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9화 (245/930)

황태자의 무도회

제스터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물론 이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상관은 매우 싫어했지만, 그는 그것을 도저히 억제할 수 없었다. 지난 6년간 그녀를 모시면서 자신은 이제 더욱 성숙하고, 건장한 몸매를 지닌 수련 기사(修練騎士)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의 상관은 6년 전에 봤을 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함이 없이 18세가 될까 말까 한 가녀린 소녀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냐?”

자신을 괴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약간 기분이 상한 다크가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거기에 정신을 차린 제스터는 즉각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대공 전하, 황태자비 전하의 생신 무도회에 참석하셔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6년 전에는 나이 어린 시종에 불과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자신의 시중을 성실하게 들고 또 검술 실력이 꽤 좋았기에 다크는 수련 기사가 된 제스터를 부관(副官)으로 승진시켜 아직까지 자신의 주위에 두고 있었다.

“놀고 있네.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너나 참석하지 그래?”

상관의 말투가 원체 더럽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그였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그 말뜻은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옛, 정말 제가 가도 되는 것이옵니까?”

“어라? 그렇게 가고 싶냐?”

원래 다크는 되는 대로 떠든 것이었지만, 제스터가 정말 그곳에 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기에 순간 당황했다.

크라레스의 국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해 버린 지금, 황궁에서 개최되는 무도회는 대단히 성대해졌다. 물론 1년 전만 해도 크라레스 황궁의 무도회는 짠돌이 황제 덕분에 매우 검소했었다. 오히려 무도회라고 하기보다는 무도회의 탈을 쓴 작전 회의에 가까웠다. 하지만 황태자가 크루마에서 돌아오면서부터 그것이 완전히 변해 버렸다. 작년에도 거창하게 진행되었지만, 올해는 그 규모가 더욱 커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리고 황태자의 명령에 따라 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는 최소 자격은 그래듀에이트나 후작 이상의 작위를 지닌 사람에 한했기에 거기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은 크라레스 제국의 실세에 가장 가까운 인물들뿐이었다. 물론 그 당사자만 참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부인이나 애인, 가족의 참석도 가능했다.

그렇기에 모든 숙녀들은 그 호화로운 무도회에 참석할 자격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고,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에서 운 좋게 짝을 얻는다면 그야말로 권력의 핵심에 한 발자국 다가선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예, 전하.”

“좋다. 대신 올해 휴가는 없다. 그래도 가겠냐?”

다크의 다짐에 제스터는 감격했다는 듯 되뇌었다.

“예, 보내만 주시옵소서. 여자 친구가 정말 가고 싶어 하거든요.”

“쯧쯧, 검술을 배운다는 놈이 저따위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니…….”

“황송하옵니다.”

“네가 없는 동안 세린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될 테니까 상관은 없겠지. 그건 그렇고 팔시온이나 불러다 줘.”

“옛, 전하.”

제스터는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이 최대한 덜그덕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도록 잡고는 밖으로 나갔다. 제스터가 나가고 난 후 다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의 한쪽 귀퉁이로 보이는 건물의 외벽이 황금빛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똑똑…….

“들어와!”

팔시온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들어섰다. 그는 주위를 쓱 둘러본 후 다크와 둘뿐이라는 것을 알자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치레아 기사단의 부단장인 카알 폰 카슬레이 백작은 다크가 부하들과 말을 터놓고 지내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과거 총독 시절에는 그래도 봐줄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 치레아 공국을 다스리는 대공이 된 다음에도 그게 바뀌지 않았기에 다크에게 잔소리를 해 댔다.

하지만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기에 그다음부터는 그따위 반말지거리를 해 대고 있는 부하들을 족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요즘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말을 터놓고, 주위에 사람들이 있는 경우에는 존대를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무슨 일로 불렀어?”

“나하고 좀 갈 데가 있어.”

“어딜?”

“크라레인시.”

“수도에? 그럼 그 뭐시냐? 무도회에 함께 가자는 말이야?”

팔시온의 입이 헤벌쭉 벌어지는 것을 보며, 다크는 꿈 깨라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무도회가 아니라 폐하를 만나러 갈 거야. 준비하도록 해.”

“폐하를 만나러 가는 거라면 평상시처럼 혼자서 가면 되잖아?”

“크라레인시에 들렀다가 다시 딴 곳으로 갈 거야.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거지.”

“그렇다면 미카엘이나 미디아도 데려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가스톤은 일이 바쁘니까 안 되겠지만……. 그리고 지미하고 라빈까지 불러서 오랜만에 함께 여행을 하는 거야.”

“쯧쯧, 너는 노는 생각밖에 안 하냐? 지미하고 라빈은 수련을 해야 할 테고, 미카엘하고 미디아는 불러도 상관없겠지.”

“알았어. 빨리 준비하라고 할게. 그런데 며칠간 여행을 할 거야?”

“아마도 1주일에서 2주일 사이?”

다크의 말에 팔시온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에게? 겨우 그것밖에 안 돼?”

“싫으면 말고……. 실바르를 데려가면 될 테니까.”

