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은 절망감을 느꼈다. 아무리 자기 집에서는 강아지도 한 수 먹고 들어간다고 하지만, 상대가 이렇게 막강하게 탈바꿈할 줄은 감히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최후의 비기까지 동원해 봤지만, 상대의 옷자락 하나 찢을 수 없었던 것이다.
“크흐흐흐…, 이제 그만 포기하지 그래. 나에게 복종하면 네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느꼈던 그 어떤 것보다 강한 쾌락과 신에 가까운 힘을 주마. 너와 나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아.”
이죽거리는 나이아드를 향해 묵향은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쓱 손으로 훔친 후 쏘아붙였다.
“젠장! 사양하겠다.”
묵향의 온몸은 나이아드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인해 만신창이에 가까웠다. 하지만 나이아드는 묵향을 일단 살려 둬야 했기에 그렇게 심한 상처가 생기도록 하지는 않고 있었다.
도저히 방법이 없자 묵향은 죽을 각오를 하고 온 힘을 동원해서 주위의 모든 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전에 살던 중원이나 얼마 전까지 살았던 새로운 세계보다도 이곳은 더욱 기가 충만한 곳이었다. 그 약동하는 대자연의 기운을 온몸이 터져 나갈 정도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단전을 가득 메운 기운은 이제 혈맥에 가득 쌓였고, 조금 더 지나자 최하부의 말단 세맥에까지도 꽉꽉 들어차기 시작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엄청난 양의 마나가 상대의 몸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느꼈지만, 나이아드는 처음에는 그걸 그냥 놔뒀다. 아무리 제까짓 게 용을 쓴다고 해도 자신을 능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나가 겨우 한 명의 호비트 몸속에 그야말로 한없이 흘러 들어가고 있자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엄청난 물줄기가 묵향의 몸을 강타했다. 물론 나이아드에게는 묵향을 이용해야 한다는 목적이 있었기에 그렇게 강한 일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태껏 그래왔듯 묵향에게 중상(重傷)을 입히기에는 충분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묵향에게 심각한 타격을 줬던 그 공격은 단번에 튕겨 나가 버렸다.
묵향의 몸에 차고 넘치는 그 엄청난 힘이 자연스레 묵향의 몸 주위에 보이지 않는 장막을 치며 보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묵향은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나이아드에게 당한 상처 곳곳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 그가 악귀와도 같은 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볼 만했다.
“네 녀석에게 복종할 바에는 차라리 죽겠다.”
그 말을 끝으로 묵향은 자신의 모든 축적된 힘을 발을 통해 대지에 쏟아 부었다. 묵향의 몸속에 축적된 힘은 그 어느 때보다 막대했고, 그것이 몽땅 다 대지의 기운과 충돌을 일으켰으니 그 결과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콰콰콰콰…….
그야말로 엄청난 대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 강기의 회오리는 약동하는 대지 밑으로 흐르고 있던 마그마를 건드렸고, 엄청난 화산 폭발까지 동반했다.
온몸의 기운을 폭발적으로 써 버린 묵향은 그야말로 자살 행위에 가까울 정도로 무리한 기의 운용으로 인해 심각한 내상까지 입고서 이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아직 묵향이 화산 폭발의 한가운데에서 살아 있는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그는 폭발적으로 자신의 공력을 발밑으로 뿜어냈고, 그 반동에 의해 몸이 하늘 위로 솟아 올라와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인간의 몸이 하늘을 날 수 없다는 간단한 자연의 법칙에 따라, 곧이어 용암이 흐르고 있는 저 불타는 대지를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 이상 내공이 남아 있지 않았기에 그는 절망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앉아서 화산 폭발에 휩쓸려 죽을 수도 없었다. 그는 무리해서 주위의 기운을 빨아들여 비공술(飛空術)을 펼쳤다. 그에 따라 아래로 곤두박질치던 묵향의 몸은 그 속도를 줄이는 것 같더니 다시 날아오르기 시작했고, 곧이어 속도를 얻어 화살과 같은 빠르기로 용암의 대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이어 진기가 역류하면서 묵향은 입으로 피를 뿜을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로 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라면 언제 절명해도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지독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그렇듯 무리한 공력 운용을 해 댔으니 몸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의식의 끈이 거의 다 끊어져 가는 가운데 묵향의 몸은 중심을 잃고 빠른 속도로 대지를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가물가물하는 의식 속에서도 묵향은 자신의 몸이 대지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는다면 죽음뿐이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손바닥에 끌어 모았다. 대지에 격돌하려는 그 위험천만의 순간, 단전은 이제 텅 비어 버린 상황이었지만 그의 의지에 따라 기적적으로 주위의 기가 동조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묵향의 몸은 급속도로 감속하기 시작하더니 안전하게 대지에 안착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묵향은 의식을 잃었다.
