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4화 (260/930)

밝혀지는 황태자의 배후

“폐하.”

황제는 정원에서 산책하고 있다가 자신을 향해 서둘러 걸어오고 있는 루빈스키 대공을 보고 반가이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그래, 무슨 일이오?”

“예, 폐하, 긴히 아뢸 보고가 있사옵니다. 좌우를 물리쳐 주시옵소서.”

황제는 루빈스키의 말에 자신의 뒤에 서 있던 기사들을 뒤돌아보며 짤막하게 외쳤다.

“잠시 물러가라.”

“옛.”

루빈스키는 기사들이 확실한 거리까지 물러간 후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속삭였다.

“아그리오스 후작의 보고에 따르면 아무래도 범인이 크루마인 것 같사옵니다.”

“으으음, 크루마라고?”

“예, 폐하. 그러니 이제 단안을 내리셔야만 하옵니다. 크루마가 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내통자는 엘리안 황태자 전하이실 가능성이 크옵니다. 토지에르 경이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사옵니까? 황태자 전하께옵서는 세뇌를 당하신 것 같다고 말씀이옵니다. 코린트에 인질로 갔던 가짜 황태자도 황태자 전하와 거의 비슷한 증세를 보이고 있사옵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토지에르 경이 그를 데려다가 철저하게 조사해 보고 내린 결론이 아니옵니까? 이제 단안을 내리셔야 할 때이옵니다.”

“루빈스키 경.”

“옛, 전하.”

“그것을 잠시만 좀 미뤄 줄 수 있겠는가?”

“예?”

“지금 국가에 중대한 위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혐의만으로 그 녀석을 내치고 싶지 않군. 또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아이의 생은 그것으로 끝장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나? 짐은 조금이라도 더 그 아이가 살아 있는 모습을 보고 싶군.”

루빈스키 대공은 황제가 살짝 꺼내 보인 아버지로서의 소박한 정 때문에 몹시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런 자잘한 정에 이끌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폐하, 그래도 이것은 국가의 중대사이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사옵니다. 윤허를 내려 주시옵소서.”

“이렇게 하면 안 되겠나? 그 아이는 놔두고 주위의 잔가지만 치게. 그리고 그 아이는 잠시만 더 놔둬 주게. 일단 시작되면 그 아이는 다시는 지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걸세. 잠시만이라도 더 그 아이에게 햇빛을 보게 하고 싶다네. 그래도 안 되겠는가?”

“칙명을 받들겠사옵니다.”

황제는 멀어져 가는 루빈스키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는 황급히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엘리안이 어렸을 때는 코린트에 대한 복수에 광분하여 그 아이에게 조그마한 정도 베풀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장성한 후에는 타국에 인질로 주기까지 했다. 그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이었고, 그 때문에 자신의 아들은 만신창이가 된 정신으로 고국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황제인 자신의 잘못이었는데, 그 잘못의 대가는 또다시 엘리안이 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던 것이다.

루빈스키 대공은 근위 기사 여섯 명을 소집했다. 여섯 명만 소집한 것은 남은 여섯 명은 황제를 호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근위 기사단장인 론가르트 백작에게 주의 사항을 일러 준 후 황태자의 최고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데이더스 백작부터 잡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백작은 지금 어디에 있나?”

“아직 황궁에 있을 것이옵니다.”

“메트렐 경, 이것은 칙명이다.”

“옛.”

“경은 데이더스를 잡아다가 감금해 놔라. 내가 올 때까지 그놈은 살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오기 전까지 그 누구도 만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아무것도 먹지도, 마지시도 못하게 해라. 알겠는가?”

“옛.”

“나머지는 나를 따라와라.”

“옛!”

아그리오스 후작의 예상대로라면 토지에르 암살의 배후는 크루마일 것이다. 그렇다면 크루마에 세뇌당했고, 또 크루마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황태자가 그들의 끄나풀일 가능성은 매우 커지는 것이다. 만약 공작의 예상대로 황태자가 범인이라면 크루마에서 보내온 키메라들은 황태자의 최고 측근인 데이더스 백작의 집에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공작의 예상은 물론 틀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고, 조만간에 황태자는 폐위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오른팔인 데이더스도 목이 날아갈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감히 이런 초강수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루빈스키 대공은 홀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근위 기사 네 명에게는 집 주위를 포위하고 있다가 만약 도망치는 놈이 있다면 잡으라는 지시를 내리고 말이다.

“놈들은 어디에 있나?”

손가락의 뼈다귀를 몇 개 분질러 놓자 집사는 고통과 공포에 질려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횡설수설 다 토해 냈다. 일단 놈들이 지하실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공작은 집사를 앞세우고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옛날에 던전 발굴하러 다니던 때가 생각나는군…….”

군데군데 밝혀져 있는 작은 등불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기에, 던전을 헤매던 때보다는 그래도 낫다고 생각하며 집사의 뒤를 따라 내려가자 어느덧 제일 밑에까지 내려왔다.

똑똑.

“들어와라.”

집사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레 문을 열자 피 냄새가 확 퍼져 나왔다.

“우그적 우그적… 쩝쩝… 와작… 우직…….”

공작이 집사의 등 뒤에서 실내를 들여다봤을 때, 한쪽 구석에는 몇몇 사람들이 손을 쓰지 않고 머리를 커다란 통 속에 밀어 넣고는 꼭 개처럼 뭔가를 씹어 먹고 있었다. 그리고 공작이 약간 몸을 이동하여 시선을 넓히자 탁자 위에 앉아서 뭔가를 들여다보며 포도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사내는 집사가 아직도 조용히 서 있자 짜증난다는 듯 외쳤다.

