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쾅!
거대한 성벽을 허물듯 박살 내고 돌진해 들어오는 적 타이탄들을 향해 성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타이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달려들었다. 이제 성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고야 말았다. 상호 1백 대가 넘는 타이탄들이 집단전을 벌여 대니 성 내부가 무사할 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기사단을 책임지고 있던 트루넨 후작은 생각해 보지 않은 몇 가지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돌진해 들어온 적들 중에서 가장 거대한 타이탄의 존재였다. 그 거대한 타이탄은 단순무식하게 싸우고 있었지만, 방패로 막고 검을 휘두르는 타이밍이 매우 기가 막혔기에 순식간에 다섯 대의 은십자 기사들을 피의 제물로 삼아 버렸다. 그것을 봤을 때 아무리 봐도 자신이 직접 나선다고 해도 상대하기가 벅찬 괴물로 보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는 기사들의 실력은 어떤지 몰라도 저쪽 타이탄의 덩치 및 출력이 이쪽보다 월등하게 우세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넓은 대지 위에서 치고받는다면 숫자가 월등하게 많은 이쪽이 유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좁은 성안에서 치고받자니 자연히 장애물이 많았고, 큰 덩치와 그에 따른 강력한 파워를 지닌 타이탄이 월등하게 유리한 것이다. 그리고 이쪽이 숫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성내의 건물들에 막혀서 행동에 지장을 받다 보니 수적인 이점을 별로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성내 곳곳에서 아직 생존해 있는 대타이탄 무기들이 적 타이탄을 향해 공격을 가하고는 있었다. 그중 몇 대의 신형 무기는 발사 때 폭발을 일으키며 사수들을 전멸시키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런 좁은 공간에서의 공격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뒤쪽에 처진 적 타이탄들이 공성 무기를 하나하나 찾아내어 박살 내기 시작했고, 눈에 띄는 병사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기 시작하면서 대타이탄 무기들은 하나씩 하나씩 침묵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가자 트루넨 후작은 억눌렀던 분노를 터뜨렸다.
“제기랄! 탁상공론이나 하던 놈이 생각해 낸 작전이니 뻔하지.”
그는 슬쩍 타이탄을 돌려 오른쪽에 솟아 있는 곳곳에 상처가 생긴 중앙 지휘탑을 바라봤다. 타이탄 몇 대가 그곳에 그 덩치를 가지고 비비적거렸으니 멀쩡할 리가 없었다.
“벌써 도망쳤나? 이런 식의 전투라면 여기서 개죽음당할 필요가 없잖아?”
트루넨 후작은 탑 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슬며시 분노를 느꼈다. 아무리 명목상이라고 해도 사령관이 도망쳤다면, 자신도 여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울 이유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타이탄을 몰아서 좀 더 앞쪽으로 나간 후 적 타이탄과 접전을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자신이 나설 단계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지금 한 가지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기에 앞으로 나선 것이다.
투르넨 후작은 적과 몇 차례 검을 겨누다가 상대의 검이 묵직한 공격을 가했을 때, 그걸 기회로 뒤쪽으로 밀리는 듯 쿵쾅거리며 후퇴하여 그대로 중앙 지휘탑을 등판으로 밀어 버렸다.
보통 타이탄이 상대의 검에 밀려 중심을 잃은 것이었다면 여태까지처럼 탑에 큰 충격을 주지는 않고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투르넨 후작은 아예 탑을 박살 내려고 힘껏 뒤로 밀어붙였기에 탑은 그 엄청난 중량을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트루넨 후작은 아예 내친김에 뒤로 자빠지면서 밀어붙인 후, 일어서면서 탑의 잔해를 지근지근 밟아 버렸다. 혹시나 다리엔 후작이 도망치지 않고 탑 안 어딘가에 숨어 있다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투르넨 후작은 자신의 행동이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목격자들에게 매우 우연히 벌어진 일인 것처럼 보였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자신은 나중에 그걸 상부에 적 타이탄의 힘에 밀렸기에 벌어진 매우 불행한 사고였다고 진술할 생각이었다.
투르넨 후작은 완전히 탑을 박살 내 버린 후 마나를 힘껏 끌어 모아 외쳤다.
