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경종이 울려 대면서 성 위쪽으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데도 정작 상대방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공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타이탄이 나와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건 어떻게 된 일이지?”
“글쎄요……. 혹시, 성내 전투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옆에 서 있는 마법사의 말에 공작은 무표정하게 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성내 전투라……. 성안에서 싸우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 것은 없지만, 어떤 대비가 되어 있는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뛰어드는 것이 과연 현명한 행동인지 조금 생각해 봐야겠군.”
“하지만 대타이탄용 방어 장비도 없다고 알려진 성이옵니다.”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야. 대타이탄용 공격 무기가 없다면 왜 구태여 저 좁은 성에서 싸우려고 들겠나? 저렇게 좁은 곳에서는 만약 전세가 불리해져도 도망치기가 아주 힘들 텐데.”
“하지만 타이탄이라면 저 높은 절벽에서라도 뛰어내려 탈출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물론 40미터 정도의 절벽이야 뛰어내릴 수가 있겠지. 하지만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라면 그 충격을 소화하기 힘들어. 그리고 뛰어내리면서 타이탄의 몸체가 절반 이상 땅바닥에 푹 박힐 텐데, 그건 어떻게 처리할 건가? 전투 중이 아니라면 상관없겠지만, 적을 코앞에 두고 그따위 짓을 한다면 위험천만하지.”
“그렇다고 여기에 계속 있을 수는 없지 않겠사옵니까?”
“쩝…, 이런 식으로 일이 찝찝하게 전개될 줄 알았다면 로니에르를 데려오는 건데 그랬군. 그렇다고 지금 불러오기도 뭣하니까 강행 돌파를 해 보기로 하지. 마법을 준비해라.”
“예? 마법이라 하시면?”
“공격 마법 말이다. 마법사면서 공격 마법 한 가지도 할 줄 모른단 말이냐?”
“저…, 알고는 있습니다만, 타이탄을 상대로 마법은 무용지물에 가까운지라…….”
마법사의 말에 공작은 조용한 어조로 질책했다.
“누가 타이탄을 잡으라고 했나? 저기 있는 성을 박살 내란 말이다. 물론 대마법사 정도라고 해도 성을 박살 내기는 힘들다는 것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자네들의 실력으로도 저 성에 어느 정도 타격을 줄 수는 있지 않은가? 그런 다음 녀석들의 반응을 보기로 하세. 놈들이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면 타이탄을 꺼내서 밑으로 달려 내려올 거야.”
“옛, 전하.”
마법사들은 저마다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전번의 사건 이후로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기사단에 투입되는 마법사들의 수는 최소한으로 줄어 버렸지만, 그 질은 월등하게 상승했다. 신참 마법사들은 모두들 본부에 배속되거나 타이탄 공장에서 잡무를 보는 식으로 대폭적인 교체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마법사들이 저마다 날려 댄 마법으로 미투랑성은 굉음을 발하며 폭발을 일으켰지만, 요란함에 비했을 때 별로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몇 명의 병사들이 불에 타죽기도 하고, 성벽의 위쪽 일부가 훼손되기도 했기에 처음 잠시 동안 성 위에 보이는 병사들이 잠시 허둥지둥하는 것 같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곧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잠시 후 성 위에서 붉은 화염 덩어리들이 직격하듯 공격대를 향해 쏟아졌다.
콰앙!
굉음을 내며 터지는 화염 덩어리들을 보며 공작은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은 어떤지 몰라도 마법사에 있어서는 저쪽이 질과 양에서 한 수 위였던 것이다.
“젠장! 되는 일이 없군.”
마치 벌집을 쑤셔 놓듯 겨우 여섯 개의 화염 덩어리를 날리고, 수십 개를 두들겨 맞았으니 이건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니었다. 먼저 꺼내 놨던 다섯 대의 타이탄들이 날아오는 화염 덩어리를 보고 재빨리 막아 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상당한 곤욕을 치를 뻔했던 것이다.
마법사들은 적들의 엄청난 반격에 질려서 아예 마법을 구사할 의욕을 상실한 듯 더 이상의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되로 주고 말로 받았으니까 말이다. 그들 중에서 그래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마법사가 다시금 공작에게 다가와 송구스럽다는 듯 말했다.
“공격을 재개할까요? 전하.”
“아니, 그래 봐야 별 소용도 없을 것 같군.”
실망스런 어조로 공작이 말하자 마법사는 대안을 제시했다.
“본국에 마법사들을 지원해 달라고 연락을 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아니, 이 정도 대 부대를 이끌고 와서 마법사를 지원받는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 또 그런 요청을 해 봐야 토지에르에게 더욱 무거운 짐을 지우는 일이 될 뿐이야.”
노마법사에게 그렇게 대답해 준 뒤, 공작은 뒤쪽에 서 있는 기사들 중의 한 명을 호명했다.
“이보게, 하인드!”
