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의 실종
키에리가 블루 드래곤 카드리안을 만나고 있던 그때, 치레아 공국에서는 갑작스런 다크의 실종으로 난리가 나 있었다. 웬만한 직위에 있는 인물이 실종되었다고 해도 어떻게 된 것인지 철저히 조사하는데, 행방불명된 대상이 치레아 공국의 주인인 치레아 대공 전하이니 그것은 당연했다.
“아, 아르티어스 님! 대공 전하께서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장교의 보고에 아르티어스는 아들의 야속함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뭐야? 이 녀석이 애비를 놔두고 어디로 튀어 버린 것이지? 그래! 모든 일은 나한테 떠넘기고 튀어 버렸다 이거지. 자기 혼자만 어딘가를 여행하면서……. 에휴, 내 팔자야.”
원망스레 말하는 아르티어스에게 장교는 재빨리 자신의 말을 정정해서 보고했다. 아르티어스가 사건의 본질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닙니다. 실종되셨다는 말입니다. 그곳에 가 보십시오. 입고 계시던 옷가지만 남겨 두고 갑자기 사라지셨다니까요?”
“뭐라고 옷가지를 남겨 두고?”
그제야 사태의 중요성을 깨닫고 아르티어스는 그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가 알고 있는 한 다크는 공간 이동 마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가 사건의 현장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시선을 압도할 정도로 거대한 강철 구조물이었다.
“이게 왜 나와 있는 거야?”
바로 그 강철 구조물은 다크가 사용하던 청기사였다. 아르티어스는 청기사의 흉부에 자신을 비꼬아 만든 골드 드래곤의 문장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이게 다크가 사용하던 타이탄이라는 것을 재빨리 눈치 챘다. 아르티어스는 청기사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타이탄은 주인과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어떻게 된 노릇인지 가장 확실히 알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너는 왜 나와 있는 거지? 주인하고 같이 간 것이 아니었냐?”
그러자 안드로메다는 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원래 주인이 있는 타이탄이라면 주인 외의 인물과 대화할 수 없었지만, 그에게는 지금 주인이 없었다.
<갑자기 주인과의 맹약이 해지되었다.>
“그렇다면 다크가 그 맹약을 해지한 거야?”
<그것은 아니다. 만약 주인이 그런 말을 했더라도 나는 결코 들어주지 않았을 테니까. 주인의 존재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맹약이 깨진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청기사가 하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고는 놀라서 외쳤다.
“맹약이 깨졌다고? 골렘의 맹약은 그렇게 쉽게 깨질 수가 없는 것인데,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냐? 거기 덩치! 너는 다크가 없어지는 것을 봤냐?”
갑자기 아들이 없어진 것으로 인해 누군가 걸리기만 하면 가루로 만들겠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광기를 머금은 아르티어스의 눈과 마주치자 팔시온은 ‘팔시온’이라는 자신의 자랑스러운 이름을 놔두고 ‘덩치’라고 간단히 축약해서 말한 상대에게 항의할 말이 목구멍 밑으로 쑥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르티어스의 공포스러운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온몸이 쪼그라드는 것만 같은 위압감을 느꼈지만 사력을 다해 말했다. 만약 말하지 않으면 진짜 아르티어스에게 찢겨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팔시온으로서는 그야말로 이렇게 무섭게 보이는 아르티어스의 모습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도대체 입만 열지 않으면 미녀와 혼동하기 쉬운 저 아름다운 얼굴에서 저런 광기와 살기가 어떻게 뿜어져 나오는 것일까? 또 아무리 미녀가 미치도록 화를 낸다고 해서 이렇듯 다리가 떨릴 정도의 공포감을 느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평상시에는 다크에게 끽소리도 못 하고 끌려 다니는 팔푼이 아빠쯤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아르티어스였기에, 도대체가 저 사람이 그 사람이 맞는지 의문이 솟아오를 지경이었다. 이 세상에서 다크가 어리광을 부리는 유일한 존재가 아르티어스이듯, 평소에 팔시온이 대하는 얼빠진 아르티어스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뿐인 다크의 앞에서만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을 팔시온은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대공 전하께선 제스터에게 검술을 가르치시던 도중에 갑자기 사라져 버리셨습니다. 그야말로 갑자기 몸통이 쓱 사라지면서 옷가지와 검이 땅바닥으로 투둑 떨어졌습니다. 제가 미친 것이 아니라 정말이라구요. 저기 옷가지들이 그걸 증명하고 있잖아요. 안 그러냐, 제스터?”
우연히 그들 주위에서 검술을 연마하다가 증인이 되어 버린 팔시온은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가지와 검을 가리켜 보이며 그때 상황을 말했지만, 아르티어스가 자신의 말을 믿는 것 같지 않자 식은땀을 흘리며 제스터에게 팔밀이를 했다.
