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쳐온 운명의 시간
코린트 제국의 새로운 수도 케락스. 케락스는 코린토비아 지방과 스와덴 지방의 경계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에 건설되어 있는 코린트 제2의 도시였다. 과거 스와덴이 코린트의 영역에 편입되기 전, 양국의 모든 산물이 교류되는 요지였기에 엄청난 기세로 발전했었다. 그러다가 스와덴이 코린트에 병합된 후에도 그 기세를 잃지 않고 발전을 거듭해 왔고, 코린트가 낳은 위대한 대마법사 그라세리안 드 코타스가 케락스에 마법 방어진을 설치한 후 더욱 발전했다. 전시라면 몰라도 평상시에는 마법 방어진으로 흘러 들어갈 마나를 실생활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관례였기에 생활의 편의성에서 근처에 있는 타 도시들을 훨씬 앞섰기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케락스가 두 번째 수도로 정해지게 된 데는 또 다른 실리적인 이유도 있었다. 케락스에는 작기는 하지만 황제의 별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황실은 케락스로 이사를 왔고, 그와 함께 별궁의 신축 작업이 한창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로체스터 공작의 집무실에는 공사하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예?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사옵니까?”
상대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로체스터 공작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럴 수가 있지요. 현재 본국에는 귀국에 타이탄 구입 대금을 지불할 여력이 없소. 그리고 지금은 본국이 안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신형 타이탄을 제작하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이점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소.”
“그럴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그때 타이탄을 본국에서 구입하면서 10분의 1은 선불로, 나머지는 20년 분할 상환으로 못 박지 않았사옵니까? 그런데 대금은 고사하고 처음 주기로 약조하셨던 선금도 전쟁 중이라며 물건만 가져갔을 뿐, 대금은 며칠 후에 지급한다고 말씀하시하고서 차일피일 그 지급을 미뤄 오고 있으니,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코린트나, 공작 전하를 믿을 수 있단 말이옵니까?”
열이 올라서 씩씩거리는 알카사스 사신의 얼굴을 보며 로체스터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한껏 지었지만, 사실 미안한 마음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그 돈을 떼먹겠다는 것이 아니지 않소? 다만 지금 상황이 안 좋으니까 조금 더 연기해 달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에 따른 이자도 지불해 줄 용의가 있소. 몇 년만 기다려 주시오. 모든 구입 대금과 함께 이자까지 톡톡히 지불해 드리리다. 그리고 이건 그대에게 드리는 내 자그마한 성의니 받아 두시오.”
로체스터 공작이 내미는 작은 가죽 주머니를 바라보며 사신은 약간은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이게 뭣이옵니까?”
“열어 보면 자연히 알게 될 텐데, 뭘 묻고 그러시오? 돌아가는 여비에나 보태 쓰시오. 내 작은 성의요.”
가죽 주머니 안에는 여러 가지 색상의 보석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뭔가 형태가 있는 세공품이라면 몰라도 이런 식의 보석 알맹이들의 경우 팔아먹기도 쉬웠고, 또 꼬투리가 잡힐 염려도 거의 없었다. 그리고 보석의 양으로 봤을 때 평생 쓰고도 남을 정도로 막대한 액수인 것은 틀림없었기에, 사신의 눈빛은 슬며시 탐욕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자자, 빨리 집어넣으시오. 물론 그때 발생한 타이탄 구매 대금은 이자까지 합쳐서 나중에 줄 테니 몇 년만 참아 달라고 그대가 윗사람들에게 말을 잘 전해 주시오.”
“하, 하지만 전하. 이러시면…….”
“내 방의 주위에는 수십 명의 그래듀에이트와 마법사들이 경비하고 있소. 결코 그대에게 누가 돌아가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내가 그 돈을 떼먹겠다는 것이 아니지 않소? 이자까지 모두 다 상환해 주겠다는데 무슨 딴 말이 필요하겠오? 그대는 상환 시일을 몇 년만 뒤로 늦춰 주면 되오. 그리고 내가 들은 정보로는 요즘 들어 알카사스에서 주력 타이탄을 가이아급으로 대체하고 있다고 하던데 사실이오?”
알카사스는 요즘 들어서 강대국들이 치열한 군비 경쟁을 시작했기에 그에 위협을 느끼고 주력 타이탄을 노리에(1.02)에서 가이아(1.32)로 교체하는 작업을 한창 진행하고 있었다.
“예? 예, 그렇사옵니다.”
“으음, 그렇다면 거기에서 대체된 노리에급 타이탄들은 어떻게 한다고 하던가요?”
