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줍음을 많이 타는 왕자
각국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크라레스의 왕자가 구애 작전을 벌이고 있는 가므에서도 여태까지 공을 들인 만큼 약간의 결실이 맺어지고 있었다.
“어? 어? 오늘은 제법 오랫동안 얘기를 하는데? 이상하지 않아?”
“그렇군. 저 아가씨가 처음에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건성으로 대답할 때는 일찌감치 자리를 털고 일어날 줄 알았는데…….”
“그건 모르지. 아주 예의 바른 아가씨인 것 같은데, 예의상 가만히 앉아 있는지도 몰라.”
이렇듯 구구하게 의견이 오가는 가운데 드디어 첫날의 데이트는 끝이 났다. 아리아스로는 기록적으로 오랜 시간 행한 여성과의 데이트였다. 아리아스는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내일도 만나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사실 기대도 안 하고 예의상 물어본 것이었는데, 그녀의 대답은 놀랍게도 ‘예스(Yes)’였다.
다음 날에도 만나 주겠다는 상대방의 약속 때문에 아리아스는 그날 밤 늦은 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고 누워 있으면 잠은 오지 않고 다소곳이 생각에 잠긴 듯한 그녀의 가냘픈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생각에 잠긴 듯한 옆모습. 그녀는 시종일관 고개를 살짝 돌린 채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계속 만나 주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녀도 그런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기는 했지만 자신을 싫어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이 좋은 방향으로만 흘러가자 그녀의 그런 수수께끼 같은 모습도 미란의 명문이라고 볼 수 있는 지벨리아 가문의 엄한 가정교육 때문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건성으로 대충 대답하던 것들까지도 자신과의 의견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좋은 방향으로 대화를 하기 위한 노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리아스의 호위들이 그들의 만남이 몇 번째 데이트에서 깨질 것인지 내기를 하는 상황에서도 그들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상대방의 표정이나 분위기로 봤을 때는 도저히 오래가지 않을 것 같은데도, 어쨌든 그들의 만남은 일주일째 계속되었다.
이쯤에서 아리아스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던 것이다. 상대도 어느 정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았고, 그도 상대가 별로 싫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 감정만으로 결혼을 청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그것에 대해 의논할 만한 상대도 시간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가 가장 의지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머나먼 곳에 있었고, 제일 가깝게 있는 다크 폰 치레아 대공은 왠지 모를 차가움 때문에 그런 의논을 하기에는 거리감이 있었다. 그리고 미란의 의장은 그가 빨리 배우자를 선택하도록 무언의 압력을 가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결혼은 일종의 정략결혼. 상대자가 마음에 들건 그렇지 않건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두 나라가 결혼이라는 자그마한 사슬로 연결되는 것만이 중요했다.
운명의 그날, 더 이상 아리아스로서는 시간을 끌 수 없었기에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
“저… 나, 나하고 겨, 결혼해 주시겠소?”
말조차 더듬거리는 멋없는 청혼이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살짝 까딱거림으로써 그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아리아스는 머리가 텅 빈 듯한 충격을 받으며 더 이상 할 말을 잊은 채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
뜻하지 않는 상대의 답에 아리아스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리아스는 모르고 있었지만, 이건 짜고 친 포커처럼 결론이 이렇게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마리안은 원래 사랑하던 남자가 있었고, 그 남자와의 결혼은 불가능했기에 취해진 결론이었다. 그 남자는 그녀의 소꿉친구인 그녀 집안 하인의 아들이었다. 그들은 몰래 사랑을 키워 왔는데, 결국은 그게 발각되었고 그 때문에 마리안의 아버지 크라크 지벨리아 백작은 이 결혼을 강경하게 밀어붙였던 것이다.
그녀의 사랑하던 남자 친구는 이미 지벨리아 백작의 저택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만약 이 결혼을 승낙하지 않는다면 남자 친구를 죽여 버리겠다는 최후통첩을 받고 있었다.
지벨리아 백작의 입장에서는 비천한 신분의 막돼먹은 녀석에게 딸을 줄 바에야 스와질렌 가문의 병약한 아들에게 주는 것이 백배 낫다고 생각했을 것은 당연했다. 스와질렌 가문이 요 근래에 워낙 병약하기에 오랜 세월 시골에서 요양하게 했던 막내아들의 신랑감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귀족이 없을 정도로 쫙 소문이 퍼져 있었다.
흠이 있는 딸을 스와질렌 후작 가문에 시집보내는 것이 좀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상대방이 워낙 병약해서 세상 구경을 못 했다고 하니 대충 넘어갈 가능성도 엿보였다. 그렇기에 이 계획을 실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만약 지벨리아 백작이 그의 딸의 결혼 상대가 스와질렌 가문의 병약한 자식이 아닌 신흥 제국 크라레스의 수줍음을 많이 타는 왕자라는 사실을 먼저 알았다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카드였다.