로체스터 공작에게 지시받은 대로 제스터는 전쟁터에서 열과 성을 다해서 다크에게 봉사했고, 그것을 인정받아 이곳까지 왔다. 물론 치레아에는 다크를 시중드는 세린이 있었다. 그렇기에 제스터는 요즘 다크의 시중을 드는 대신 그의 간단한 심부름을 하면서 지내고 있었고, 다크는 검술에 대한 제스터의 비범한 재능을 눈치 채고는 요즘 그를 가르치는 데 조금씩 시간을 투자해 주고 있었다.
제법 검술을 익혔고, 키도 제법 크다고 하지만 제스터는 이제 겨우 열여섯 살 정도의 미숙한 청년이었기에, 저 격렬한 광기를 뿜어내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눈빛에 질려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사실이냐?”
“…….”
아르티어스는 주눅이 들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제스터를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다가, 드디어는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대답을 햇! 저 덩치가 한 말이 사실이냐니까?”
“저…, 그, 그러니까 아, 아, 아르티어스 님. 파, 팔시온 님의 말이 사, 사실이십니다.”
더듬더듬 주눅이 든 채 제스터가 말을 마치자 아르티어스는 그 광기 어린 눈동자를 하늘로 향했다. 갑자기 사라졌다면 공간 이동 마법이나 뭐 그런 것을 첫째로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크는 공간 이동 마법을 할 줄도 몰랐고, 또 안다고 하더라도 남을 가르치다가 갑자기 공간 이동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면 둘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다크를 강제로 공간 이동시켜서 끌고 간 경우이다.
아르티어스의 눈이 주위를 샅샅이 훑어나갔다. 하지만 패밀리어(Familier)를 찾을 수는 없었다. 마법사들은 필요에 의해 자신의 눈과 귀, 그리고 손과 발이 되어 줄 동물을 평생 동안 딱 한 마리만 패밀리어로 선택할 수 있었다. 물론 패밀리어는 선택된 후 교체가 불가능했고, 패밀리어가 무슨 이유인가로 사망했을 때 그 마법사는 엄청난 정신적 충격에 바보가 되거나 심지어 사망하는 경우까지 있는 아주 위험도가 큰 마법이었다.
하지만 패밀리어를 가지고 있다면 정보 수집에 매우 효과적인 것은 사실이었기에 한 번씩 사용되기도 하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마법사는 패밀리어를 만들지 않았다. 패밀리어를 만듦으로 인해 생기는 이점보다 위험도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패밀리어를 이용해서 다크가 있는 좌표를 잡고 강제로 공간 이동해서 끌고 간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문제였기에 아르티어스는 어떤 망할 놈의 마법사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패밀리어를 찾은 것이었다. 하지만 잠시기는 했지만 패밀리어를 찾다가 보니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공간 이동을 한다고 해서 절대로 존재감이 사라질 수는 없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던 것이다. 타이탄과의 맹약이 해지되었다는 말은 아예 다크라는 인물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생각을 정리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그도 상당히 당황했고, 또 그 때문에 상황 판단이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존재 자체를 없앨 수 있는 마법이 있던가? 맞아. 존재 자체를 없앤다면 차원 이동뿐이지. 이 세계에서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왜 갑자기 차원 이동이 발생한 거지? 예전에 차원 이동해서 이리로 왔으니까 자연히 다시……. 아니야. 그것은 아니야. 어떤 망할 놈이 개입했다고 봐야 해. 그렇다면 다크를 향해 차원 이동 마법을 쓸 놈이 누가 있지?”
그러다가 아르티어스의 눈에 땅 위에 널브러져 있는 다크의 옷가지 사이로 뭔가 반짝이는 푸른 것이 눈에 띄었다. 바로 다크가 언제나 끼고 있던, 아니 뺄 수가 없었기에 끼고 있을 수밖에 없던 반지였다.
“세상에, 아쿠아 룰러까지 그대로 있다니……. 그렇군! 딴 놈이 그녀에게 마법을 걸었다면 아쿠아 룰러가 막아 줬을 거야. 그런데도 아쿠아 룰러가 방관했다면 차원 이동 마법을 쓴 놈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르티어스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나이아드!”
이런 행동을 할 놈은 나이아드 뿐이었다. 아르티어스는 나이아드를 떠올리면서 얼굴색이 핼쑥해졌다.
