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6화 (262/930)

오랜 휴가를 끝낸 아르티어스는 또다시 분주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들인지 웬수인지 요즘 들어서는 분간이 잘 가지 않지만, 하여튼 그 망나니의 마수에 걸려서 호된 경험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수고했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잘되어 가는 거야.”

“감사합니다, 아르티어스 님.”

“그래, 파이프라인 공사는 언제 끝낼 수 있겠나?

여기저기 공사가 진행 중인 현장 설계 도면과 비교하면서 바라보던 아르티어스는 한쪽에서 길이 10미터는 넘어 보이는 아주 길면서도 두터운 파이프를 땅에 묻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예, 일주일 정도 시간을 더 주셔야겠습니다. 수도 전체에 거미줄같이 파이프들을 깔자니까 예상외로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뭐, 일주일이면 그렇게 늦는 것도 아니야. 고생 좀 했겠구먼.”

“천만에요.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르티어스는 공사 현장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상태대로 공사가 진행된다면 아마도 반 년 이내에 공사를 완료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완료 시기는 될 수 있다면 자신과 아들이 처음 만난 그날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장기인 마법을 이용해서 아들과 자신의 나라를 발전시킬 장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때문에 치레아 곳곳에는 이동용 영구 마법진들이 설치되고 있었고, 수도 주위에는 거대한 방어 마법진과 함께 상하수도 망까지 마련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올해 겨울부터는 따뜻한 물을 하루 종일 수도 내의 각 가정에 공급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도에 사는 시민들은 난방비가 필요 없게 될 테고, 그때부터 수도세의 명목으로 세금을 조금 더 걷는다면 일석이조가 될 것이 분명했다.

아르티어스는 이곳 치레아 공국이 아들의 영토가 되었을 때부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아들의 영토를 돌보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라면 아마도 10년 이내에 마도 왕국 알카사스에 버금갈 정도로 마법에 의한 편의시설이 잘 갖춰진 나라로 거듭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뭔가 새로이 만든다는 것은 확실히 재미있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것이 거의 반영구적일 정도로 오랜 수명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이 사용되는 것에 대해 모든 시민들이 찬사를 늘어놓는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자신의 생활에 보탬까지 된다면 그야말로 더 말할 나위가 없어지는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그 때문에 재정이 허락하는 한 틈틈이 여러 가지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아들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기념할 뭔가를 말이다.

“아빠! 여기서 뭐 해요?”

“헤헤헤, 보면 모르겠냐? 너와 나의 소중한 기념품들을 만들고 있지.”

희희낙락하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다크는 기도차지 안는다는 듯 말했다.

“수도의 모든 사람들이 왕래하는 중앙로에 거대한 분수대를 만드는 것은 이해할 수 있어요. 여름에 물이 뿜어져 올라가면 아주 시원하게 보일 테니까……. 그런데 거기에 만들어 놓은 거대한 동상은 또 뭐예요?”

“뭐긴 뭐겠니? 너와 나의 동상이지. 흐헤헤…….”

“그딴 거 만든다고 돈을 계속 낭비하실 거예요? 가스톤과 카알이 매일 나한테 와서 투덜거린단 말이에요. 국경에 요새를 건설해야 하는데 돈이 없다면서…….”

“헤헤헤, 뭐 그따위 걸 가지고 그러냐? 걱정하지 마라. 만약 쳐들어오면 내가 내쫓으면 되지. 그런 쓸데없는 것보다는 좀 더 우아하면서도 실용적인 것들을 많이 만드는 편이 좋아.”

“글쎄요…….”

“아, 평상시에는 그런데 신경도 안 썼으면서 오늘따라 왜 그러냐?”

다크는 새침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밑에서 투덜거리니까 신경이 쓰여서 그러지요.”

“그따위 것은 이 애비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신경 끄라구. 몇 년 만 더 지나면 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로 만들어 줄 테니 아무런 걱정을 하지 말란 말이야.”

“글쎄요…, 저는 그게 더 걱정이 되는데…….”

들개와 까마귀의

밥이 되게 하겠노라

탄벤스 공국(共國)은 동쪽으로는 드보레크 산맥을 끼고 있는 그렇게 크지 않은 국가였다. 드보레크 산맥이 끝나는 부분에 위치한 토리아 왕국이 알카사스와 코린트, 크라레스와의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던 것에 비한다면 탄벤스는 상업이 그렇게 잘 발달한 국가는 아니었다.

농업과 목축을 주로 하고 있는 탄벤스 공국은 공왕(共王)이 다스리는 국가다. 공왕이라는 것은 전제 왕권(專制王權)이 발달하기 전의 과도기적인 국가에서 나타나는 왕이다. 전제 왕권의 왕위가 아들이나 혹은 딸에게 세습되는데 반하여, 공왕의 경우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이 왕위를 이어받게 되는 것이다.