“예? 물론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듯이 판매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걸 본국에다가 판매해 달라고 주선 좀 해 주시오. 그대도 여기에 오기 전에 아마 말을 들었을 거요. 이제 쓸 만한 타이탄은 코린트에 1백여 대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말이오. 지금 크루마와 크라레스가 힘을 합쳐 밀어붙인다면 우리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지. 안 그렇소?”
공작이 솔직하게 털어놓자, 사신은 의외라는 듯이 그를 바라봤다. 코린트가 이번 전쟁을 치루면서 엄청나게 약화되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말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예, 소인이 알고 있는 바도 그렇사옵니다. 하지만 코린트에는 세 명의 마스터가 있고, 또 뛰어난 기사들이 많지 않사옵니까?”
사신의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일부러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허, 그게 아니오. 두 나라가 함께 공략해 들어온다면 마스터의 숫자도 비슷해지지. 크라레스에 두 명이 있고, 크루마에는 한 명이 있으니까 말이오.”
크라레스에 마스터가 두 명이나 있다는 말에 사신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로서는 그런 정보를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크라레스에서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코린트를 침공했을 것이고, 또 코린트는 그 막대한 땅덩어리를 뺏기고도 휴전을 할 수 밖에 없는 지경까지 들어간 것이 아닐까?
“사실이옵니까?”
“그럼, 내가 왜 그대에게 거짓말을 하겠소? 오히려 우리 코린트가 반석과 같이 안전하다고 떠들어 대는 것이 거짓말이겠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코린트가 망하면 귀국은 우리나라에 타이탄을 판매했던 대금을 어떻게 회수할 거요?”
“그야…….”
그 막대한 금액을 날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신을 향해 공작은 차근차근 설명해 들어갔다.
“이제 알겠소? 귀국이 판매 대금을 받아 내려면 본국이 망하지 않게 도와줘야 한다는 것을 말이오. 내 말이 거짓인지 사실인지는 조사해 보면 알 거요. 본국은 지금 개국 이래 최악의 상태에 직면해 있소. 지금 우리들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은 귀국뿐이오. 이제 몇 년 지나지 않아 코린트는 다시금 힘을 회복할 거요. 그때는 결코 귀국의 도움을 잊지 않을 것이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소?”
“예.”
“노리에급을 우리에게 판매할 수 있도록 손을 써 주면 내가 방금 줬던 보석의 두 배를 그대에게 줄 거요. 그러니 힘 좀 써 보시오. 그대만 믿겠소.”
로체스터 공작은 보석 주머니를 품속에 소중히 감추고 문을 나서는 사절의 뒷모습을 향해 비웃음을 흘려보냈다.
“멍청한 녀석…….”
물론 로체스터 공작은 이번 거래가 성사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만큼 지금 코린트는 최악의 상태였고, 또 알카사스는 원금이라도 회수할 목적으로 코린트를 도와야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안 그러면 그 막대한 금액을 통째로 날릴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코린트는 원체 저력 있는 국가였기에, 조금만 도와주면 금세 일어설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원래가 빚이라는 것은 웃기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 부채가 작을 때는 채권자가 채무자를 들볶을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마련이다.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 채무가 늘어났을 때는 정반대의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채무자가 큰소리를 치게 되고 채권자는 제발 원금이라도 돌려주거나 아니면 원금의 반이라도 돌려달라고 사정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로체스터 공작은 키에리가 알카사스에 만들어 놓은 이 막대한 부채를 상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빚을 더욱 불려놓을 생각이었다. 그런 후 코린트의 힘이 다시금 막강해졌을 때, 그 빚을 갚건 그렇지 않건, 그건 그때 가서 마음 내키는 대로 처리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가을도 이제 늦었는지라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찬 기운이 돌았다.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오늘도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차라리 레어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적적한 레어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활발하기 그지없는 이 신생국에 머무르는 생활이 훨씬 더 자극적인 건 사실이었기에, 그는 아들에게 투덜거리면서도 일부러 남아 있었다.
아들 녀석은 처음에 아르티어스에게 갖은 아양을 떨며 몇 가지 일을 시켰다. 그녀로서는 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 상황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아르티어스는 그녀의 애교에 홀딱 넘어가서는 전혀 할 생각이 없었던 일을 떠맡고 말았다. 이렇게 된 이상 후딱 해치우고 쉬자는 생각에서 아르티어스는 그 일을 빨리빨리 처리했다. 안 해서 그렇지, 일단 하려고만 들면 어떤 일이든 처리하지 못할 것이 없는 아르티어스였다. 그는 드래곤이었고, 드래곤의 머리가 뛰어나다는 것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지금에서야 그때 왜 자신이 그토록 열심히 일을 했었는지 후회막급인 심정이 되어 있었다. 일단 자신이 일을 잘 처리한다는 것을 알아챈 아들놈은 그다음부터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애비에게 중노동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끝이 날 것 같지도 않은 일을 하다가 하다가 질렸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다음 찬장을 열고 미네르바가 뇌물로 갖다 바친 포도주를 꺼내어 한 잔 따라서 음미하며 마시기 시작했다. 포도주의 그윽하고도 풍요로운 맛과 향이 그를 매료시키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그 지독한 레드 드래곤을 마셔야만 했다는 것이 그로서는 악몽과 같이 느껴졌다. 그것도 다 자신과 술에 있어서는 극과 극의 취향을 지닌 아들놈의 탓이었다. 아들놈은 독하기만 하면 어떤 술이든지 다 좋아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겨울도 머지않았군. 이제 조금 더 지나면…….”