“전원 후퇴!”
트루넨 후작은 후퇴하라고 외쳤지만 정작 자신은 앞으로 나섰다. 이렇게 많은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목격자가 한둘은 살아남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그것을 생각한다면 자신은 후퇴하면서 최고로 모범적인 상관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투르넨 후작과 몇몇 기사들이 사력을 다해 막고 있는 사이 부하들은 뒤로 빠지면서 일부 성벽을 허물어 버리고는 아래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40미터 정도 높이의 절벽이었기에 상당한 충격이 오기는 하겠지만, 그건 각자가 지닌 재주껏 억누르면 되는 것이다.
부하들이 차례로 빠져나가는 사이 투르넨 후작은 정말이지 후퇴 작전에 있어서 모범적인 상관으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거기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적의 사령관이 탑승했을 것으로 보이는 그 거대한 청색 타이탄을 직접 막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수들은 고수들끼리 겨뤄야 서로 간의 피해가 줄어드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투르넨 후작도 저 청색 괴물하고 싸워서 이길 자신은 아예 없었다. 그리고 또 잘못해서 상대가 상상 이상의 고수라면 자신은 그놈에게 발목을 잡혀서 아예 탈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가능성마저 있었기에 그는 일부러 거대한 청색 타이탄의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3분의 2가 넘는 부하들이 절벽 밑으로 뛰어내린 후 그들의 퇴로를 지켜 주던 후작도 아래로 뛰어내렸다.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탈출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물론 자신의 부하들처럼 타이탄을 타고 그대로 뛰어내릴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타이탄에 탄 채로 땅바닥에 박히게 된다면 해답이 안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는 뛰어내리기 직전 타이탄의 머리를 뒤로 젖혔고 타이탄이 땅바닥에 격돌하려는 순간, 타이탄에서 위로 뛰어올랐다. 그런 다음 땅바닥에 처박혀 있는 자신의 타이탄에게 공간의 저편으로 들어가라는 말을 남기고 쏜살같이 도망쳐 버렸다.
크라레스의 기사단은 끝까지 퇴로를 사수하고 있던 상대방 타이탄 다섯 대를 해치운 후 절벽 쪽으로 달려갔다. 상당수의 타이탄은 벌써 구덩이에서 빠져나와 도망쳤지만 아직 몇 대는 도망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먼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검이나 철퇴 등의 무기를 아래쪽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타이탄들을 향해 던졌다. 그런 후 성벽의 일부를 뜯어내어 그대로 아래쪽을 향해 던지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다섯 대의 타이탄이 아래쪽으로 뛰어내렸고, 끝내는 여섯 대의 적 타이탄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일단 더 이상 적 타이탄을 상대할 필요는 없었기에, 루빈스키 공작은 자신의 타이탄 프루토에서 서둘러 내려왔다. 공작은 더 이상 타이탄이라면 탑승하기도 질린다는 듯 끔찍한 표정으로 프루토를 바라봤다. ‘로니에르는 청기사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 걸까’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던 루빈스키 공작이었다.
그만큼 프루토는 지독스럽게도 말을 듣지 않는 타이탄이어서, 공작은 눈앞의 적과 프루토를 함께 상대해야 했기에 다른 전투보다 피곤이 배로 몰려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공작은 프루토에서 내리자마자 부하들에게 피곤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우렁찬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쓸 만한 서류가 있는지 뒤져라. 그리고 적의 마법사나 기사가 보이면 생포하도록! 그리고 그 외의 포로는 필요 없으니 모두 본보기로 처형하라.”
“옛, 전하.”
부하들은 공작의 명령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 그야말로 사냥을 시작했다. 몇몇은 타이탄에 탑승한 채였지만, 대부분은 성안을 뒤지기 위해 타이탄을 돌려보낸 후였다.
사방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공작은 자신의 옆에 서 있던 부하를 향해 말했다.
“참, 그 우렛소리를 내던 적의 대타이탄 병기 기억하나?”
“예, 전하.”
“혹시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는지 뒤져 봐라. 그리고 사수들 중에서 살아 있는 녀석도 몇 명 잡아와라.”