‘자신이 만든 공간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라면 구태여 이런 방법을 쓸 이유가 없다. 꿈속에서 그 아이의 정신만을 끌어들여도 충분하기 때문이야. 이렇게 완전한 차원 이동까지 사용해서 다크를 어디로 데려갔을까? 왜? 무슨 목적으로……. 그게 이 사건을 푸는 열쇠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아르티어스는 기겁을 하며 주문을 재빨리 외워 대기 시작했고, 곧이어 그의 몸은 사라져 버렸다.
무서운 얼굴로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던 아르티어스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자 남은 사람들은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훔쳐봤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에게서도 그 해답을 얻어 낼 수 없었다.
정령계로 간 묵향
엄청나게 짙게 우거진 숲. 평생 듣도 보도 못 했던 기이한 식물들이 엄청나게 짙게 우거져 있었다.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우거진 수풀 덕분에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시종으로 데리고 있는 제스터가 제법 검술에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재미 삼아 조금씩 가르쳐 오며 즐거움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물론 자신이 검술을 가르치며 제자가 잘 소화해 내는 것에 뿌듯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걸 역으로 생각해서 자신이 마법을 잘 따라서 배우면 아르티어스가 얼마나 좋아할지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크는 자신이 평소에 하던 대로 바쁜 와중에도 제스터에게 약간의 시간을 내어 검술을 가르치던 도중, 갑자기 눈앞이 뿌예지더니 이렇듯 울창한 숲이 나타난 것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여기가 어디지?”
갑자기 굵직한 목소리가 입에서 튀어 나오자 그 목소리를 낸 당사자가 오히려 더 놀랐다. 검은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사내. 그는 갑자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이게 꿈이 아닌지 만져 보기 시작했다. 그런 후 터져 나오는 만족스런 목소리.
“드디어 남자로 돌아왔어. 남자로……. 으하하핫!”
한참 웃음을 터뜨렸지만, 이윽고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자 여기는 어딜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이 무더운 온도와 해괴한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울창한 숲, 그 어떤 것으로 봐도 중원으로 돌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남만(南蠻) 지방으로 가면 무덥다고 하던데, 설마 거기에 왔나?”
하지만 머리만 굴린다고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일단 나무 위로 올라가서 주위를 살펴보기로 작정했다. 나무 위로 몸을 날렸을 때, 묵향은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군데군데 솟아올라 있는 화산에서는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그 화산들이 차지하고 있지 않은 곳은 끝없는 밀림의 연속이었다.
바로 이때 저 먼 곳에서부터 엄청난 먹구름이 강력한 바람을 타고 흘러 들어오며 대지를 향해 마치 화살을 뿌리듯 번개를 뿌려 댔다. 아직 거리가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하늘에서 지상으로 연결되는 그 뇌전의 축제는 발밑이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힘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윽고 그 먹구름은 묵향이 서 있는 곳까지 몰려들었고 사방에는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섬광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곧이어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뭐 이런 곳이 다 있지? 눈에 보이는 것은 식물뿐이고, 지독하게 퍼붓는 비, 바람, 번개……. 대기는 그 모든 것들이 뿜어내는 기로 소름이 끼칠 만큼 충만해져 있고, 생명력이 약동(躍動)하는 이런 곳이 말이야.”
한동안 주위를 둘러보던 묵향은 여기가 어딘지 알려 줄 사람부터 먼저 찾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았던 그곳에 처음 갔을 때도 먼저 민가를 찾아 말부터 배우지 않았던가?
“젠장, 재수 없으면 전과 같은 일을 똑같이 반복하게 생겼군.”
어느 한쪽 방향을 정한 후 묵향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나무 위로 달려가고 있었기에 발밑으로 울창한 밀림들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듯한 착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밀림은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묵향은 강을 하나 발견했다. 나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니 강물 속에는 이상하게 생긴 거대한 물고기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일단 저걸 잡아먹고 갈까? 언제 또 먹음직한 먹거리를 발견하게 될지 모르는데…….”
잠시 그가 궁리하는 사이, 갑자기 붉은 머리카락을 나부끼는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상체에는 몸매가 완전히 드러날 정도로 꽉 끼는 옷을 입고 있었고, 하체에는 늘씬한 다리의 허벅지가 거의 다 드러나는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묵향을 잠시 노려보더니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이봐, 방금 이쪽으로 차원 이동되어 온 놈이 네가 맞냐?”
다행히 일단 말은 통하는 세계라는 것을 확인했기에 묵향은 느긋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언어의 장벽이 없는 세계라는 것을 알려 준 보답으로 저쪽의 질문은 다 들어 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다음에는 저년에게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알아낼 작정이었지만…….
“이상하네. 대상을 잘못 잡았나? 분명히 아쿠아 룰러의 기척을 느끼고 잡아들인 것이었는데, 내가 실수를 하다니……. 이봐, 너는 누구지?”
“묵향이라고 한다.”
