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 전, 트루비아의 군대가 탄벤스 공국(共國)의 국경선을 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사옵니다. 변방의 동맹국인 쿠레오 왕국을 로사나 왕국이 침공, 점령한 것을 비롯하여 올해 들어 행해진 일곱 번째 전쟁이옵니다. 전하, 이제 결단을 내려 주시옵소서!”
로체스터 공작은 한참 동안이나 창밖을 바라보며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쟁의 배후에 크라레스가 있다는 것이 확실한가?”
로체스터 공작의 물음에 베르딘은 확신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처음 한두 번은 분명치 않았사오나 이제 확연히 드러났사옵니다. 올해 행해진 일곱 번 전쟁터의 주역으로 활동한 타이탄은 테리아였사옵니다. 테리아는 외관은 투박하지만 상당히 고성능 타이탄으로서 그 정도 타이탄을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몇 나라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수출할 만한 국가는 알카사스 정도라고 봐야 할 것이옵니다. 하지만 알카사스는 고성능 타이탄은 판매하지 않는다는 점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것은 동맹국들의 전력 강화를 위해 비밀리에 판매되고 있는 한정 수출품이라고 봐야 할 것이옵니다.”
베르딘은 잠시 로체스터 공작을 살펴본 후 말을 이었다.
“정보부에서는 몇 달 동안 조사해 본 결과 그 국가들이 크라레스의 비밀 동맹국들이라는 것을 밝혀냈사옵니다. 그러니 테리아를 자국에서 수출한 타이탄이 절대로 아니라고 크라레스가 아무리 발뺌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임이 분명하옵니다. 아마도 그 나쁜 녀석들은 테리아를 수출하면서, 그 조건으로 타국에 대한 침공을 종용한 것일 테지요.”
상당히 많은 증거들이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체스터 공작은 애써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고 있었다. 이번에 단안을 내려 병력을 파병한다고 해도 곧장 크라레스와 전쟁 상태로 갈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크라레스와는 충돌을 피하기 힘들 것이고, 양국의 사이는 더욱 악화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크루마의 위치는 매우 상승될 것이다. 그들이 누구의 손을 들어 주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적기사의 배치를 완료했을 정도였기에, 다크가 있는 크라레스에 월등한 우위를 점유하게 될 때까지는 될 수 있다면 충돌을 피하고 싶은 것이 로체스터의 마음이었다. 지금 조금 힘들더라도 참으면서 힘을 더 키운다면 최후의 승자는 코린트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글쎄…, 꼭 그렇게 볼 수도 없지 않은가? 최신형 타이탄들을 확보한 김에 옆에 있는 약소국을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한 것일 수도 있다네.”
로체스터 공작의 애매한 태도에 베르딘의 옆에 서 있던 당당한 체구의 무장이 답답한 듯 외쳤다. 그는 금십자 기사단의 단장인 프레드 드 알파레인 후작이었다.
“전하, 무엇을 망설이고 계시옵니까? 이번에 트루비아의 침공으로 모든 것이 확실해졌사옵니다. 트루비아는 두 달 전에 토리아 왕국을 침공, 점령했사옵니다. 트루비아의 군사력으로 봤을 때, 겨우 두 달 내에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불가능하옵니다. 그것도 방어의 개념이 아닌, 선제 기습 공격이었지 않사옵니까? 이것은 더 이상 물증을 확보할 여지도 없사옵니다. 결단을 내려 주시옵소서!”
알파레인 후작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도 로체스터 공작은 망설이고 있었다. 그는 될 수 있다면 파병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교적 통로로 압력을 가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지만 그의 말은 알파레인 후작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그것은 효과가 없다는 것이 벌써 입증되지 않았사옵니까? 크라레스가 본국이 적기사를 대량 생산했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여기저기에 떠벌리고 다닌 덕분에 주변의 모든 국가들이 본국의 힘이 강성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사옵니다. 또 크라레스 같은 철면피들은 그런 외교적 압력 따위를 아무리 가해도 눈도 깜짝 안 할 것이옵니다. 그리고 최근에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라이지엔 공작이 전하를 탄핵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사방에서 본국의 동맹국들이 점령당하고 있는데도 뒷짐을 지고 있는 무능한 사령관이니 교체해야 한다면서 말이지요.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것은 전하께도 위험하옵니다.”
라이지엔 공작은 그로체스 공작이 실각된 후에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인물이었다. 그 역시 그로체스 공작처럼 황제와는 먼 친척이었다. 하지만 그는 혈기만을 앞세우는 젊은이일 뿐, 그로체스 공작만큼 실력이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로체스터 공작은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인데, 요 근래에 와서 제법 황실에서의 입김을 키워 나오며 급성장하고 있는 위험인물이었다. 황제도 로체스터 공작 혼자만의 독주를 견제하여 일부러 그를 키워 주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기에 로체스터 공작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로체스터 공작은 한숨을 내쉰 후 한탄조로 말했다. 이제 그로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후우…,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이쯤에서 크라레스에 본때를 보여 주는 것이 좋겠지. 이쪽이 개입할 수도 있다는 것을 놈들에게 살짝 알려 준 후 외교적 협상을 해 보게나. 한 번 쓴맛을 보고 나면 이쪽의 말을 좀 들을지도 모르지.”