“옛, 전하.”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로체스터 공작에게로 남부 전선의 지휘권이 넘어온 것은 미투랑 전투가 끝난 후 정확히 이틀 뒤였다. 그 전투에서 살아남은 투르넨 후작이 전투 도중 지휘권을 내팽개치고 도주한 다리엔 후작을 고발한 후 코린트의 황제는 끝내 단안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잘못된 작전으로 인해 무려 48대의 타이탄이 손실되고, 성 하나와 1개 사단급의 병력이 몰살된 것은 둘째 치고, 지휘자가 전투 도중 도주했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탈출에 성공한 기사들 및 몇몇 생존한 병사들의 증언에 따라 최후까지 부하들의 퇴로를 마련해 주기 위해 분투했던 트루넨 후작은 간단한 징계만 받았을 뿐, 자신의 직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징계를 받은 이유는 부사령관이라는 위치에 있으면서 사령관인 다리엔 후작이 잘못하고 있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다리엔 후작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 처형되었다. 그리고 그의 목이 날아가면서 그로체스 공작의 꿈도 박살 나 버렸다. 모든 군권(軍權)은 로체스터 공작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로체스터 공작은 남부 전선이 자신의 관할 하에 들어오자마자 근위 기사단과 발렌시아드 기사단을 제외한 남은 여유 전력을 모두 이끌고 남부 전선에 도착했다.
여유 전력이라고 해 봐야 철십자나 동십자 기사단은 직접적인 대타이탄 전투에 사용하기에는 무리였기에 금십자와 은십자 기사단뿐이었고, 한때 2백 대에 이르던 그 전력은 겨우 80대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생각 같아서는 근위 기사단의 일부라도 돌리고 싶었지만 근위대 또한 오랜 전쟁으로 인해 막심한 피해를 당해, 제1, 2근위대를 통합하여 제1근위대로 만들어 제임스에게 맡겼고, 제3근위대는 제2근위대로 명칭을 바꾼 상태였다.
한때 최강의 타이탄 36대로 구성되었던 코란 근위 기사단이 지금은 불과 15대 정도로 감소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개편된 제2근위대의 경우 비밀 임무를 위해 크라레스에 들어가 있는 상태가 아닌가? 불과 적기사 두 대로 이루어진 제2근위대라고 해도 지니고 있는 전력은 엄청난 것이었고, 더 이상의 전력을 근위대에서 빼낸다는 것은 어려웠다.
로체스터 공작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쟈크렌 요새에는 발렌시아드 기사단을 배치하고, 새로운 수도로 확정된 케락스시에는 제임스가 거느리고 있는 제1근위대를 배치했다. 그런 후 곧바로 모든 전력을 거느리고 남하했던 것이다. 하지만 로체스터에게는 이제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의 전력으로는 아예 전쟁을 지속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해져 버린 것이다.
정보에 따르면 크라레스는 정규급이 거의 1백여 대, 크루마는 130여 대가 남아 있었다. 그에 비했을 때 코린트는 모두 다 합한다면 정규급 118대, 그것도 발렌시아드 기사단까지 합해서 말이다. 이런 최악의 상태에서는 아직까지 두 나라를 견제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을 때 재빨리 휴전을 하고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것은 당연했다.
공작은 전선에 도착한 후 크라레스에 잠입해 있는 까미유를 불러냈다.
“안녕하셨사옵니까? 공작 전하.”
“오, 갑작스런 호출이었는데 빨리 도착했군.”
“옛, 전하. 이번에 남부 전선까지 총괄하게 되신 것을 경하(慶賀) 드리옵니다.”
“경하는 무슨……. 처음부터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지. 그건 그렇고 그 멍청한 다리엔 녀석이 50여 대에 이르는 타이탄을 손실한 덕분에 이제 크라레스와는 한판 하고 싶어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원통할 뿐이지. 자네가 있었는데도 그 낌새를 채지 못했나?”
“예, 로니에르 공작은 이번 전투와는 무관하옵니다. 얼마 전에 어딘가로 여행을 다녀왔다고 들었사온데, 그 외에는 대부분 자신의 천막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지낸다고 하옵니다.