“무키앙? 웃기는 이름이군. 어떻게 해서 네가 왔는지 모르겠지만, 너는 크라레스라는 작은 나라에서 왔나?”
또다시 사내가 고개를 까딱하자,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말했다.
“다크라는 계집과는 어떤 관계지? 그년을 잡아들였는데, 왜 네가 있는지 그걸 묻는 거다.”
“다크? 다크라면 난데?”
“오호호홋, 미친 녀석! 그 계집애가 자기라고 말하다니 진짜 미…….”
갑자기 그녀는 말을 중지했다. 잠시 잊어먹고 있었지만, 아쿠아 룰러의 주인은 원래 남자였다. 그러나 저주를 받아 여자로 변한 것이다. 이곳은 물, 불, 바람, 뇌전, 대지를 주관하는 5대 정령이 다스리는 정령계였다. 차원이 바뀌었기에 묵향을 소녀로 만드는 저주를 주관했던 마왕 크로네티오의 힘도 여기서는 그 빛을 잃게 된다. 그렇기에 묵향의 저주는 풀리게 되고, 다시 남자의 모습을 되찾게 된 것이다.
“오호호호호……. 바로 여기에 놔두고 찾는다고 그 난리를 피웠었군. 나를 기억하겠냐?”
묵향의 뇌리에는 저렇게 퇴폐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는 계집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을 보고 계집이 생긋 웃더니 어느 순간 그 모습이 확 바뀌어 버렸다. 몸이 허물어지는 듯 보이다가 다시 재구성되는 것을 보면 괴물인 듯 보이기까지 했지만, 다시 나타난 얼굴을 보는 순간 묵향은 그 상대의 얼굴을 며칠 전에 봤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나이아드?”
빛나는 금발을 뒤로 쓱 쓸어 넘기면서 남자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이제야 기억을 하는군. 네년을 제압하기 위해 이런 수고까지 하게 만들다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나에게 복종하겠다고 맹세해라. 이곳은 정령계. 여태까지의 금제는 사라지고 나는 모든 힘을 다 쓸 수 있다. 그러니 괜한 생각하지 말고 일찍이 포기하는 것이 좋아.”
“미친놈!”
“흐흐흐…, 매를 버는구나. 그래 네년은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타입이었지. 오냐, 원대로 해 주마.”
그때부터 묵향에게는 악몽의 연속이었다. 자신과 주종의 관계를 맺었던 타이탄은 어디로 도망갔는지 나오지도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어떤 무공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나이아드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생명이 있는 곳치고 물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으니, 물을 주관하는 나이아드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헉헉헉…….”
묵향으로서는 자신을 이렇듯 숨차게 만든 사람을 만난 적이 거의 없었다. 아마도 묵향이 제일 마지막으로 만났던, 자신을 고생시킨 인물은 그의 마지막 사부 유백뿐이었을 것이다.
“젠장! 아무리 기(氣)가 충만한 곳이라고 해도, 이렇게 되면 밑 빠진 독에 물……. 아니지, 기가 충만하다면 한번 해 볼 만하지.”
묵향은 슬쩍 몸을 숨긴 채, 나이아드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렸다.
“히히히…, 겨우 여기까지밖에 도망치지 못하다니. 내가 시간을 줘도 그 모양이라니. 호비트란 것들은 고집만 세고 정말 쓰잘데기가 없어.”
거의 포기한 듯 힘없는 눈으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묵향을 보며 나이아드는 이죽거렸다.
“이제 포기한 것인가? 포기했다면 빨리 나에게 충성을 맹세해라.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네년을 잡고 실랑이하는 것도 귀찮은 노릇이니까 말이야. 으하하하핫.”
바로 그 순간 묵향의 손에서 빛나는 막대기 같은 것이 쑥 솟아올랐고, 그와 동시에 묵향의 몸은 나이아드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나이아드는 재빨리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그 빛나는 검의 목표는 나이아드가 아닌 나이아드와 비교적 가까운 땅속 깊은 곳을 흐르는 기였다.
쿠콰콰콰콰…….
대 폭발이 일어났다. 대지의 기운을 충돌시키는 이 무공을 깨달은 이후, 최고로 강력한 위력이었고, 그 강기의 폭풍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주위를 완벽하게 초토화시켰다.
“헉헉헉…, 간신히 끝난 모양이군.”
바로 그때 묵향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오오, 다오(Dao : 대지의 정령왕)가 슬퍼하겠군. 그가 아끼는 숲을 이렇듯 묵사발을 내놓다니 말이야.”
흠칫 굳어 있는 묵향의 뒷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나이아드는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어조는 상당히 꼬여 있었다.
“어때?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지 깨달았나? 겨우 그따위 공격으로 나를 없앨 수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