엔테미어 공국은 모국(母國)인 알카사스에 비교한다면 매우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알카사스는 저 먼 서쪽의 사막 지대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국가였다. 그 먼 변방이었기에 소수의 마법사들이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동쪽 대륙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강대국은 대 아르곤 제국이었었다. 그리고 크루마, 코린트, 크라레스 제국들이 연합해서 아르곤 제국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었다.
대 제국들이라 불리고 있던 그 네 나라들은 저마다 푸른 젖줄기가 흐르는 비옥한 평원들을 끼고 있었고, 그 평원들에서 생산되는 산물들이 곧 그들의 막강한 힘의 원천이었다. 그에 비해 알카사스는 변방의 사막 지대에서 탄생한 국가였던 만큼 신이 선물한 자연의 혜택을 입을 수 없었다.
대신 그들은 마법을 이용하여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자연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일단 마법진을 이용하여 자연을 제어하는 데 성공하자, 그 인근의 부족 국가들은 더 이상 알카사스의 적이 될 수 없었다. 알카사스는 마법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는 방법을 개발했고, 그 방대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강대한 군사력을 키워 나갔다. 그리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던 것이다.
그렇게 작은 왕국들을 복속하며 동진을 거듭하던 알카사스는 크라레스라는 강력한 벽 앞에서 진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몇 번 무력 충돌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여태껏 알카사스가 상대해 왔던 변방의 자그마한 왕국들의 군사력과 4대 강국에 들어가는 크라레스의 군사력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엔테미어 공국 동쪽에 있는 자그마한 평야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에서 무참히 패배를 당한 알카사스는 더 이상 싸워 봐야 득이 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크라레스 제국에 화평을 제안했다. 크라레스 제국도 배후에 아르곤 제국이라는 막강한 적을 놔두고, 군사력을 서쪽 전선에 오랜 시간 돌리는 것은 별로 좋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그 조약은 서로 간에 공평하게 아주 빨리 체결되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르곤 제국이 내전 상태로 빠지면서 곧이어 일어난 크라레스 제국의 몰락은 알카사스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때 처음 모습을 드러낸 흑기사라는 신형 타이탄의 막강한 성능도 놀라웠지만, 상대국의 수도만을 박살 내면서 조기에 전쟁을 종결시키는 그 전광석화 같은 전술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 뒤로 알카사스는 코린트의 그 전격전(電擊戰)에 대비하여 수많은 탐지 마법진과 방어 마법진을 건설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크라레스 제국을 집어삼키면서 급성장한 코린트에 추파(秋波)를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어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상호 간의 완충 지대라고 할 수 있는 엔테미어 공국(公國)이었다.
엔테미어 공국의 첫 번째 영주는 고(故) 크라이더 엔테미어 대공이었다. 그가 엔테미어 공국의 대공으로 즉위한 것에는 그의 뛰어난 외교적 센스가 한몫을 했다. 알카사스는 코린트와의 전쟁에 도움이 되는 ‘동맹 위성 국가’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비무장 지대의 성격을 띤 ‘무력 완충 지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무튼 고 크라이더 엔테미어 대공은 그의 모국인 알카사스의 바람대로 그 역할을 훌륭하게 완수해 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아들인 미카엘 엔테미어 대공이 시험대에 올라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와리스 후작 각하.”
“무슨 말씀을……. 이렇게 불쑥 찾아뵈어서 죄송할 따름이옵니다, 대공 전하.”
만약에 제국 전쟁 전에 와리스 백작이 이렇듯 무례한 방식으로 그에게 찾아왔었다면, 미카엘 대공의 얼굴도 구경하지 못한 채 쫓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외교관이라는 직업은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실력자냐 하는 것보다는 뒷배경이 얼마나 대단하냐에 따라 대접이 달라지는 것이다. 상대는 거대한 군사력을 보유한 신흥 제국 크라레스의 외교 담당관. 이렇듯 찾아오기 10분 전에 통신 마법을 통해서 가겠다고 ‘일방적인 통보’만 하고서는, 마법진으로 ‘뿅’하고 나타나서 사전 양해도 구하지 않고 만나자고 해도, 상대로서는 만사를 제쳐 놓고 만나 줘야만 하는 것이다.
“뭐 우리 사이에 그것이 그렇게 큰 흠이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오늘은 어쩐 일이신가요?”
“허허허헛, 대공 전하께서는 제가 꼭 무슨 부탁이 있을 때만 찾아오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이거 섭섭하군요.”
“무슨 그런 말씀을……. 자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면서 대화를 나누기로 하죠. 때마침 꽃이 활짝 피어서 테라스에서 보는 경치가 정말 좋지요.”