그 때문에 그의 시중을 든다고 제스터는 별로 돌아다닐 여유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사실, 제스터도 그날 거의 70명이 넘는 기사들이 공간 이동한 것을 저에게 보고해 오기는 했사옵니다. 하지만 그들이 미투랑을 공격하러 간 것인지는 알 수 없었사옵니다.”
“흐음, 오히려 쓸데없이 정보 수집한다고 돌아다니지 않는 게 더 좋겠지. 또 그 작전은 나에게도 보고되지 않았을 정도로 다리엔 혼자서 세운 작전이었다. 만약 이쪽에 도움을 청했다면 사정이 약간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 그건 그렇고 이번 패전으로 더 이상 크라레스와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쯤에서 손 터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예? 그렇게 된다면 코린트의 명성은 무너질 것이옵니다.”
“하지만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지속하다가 나중에 크루마에게 뒤통수라도 얻어맞는 날이면 명성 유지는 고사하고 멸망할 가능성마저도 있다. 그만큼 본국의 전력은 형편없이 떨어져 있다. 크루마는 그때 수거한 고철 타이탄들로 새로운 타이탄들을 생산 중이다. 하지만 지금 본국은 그것마저도 어려워. 생산 시설을 다시 복구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아마도 내년 봄이나 되어야 새로운 타이탄 생산이 가능해질 거란 말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예.”
“현재까지 입수된 가장 정확한 정보에 의하면 크라레스의 타이탄 총 수는 150대를 넘어서고 있다. 물론 그중에서 70대 정도는 루시퍼나 푸치니 같은 별 볼일 없는 타이탄이야. 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거의 대부분이 1.3의 출력을 지닌 카프록시아나 그에 준하는 출력을 내는 것으로 조사된 알파급, 그리고 거대한 덩치와 상상하기도 힘든 출력을 지닌 최신형 베타급이다.
조사된 바에 의하면 베타급은 두 대 이상, 아마도 다섯 대 이하일 것으로 추측된다. 로니에르가 가지고 있는 것 한 대, 그리고 미투랑 전투에서 투입된 한 대, 정보에 의하면 미투랑 전투는 크로아 공작이 지휘했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크로아 공작이 베타급을 가지고 있겠지. 그 외에는 많아 봐야 세 대 이하일 것으로 추측된다.”
“대단한 전력이옵니다, 전하.”
“그렇지. 그에 비해 본국의 전력은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격감했다. 이제 은십자 기사단과 금십자 기사단을 합쳐도 겨우 78대. 철십자나 동십자 기사단의 전력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아. 발렌시아드 기사단 10대에다가 근위 기사단 총 전력 17대. 이 상황이라면 크루마나 크라레스보다는 약간 우위에 서겠지만 그 둘이 한꺼번에 침공해 들어온다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
“설마 그렇게까지야…….”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것이 좋겠지. 한 가지 네가 명심해야 할 것은 크루마보다는 크라레스 쪽이 더 강하다는 사실이다. 키에리를 격패시킬 정도로 강력한 기사가 존재하는 한, 크라레스는 무시할 수 없는 상대야. 그래서 자네를 불렀다. 자네가 사신으로 가 주겠나?”
“예?”
“자네에게 여태껏 설명한 이유가 바로 그거야. 현실적인 힘의 균형을 잘 이해해 달라는 것이었네. 내가 자네를 사신으로 선택한 이유는 자네라면 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크라레스에 많은 것을 양보하지 않고 종전시킬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지. 지금 크라레스도 너무 많은 영토를 폭식(暴食)한 덕분에 소화 불량에 걸리기 직전이야. 아마도 협상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야. 해 주겠나?”
“옛, 전하.”
“원래 처음부터 내 의견대로 크라레스를 게릴라전으로 발목을 잡고, 그사이에 크루마를 박살 내 버렸으면 이런 사태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정말이지 원통하구나.”
“안녕하셨사옵니까? 공작 전하. 이번 미투랑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신 것을 축하드리옵니다.”
“축하라고 할 것 있겠나? 테세우스 12대가 파괴되고 기사 두 명 사망, 여덟 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말이야.”
“그래도 오랜 전쟁에 쐐기를 박는 멋진 승리였사옵니다.”
“내가 자네를 부른 것은 공치사나 듣자는 것이 아니고 보여 줄 것이 있어서네.”