“호되게 맛을 보여 준 후에 외교 사절을 보내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옵니다.”
알파레인 후작의 의견에 공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호되게 맛을 보여 줘 봐야 남는 것은 없어. 적당히 그 녀석들에게 위협을 가하고, 서로가 자존심이 안 상하는 정도에서 물러서는 것이 좋을 거야.”
로체스터 공작은 베르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기사단은 준비시켰나?”
“옛, 전하. 철십자 기사단에 동원 대기령을 내려 뒀사옵니다만, 그들을 모두 다 보낼까요? 신속한 작전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전부 투입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만…….”
잠시 생각하던 로체스터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이왕에 투입할 것이라면 지난번 전쟁을 교훈 삼아 넉넉하게 투입하는 편이 좋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지난 전쟁 때는 쓸데없이 자존심 세운다고 단계적으로 넣었다가 결국은 각개 격파당해서 쌍코피 터지지 않았던가?
“좋아. 모두들 마법진에 집합시키도록! 폐하의 윤허는 내가 직접 받아 내겠다.”
“옛, 전하.”
“가가린 후작!”
쭉 늘어서 있는 기사들 중에서 제일 뒤쪽에 서 있던 가가린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힘차게 답했다. 그가 철십자 기사단장이라고 하지만 그의 휘하에 있는 타이탄은 겨우 34대밖에 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의 지위는 은십자 기사단의 부단장보다도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제일 뒤에 서 있는 것이다.
만약 나중에 철십자 기사단이 50대 이상으로 증편된다면 그보다 더 높은 인물이 기사단장으로 임명되고, 그는 부단장으로 밀려날 것이 확실했다.
“옛, 공작 전하.”
“경은 이번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최선의 목표가 아니라 적이 후퇴할 만한 명분을 마련해 주는 것이 최선의 목표라는 것을 명심해라.”
“옛, 전하.”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필요 없이 전략적인 우세 정도만을 점하고 있으면 그때 외교적인 협상을 통해서 그들을 후퇴시킬 것이다. 그동안 경은 놈들의 진격로를 막고, 더 이상 전쟁이 확대되지 않도록 막기만 하면 되는 것이야. 알겠는가?”
“옛.”
코린트와 크라레스의 충돌
“폐하, 급보이옵니다.”
한 마법사가 달려 들어왔다. 그는 통신실에 배속되어 있던 마법사인데, 급한 전갈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것이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코린트가…, 코린트가 개입했사옵니다.”
황제는 이 뜻하지 않은 소식에 놀라 엉거주춤 일어서며 외쳤다.
“뭣이? 정확한 정보냐?”
“예, 지금 트루비아 왕실로부터 긴급 연락이 들어왔사옵니다. 적 타이탄은 50여 대, 문장으로 봤을 때 철십자 기사단 소속의 타이탄으로 추정된다 하옵니다.”
마법사의 보고를 듣고 있던 황제는 자신이 지금 체통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슬며시 자리에 앉으며 외쳤다.
“루빈스키! 루빈스키 대공을 불러와랏!”
루빈스키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나타났다.
루빈스키는 제국 안에 퍼져 있던 친크루마의 세력을 완전히 소탕해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의 처리는 매우 신속하면서도 잔인한 것이었기에 죄 없는 피해자도 많이 나타났다. 황태자를 자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된 중신도 있었을 정도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최고 괴수라고 할 수 있는 황태자는 나쁜 친구들을 사귀지 말라는 황제의 훈시 정도만 듣고 끝났다. 나중에는 그를 지하 감옥에 집어넣어야 하겠지만 지금은 황제가 그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때부터 황태자의 주위에는 그를 감시하는 눈들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루빈스키는 황태자가 지하 감옥에 가기 전까지 도망치지 못하게 황궁에 잡아 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약 황태자가 도망친다거나 또 다른 외부의 세력을 포섭해 들어오면 매우 골치 아파진다. 지금은 힘을 완전히 상실했지만, 그래도 엘리안은 황제의 아들인 황태자였기 때문이다.
황태자의 부하들을 싹 쓸어버리는 대규모 소탕전이 벌어진 후 루빈스키는 타이탄 연습장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그만큼 부하들을 훈련시키고, 또 청기사가 제대로 된 위력을 내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황제의 명에 따라 그를 데려오기 위해 마법사들이 재빨리 움직였고, 그는 이동 마법진을 이용해서 도착했기에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아 황제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서 오게, 루빈스키 경. 그래 보고는 들었는가?”
“예, 폐하. 대충 보고는 들었사옵니다.”
“경의 의견은 어떻소? 구원군을 보내야 할까? 아니면 충돌을 피해야 할까?”