“젠장할! 이렇게 지독한 놈은 내 평생 처음 보는군. 하지만 이제 네 몸뚱이는 내 것이야. 크하하핫!”
나이아드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의 그 웃음소리는 또 다른 목소리에 끊겨 버렸다. 그것은 아주 공허한 울림을 담고 있는 특이한 목소리였다.
<누구 마음대로?>
서서히 한쪽에서 투명한 음영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나이아드는 뭔가 장난질을 치다가 들킨 아이마냥 깜짝 놀라서 외쳤다.
“어엇? 아리엘?”
<그렇다. 다른 차원에 있는 살아 있는 생명체를 이곳으로 끌어 오는 것은 금기된 사항이다. 너는 그것을 어겼어.>
나이아드는 주변을 휙 둘러보며 또 다른 정령왕의 존재를 가늠해 보며 아리엘을 향해 대꾸했다.
“그렇다면 이제 다 잡아놓은 먹잇감을 놔 주라는 말이냐?”
<그렇다.>
나이아드의 감각에는 땅 밑에 또 다른 한 명의 정령왕의 존재감이 잡혔다. 하지만 그것이 그를 더욱 안심시켰기에 나이아드는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핫. 그렇게는 못 하겠다. 아무리 그것이 금기라고 하더라도 나는 해야 하겠어. 이 녀석이 얼마나 강한지 여기로 끌고 오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거든. 다오와 내가 세운 계획을 실행하려면 이 녀석이 꼭 필요하지. 안 그런가? 다오.”
그러자 땅속에서 정말 듣기에도 껄끄러운 꽉 쉰 듯한 텁텁한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나이아드의 말대로다. 아리엘, 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우리 둘을 이길 수는 없다.>
희미한 음영을 만들고 있던 아리엘은 순간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자신이 강하다고 해도 정령왕 둘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5대 정령왕의 힘은 거의 비슷비슷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꺼져라. 네가 아무리 금기를 떠들어 대도 소용없어. 일단 이 녀석을 손아귀에 넣는 데 성공했으니까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있을 필요는 없어. 곧이어 놈이 살던 세계로 돌려보낼 거다. 자네는 그때까지만 눈감아 주면 돼. 아주 잠시면 모든 일이 끝날 테니까 말이야. 흐흐흐.”
하지만 이번에도 나이아드의 웃음소리는 또 다른 목소리에 의해 가로막혀졌다. 그 목소리는 멀리 떨어지지 않은 대지를 흐르는 용암 속에서 울려 나왔다.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모처럼 카렐이 부탁했는데, 나는 그것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거든. 그리고 너는 금기를 어겼으니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동시에 하늘 위에서도 우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그래. 그 녀석을 돌려보내라. 우리 셋이서 너희들을 응징하기 전에.>
또 다른 정령왕 둘이 거의 근소한 시간차를 두고 약속이나 한 듯 등장했기에 나이아드는 당황했다. 이제 사태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2대 2로 싸워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인데, 2대 3이라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제기랄. 도대체 이 녀석이 뭐길래 정령왕 셋이서 이놈을 구출하려는 것이냐? 너희들은 그렇게도 할 일이 없냐?>
<일단 약속은 약속! 돌려보내라. 우리가 너희들을 죽이고, 너희의 뒤를 이을 정령왕이 탄생하도록 만들기 전에.>
아리엘의 말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다른 세계에서는 정령왕이 자신의 힘을 모두 사용하지 못한다는 금제가 붙지만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이점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 정령계에서라면 얘기가 다르다. 여기서는 모든 힘을 쓸 수 있지만 소멸당하면 그야말로 죽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령왕이란 것이 죽는다고 변하는 것은 없었다. 정령왕이 사멸하고 나면 그를 대신할 또 다른 정령왕이 거의 순간적으로 태어나기 때문이었다.
“겨우 호비트 한 마리 때문에 그 오랜 세월 사귄 우리들을 없애겠다는 말인가?”
나이아드가 항변했지만, 그의 말은 이프리트에게 간단하게 묵살당했다.
<네 녀석이 언제 나하고 사귀었단 말이냐? 나는 언제나 꼴 보기 싫은 네 녀석이 사라지기를 원하고 있었어.>
이제 나이아드와 다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잘못하면 자신들이 무(無)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돌려보내자.>
다오의 체념적인 말에 나이아드는 화를 벌컥 냈다. 그냥 놔 주기에는 여태까지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닥쳐! 내가 이년을 어떻게 잡았는데 그렇게 쉽게 돌려보낸단 말이야?”
<그렇다면 너는 무로 돌아가고 싶나? 선택하라!>
이프리트의 최후통첩에 나이아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로서도 더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데리고 가라!”
<잘 생각했다, 나이아드여.>
“젠장! 언젠가는 너희들에게 복수하고야 말겠다.”