토지에르가 궁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공작은 괴상하게 생긴 물건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것은 이번 미투랑 전투에서 노획해 온 적의 최신 무기였다.
“이게 뭔지 알겠나?”
루빈스키 공작의 물음에 토지에르는 한참 생각한 후 대답했다.
“그…, 글쎄요. 이게 무엇이옵니까? 여기 나 있는 구멍은 또 무엇이지요?”
공작이 가리킨 물건을 토지에르는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제법 큼직한 둥그런 구멍이 뚫려 있는 길이 1미터 정도의 원통형 쇠막대가 놓여 있었고, 그 쇠막대는 나무로 만든 틀로 견고하게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 틀의 아래쪽에는 바퀴가 붙어 있어 어느 정도 움직일 수도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런 해괴한 물건은 토지에르로서는 난생 처음 보는지라 그 용도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게 무엇이옵니까? 전하.”
“자네도 짐작하지 못하는군. 이게 이번에 미투랑 요새에 배치되어 있던 신형 대타이탄 병기지. 이름은 뭔지 잘 모르겠군.”
“이게 대타이탄 병기라구요? 그렇다면 여기 뚫려 있는 이 구멍으로 뭔가를 쏜다는 것이옵니까?”
“그렇네. 열 번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좋겠지. 이봐.”
그러자 공작의 뒤에 서 있던 장교가 즉각 대답했다.
“옛, 전하.”
“발사 준비를 하라. 그리고 포로들도 데려오고.”
“옛!”
장교가 성큼성큼 어디론가 가 버린 후 공작은 토지에르에게 설명했다.
“어떻게 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기에, 이걸 쏘던 녀석 몇 명을 잡아왔지.”
“아, 예.”
토지에르가 흥미진진한 눈길로 바라보는 사이, 포대(布袋)로 덮어 뒀던 큰 화살이 운반되어 왔고, 흑색의 가루가 잔뜩 들어 있는 통도 날라져 왔다. 그 통의 내용물을 흘끗 바라보던 토지에르는 눈동자를 빛내며 그곳에 다가간 후 그 내용물을 집어서 만져 보다가 냄새까지 맡아 보고 있었다.
“이게 뭔지 알겠나?”
“예, 이건 화약이라는 것이옵니다. 거의 1백 년쯤 전에 개발된 것이온데, 불을 붙이면 금방 타 들어가면서 짙은 연기를 내지요. 낮은 수준의 마법사들이 높은 분들 앞에서 연출 효과를 내기 위해 주로 애용하는 물건이옵니다. 그 외에 화염계 마법을 사용하면서 좀 더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 수련 마법사들이 보조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지요.”
“흐음……. 이게 폭발하기도 하나?”
“예? 폭발이라고요? 글쎄요. 이건 어떤 특수한 조건을 만들어 주지 않는 한 폭발하지 않사옵니다. 아주 맹렬하게 타 들어간다고 보는 것이 옳겠죠. 한번 보시겠습니까?”
토지에르는 통 속의 화약을 한 주먹 가져다가 흙 위에 올린 후 불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그 화약은 한순간에 타 들어가 버렸고, 재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연기는 엄청나게 솟아나왔지만, 토지에르의 말대로 폭발한다고는 할 수 없었다.
“자네의 말대로군. 그런데 이게 굉음을 내면서 저걸 쏘아서 날리더라구. 좀 있다가 포로들이 도착하면 자네도 알 수 있을 걸세.”
곧이어 포로들이 도착했다. 포로들은 이걸 발사해 보라는 지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사 목표를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산 쪽으로 잡은 후 그들은 숙련된 동작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그 쇠통 위의 작은 구멍에 심지를 박아 놓은 후, 화약이 들어 있는 통에서 작은 통 세 개 분량의 화약을 떠서 쇠통 속에 집어넣은 후 적당히 다졌다. 그런 다음 그 쇠통에다가 대형 화살을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포로들은 잠시 쑤군거리더니 한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그 쇠통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후 귀를 틀어막았다.
“귀를 막으십시오.”
이걸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던 토지에르가 발사하려는 것을 갑자기 중지시키며 물었다.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멀찌감치 떨어지는 것인가? 그리고 거기에 불을 붙이려는 자네의 손은 왜 그렇게 떨리는 거지?”