탄벤스 공국의 경우 세 개의 가문이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 가문에서 돌아가면서 왕이 배출되고 있었는데 이것을 보고 공왕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공왕이 다스리는 국가를 공국(共國)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적인 선출에 의해 탄생된 왕이 다스리는 공화국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의 국가인 것이다.

탄벤스 공국은 공왕이 다스리는 만큼 전제 왕정보다는 왕권이 떨어지고 귀족들의 권한이 강하다.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주어지지 않고, 기득권층인 귀족들이 그 권세를 장악함으로 인해 대단히 보수적인 성격이 짙은 국가가 되었다. 귀족들의 경우 될 수 있다면 변화를 싫어했기에, 타국에 대한 침략을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재수 없게도 과거 약소국으로 깔봤던 트루비아의 침략을 당하게 된 것이다.

탄벤스 공국의 군대는 트루비아군이 침공해 들어오자, 국경 수비군이 트루비아 침공군을 저지하고 있는 사이 뒤로 후퇴하여 일단 전력을 정비했다. 여러 군데에 흩어져 있던 부대들이 한 곳에 집결을 완료한 후에야, 탄벤스군은 트루비아군과 감히 싸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일단 전력이 정비된 후 탄벤스군은 트루비아군의 힘을 알아 보기 위해 간단한 탐색전을 펼쳤다. 그런데 막상 전투를 해 본 결과 상대방의 군사력이 보통이 넘는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재빨리 자신들의 맹방인 코린트에 구원병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벤스 전선에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 철십자 기사단장 가가린 후작이다. 그는 철십자 기사단을 거느리고 전선에 도착한 후 로체스터 공작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체스터 공작은 가가린 후작에게 트루비아군을 전멸시켜 크라레스를 자극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고, 서서히 트루비아 군을 압박하여 그냥 국경 밖으로 내쫓으라고 명령했기에 가가린 후작이 거느린 철십자 기사단도 상당히 수동적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트루비아 군대는 코린트의 강대한 기사단 앞에서 거의 피해 없이 후퇴에 성공할 수 있었다.

“흐음…, 아직도 후퇴하지 않고 있다는 것인가?”

“옛, 각하. 트루비아군의 진형으로 봤을 때 일전을 벌일 각오인 것 같습니다.”

부단장으로부터 보고를 들은 가가린 후작은 잠시 궁리를 했다. 놈들이 과연 무엇을 믿고 일전을 벌일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뭔가 속임수가 아닐까? 일전을 하는 듯 보이면서 실제로 주력 부대는 뒤로 빠지는 것 말이야. 놈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쪽에서 서둘러서 공격을 안 하는 것을 보고 뭔가 감춰진 수가 있다고 지레 짐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안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각하.”

“그렇다면 놈들에게 이쪽에서 전투를 벌일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리는 것은 어떨까?”

“각하, 만약 그것을 공왕이 안다면 우리들의 저의를 의심할지도 모릅니다.”

“맞아. 그걸 생각 못 했군. 그렇다면 어떻게 한다?”

“일단 위력 제압부터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껏 밀어붙여 버리면 놈들은 도망칠 겁니다. 그걸 추격해 섬멸하지만 않으면 상관없지 않을까요?”

실질적인 정면 전쟁에서 오는 피해보다 패배하여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피해가 더 크다는 것은 거의 상식에 가까울 정도로 간단한 문제였다.

철십자 기사단의 문장이 그려져 있는 타이탄까지 보여 주며 은근히 압력을 가했는데도 불구하고, 녀석들은 국경을 넘어 도망칠 생각을 안 하고 꼭 일전을 겨루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말로 해서 안 듣는 상대라면 일단 이쪽의 실력을 보여 주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가린 후작에게 떠올랐다.

적을 전멸시키지만 않는다면, 혹은 전멸시킨다고 하더라도 토리아까지 침공해 들어가면서 전쟁을 확대시키지만 않는다면 크라레스는 묵인해 줄 것이다.

“좋아, 부하들에게 전투 준비를 하라고 지시해라.”

“옛, 각하.”

“천천히 이동하는 속셈을 모르겠단 말이야. 자네 생각은 어때?”

“글쎄…, 혹시 이쪽에서 그냥 순순히 물러나 주기를 원하는 것은 아닐까?”

“순순히 물러나 주기를 원한다면 저쪽에서 전령이 ‘빨리 물러나지 않는다면 전멸시켜 버리겠다.’하는 포고문을 가지고 달려왔겠지.”

“그럼 뭐지? 혹시 함정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 딱히 함정을 만들 만한 것이 없으니까 우리들의 퇴로를 차단할 계획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듀런보고 부하 몇 명 데리고 가서 퇴로를 확보하라고 지시하는 게 좋겠군.”

“그게 안전하겠지.”