나이아드는 자신이 오랜 시간 공들여 이룩한 것이 완전히 물거품이 된 것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며 그 존재감을 지워 버렸고, 곧이어 땅 밑에서 느껴져 오던 기척 또한 함께 사라져 버렸다. 두 정령왕이 사라지자 아리엘은 거의 시체처럼 창백하게 쓰러져 있는 벌거벗은 청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아직 죽지는 않았군.>
아리엘은 투명한 자신의 손을 호비트 청년에게로 뻗어 그를 안아 들었다. 아리엘의 몸이 원체 투명했기에 청년은 축 늘어진 채 저절로 공중에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리엘은 청년을 안아 들자마자 아르티어스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차원 이동을 감행했다.
고약한 드래곤의 성격
황금빛이 확 뿜어 나오는 가운데, 아르티어스는 처음과 같이 인간의 몸으로 트랜스포메이션했다. 문득 이 영토의 주인이 저렇듯 엘프의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는데, 손님인 자신이 위압적인 드래곤의 형태로 있다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것이다.
“험험…….”
아르티어스는 잠시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해 대며 뭐라고 입을 열어야 할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이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만큼, 타이탄을 집어넣은 후 키아드리아스의 옆에 서 있는 카렐이나 그의 연인인 키아드리아스에게 다짜고짜 행패를 부린 것이 상당히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었다는 게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저 포악한 아르티어스를 향해 돌진했던 연인을 향해서는 그야말로 달콤한 시선을, 그러면서 아르티어스를 향해서는 감히 드러내 놓지는 못하고 밑바닥에 살짝 분노를 깔아 놓은 시선을 던지고 있는 키아드리아스를 향해 아르티어스는 언제 자신이 그렇게 분노했었느냐는 듯 시치미를 떼고는 주절거렸다.
“미안하게 되었구먼. 원래 내 성격이 이렇지 않았는데 아들에 대한 사랑이 원체 지극하다 보니 실수를 하게 됐네. 자네가 카렐인가?”
일단 상대가 의외로 예의를 차리고 나오자 카렐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위압적인 존재감과 무지막지한 광기를 드러내던 포악한 드래곤과, 저 약간은 쑥스러운 듯한 선량한 미소를 얼굴 가득 짓고 있는 인물이 동일인이라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예, 제가 카렐 아미타유스라고 합니다.”
“나는 아르티어스라고 한다네. 그 넓은 말토리오 산맥에서 혼자서 쓸쓸하게 살고 있지. 그러다가 정을 붙인 아이니까 내가 얼마나…….”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말은 키아드리아스에게 가로막혔다. 상대가 일단 예의를 차리고 나오자, 방금 전까지 그 놀라운 아르티어스의 전투력과 광기 덕분에 주눅 들어 있던 것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고, 또 연인까지 옆에 서 있었기에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까지 생기자 원래의 성깔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놈의 성질머리를 뻔히 알고 있는데, 저렇듯 내숭을 떠는 것에 그야말로 기가 막히기 시작한 키아드리아스의 회심의 반격이었다.
“흥! 누가 쓸쓸하게 살았다고 그래요? 2천 년 전에 내가 자기 허락도 받지 않고 그곳에 둥지를 틀었다고 노발대발하면서 달려와서는 내 날개를 박살 낸 것은 누구였죠? 그러면서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도 쓸쓸하다는 말이 입에서 나오느냐구요.”
키아드리아스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식은땀을 삐질 흘리면서 항변했다.
“허허허…, 그런 일이 있었던가? 원체 오래전의 일이라서 기억도 나지 않는구먼. 아, 원래 드래곤이 살다 보면 이런 때도 있고 저런 때도 있는 거지, 뭐 그런 걸 가지고 아직까지 꽁하니 가슴에 품고 있나? 그런 사소한 기억은 훨훨 털어 버리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지.”
“날개 부러지는 것이 아르티어스 님에게는 사소한 일일지 몰라도, 처음 잡았던 레어가 너무 비좁아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고 있던 저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구요. 그리고 그걸 다시 제대로 치료한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세요? 혹시나 날개가 잘못 붙어 버릴까 봐 딴 생명체로 트랜스포메이션도 할 수 없었다구요. 그런 저를 보면서 주위에서 얼마나 많은 드래곤들이 비웃었는데요.”
계속 상대가 밀어붙이자 슬며시 신경질이 나기 시작한 아르티어스는 슬며시 항변하기 시작했다.
“허허, 자네 좀 집요한 데가 있군. 이만 딴 데로 화제를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아르티어스는 난처한 듯 억지 미소를 지으면서 주절거렸지만, 눈에는 한껏 힘을 주어 만약 말을 안 들으면 아예 없애 버리고 새로 시작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키아드리아스에게 살짝 보내고 있었다. 그걸 눈치 채고는 카렐이 키아드리아스의 팔을 살짝 잡아끌면서 말했다.