“옛, 전하.”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한다. 모두들 타이탄을 꺼내라고 지시하도록! 내가 앞장서겠다. 이쪽에서 위력 제압으로 나간다면 무슨 꿍꿍이속인지 곧 알 수 있겠지.”
“적들이 타이탄을 모두 꺼낸 것 같습니다. 수효는 50여 대 정도!”
망원경으로 적진을 관찰하고 있던 다리엔 후작의 수행원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걸 듣고 투르넨 후작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겨우 꺼내는 정도의 행동인데도 저렇듯 놀라다니, 실전 경험이 없는 다리엔 후작과 마찬가지로 그의 부하들도 역시 실전 경험이 없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 수행원이 자신의 부하였다면 당연히 질책을 했겠지만, 다른 사람의 부하였기에 참아야 했다.
투르넨 후작은 자신의 명령을 침착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듬직한 자신의 수행원에게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전 기사단 성내 전투 준비. 걸리적거리는 것은 뭐든지 박살 내도 상관없다. 마음껏 싸우라고 전해라.”
“옛, 각하.”
수행원은 이번에는 사격 통제실과 연결된 관에다가 외쳤다.
“사격 통제실! 전 기사단 성내 전투 준비!”
그렇게 외친 후 그는 재빨리 옆쪽에 마련된 탁자로 다가갔다. 그 탁자 위에는 종이와 펜, 그리고 잉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곧장 펜을 들고는 투르넨 후작의 명령을 휘갈겨 썼다. 그런 후 종이를 구겨 가지고는 아래쪽으로 던졌다.
아래쪽에는 그 종이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연락병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은 그 종이를 펴 본 후 명령을 전해야 하는 곳으로 곧장 달려갈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후작의 명령을 들은 사람이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가는 것보다 훨씬 빠르기에 취해진 조치였다.
이렇게 자세한 전달 사항에 종이를 이용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사격 통제실은 성의 각 지점으로 연결된 로프가 집결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약속된 신호에 따라 로프를 잡아당김으로 인해 명령이 효율적으로 전달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치열한 성내 전투가 벌어지고 나면 곧장 그 명령 체계는 박살 날 것이 분명했지만, 그 정도 상황이 벌어질 정도면 이미 외곽의 타이탄 공격 무기는 필요가 없어지기에 상관없는 일이었다.
혹시나 하고 있었지만 막상 투르넨 후작이 명령을 내리는 것을 듣고 성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투르넨 후작의 명령은 최악의 경우에나 내리는 것으로, 전투만을 우선시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인정사정없이 싸우는 아군 타이탄에 깔려 압사하는 병사들이 매우 많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런 성주의 표정은 본체만체하고 투르넨 후작은 다리엔 후작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휘는 계속 그대가 할 거요? 이건 병정놀이가 아니니 본인에게 양도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만.”
“귀공은 기사단을 인솔하는 것에만 신경 쓰시오. 내 지휘권까지 넘보지 말고.”
“정 그렇다면 좋을 대로 하시오.”
투르넨 후작은 슬쩍 비웃음을 흘린 후 수행원들을 이끌고 아래쪽으로 내려가 버렸다. 여기에 있어 봐야 별로 할 일도 없을 게 분명했고, 저따위 똥고집을 부려 대는 녀석 근처에 있고 싶은 마음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
투르넨 후작이 내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격 진형을 갖춘 적의 타이탄 부대들이 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리엔 후작은 거대한 적 타이탄들이 돌진해 오는 것을 창백한 안색으로 바라봤다. 상대와의 거리가 1킬로미터 정도 남았는데도 땅바닥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처음 전장에 선 그로서는 거대한 적 타이탄들이 돌진해 오는 장면이 엄청난 중압감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후작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타이탄이라면 이쪽에도 많았고, 또 철저하게 준비까지 되어 있지 않던가? 만약 저 많은 타이탄들을 제압할 수만 있다면, 전세가 역전되는 정도를 아예 넘어서서 크라레스의 항복까지도 받아 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모든 사수 발사 준비.”
후작의 말에 따라 수행원은 떨리는 어조로 사격 통제실로 연결된 관에다가 외쳤다.
“사격 통제실! 모든 사수 발사 준비!”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다리엔 후작은 창백한 표정으로 외쳤다. 이제 적 타이탄은 거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발사.”
“발사!”
그와 동시에 벼락 치는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울려 퍼졌고 그것에 놀란 다리엔 후작은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뭐냐?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놈들이 또 마법을 쓴 거냐?”
다리엔 후작은 성벽의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놈들이 뭔가 화염계 마법을 써서 공격을 가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수백 개도 넘는 거대한 나무 말뚝들이 상대방 타이탄들을 향해 날아갔다. 적들도 이 요란함에 놀랐는지 다급하게 방패로 상체를 가리면서 자신들에게 직격해 오는 말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갑자기 날아든 말뚝의 양은 엄청난 숫자였고, 몇 대의 적 타이탄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 휘청거렸다. 그중에는 장갑이나 방패에 심각한 타격을 받은 타이탄도 있었다.