트루비아군과 크라레스군이 적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당황하고 있는 사이, 탄벤스 공국의 주력 부대는 천천히 이동해 와서는 트루비아군과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그날 밤 양국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상대방을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저마다 부산하게 움직이며 상대의 뒷수가 뭔지를 궁리했고, 또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며 날을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 양군은 서서히 이동하여 상대방과의 거리를 4킬로미터 정도로 줄인 후 진형을 짜기 시작했다. 탄벤스 공국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코린트군으로서는 타이탄을 숨길 이유가 없었기에, 그것들을 모두 다 밖으로 꺼내어 배치하고 있었다. 코린트 쪽에서야 자신들의 강력한 타이탄을 상대가 보고, 알아서 도망쳐 줬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라?”

“왜 그래?”

“저거 34대 맞지?”

쟈므란 백작의 물음에, 라테민 백작은 상대방 진형에서 코린트의 타이탄을 찾아서 헤아리기 시작했다. 코린트의 미노바-P2의 경우 탄벤스 공국이 보유하고 있는 타이탄보다 훨씬 덩치가 컸기에 판별하기는 쉬웠다.

“맞아, 34대야.”

코린트가 이번 전쟁에 투입한 타이탄은 34대가 다였다. 하지만 갑작스레 코린트의 타이탄들을 만난 정찰조의 기사들이 뿌옇게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상대방의 타이탄 수를 혼동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탓할 수는 없었다. 적의 타이탄들이 달려올 때 앞의 타이탄들이나 자세히 볼 수 있지, 뒤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따라오는 것들이 코린트의 것인지, 탄벤스의 것인지 알기는 힘들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것 때문에 미묘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럼 16대가 어딘가로 갔다고 보는 게 옳겠군. 안 되겠어. 자네가 9대를 더 가지고 뒤로 가. 자네가 뒤에서 퇴로를 막아 준다면 든든할 것 같아.”

“내가 뒤에서 꽁지 빠지게 막아 주는 동안에 너 혼자 영웅이 되겠다는 거냐?”

“히히, 그럴지도 모르지. 안 그러면 내가 뒤로 갈까?”

“아니, 내가 뒤로 가지.”

“고마워. 무슨 일이 있으면 빨리 연락해.”

쟈므란 백작의 말에 라테민 백작은 빙긋이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그럼 잘해 봐라.”

라테민 백작은 서둘러서 자신이 지휘하던 8전대에서 아홉 명을 추린 후 마법진을 이용해서 부하들이 포진하고 있는 후방으로 가 버렸다. 그렇게 하여 쟈므란 백작은 8전대의 남은 열 명까지 합해서 40대의 타이탄을 가지고 코린트와 정면대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쟈므란 백작은 20대의 타이탄을 퇴로 확보를 위해 30킬로미터 후방에 배치시킨 후, 면밀하게 적진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34대 40이라면 그런대로 해 볼 만한 싸움이 될 것이다. 거기에다가 상대방의 경우 탄벤스 공국이 보유한 19대의 타이탄을 믿을 수 없는데 반해서, 이쪽의 경우 트루비아가 가지고 있는 14대의 타이탄을 믿을 수 있었다.

근위 기사단 소속의 3대가 트루비아의 수도에 남아 있기는 했지만, 시드미안이 거느리고 있는 14대 중에서 12대가 카프록시아급이었기 때문이다.

양국 군대의 전투 진형이 완전히 갖춰지고 나자, 관례에 따라 탄벤스 공국의 전령이 백기를 들고 트루비아군 진형으로 달려왔다. 전령은 시드미안이 있는 곳까지 달려와서는 두루마리를 펼쳐 놓고는 거만한 목소리로 읽었다.

“본국의 영명(英明)하신 라미네르 그론티어 공왕 전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너희 침략의 무리들이 지금이라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물러간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노라! 너희 침략의 무리들은 목숨이 아까운 줄 알면 이곳 탄벤스 영토에서 조용히 물러가라. 그렇지 않다면 너희들의 시체를 들개와 까마귀의 밥이 되게 하겠노라.”

전령의 우렁찬 목소리에 모두들 피식 코웃음을 쳤다. 그 수작이 빤히 보였던 것이다.

“헛소리하고 있군. 전쟁 준비를 완전히 갖춘 후에 물러가라니, 말이 되나? 만약 어젯밤 정도에 사신을 보내왔다면 몰라도……. 후퇴하면 뒤통수를 치겠다는 말이겠지.”

쟈므란 백작의 말에 시드미안 후작이 덧붙였다.

“그렇지 않다면 탄벤스 지휘관들의 상상력이 부족해서일 겁니다. 탄벤스를 침공하면서 모든 전투에서 이와 똑같은 포고문을 들었으니까 말입니다. 아마도 탄벤스에서는 지휘관들에게 포고문에 대한 공식 책자라도 나눠 주는 모양이지요. 어떻게 글자 하나 틀리지 않는지, 원…….”

시드미안은 툴툴거리면서 자신의 부하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그 부하는 말을 달려 나가 전령의 백기를 낚아챈 후 그것을 높이 들어 올린 다음 꺾어 버렸다. 헛소리하지 말고 전쟁이나 하자는 표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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