포로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이번에 폭발 사고가 몇 번 있었습니다. 발사되는 것도 있었지만, 그대로 폭발하는 것도 있었죠. 이게 폭발하면 근처에 있는 사람은 다 죽습니다.”
포로의 대답에 토지에르는 놀랍다는 듯이 그 쇠통을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바라봤다. 쇠로 매우 튼튼하게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는데 이게 터져 나갈 정도라면 과연 자신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대단한 힘이 화약에 있는 모양이었다. 토지에르는 일단 그 힘을 견식해 보기로 작정했다. 그는 그 쇠통을 중심으로 방어 마법을 펼친 후 말했다.
“이제 쏘아 봐라.”
그 마법 방어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기에, 포로는 눈앞의 이 늙은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었고, 그렇기에 또다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심지 쪽으로 불을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쾅!
발사는 성공이었다. 엄청난 굉음 덕분에 주변에 있던 나무에서 새들이 기겁을 해서 날아올랐다.
“흐음, 1킬로미터는 족히 날아가는 것 같은데?”
“예, 웬만한 쇠뇌들도 그 정도는 화살을 날리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덩치에 있죠. 저 정도로 작다면 더욱 좁은 면적에서 더욱 많은 쇠뇌를 적 타이탄을 향해 발사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저건 정말 혁신적인 무기군요.”
“나도 그게 놀라워서 가져온 것이지. 하지만 포로의 말대로 한 번씩 폭발한다면 그 점은 개량해야만 하겠지.”
“방금 본 대로라면 저 화약이 쇠통의 내부에서 폭발하면서 그 힘으로 쇠뇌를 밀어붙이는 것이겠지요. 아마도 저 쇠통은 화약이 그냥 타 들어가지 않고 폭발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는 모양이옵니다. 아주 혁신적인 생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문제는 일단 화약이 타 들어가지 않고, 폭발하도록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쇠통이 그 폭발력을 버티지 못하는 것이겠죠. 아마도 제 생각으로는 저 쇠통의 두께를 좀 더 두껍게 만든다면 상관없을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그렇다면 자네가 연구를 좀 해 보게. 이제 영토가 비약적으로 늘었으니 기사단에만 의존하기는 힘들 거야. 전략적 요충지에는 적의 타이탄 부대를 저지할 만한 강력한 요새들을 건설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겠지. 그때를 위해서 이런 무기는 필수적이지 않겠나? 좀 더 개량한다면…, 예를 들어 더 많은 화약을 넣어 폭발력이 강해진다면, 지금보다 더욱 강력한 파괴력을 얻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한번 연구해 보겠사옵니다, 전하.”
쇠뇌를 발사하는 쇠통은 나중에 대포라고 불리게 된다. 그리고 예로부터 타이탄을 상대하는 무기는 화살 종류였고, 쇠뇌에서 발사하는 것도 큼직한 나무통이었기에 대포에도 탄환으로 나무통을 넣어서 쏜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가서야 몇몇 선지자들이 구태여 그렇게 큰 나무통을 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대포의 탄환은 작아지기 시작한다.
초기의 대포가 폭발할 확률이 높았던 것은 쇠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두께의 균일함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포의 쇠 두께가 일정한 두께가 되기가 힘들었던 이유는 타이탄 제작 기술에 힘입어 대포를 주물로 제작했기 때문이다.
일정한 틀을 만들고 거기에 쇳물을 부어서 만드는 방식으로는 대포를 크게 만들면 만들수록 그 두께를 일정하게 만들기 어려워진다. 거기에다가 주철은 깨지기가 쉽고, 또 대포 내부에 기포 같은 것이 생길 여지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한쪽이 약해지면 손쉽게 대포가 폭발하는 참사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은 훗날 주물이 아닌, 포신 안쪽을 커다란 드릴 같은 것으로 깎아 내는 신기술이 개발되면서 어느 정도 해결이 된다. 그렇게 해야만 포신의 두께를 균일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전까지 대포는 적에게도 강력한 위협이 되는 신무기였지만, 동시에 아군에게도 생명의 위협을 주는 괴상한 무기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