“아르티어스 님의 말이 맞아. 괜히 싸울 필요는 없겠지.”
“그래도…….”
“쉬쉬…, 오늘 당신답지 않게 왜 그러는 거야? 여태껏 우리들은 평화롭게 살았잖아? 나는 이런 사소한 해묵은 감정을 가지고 우리들의 생활이 깨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허허헛! 내말이 그 말이라니깐. 해묵은 감정은 씻어 버리고 우리 사이좋게 지내세나. 나도 옛날과는 아주 많이 달라졌다니까. 원래가 세월이 가면 모든 생명체의 삶을 거부하는 거대한 바위도 풍요로운 옥토로 탈바꿈하는데, 내 성격이 안 바뀌겠는가? 이해해 줄 거지?”
딴 거는 다 좋았는데 “이해해 줄 거지?”하는 말을 내뱉으며 공포스러운 광기를 드러내는 것을 보며 키아드리아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면 적당히 손봐 준 후 다시 우아하게 대화를 시작하겠다는 저 더럽기 그지없는 성질머리. 아르티어스의 성격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는 게 이로써 증명된 거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해해 드리죠.”
키아드리아스의 표정은 누가 봐도 억지로 내뱉는 말이라는 것이 확실했음에도, 아르티어스는 뻔뻔스럽게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래, 그래! 이웃끼리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좋지 않겠나?”
‘누가 이웃이라는 거야? 여기서 말토리오 산맥이 얼마나 먼데……’라고 키아드리아스가 생각하고 있는 그때 공간이 확 열리며 누군가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는 아리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티어스의 앞에 자신의 성과를 보여 주기 위해 의기양양하게 나타났지만, 바로 그 순간 아리엘은 엄청나게 당황하고 말았다.
<이런 변이 있나?>
피투성이의 청년이 자신의 팔에 안겨 있어야 했는데, 거기에는 피투성이의 웬 어린 계집애가 금발 머리를 축 늘어뜨린 채 인사불성인 상태로 안겨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아리엘은 본체만체하고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그에게로 다가와 빼앗듯이 소녀를 받아 들었다.
“이럴 수가…….”
아르티어스는 방금 전까지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어디로 갔는지 자신의 아들을 아리엘이 그 모양으로 만들어 놓기나 한 듯 그 분노를 아리엘을 향해 터뜨리며 외쳤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내 사랑스러운 아들이 왜 이 모양이 되었냐고?”
아르티어스가 축 늘어져 있는 소녀를 단박에 알아보자 아리엘은 안심했다.
<이게 네 아들이 맞냐? 그렇다면, 약속은 지켜졌다.>
“뭐야? 이 빌어먹을 녀석아. 어떻게 약속이 지켜져? 너는 이게 안 보이냐?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한…….”
<아직은 숨이 붙어 있잖은가? 나는 분명히 살아 있는 채로 너에게 건네줬다. 네 손에서 죽건 말건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야. 이것으로 약속은 지켜졌다!>
아리엘은 더 이상 욕을 듣기 싫은 듯 사라져 버렸다. 사실 아리엘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아르티어스가 아들이 건강하게 살아 있는 상태로 돌려주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으니…….
아르티어스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에 분노를 억누르고는 치료에 들어갔다.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강력한 치유 마법을 이용해서 일단 아들을 살려 놓고 봐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우려와는 달리 아들의 치료는 아주 짧은 시간 내에 끝났다. 그게 아르티어스로서도 불가사의한 일이었지만, 아들의 몸은 내부에서부터 엄청난 속도로 재생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아르티어스의 치유 마법이 합쳐지자 정말이지 순식간에 상처가 아물어 버렸다.
“자요.”
이제는 축 늘어져서 잠들어 있는 아들을 하염없이 불안한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는 아르티어스가 약간은 불쌍한 듯한 마음이 일었던지, 키아드리아스는 비록 걸레가 되다시피 한 옷이었지만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아르티어스에게 건네줬다. 그제야 정신이 든 아르티어스는 그 옷을 조심해서 아들의 몸 위에 덮어 줬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레어 안으로 들어가죠. 거기에는 편안한 침대도 있으니까 말이에요. 아무리 치유를 했다고 해도 그런 상태에서 금방 공간 이동을 하는 것은 별로 좋지 못할 거예요. 그 아이를 그렇게 아끼신다면 며칠 정도 여기서 몸조리나 하고 가는 것이 현명하겠죠. 그런데…, 이런 말 묻기는 좀 이상하지만 저 아이, 드래곤이 맞아요? 제가 보기에는 호비트 같은데?”
“내 아들이야. 더 이상 딴 수식어는 필요 없다.”
“쳇, 잘난 척하기는……. 알았어요. 빨리 따라 들어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