“폐하, 놈들이 50여 대나 되는 신형 타이탄을 투입했다는 것은 트루비아 전선에 대한 구원병의 차원을 넘어, 아예 뿌리를 뽑아 버리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다고 봐야 할 것이옵니다. 그리고 트루비아를 충동질한 본국에 대한 경고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 하겠지요.”
“그야…, 그렇겠지. 그렇지 않다면 지금 트루비아가 가지고 있는 타이탄 총수가 20대를 넘지 못하는데, 50대나 밀어 넣었을 리가 없겠지.”
“폐하, 소신의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구원병을 파견해서는 안 된다고 사료되옵니다. 하지만…….”
“파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말했으면 됐지 하지만은 또 뭔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신의 판단이옵고, 폐하께서는 한 가지 더 생각하셔야 할 것이 있사옵니다. 물론 군사적인 입장에서는 강력한 코린트와의 충돌은 최대한 피해야 할 것이옵니다. 하지만, 트루비아는 본국의 동맹국이옵니다. 그것도 본국의 부탁을 받아 타국을 침공한 맹방이옵니다. 그런 그들을 이번에 외면한다면 다음에는 본국의 부탁을 들어줄 동맹국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그렇군. 경의 의견은 잘 알았네. 최후의 선택은 짐이 내리라는 것인가?”
“예, 하명을 하시옵소서!”
“으음, 어쩔 수 없구먼. 만약 구원군을 파병하지 않는다면 동맹국들은 등을 돌릴 것이 당연하겠지? 파병하는 것으로 하세. 코린트와 정면충돌을 일으키지 말고, 공격을 격퇴하는 수준으로 끝내는 것이 좋겠지. 알겠나?”
“옛, 폐하.”
황제의 집무실에서 물러난 루빈스키 대공은 두 명의 기사를 호출했다. 그들은 중앙 기사단 7전대와 8전대를 책임지고 있는 쟈므란 백작과 라테민 백작이었다. 제7, 8전대는 전방에 포진 중인 다른 전대들과 달리 수도에 주둔하는 예비 부대의 성격이 강했지만,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게 되면 이들이 우선적으로 투입되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루빈스키의 호출에 급히 달려와서는 예를 올렸다.
“명을 받고 달려왔사옵니다, 전하.”
“오, 어서들 오게나. 자네들은 지금 탄벤스 공국(共國)으로 가야겠다. 부대원들을 소집하고, 준비가 되는 대로 이동 마법진으로 집합하도록.”
“옛, 전하.”
“피터슨.”
공작의 호명에 피터슨 폰 라테민 백작이 즉각 답했다.
“옛.”
“자네는 다 거느리고 갈 필요 없이 30대만 가져가도록. 나머지 8대는 수도에 놔두고 가라.”
제8전대의 경우 아직 편성 중인 부대였기에 다른 부대들보다 수가 조금 더 많았다. 만약 8전대의 수가 정수인 30대를 훨씬 초과하여 40대를 넘어 버리면 그 초과분 10대로 제9전대가 편성되는 것이다.
“옛!”
“자네들도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트루비아가 탄벤스를 침공하는 데 갑자기 코린트가 개입해 왔다. 적의 전투력은 확실하지 않지만 타이탄 50여 대 정도니까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작전은 트루비아를 돕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코린트의 기사단과 정면충돌을 할 필요 없이, 될 수 있으면 체면만 세워 주고 돌아오면 된다. 알겠나?”
“옛, 전하.”
그로부터 20분 후 그들은 마법진을 이용해서 탄벤스 공국으로 날아가, 탄벤스 공국의 군대와 대치 중인 트루비아 군대와 합류했다.
“전세는 어떻습니까?”
자므란의 물음에 시드미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전세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코린트의 타이탄을 발견하자마자, 전 군에 후퇴 명령을 내린 후 여기까지 도망쳤으니까 말이지요. 지금 제각기 후퇴하여 이곳에 도착하고 있는 부대들을 재편성 중이지요.”
“그렇다면 적의 위치는 파악하고 계십니까?”
“그거야 당연하지요.”
시드미안은 그들을 지도가 있는 곳으로 안내한 후 설명을 시작했다.
“적은 세 방향에서 진격 중입니다. 중앙의 주력 부대, 그리고 주력 부대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서 좌우에서 이동 중인 좌익과 우익 부대입니다. 정보에 의하면 코린트의 기사단은 주력 부대와 함께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적들의 이동 속도는 아주 느리기 때문에 오늘 내일 오후쯤 되어야 만나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여 격멸하는 것이 전투의 정석인데, 왜 저들의 진격 속도가 그렇게 느린 것입니까?”
“글쎄요. 그것을 알 수는 없지만, 덕분에 별 피해 없이 후퇴하는데 성공했으니 다행이라고 봐야겠지요. 놈들의 움직이는 속도로 미루어 봤을 때, 내일 오후에 여기에 도착하여 진형을 짜고 준비를 갖춘다면, 아마도 모레쯤 되어야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휴식이나 좀 취해 두십시오.”
“알겠습니다, 시드미안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