그러다가 갑자기 아르티어스에게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요즘 너무 바쁘다 보니 그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오늘이 그날인가? 가만있자, 계산을 해 보자구.”
한참 머리를 굴리던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르티어스는 아들의 방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다시 나타난 정령왕 나이아드
“히야!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경치구먼.”
다크는 문득 자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이 오래전에 아주 신물 나게 봤던 것임을 깨달았다. 정령왕 나이아드에게 걸려서 엄청나게 고생하던 매일 매일이 악몽과 같았던 그때. 사실 그때는 모든 것이 시커멓게 보였을 뿐 주위 경관이 보이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경관들을 볼 수가 있었고, 제일 마지막에 나이아드와 만났을 때는 아주 확연하게 이 작은 이상한 세계를 볼 수 있었다.
“그놈이 아는 곳은 여기밖에 없나? 맨날 여기로 불러내는 것을 보면…….”
그녀는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호수 옆에 있는 바위를 하나 찾아내고는 그곳에 가서 앉았다. 새파랗게 빛나는 호수는 대단히 아름답게 보였지만, 그 안에 물고기는 살고 있지 않았다. 또 새파란 하늘과 호수 주변에만 있는 몇 그루 안 되는 나무들. 그 외에는 사막과 같은 드넓은 척박한 대지였다.
다크가 느긋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을 때, 호수의 물이 갑자기 치솟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잘생긴 남자가 나타났다. 그 남자는 황금빛 머리카락을 뒤로 쓱 쓸어 넘긴 후 꼭 땅 위에서 걷듯 물 위를 천천히 걸어왔다.
“오랜만이로군.”
오만한 표정으로 인사하는 상대를 향해 다크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나 역시! 그런데, 아직도 나한테 볼일이 남아 있나?”
“물론, 남아 있지. 이제 약속한 1년도 다 되었으니 나에게 협조를 해 줘야 하지 않겠나?”
상대의 말에 다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약속한 1년?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리고 협조는 무슨 협조?”
상대의 반응에 나이아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이런, 이런……. 아르티어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군. 나를 위해서 한 가지 일을 좀 해 줘야겠어.”
나이아드가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다크는 재빨리 답했다.
“거절한다.”
“뭐야? 무슨 일인지 들어 보지도 않고 거절이야?”
“들어 보나 마나야. 나는 남의 일 해 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네 녀석처럼 뻔뻔하게 부탁해 오는 놈의 청을 들어줄 정도로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야.”
“쯧쯧…, 이런 식이라면 전번과 달라진 점이 하나도 없군. 네년은 꼭 두들겨 맞아야 말을 듣는 타입인 모양이지?”
나이아드가 이죽거리며 말하자, 다크는 슬며시 몸속의 마나를 움직이며 자신의 몸 상태가 최적의 상태라는 것을 재삼 확인했다. 몸 상태는 정상, 그렇다면 겁날 것은 하나도 없었다.
“글쎄, 그게 뜻대로 될까?”
“정 소원이라면 몇 대 때려 주고 다시 대화를 시작해 보기로 하지.”
그 순간 나이아드의 몸에서 수십 가닥의 미세한 물줄기가 뻗어 나가 다크를 강타했다. 하지만 다크의 몸 주위에 생겨나기 시작한 푸르스름한 막을 뚫지는 못했다. 소녀가 자신의 공격을 간단하게 막아 내 버리자 나이아드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전에 미쳤을 때 만났을 당시에도 상당히 강하기는 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정도 실력이라면 조금 어렵기는 하겠지만 못 할 것도 없겠다 싶어 찾아왔는데, 해괴한 마법을 써서 자신의 힘을 차단하다니?
“그게 무슨 마법이냐?”
“멍청하기는……. 말 못 해 주겠으니까 한번 맞혀 봐라.”
그때부터 소녀의 가공할 만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나이아드는 소녀의 공세를 막는 데 급급한 형편이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소녀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주문이나 시동어 따위를 외친 적이 없었다는 것.