“이봐, 무슨 일이야? 들어왔으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니냐?”

그러다가 그 사내는 집사 뒤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를 뒤늦게 발견했다. 사내는 손가락을 딱 소리가 나게 튕겼다. 그러자 정신없이 뭔가를 씹어 먹고 있던 무리들이 재빨리 고개를 뒤로 돌려왔다.

뒷모습을 봤을 때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들이 고개를 돌렸을 때 지하실 안에 밝게 비춰지고 있는 등잔불 아래서 그게 아니라는 것이 명확히 드러났다. 몬스터들처럼 두텁고도 끈적거리는 듯한 피부, 그리고 둥그러면서도 광기에 가득 찬 눈, 도마뱀 같이 뚫려 있는 콧구멍들, 송곳니가 끔찍하게 솟아올라 있는 악귀와 같은 입에는 방금 전까지 식사를 하던 중이라서 그런지 피가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과연, 그렇게 된 것이었군.”

집사를 밀치면서 앞으로 나오는 루빈스키를 상대방은 금세 알아봤다. 크라레스의 두 명뿐인 대공 중의 한 명이니 그건 당연한지도 몰랐다.

“루, 루빈스키 대공? 젠장 발각된 것인가? 죽여랏!”

명령이 떨어지는 그 순간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네 마리의 키메라는 순간적으로 튀어 오르며 루빈스키를 향해 육박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루빈스키의 검이 엄청난 속도로 뽑히며 그들을 향해 날아갔다.

루빈스키의 검이 흰 궤적을 그리는 순간 뭔가가 부딪치는 듯한 금속성 소리가 울려 퍼지며 붉은 피가 확 터져 나갔다. 그리고 토막토막 잘려 버린 키메라의 몸통들이 여기저기에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루빈스키가 시선을 돌렸을 때 이미 그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는 사라지고 없었다.

“젠장, 마법 도구를 가지고 있었나?”

루빈스키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괴물의 여기저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와 폭발적인 도약력. 단순히 괴물이라고 여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인간이 창조해 낸 생명체가 그 정도 파워를 지니고 있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루빈스키였다.

“감히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다니……. 그놈들은 언젠가 신의 저주를 받게 될 거야.”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루빈스키의 눈에 특이한 것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키메라의 토막 난 검 조각이었다. 처음에 그것을 다론에게서 넘겨받았을 때는 검이 손에 붙어 있는 괴상한 생명체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갓 잘려 나간 놈의 검을 봤을 때 자신의 판단이 약간은 틀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잘려 나간 검에는 약간씩이지만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키메라의 검은 소의 뿔처럼 죽은 조직이 아니라 피가 통하는 살아 있는 조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저쪽에 토막 나 있는 키메라의 손을 봤을 때 더욱 명확해졌다. 겨우 며칠이 지났을 뿐이었는데도, 토지에르를 습격하는 데 동원되었다가 검의 한쪽이 날아가 버린 그놈의 검 끝은 조금씩 자라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검 자체가 살아 있는 조직이었기에 가능할 것이다.

“엄청난 재생력이군. 이건 다론에게 말해 줄 만한 값어치가 있겠어.”

크라레스의 둘째 왕자의 결혼은 주변 국가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직접적인 이해 당사국인 코린트나 크루마, 미란의 경우 이미 결혼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 외의 주변국들은 크라레스와 미란의 결합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미란이 크라레스와 결합함으로 인해 크라레스는 크루마에 군사, 경제적으로 미묘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기 때문이었다.

크라레스의 둘째 왕자가 결혼하는 그해에는 크라레스의 국내외로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이 벌어진 매우 분주한 해였다.

세계의 곳곳에서는 수많은 국지전들이 벌어졌고, 복수는 복수를 낳으면서 더욱 가열되던 한 해였다. 그 대부분의 전쟁들이 국지전이었는데, 대부분의 경우가 타국에 대한 보복보다는 경제적 이권이나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그 양상은 서로 상대 영토의 한 귀퉁이를 뺏고, 뺏기는 가벼운 분쟁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상대방 국가가 멸망할 정도의 대규모 전쟁도 여섯 번이나 벌어졌다. 그런데 특이한 사실은 그 멸망당한 국가들이 모두 다 코린트의 동맹국들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 코린트는 이 사실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멸망한 동맹국들이 6년 전에 있었던 제1차 제국 전쟁에서 코린트를 지원했다가 상당한 전력 손실을 당한 국가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멸망한 국가가 하나 둘 늘어나면서 코린트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고 조사를 시작했다.

그 결과 밝혀진 것은 침공국들이 모두 다 크라레스의 동맹국들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코린트가 뒤늦게 눈치 챈 것도 다 크라레스가 제1차 제국 전쟁 시절부터 매우 비밀리에 이 계획을 진행시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크라레스와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크라레스가 그야말로 한입에 꿀꺼덕 삼키기 쉬울 정도로 만만한 국가였다면, 코린트는 진작 군사적 응징을 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크라레스는 하루아침에 박살 내 버릴 정도로 만만한 국가는 절대로 아니었고, 또 크라레스와 푸닥거리를 하고 있을 때 크루마가 개입해 온다면 문제는 더욱 난감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역으로 해석하면 크라레스도 코린트와 전쟁을 벌여 봐야 크루마가 개입해 온다면 재미가 적을 게 뻔하니, 군사적 행동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렇듯 3국이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기에,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게 지금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상황을 크라레스가 더욱 장기화시키기 위해서 코린트가 힘을 키우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코린트의 지도부가 확실하게 느낀 것은 크라레스의 둘째 왕자가 결혼식을 올린 그해 8월 중순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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