌아온 대답이 좀 더 길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리엔 후작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투르넨 후작은 이번 작전이 자신을 제외하고 다리엔 후작 혼자서 몇몇 부하들만 데리고 쑥덕공론을 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에 강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 갑자기 대규모 토목 공사를 하면서 적의 타이탄이 이곳에 쳐들어온다는 간단한 통보만 나에게 했소. 그토록 야단법석을 부리며 준비를 했을 정도라면 적 타이탄이 이곳에 쳐들어온다는 정확한 정보를 그때 입수했다는 말일 것이오.
만약 경이 그런 정보를 정보부에서 얻어 들었다면 나에게도 통보가 왔을 텐데, 정보부에서는 아무런 보고도 없었소. 그렇다면 경 혼자서 일을 벌인 것이 분명한데, 도대체 무슨 공작을 한 거요? 나도 정보가 있어야 그놈의 오차를 줄일 수 있을 것 아니오?”
“이쪽이 본거지라고 정보를 흘렸소.”
다리엔 후작도 상대의 질문에 간단하게 답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예의에 어긋날 정도로 투박한 것이었다.
“당신 정신 나갔소? 그렇게 하면 놈들은 최고 정예를 이끌고 와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 게 당연한데.”
“물론 제정신이오. 대신 놈들은 이곳에 대타이탄 병기라든지 또는 타이탄을 상대하기 위한 그런 준비는 없다고 들었을 거요.”
다리엔 후작은 변명하듯 주절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니 슬며시 자존심이 상하는지라 따지듯 트루넨 후작에게 말을 이었다.
“나도 이곳이 본거지라고 알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소. 하지만 당신의 그 잘난 부하들이 패배한 것도 모자라서 몇 명 생포당했으니 자연히 이쪽 정보가 샐 것이 분명하단 말이오. 그런데 딴 곳이 본거지라고 거짓 정보를 흘렸다가는 금방 들통 날 것이 아니겠소?”
“내 부하들은 입이 무거운 놈들이오. 겨우 고문 정도 한다고 해서 그렇게 정보를 술술 얻어 낼 수 없소.”
투르넨 후작은 급히 변명을 했다. 하지만 다리엔 후작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상대를 몰아붙였다. 이제 주도권이 자신에게 넘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는 고문을 하겠지. 그동안에 자살하지 않았다면, 결국은 불게 되어 있소. 마법사들은 폼으로 기르고 있는 줄 아시오?”
마법사까지 동원한다면 당연히 불 것이다. 그건 의지와는 상관없는 고문술이니까 말이다. 투르넨 후작은 할 말이 없어지자 슬쩍 화제를 바꿨다.
“으음…, 그때라면 나머지 은십자 기사단이 도착하기 전이니까, 대략 50대 정도의 타이탄이 있다고 한거요?”
“물론이오. 은십자 20대에 철십자 30대라고 했지.”
“그렇다면 50대 이상 69대 이하로 보면 비교적 정확할 거요. 놈들이 자신들의 실력에 자신감이 있다면 50대 정도만 가져왔을 테고, 그렇지 않다면 좀 더 가져왔겠지.”
“그런데 왜 다섯 대밖에 안 보이는 거요?”
“그거야 당연히 이 좁은 곳에서 치고받자니 힘들 테니까 작은 숫자만 꺼내 놓고 이쪽을 꾀고 있는 거지. 그건 그렇고, 대타이탄 공격 무기는 얼마나 준비했소?”
갑자기 또 화제가 바뀌자, 다리엔 후작은 상대의 저의가 뭔지 생각해 보며 퉁명스레 답했다.
“그게 지금 중요하오?”
“물론 중요하오. 아무리 쟈크렌 요새에 있던 남은 기사단이 며칠 전에 모두 도착했다고 하지만 철십자까지 전부 다 합쳐도 70대뿐이오. 그중에서도 은십자는 50대밖에 없다는 말이오. 그런 상황에서 이쪽 50대를 확실하게 박살 내겠다고 온 부대라면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왔을 테니 대략 짐작해 본다면 빠듯한 전투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만약 대타이탄 공격 무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면?”
다리엔 후작의 물음에 투르넨 후작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저 아래로 내려가서 싸워야지. 그래야 상황이 불리해지면 후퇴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다리엔 후작으로서는 매우 황당한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인원들은 어쩌라는 말인가?
“여기 있는 모든 인원들을 버려 놓고 탈출하겠다는 말이오?”
“당연히. 당신도 전황을 지켜보다가 여차하면 이동 마법으로 튀면 될 것 아니오?”
“그렇다면, 방어 무기가 제대로 갖춰져 있다면 어쩔 거요?”
“그렇다면 당연히 여기서 싸워야지. 그편이 훨씬 더 유리할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