“아니, 갈게. 간다고. 조금만 기다려. 모두들 불러 모을 테니까. 그런데 황궁에 갈 거면 정복을 입어야 하나?”

“내가 황제를 만나지 너희들이 만나냐? 간편한 여행복을 입고 준비를 갖춰서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와.”

“알았어!”

팔시르가 뛰어나간 후 다크는 큰 소리로 외쳤다.

“세린!”

“예.”

팔시르가 나간 문과는 달리 한쪽 구석에 붙어 있는 작은 문을 열고 세린이 얼굴을 드러냈다.

“저기 책상 위에 있는 편지를 정확히 한 시간 후에 카슬레이 백작에게 전해. 알겠어?”

“예.”

“아버지는 어디 계시냐?”

“한 시간쯤 전에 정원에서 뵈었습니다. 아마도 파이어해머의 숙소로 가시는 것 같던데요?”

“흐음……. 그거 잘되었군. 아버지를 어떻게 떼어 놓나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이런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다니. 나중에 아버지가 찾거든 기사들 검술 교육시키러 갔다고, 잠시만 기다리시라고 전해라. 알겠냐?”

다크의 말에서 뭔가 음흉한 꾀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곧장 눈치 챈 세린은 귀를 축 늘어뜨리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마도 나중에 아르티어스가 속은 것을 알면 제일 먼저 자신에게 경을 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예.”

하지만 다크가 그냥 몇 시간 정도 아르티어스를 따돌리는 것이 아니라 몇 주일을 따돌릴 계획이라는 것을 미리 세린이 알았다면 그대로 아르티어스에게 달려가서 고자질부터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크가 없을 때 아르티어스는 너무나도 무섭게 변한다는 것을 벌써 경험으로 터득했기 때문이다.

다크는 대충 준비를 한 후 이동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갔고, 그곳에서 세 명의 동료들과 합류하여 곧장 크라레인시로 공간 이동했다. 이런 식으로 도망쳐 버리고 나면 남은 사람들이 아르티어스에게 얼마나 곤욕을 치러야 할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이다.

새로운 여행의 비밀

“안녕하셨습니까? 폐하.”

“오, 어서 오게나. 자네를 부른 것은 대충 언질을 주기는 했지만 왕자의 결혼식 때문이야.”

“예? 그렇다면 미란 국가 연합에 가라는 이유가…….”

“황태자는 크루마의 여인과 결혼식을 올렸지. 그걸 막으려고 했었지만, 이미 정이 깊이 들어 버린 상태라 떼어 놓기가 힘들었어. 그리고 그 아이가 왜 그렇게 갑자기 고집이 세졌는지, 아무리 말려도 듣지를 않았지. 그래서 가므 의장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둘째를 그곳 여인과 결혼시킬 필요성이 생긴 거야.”

“그래서 호위를 해 주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지금 미란은 크루마 제국 내에 존재하면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상황이지. 그리고 본국은 과거의 약속을 지킨다는 명분도 있지만, 크루마를 견제하기 위해 미란의 존재가 필요하고 말이야. 하지만 크루마 쪽에서 그 사실을 알아챈다면 그것을 막으려고 총력을 기울일 거야. 물론 왕자가 가는 것은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지만, 그 비밀이 새 나갈 우려는 언제나 있는 것이지. 내 아들을 맡아 줄 수 없겠나?”

“뭐…, 오랜만에 바람이나 쐴 겸 제가 맡기로 하죠.”

“오오, 고맙네.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내가 몇 명 붙여 줄 테니…….”

“아니, 폐하. 제 부하들을 몇 명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니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경의 부하들을 데려왔다면 그들을 데려가는 것도 상관없겠지. 수효가 많을수록 비밀이 샐 우려만 커지니까 말일세.”

“그렇다면 왕자는?”

“사람을 보냈으니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리아스 폰 그래지에트 왕자가 도착했다. 다크는 그 왕자가 꽤 낯이 익었다. 전에 언젠가 정원에서 만났던 그 부끄럼을 잘 타던 소년이었는데, 어느덧 청년이 되어 있었다. 거의 180센티미터에 가까운 키였지만, 그의 아버지와 달리 아주 나약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에는 다크로서는 처음 보는 물건인 안경이라는 것을 끼고 있었다. 동그란 쇠테에 역시 동그란 유리로 만든 렌즈를 붙여 놓은 것이었는데, 유리에 대한 섬세한 가공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관계로 안경의 가격은 대단히 비쌌다. 그렇기에 서민들은 눈이 나쁘다 해도 감히 구입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인사하거라. 이쪽이 네 안전을 책임질 치레아 경이다. 그리고 저 아이가 내 둘째지. 아리아스라고 한다네.”

아리아스는 부황(父皇)의 소개를 듣고, 눈앞의 소녀를 향해 자그마한 안경의 렌즈 너머로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치레아 공국을 다스리는 치레아 대공은 엄청난 무예와 당당한 위엄을 지닌 여자 호걸쯤으로 전해 듣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도 다 다크가 거의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떠도는 헛소문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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