쟈크렌 요새처럼 처음부터 타이탄을 막기 위해 건설한 요새의 경우, 엄청나게 많은 타이탄 공격 무기를 보유하고 있기에 한 번의 공격으로 치명상을 입는 타이탄이 대거 나올 가능성이 많았지만, 미투랑 요새는 그렇지 못했다.
다리엔 후작이 급히 무기들을 끌어 모았다고 하지만 거의 태반 이상이 몬스터 퇴치용이었기에 타이탄들에게 치명적일 정도의 타격을 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쏟아지는 화살의 비. 혹시나 상대방 타이탄의 머리 쪽에 나 있는 구멍을 통과해서 기사를 다치게 할 수 없을까 하는 망상에서 쏘아 대는 것이었다. 물론 기사가 맞을 확률은 정말 적었지만 수천 개가 날아드니 약간은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상대방 타이탄들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달려들었다. 괜히 지체해 봐야 화살 세례나 대타이탄 병기들의 세례를 한 번 더 맞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던 순간, 거의 일곱 대 정도의 타이탄들이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파놓은 함정이 제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것은 타이탄의 발목을 잡고, 그 안의 기사를 익사시키려는 의도였다. 다리엔 후작과 성주의 의도대로 물과 지푸라기로 뻑뻑해진 물에 잠긴 그 순간, 타이탄은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엄청난 쇳덩어리의 무게에다가 물이라는 저항체가 있다 보니 그렇게 높게 도약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동료들이 빠지고 나자 적들은 더욱 진격 속도를 높여서 달려들었다. 이것 외에는 동료들을 살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저렇게 물속에 빠진다고 해서 마법 생물인 타이탄이 익사할 리는 없었고, 그것을 꺼낸다고 난리를 칠 필요도 없었다. 그냥 공간의 저편에서 기다리라고만 한 다음, 그 구덩이에서 탈출해서 다시 불러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탈출한 기사가 물 위로 나올 때가 가장 위험한 때다. 왜냐하면 이때가 가장 좋은 화살의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적의 궁수들은 기사들이 물 위로 생쥐마냥 기어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동료들이 탈출하기 전에 이들을 침묵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알프레드는 이 성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다. 서둘러서 수리를 했다고 하지만 이 성은 처음부터 몬스터 정도만을 막을 수 있도록 구축된 곳이었다. 그렇기에 성벽이 타이탄을 상대하기에는 좀 약하다는 것은 둘째 치고, 초대형 병기들을 놔둘 만한 장소로는 비좁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병기를 수납할 공간도 별로 넓지 않은 이곳 73보루(堡壘)에 무려 8개의 대형 쇠뇌와 7개의 신형 무기를 쑤셔 넣어 놨으니 비좁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초가을인데도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좁은 장소에서 벅적거리니까 땀방울이 절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신형 무기는 발사할 때 꼭 불을 필요로 했다. 그렇기에 보루 내는 한증막을 연상시킬 정도로 찜통이 되어 있었다.
땡땡땡… 땡땡땡…….
종이 약간의 시간 간격을 두고 두 번 울리자 발사수들은 모두들 긴장감을 가지고 각자의 무기를 발사할 준비를 했다. 이것은 발사 준비의 신호였고, 보루의 벽 틈새로 적이 먼 곳에서 돌진해 오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알프레드는 신형 무기의 발사수였기에 오른손에 횃불을 들고 있었다. 이제 종이 한 번 더 울리면 그때 발사하면 되는 것이다.
땡땡땡…….
종이 울림과 동시에 알프레드는 큼직한 쇠통의 위쪽에 삐죽이 솟아 있는 심지에 불을 붙였다.
푸지지직…….
묘한 소리를 내면서 심지가 타 들어가자 먼저 설명을 들은 신형 무기 사수들은 모두 귀를 틀어막았다. 곧이어 굉음이 울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쇠뇌의 사수들은 얘기가 달랐다. 그들은 곧이어 굉장한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옆의 동료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손으로 귀를 틀어막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발사와 동시에 다음 발사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쇠뇌 발사수들이 발사를 끝내고 막 시위를 뒤쪽으로 당기기 위해 애쓰고 있는 그때 천지가 뒤집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면서 신형 무기가 발사되긴 했지만, 그건 여섯 발뿐이었다. 나머지 하나 남은 신형 무기는 발사되기는커녕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파편과 충격을 주위로 퍼뜨렸다.
알프레드는 운 좋게도 자신의 옆에 있던 동료가 그 파편을 막아 주는 그야말로 인간 방패의 역할을 해 줬기에 충격만 받고, 옆쪽으로 밀리다가 벽을 들이받고 기절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