“그럴까요?”
하지만 와리스 후작은 본론으로 빨리 넘어가지 않고 시간만 질질 끌었다. 그것은 원래가 외교를 담당하는 너구리들이 흔히들 써먹는 방법이었기에 미카엘 대공은 마음을 푸근하게 가지고 대충 대답하면서 상대가 언제쯤에나 본론으로 넘어갈까 기다리고 있었다. 외교라는 것이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임하면 실패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오래전부터 이런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뚱뚱한 너구리 쪽에서 뭔가를 꾸미기 위해 왔기에 일단은 대화의 실마리는 그쪽에서 풀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있었다.
“타이탄이라는 것은 정말 대단한 병기(兵器)가 아닙니까, 전하?”
뭐 때문에 그런 말을 꺼내는지 의도를 생각하면서 미카엘은 찜찜하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렇죠.”
“저는 기사가 아니기에 타이탄을 타 보지 못했지만, 그걸 타 보면 정말 기분이 좋을 것 같더군요. 전하께서는 한번 타 보셨습니까?”
미카엘 대공도 외교관으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지 결코 기사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전용의 타이탄이라는 것이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미카엘 대공이 기사가 아니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미카엘 대공은 이 늙은 너구리가 왜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나 생각하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타 보지 못했습니다. 제 밑에 기사단이라도 있다면 한번 타 봤을 텐데, 원래가 본국에는 타이탄은커녕 기사단도 없지 않습니까? 본국은 알카사스의 속국일 뿐이지요.”
“그렇다면 타이탄을 구경해 보신 일은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본국에는 콘도르(Condor) 기사단의 분대가 주둔하고 있지요. 그 덕분에 노리에급이나 가이아급 타이탄은 몇 번 봤습니다.”
가이아급 타이탄은 현재 알카사스의 4개 기사단이 보유하고 있는 타이탄이었다. 노리에급은 가이아급으로 대체되면서 모두 다 타국에 수출되었기에 지금은 알카사스 영토 내에서는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그 두 가지 타이탄밖에 보지 못하셨습니까?”
“예.”
“믿어지지 않는군요. 저는 전하께서 저보다 훨씬 더 많은 타이탄들을 구경해 보신 줄 알았습니다. 몇몇 국가에서는 사열식을 할 때 타이탄을 동원하여 위엄을 과시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아, 예, 그런 식이라면 몇 가지 더 되는군요. 미란의 타이탄은 정말 아름다웠지요.”
“예, 하지만 강력한 힘은 느껴지지 않더군요. 원래가 타이탄이란 것이 힘의 상징이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지요.”
“외형을 그렇게 예술품처럼 만드는 것은 웃기는 노릇이지요. 역시 힘이 느껴지는 외형은 코린트의 타이탄 이상 가는 게 없지요. 당당한 5각형의 방패, 기다란 뿔……. 특히 적기사의 경우는 붉은색 페인트를 칠해서 그런지 더욱 무시무시하게 보이더군요. 적기사를 보셨습니까? 전하.”
“아니요, 소문만 들었을 뿐, 아직 보지는 못했습니다.”
“예, 적기사는 정말 대단하지요. 특히 이번에 실전 배치된 신형 적기사는 정말 무시무시하게 보이더군요. 커다란 방패와 거대한 검……. 정말이지 위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신형 적기사라구요?”
와리스 후작은 상대의 눈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크라레스도 간신히 알아낸 정보인 만큼 알카사스에서 그것을 알 가능성은 없다는 전제 하에 여기 와서 떠들어 댄 것이었다. 그런데 역시나 미카엘 대공의 모습을 보니 아직 알카사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음이 확실했다. 와리스 후작은 넌지시 시침을 떼고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아직 모르고 계셨습니까? 이번에 30대씩이나 생산되어 흑기사를 밀어내고 정식 근위 타이탄이 되었는데 말입니다. 역시 코린트는 정말 대단한 국가지요. 전쟁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토록 엄청난 자금을 확보하다니 말입니다.”
와리스 후작은 네 시간 동안이나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어 대다가 돌아갔다. 국경 문제부터 시작해서 별의별 소리가 다 오고 갔기에 미카엘 대공은 상대가 왜 여기까지 와서 노닥거리다가 갔는지 의도를 눈치 채지는 못했다.
그만큼 와리스 후작이 적기사에 대해 떠들어 댄 것이 매우 교묘한 타이밍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저렇게 말이 흘러가다가 보니 그런 말을 하게 된 형국이었기에 미카엘은 와리스 후작이 일부러 정보를 흘리려고 여기까지 왔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미카엘 대공은 와리스 후작이 마법진에서 모습을 감추는 것을 배웅한 후 통신실로 달려갔다. 원로원에 급히 보고할 특급 정보가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