엄청난 강기(剛氣)의 회오리가 덮쳐 오며 나이아드가 구축한 거대한 물의 장벽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강철도 뚫는 물의 힘이었지만, 소녀가 뿜어내는 힘은 그보다 더욱 강했던 것이다.
“크으윽!”
나이아드의 형체는 엄청난 힘에 의해 찢겨져 나갔고, 소녀는 이죽거리며 서서히 나이아드가 있던 곳에 다가가 자신의 작품을 감상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물의 정령왕이니까 물로 도망쳤나? 크흐흐흐,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떻게 하지 못할 것 같아?”
순간적으로 소녀의 손에서 푸른빛이 튀어 나오더니 쑥쑥 자라서 하나의 검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소녀는 막강한 기(氣)를 투입해서 검의 형상을 만들어 내자마자 그것을 나이아드가 사라졌던 그 얕은 호수 바닥을 향해 거침없이 쑤셔 넣었다.
쿠콰콰콰콰…….
그와 함께 거대한 기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 반구형의 강기 덩어리가 급속도로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호수에 고인 물과 충돌을 일으켰다. 엄청난 굉음을 울리며 주위의 공간이 찢어질 정도로 파괴되고 있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위력!
소녀는 주위가 황폐화되다 못해 완전히 박살이 나고, 자신이 서 있는 곳 주위에 거대한 웅덩이가 생겼는데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또다시 그 기술을 사용했다. 엄청난 힘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그 순간 더 이상 소녀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이아드가 만들어 놓은 공간이 찢어지듯 박살 나 버렸다.
“어? 여기는?”
다크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재빨리 눈동자를 굴려서 주위를 둘러봤다. 그곳에는 자신을 향해 애처로운 눈길을 보내고 있는 아르티어스가 서 있었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에요?”
아르티어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변명했다.
“네가 잘 있는지 궁금해서 와 봤지.”
“맡긴 일은 다 끝내고 여기서 노닥거리고 계신 거예요?”
아들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헛바람을 삼키며 변명에 급급했다.
“저, 그게 그러니까 말이다. 아직 다 끝내지는 못했는데, 아마도 내일 점심때쯤이면 끝낼 수…….”
“빨리 나가서 일해요. 여기에서 노닥거리지 말구요. 내일 아침까지 끝내라구요. 드래곤은 한꺼번에 1년도 잘 수 있지만, 그 반대도 가능하다고 자랑했었잖아요. 빨리 안 가요?”
다크는 아르티어스의 변명을 들을 생각도 안 하고 몰아붙이기 시작했고, 아르티어스는 왜 자신이 그 일을 해야만 하는지 아리송한 표정을 지은 채, 신세 한탄만 늘어놓으며, 돌아가서 일이나 할 수밖에 없었다.
“에구구구…, 내 팔자야…….”
아르티어스가 나가고 난 후 다크는 몸을 일으켜 옆에 놔뒀던, 미네르바가 선물한 크루마산 브랜디, ‘블랙홀’을 한 모금 마신 후 아쉬운 듯 투덜거렸다.
“아깝다. 완전히 끝장을 낼 수 있었는데…….”
다크는 가볍게 입맛을 다시며 다시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나이아드란 놈이 한 번 더 자신의 눈에 띄기만 하면 다시는 자신의 앞에 나타날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릴 작정이었다.
소녀의 숨소리가 점차로 잦아들기 시작하자, 소녀가 끼고 있던 반지에서 물줄기가 천천히 흘러나오더니 방금 전 소녀와 격투를 벌였던 바로 그 황금빛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아름다운 청년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젠장! 정말 이 계집이 호비트가 맞기는 맞는 거야? 내가 5천 년 전에 공들여 만들어 놓은 세계를 완전히 박살 내 버리다니……. 어떻게 호비트 계집애 따위에게 공간을 박살 낼 정도의 힘이 있는 거지? 그런 공간은 밖에서는 깨기 쉽지만 안에서 부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데 말이야. 하기야, 저 정도 힘이 있으니까 이용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보다 너무 강하다는 것이 문제로군.”
나이아드는 도저히 닭 모가지 하나 비틀지 못할 것 같은 순진한 얼굴을 하고 평화로운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소녀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봤다.
“으으윽! 저 아이를 어떻게 하면 이용할 수 있지? 지금 그녀의 힘은 내가 이 공간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의 한계를 넘어 서 버렸어. 조금만 탈출하는 것이 늦었다면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받을 뻔했을 정도니까 말이지. 그렇다고 꼬마 애 하나를 상대하자고 다른 정령왕에게 부탁하자니 자존심이 걸리고……. 으음…, 이래저래 문제구만. 저 아이를 끌어들이는 것은 좀 더 궁리를 해 봐야겠어.”
나이아드는 깊이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유지하는 듯하더니 순간적으로 물이 되어 허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